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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비유의 교훈(눅15:11-24)-2025.1.19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분들도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다양한 마음을 읽게 됩니다.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과 집 안에 있는 형의 마음을 보게 되지요. 아버지의 마음은 자기 목숨까지라도 주고 싶은 마음인 데 반하여, 형의 마음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 의에 충만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깨닫게 하고, 집 안에 있던 형의 마음을 통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율법에 갇혀있는 종교인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집을 나간 탕자처럼 누구든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버지의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우리도 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니 지금 우리가 탕자 같은 사람은 아닌지 모릅니다. 솔직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는 탕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지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돌아갈 처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을지라도 돌아오라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나름대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작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 돌아갈 마음이 없다면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든지, 혹은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거룩한 부담감이 있는 사람은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탕자입니다. 다만 자신은 탕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거나 착각하고 있을 뿐이지요. 사실 순간마다 탕자와 같은 마음이 우리를 괴롭히고, 실제로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나는 탕자가 아니라고 큰소리를 칠 수 없는 것이지요. 본문에 나오는 탕자는 몇 가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착각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유와 방종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품은 구속이 아니라 아들을 지켜주는 울타리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는 종교인들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미련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모릅니다. 그래서 일탈을 꿈꾸는 것이지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꿈꾼다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또 다른 착각은 소유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가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처분에 따라 분깃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권한은 아버지께 달렸습니다. 아버지의 처분에 따라 분깃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탕자는 아버지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분깃을 달라고 떼를 쓴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책임은 없고 권리만 주장한 것이지요. 얼마나 이기적이고 불효막심한 자식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당연히 받을 분깃이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해야 할 도리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찾아야 할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지요. 탕자처럼 말입니다. 또한 탕자는 사랑에 대한 착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조건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아버지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만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잘못에 대해 따끔한 책망과 브레이크를 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의 성품을 적절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과 공의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사랑과 공의를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없으면 가정의 질서도 무너지고 천국의 질서도 무너집니다. 진정한 질서는 사랑할 때는 조건없이 사랑해야 하고, 공의로 다스려야 할 때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공의의 메스를 가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탕자는 몇 가지를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착각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잘한 것입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지라도 반드시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면 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요엘서1장12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나니”. 그 말씀의 핵심은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시점은 지금입니다. 아니 이제라도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은 지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것이지요. 지금은 우리가 은혜 받을만한 때요, 하나님께 돌아갈 때입니다. 본문의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과정을 살펴보고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과정은 먼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반성 즉,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1)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17절)
탕자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일어났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본 것입니다(17절). 자신의 행동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자기 분깃을 챙겨 먼 나라로 가서 며칠 만에 모든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허랑방탕하여 허비한 것이지요.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재산이 아니기에 그는 흥청망청 사용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나라에 흉년까지 겹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궁핍하게 된 것이지요. 간신히 그 나라 백성 중에 붙어서 돼지를 치며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습니다. 완전한 거지가 된 것이지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아무 걱정없이 살 수 있었는데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 개고생을 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인 셈이지요. 아마도 그는 자신의 미련한 결정에 대해 별스런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어쩌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스러운 것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본 것입니다(17절). 자기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버지 곁을 떠나온 자신에게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인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것이지요. 사람은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실존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이는 성공을 통해서 깨닫기도 하고, 어떤 이는 실패를 통해서도 깨닫기도 합니다. 그나마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 것은 소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탕자는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깨달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깨달음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행히 탕자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깨달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탕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된 것이지요.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풍족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자각이 일어난 것이지요. 아버지 곁에 있을 때는 아버지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고난 중에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있을 때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우리 곁에 있을 때 그 사람의 소중함을 모르고, 재물의 소중함을 모르며, 건강의 소중함도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 곁을 떠나버리거나 잃어버리면 그제야 존재감을 느끼고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도 영적으로 볼 때 탕자가 소중한 것은 비록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돌아갈 아버지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탕자가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물론 탕자는 아버지에 대한 인식과 함께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인식만 있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싶은 자기 인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버림받은 탕자로 끝나고 말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싶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탕자를 복된 탕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나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불쌍했겠습니까? 혹은 아버지에 대한 인식은 일어났을지라도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싶은 인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영원한 탕자로 삶을 마무리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거지가 되어 버린 탕자를 일방적으로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탕자였지만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탕자를 아무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사실 본문의 탕자의 비유는 집을 나간 탕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탕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성경의 의도일 것입니다. 누구라도 한순간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방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된 행실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끝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나간 탕자를 책망하는 것보다 돌아온 탕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가 돋보이는 것은 한번도 집을 나간 적이 없는 집안에 있는 맏아들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가 진짜 탕자입니다. 은근히 내숭을 떠는 맏아들이 더 큰 문제인 것이지요. 사실 집 안에 있는 맏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훨씬 더 지능적인 탕자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누가복음 15장은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잃은 양을 찾는 주님의 마음(눅15:4-7),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성령님의 마음(8-10),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마음을 점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99:1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 9:1로, 다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비유가 2:1로 축소됩니다. 그만큼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심히 관찰해 보아야 할 부분은 비유를 들어야 하는 대상입니다. 주님이 비유를 통해서 들려주시고 싶은 일차적인 교육 대상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2절).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같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고 교제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할 대상자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설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집안에 있던 맏아들이요, 세리와 죄인은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입니다. 다행히 둘째 아들은 스스로 뉘우치고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치 말씀을 들으러 주님께 나온 세리와 죄인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첫 번째 조건은 자기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우선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깨달음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탕자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하셨다는 말이 옳은 표현입니다. 성령이 탕자의 마음을 만지시매 그가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일어난 것이지요. 우리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은 깨달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깨달음과 함께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2)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18절)
탕자는 자기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고백할 것을 알았습니다. 중요한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18절로 고백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하늘과 아버지께로 죄를 얻었다는 것이지요. 하늘로 죄를 얻었다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인식입니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의 범죄 구성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죄를 범했다고 고백할지라도 세상적인 시각으로만 죄를 고백한다면 그는 죄의 구성요소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짓는 죄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하나님께 짓는 죄일지라도 육신의 아버지께 짓는 죄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육신의 아버지께 범하는 죄도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짓는 죄는 하늘 아버지께 짓는 죄가 우선이지만 육신의 아버지께 짓는 죄도 성립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는 하늘 아버지께 짓는 죄악과 함께 육신의 부모에게 짓는 죄도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세상에 머물지라도 소속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두 도성에서의 죄의 문제를 분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악을 범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악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부모는 하나님이 세우신 법정대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네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죄악은 육신의 부모를 괴롭힌 죄악임과 동시에 하늘 아버지께 범한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원천적으로 하늘 아버지께 범한 죄악이 우선인 것입니다. 탕자는 자기 죄의 본질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로 죄를 얻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자기 아버지에게만 범죄했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하늘에 죄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은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로서의 자격이 미달임을 자인한 것이지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보다 품군의 하나로 여기셔도 할말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결코 아들의 신분을 박탈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럼에도 탕자는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정직하고 순수했던 것이지요. 그의 고백은 바른 회개를 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자기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그가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든지, 혹은 품군의 신분으로 추락하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권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아버지의 권위와 아버지의 위상을 알았던 것이지요. 솔직히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엄청난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집을 나간 후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후에 그는 아버지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아버지의 존재를 잘 압니다. 건강이 있을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은 후에는 건강의 소중함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탕자는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아버지 곁을 지키고 살고 있던 맏아들을 보십시오. 아버지 곁을 한번도 떠나지 않은 채로 살아온 그는 아버지의 소중함을 바르게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께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자 아버지께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잃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기 곁에 계셨기에 소중함도 모르고, 고마움도 몰랐던 것이지요. 때문에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 분노한 것입니다. 차라리 한번 실수했을지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바르게 알고 깨달아 돌아온 탕자가 집안에만 있었던 맏아들보다 훨씬 더 낫다는 증거입니다.
(3)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20절)
탕자의 비유 가운데 탕자가 가장 잘한 일은 실제로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생각으로만 구상하고 있었거나, 혹은 입으로만 그렇게 고백하고 끝났다면 탕자의 비유는 그냥 실패한 스토리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역시 절대 집을 나가지 말라는 메시지로 마무리되고 말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탕자 비유의 핵심은 그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말입니다. 비록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그가 어떤 대접을 받을는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가 받을 대접의 양상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아버지에게 자기 운명이 달린 것이지요. 아버지가 그를 아들로 받아주실 수도 있고, 품군으로 받아주실 수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몫입니다. 탕자는 자기 운명을 아버지께 맡겨야 합니다. 아버지께 협상할 일도 아닙니다. 만일 그가 아버지께 돌아감을 전제로 하여 아들로 받아주실 것인지를 먼저 타진해 보았다면 그는 회개한 자가 아닙니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탕자일 뿐입니다. 그는 더 큰 고생을 해야 합니다.
만일 그가 자기가 받을 대접에 대해 신경을 썼더라면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버지로부터 홀대를 받는다면 그 상실감을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신변을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자기를 아들로 여겨주시든지 혹은 품군의 하나로 여겨주시든지 그것은 자기 몫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지요. 오히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자아를 죽이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체면이나 체통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더 이상의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지요. 죽은 자가 돌아오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것은 믿는 우리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도저히 나올 자격이 없는 우리지만 아버지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나올 자격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죄송하고 송구하지만 아버지의 부르심 앞에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위대함을 알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사랑이 크고 소중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탕자도 그런 마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 나올 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었을는지 모릅니다. 감히 무슨 낯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뵐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마음을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달려와서 탕자를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를 녹여주셨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더 이상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동안의 아들의 행적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나지막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로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21절)고 말입니다. 아버지로서는 그 말이면 충분했습니다.
아들에게 만입이 있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가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고백이면 충분했습니다. 그 고백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토닥거려주는 것으로 대신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제는 더 이상 품군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타이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들의 말이 말 같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그 아들은 아버지가 밤낮 애간장을 녹이며 찾고 기다리는 그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이면 충분했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다른 말을 듣고 싶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필요했습니다. 아들이면 충분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그 이상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32절). 아버지에게 돌아온 그 아들은 죽었다가 새 생명을 얻은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했나이다’입니다. 그 고백이면 충분합니다. 아버지가 듣고 싶은 것은 그 고백이 최고입니다.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하십니다. 어떠한 조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고백이면 충분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잔치를 배설하십니다. 그 잔치는 전무후무한 잔치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아들을 위한 하늘의 잔치를 배설하십니다. 탕자는 품군이 아닙니다. 탕자는 결코 품군일 수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조건없이 받아 누릴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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