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난 내 마누라가 좋다!' 외치던 남편…"
스타를 넘어서다
▲ 귀천의 작가, 천상병과 그의 아내, 목순옥. 젊은 시절 단란한 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그리움은 입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참을 수 없다.
구토처럼 틀어막은 입을 비집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그리움이다. 기자는 어느 시인의
늙은 아내로부터 그 사실을 배웠다.
칠순이 지난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다. 나이 든 아내의 목소리가 그랬다.
“어린 아이 같은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말했죠. ‘난 내 마누라가 좋다!’
그게 그렇게 듣기 좋았어요.” 아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카페엔 남편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들이 널려 있다. “그 사람의 글이 너무 좋아서….”
아내는 수줍게 남편의 글 솜씨를 자랑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와요.” 아내는 다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다. 이른바 귀천(歸天). 떠난 남편의 이름은 천상병, 남겨진
아내의 이름은 목순옥이다. 그녀의 나이는 72세다.
▲ 목순옥(72) 여사는 남편 천상병에게 15년째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쓴 편지는 50여통. 그녀는 편지를 모아 연말쯤 '하늘에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남편 천상병, 아내 목순옥
천상병은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으로 기억된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해맑은 동심과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 그의 대표작, 귀천은 그런 천상병을 잘 설명
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1930년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랐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실패 덕분이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감수성이 예민했다.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국어교사는 시인 김춘수였다. 스승은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1년간 혹독한 습작의 시간을 보냈다. 1950년, 소년은 스승과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문학잡지가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던 시절. 중학생이던 소년은 전국구 스타
가 됐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1951년, 부산으로 옮겨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전쟁은 감수성 여린 소년
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선물했다. 대학에서는 평론가로 유명했다.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평론은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글이다.
아내는 기억한다. “시 쓸 때와 평론할 때,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독하
게 평론을 했답니다. 그의 매를 맞지 않으면 유명한 문인이 아니란 말이 나돌았어요.
때문에 은근히 남편의 평론에 오르내리길 바라는 분들이 많았죠.”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시인
은 배가 고파야지.” 그는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그 시절,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이었다. 아내의 오빠가 시인의 친구다. 가끔 커피숍에서 만나는 시인은 그녀의 우상이었
다. “그 시절엔 문인들이 함께 어울렸어요. 오빠 덕분에 시인을 만났어요. 당시엔 큰
소리로 잘 떠드는 분이셨죠. 가끔 술집에도 따라갔는데 시인은 제 자리에 술잔이라도 올
려지면 당장 치웠답니다. ‘미스(Miss) 목은 술 마시면 안돼.’이러면서 말이죠.”
1967년, 시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받은 뒤 풀려
났다. 시인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잦은 폭음도 그의 건강을 해쳤다.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한 천상병은 그 길로 친구의 동생을 찾아갔다.
“얼굴이 까맣게 변했더라구요.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어요.
그런데 사라지신 거예요.”
그날 시인은 길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서였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갔다. 천재 시인이
행려병자로 바뀐 것이다. 목순옥을 비롯해 시인의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허사였다.
그들은 울면서 친구의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도 실렸다. 병원
장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상병은 살아있습니다.”
목순옥은 매일 병문안을 갔다. 그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시인의 몸무게는 40㎏에서 60㎏
으로 불었다. 병원장이 말했다.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
▲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남편의 재능을 사랑한 아내
둘은 부부가 됐다. “그냥 돌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깊이 들어가면 그게 사랑
이겠죠?” 가진 것은 병과 가난 뿐인 남자. 그런 이를 사랑한 아내는 말했다. “나이가 드
니까 잔소리가 늘었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꼭 껴안은 젊은 남녀를 보면 잔소리를 합
니다. ‘너무 붙어있지 마라. 빨리 뜨거워지면 금새 식는다.’ 서로 툭툭 치는 젊은 남녀를
봐도 지나치질 못해요. ‘서로 배려해야지.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것이겠죠?”
시인과의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좋았다. 특히 시인의 아내만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마냥 기꺼워했다. “시인이 정말 아이 같았어요. 가끔 집에 들어오면 다 써놓은 시
를 베게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 했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시인의 글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이죠. 좋았냐구요? 그야 물론 너무 좋았죠.”
그녀의 남편 자랑은 이어졌다.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제목을 정하면 한달음에 시를 썼
어요. 단 한번도 다시 고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정제된 단어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그럼 시를 툭 보이면서 자랑했답니다. ‘이것 봐라, 아내야.’ 천재였던 거죠.”
그럼, 남자 천상병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천재 천상병을 사랑한 것 아닌가. “그랬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든 걸 제게 의지하는 시인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사랑이란 가슴에 담아
두기도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줌으로써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녀는 시인에게 동생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동시에 스승이며 어머니였다.
하긴 그것이 사랑이다.
◆ 남편의 유산(遺産)
천상병은 1988년부터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했다. 친구가 의사로 재직하던 춘천의료원에 입원
했다.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유쾌했다. “배가 산처럼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복수(服水)가
찬 것이죠.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많이 두려웠을 거예요. 병원에 도착하니 친구인 정원
석 선생님이 야단을 치시더군요.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 시인이 대뜸 받아쳤
어요. ‘내가 말이다.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 그만큼 낙천적이었어요. 덕분에 많이 웃
었죠.”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 일이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이 참 예뻤답니다. 차 안에서 매일 기도했어요.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
시인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이른 봄이었어요. 방금 헤어져서 카페 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있는데.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죠. 마음이 덜컥 하더군요. 매일 춘천으로 갈 때, 5년이 아니라 10년을 살게 해
달라고 빌 것을….” 시인의 나이 63세였다.
남편이 떠난 지 15년. 아내는 추억을 먹고 산다. 매년 의정부, 산청 등지에선 천상병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시비(詩碑)도 세워졌다. 작은 카페엔 여전히 남편의 친구와 팬들이 찾아온다.
아내는 남편의 기념관을 세우고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간첩사건의 진실을 찾는데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남편은 세상을 등지고도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제게 남겨진 일, 모두 마무리하고 저도 떠나야죠.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큰 소리를 칠 거예요.
제가 다 처리하고 왔다고 말이죠.”
남편의 그리움은 시가 됐다. 아내의 그리움은 이제 별이 되려 한다.
그들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함은 여느 청춘의 사랑에 못지 않다. 문득 남편의 은사인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가 떠올랐다.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