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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東州) 이민구는 1589년(선조22) 정월 14일에 태어났다태종(太宗)의 서자(庶子) 경녕군(敬寧君) 비(裶)가 6대조이고, 조부(祖父)는 병조 판서에 오른 이희검(李希儉)이다. 아버지 이수광(李睟光)은 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1636년(인조14) 12월, 청 태종(淸太宗)이 이끄는 군사가 조선을 침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사는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피해 곧장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계획하였으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고 도중에 방향을 바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인조보다 앞서 피난에 나선 봉림대군(鳳林大君) 일행만이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강화도 피난 행렬의 검찰사를 맡은 사람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김류(金瑬)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었고, 이민구는 부검찰사의 직책을 맡았다. 김경징을 검찰사로 임명하면서 인조는 김류에게 그가 적임자인지 물었는데, 김류는 “경징이 다른 재능은 없으나 적을 막고 성을 지키는 일에 어찌 감히 그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강화도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강화 유수 장신(張紳)과 검찰사 김경징, 부검찰사 이민구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이민구는 평안북도 영변으로 유배됨으로써 인생의 큰 변곡점을 맞이하였다. 북쪽 변방의 적객(謫客)이 된 이민구는 그가 꿈꾸었을 삶의 지향을 상실한 채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불우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검찰사 김경징에 대한 인조의 믿음이 부족했듯 이민구 역시 부검찰사로 적임자가 아니었다는 평가가 대두되었다. 사건의 결과에 근거하고 당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평가이기에 온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김경징과 이민구에 대한 비판은 여러 자료에서 발견된다.
이 때 검찰사 김경징은 원훈 김류의 아들로서 교만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였고, 부사 이민구는 일개 문인이었는데, 이들은 말하기를 “강화는 대강이 있는 천연의 요해지이므로 걱정할 것도 없다.” 하며 밤낮으로 연회를 즐기면서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안정복 순암집권26)
당시에 판윤 김경징과 참판 이민구와 유수 장신 등이 검찰의 명을 받아 진지를 수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으나 날마다 술에 빠져서 방어에 관한 대비책을 염두에 두지 않다가 오랑캐가 강을 건너자 세 장수는 전함을 타고 멀리 달아나서 국가의 운명이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민구는 문인에 불과할 뿐 군무를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평가인 동시에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만을 믿고 대비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밤낮으로 연회를 즐겼다거나 술에 빠져 지냈다는 말은 전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기록 그대로 신뢰하기가 어렵다.
호서의 관군이 패전했다는 보고가 이르자 분사가 또 이민구로 하여금 호서로 나가 안찰하도록 하였는데 이민구가 강가에서 배회하며 즉시 출발하지 않고 그 처자를 데리고 가고자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포위된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가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당시 강화도에서는 이민구를 충청도로 보내 관찰사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민구는 충청도로 가는 것을 망설였고, 처자를 함께 데려가려고 했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이민구의 강화도 행적을 지적한 기록은 그가 군무에 어둡고, 수비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연회만을 즐겼으며, 겁을 내어 달아나고, 충청도로 가지 않으려 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민구 본인의 입장은 세간의 평가와 달랐다. 그는 정세규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화도 함락 당시의 정황을 진술하였다. 세간에서는 그가 군무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지만 이민구는 빈궁(嬪宮) 일행이 강화도로 들어온 이상 검찰사와 부검찰사의 임무는 완수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무엇보다 그가 군무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남한산성으로부터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며칠 뒤에 무인 최상원이 남한산성으로부터 밀랍으로 봉한 글을 가지고 도착하였습니다. 유지에 이르기를 “수륙의 방비를 모두 유수 장신에게 위임하니 간섭하는 문제가 없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틀 뒤에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승려가 또 남한산성으로부터 왔는데 유지의 내용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대개 행조에서 밖의 포위망이 단단하므로 최상원이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앞의 유지를 다시 내린 것이었습니다.
수륙의 방어를 모두 장신에게 일임한다는 유지(有旨)가 두 차례나 도착하였으므로, 군무에 관한 모든 책임은 장신에게 있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세간에서는 이민구가 겁을 먹고 숨으려고만 했다고 했지만 이민구는 도리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금상께서 당시 봉림대군이셨는데 외사에 나와 여러 재신들에게 이르시기를 “공들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가서 적정을 살펴보라.” 하셨는데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으니 제가 속으로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를 “제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다만 수하에 병사가 없으니 적의 실태를 살필 수는 있겠으나 적을 막는 일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였습니다.
봉림대군의 지시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를 비루하게 여겼다는 이민구의 진술은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상반된다. 세간에서는 그를 직책을 도외시한 인물로 평가했지만 이민구는 도리어 강화도에 머물렀던 재신들이 소극적이었으며 자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정을 살피기 위해 자원했다는 입장이다. 그는 또 처자식을 탈출시키려 했다는 세간의 말에 대해서도 “한 집안의 모든 식구들이 전란의 불구덩이 속에서 희생되어 하나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하며, 사실과 다름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실제로 이민구는 강화도에서 아들 이원규(李元揆)와 이중규(李重揆)를 잃었으며, 부인도 적의 포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청도로 가지 않으려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민구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당시 강화도에 피난했던 윤방(尹昉)이 충청도 관찰사의 생사를 알 수 없으므로 이민구에게 충청도로 가서 임무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이민구는 이에 동의하고 장신에게 배편과 식량 준비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 출발하려고 할 때 윤방이 사람을 보내서 충청도 관찰사가 무사하므로 갈 필요가 없다는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이민구의 입장이다. 그러면서 “이민구가 눈물을 흘리며 가려고 하지 않았다.〔敏求涕泣不行〕”라거나 “이민구가 가려는 의사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기까지 하였다.〔敏求殊無意行, 至涕泣危懼。〕”라는 등의 말에 대해 반박하였다. 남한산성과 연락이 끊기고, 여러 사람의 의견이 분분하여 불안했던 강화도보다는 전란의 피해가 거의 없는 충청도로 가는 것이 더 안전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으려고 했겠냐는 것이 이민구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당시 강화도에 피난했던 김광환과 윤선거가 생존해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본다면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민구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강화도 함락의 책임은 누군가가 짊어져야만 했다.◆희생양의필요
김경징, 장신, 이민구, 강진흔, 변이척 등을 잡아다 국문한 끝에 김경징은 강계(江界)로, 이민구는 영변(寧邊)으로 정배(定配)하고, 장신에게는 사약(死藥)을 내리고, 강진흔과 변이척은 목을 베었다.
사실 처음에는 장신과 김경징을 정배(定配)하려 하였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이 거세게 일어났으므로 두 사람이 모두 사형되었다. 결국 주요 책임자 가운데 이민구만 목숨을 보존하여 영변으로 유배된 것이다.
이민구 스스로는 강화도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이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술회했지만 한번 유배객이 된 그는 재기하지 못한 채 초야의 문인으로 인생의 후반부를 보내야만 했다. 세간의 평가와 이민구의 주장 가운데 무엇이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지금 판명할 수 없지만, 병자호란과 강화도 함락은 그야말로 하늘이 정한 일이라서 그의 삶 절반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나락으로 내몰고 말았다. 결국 이민구는 영변과 아산에서 10년 이상의 세월을 유배객의 신세로 지내야만 했다. 당시 지은 작품은 철성록(鐵城錄)과 아성록(牙城錄)에 수록되었다.
4) 서호(西湖)에서 보낸 말년(末年)
1647년(인조25) 4월 이민구는 드디어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해배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의금부의 계사(啓辭)에 따라 이민구를 석방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사헌부에서는 반대 의견으로 맞섰다.
이민구의 죄를 당초 사형에서 감하여 안치시킨 것은 상의 특별한 명령에서 나온 것으로 그가 죽지 않은 것은 요행일 뿐이었습니다. 내지로 양이한 것도 너무 지나친 것인데, 지금 어찌 완전히 풀어 주어 아무 죄가 없는 사람처럼 하겠습니까.
강화도 방어의 주요 책임자들이 모두 사형된 점을 감안하면 이민구가 목숨을 부지한 것은 사헌부의 주장대로 임금의 은혜이며 요행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영변의 적소를 아산으로 옮겨 주었으니 사형된 사람의 경우와 비교하면 법률의 적용이 공평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제 해배한다면 죄를 완전히 용서해주는 격이니 사헌부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해배된 이민구는 서울로 돌아와 현재의 마포구 주변에 해당하는 서호(西湖)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나이 59세로 이미 노년에 접어든 때였다. 서호에서 지낸 그의 말년은 큰 변화 없이 문장으로 소일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그의 바람은 서용(敍用)이었다. 조정에서도 그의 서용이 논의되었다.
이민구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려 종사에 죄를 얻은 것은 김경징, 장신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혼자 형장(刑章)을 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직첩을 도로 주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으니, 신하로서 이토록 죄를 지고도 다시 사판을 더럽히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빨리 이민구에게 직첩을 도로 주라는 명을 거두소서.
장신과 김경징은 강화도 방어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형되었는데,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같은 죄를 범한 이민구를 서용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민구의 서용이 허락되었는데, 이 일에는 김광욱(金光煜), 한흥일(韓興一), 이경여(李敬輿), 조익(趙翼) 등의 역할이 컸다. 김광욱이 이민구의 문재(文才)가 뛰어나므로 그를 서용할 것을 진언하자, 한흥일이 동조하였다. 이에 효종은 “죄에는 수범과 종범이 있는 것인데 나도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다.〔罪有首從, 予亦惜其才。〕”라고 하고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효종이 이민구를 종범(從犯)으로 판단하였다는 점과 그의 문재(文才)를 높이 평가하였다는 점이다. 강화 유수 장신과 검찰사 김경징을 수범(首犯)으로 분류하여 그들을 사형시킨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로, 이민구가 사형을 면한 것도 요행인데 그를 서용한다면 법 적용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반대 의견을 무마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민구의 문학적 능력은 효종조차도 인정하는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효종이 대신들의 논의대로 처리하라고 지시하자 당시 영의정과 우의정으로 있던 이경여와 조익은 “이민구가 죄로 폐기된 지 이제 14년이 되었습니다. 종전에 패군한 사람이 끝내 수용되는 은혜를 입었는데, 민구가 영원히 폐기되고 있는 것은 실로 원통한 일입니다.”라고 하여 이민구의 서용을 적극 찬성하였다. 패군의 책임을 졌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지만 이민구만 서용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의 서용을 적극 동조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민구 스스로도 언급한 바 있다. 자신과 함께 견책된 사람들 중에는 같은 당의 사람들이 도와주어 죄적(罪籍)에서 벗어나 다시 환로에 오른 경우가 많은데, 이민구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을 가혹하게 적용하여 죽음으로 내몰려고만 한다고 한탄하였다.
이민구의 문재(文才)를 아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서용이 결정되었으나 끝내 반대 의견에 저지되어 그의 서용은 취소되었다. 이후로도 그의 서용이 논의되었으나 끝내 조정에 다시 나가지 못한 채 1670년(현종11) 82세의 나이로 불우한 삶을 마감하였다.
《현종실록》에 수록된 이민구의 졸기는 그의 삶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검찰은 애당초 전쟁하는 장수가 아니었고 보면 이민구에게는 김경징과 같은 죄도 없었는데, 어찌 같은 부류로 논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간의 논계가 여러 달 그치지 않았으니, 그 또한 너무 각박하였다. …… 그 뒤 양조에서 서용하라는 은전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명령을 도로 거두었다. 묻혀 지낸 지 30년에 마침내 불행하게 죽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의 문장을 대단히 아깝게 여겼다.
이 평가는 첫째, 부검찰사 이민구를 장수와 동일한 법률로 처벌할 수 없고, 둘째, 대간의 반대로 인해 서용되지 못하였고, 셋째, 그의 문장을 아깝게 여겼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결국 이민구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란과 당파 갈등으로 인해 뛰어난 문재(文才)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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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전집 제2권 / 시(詩)○종군록(從軍錄)
강가에서〔臨江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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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어디 있었나 남쪽 동래에 갔었고 / 去年何在南征蠻
올해 어디 있는가 서쪽 오랑캐 막노라 / 今年何在西防胡
이미 일곱 명이 길에 나서니 / 已將七人付道路
몸은 있어도 마음은 응당 없으리 / 皮肉尙在神應無
집에 편지 보내도 기러기 괴로워하는데 / 寄書家中雁飛苦
꿈속 혼백은 높은 관산을 아랑곳 않네 / 夢魂不度關山長
수루 차가운 변방에 전쟁의 북소리 울리고 / 戍寒塞絶戰鼓飛
강에 임해 군사 바라보니 마음 아프다 / 臨江視師情內傷
밤마다 봉화가 눈 덮인 고개를 범하고 / 夜夜煙塵犯雪嶺
아침마다 격서가 언 강을 넘는구나 / 朝朝羽檄超氷河
서울 권세가들에게 전하노니 / 傳語洛陽權豪人
고운 옷에 성난 말 탄들 마음 어떠하랴 / 鮮衣怒馬心獨何
남쪽 동래에 갔었고 : 만(蠻)은 남쪽 오랑캐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이민구가 선위사가 되어 동래에 갔던 사실을 말한 것이므로 동래로 풀이하였다.
이미 …… 나서니 : 《효경》 〈간쟁장(諫爭章)〉에 “천자에게 간하는 신하 일곱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천하를 잃지 않는다.〔天子有爭臣七人, 雖無道, 不失其天下.〕”라고 하였다.
봉화(烽火) : 연진(煙塵)은 봉화 연기와 전장에 이는 먼지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봉화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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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전집 제1권 / 시(詩)○선위록(宣慰錄)
토천에서〔兔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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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만든 다섯 사람의 공이 남아 / 疏鑿功存憶五丁
산 따라 난 험한 길 별에 닿을 듯 / 隨山鳥道上捫星
강 가운데 드러난 돌은 언제나 검고 / 江心石露千年黑
골짜기 입구 둥근 하늘은 만고에 푸르네 / 峽口天團萬古靑
깊은 골짜기 언 서리는 차갑게 서걱대고 / 幽壑氷霜寒淅淅
우거진 숲에 안개 덮여 낮에도 어두워라 / 喬林煙靄晝冥冥
평생 고생하며 이제 늙어 가건만 / 平生歷險今垂老
다시금 험한 길에 마부 꾸짖는다 / 更向危途叱馭經
토천(兔遷) :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마성면(麻城面) 신현리(新峴里)에 있는 좁은 길로, 속칭 토끼비리라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서서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없어 갈 길을 찾고 있던 중에 뜻밖에 토끼가 나타나 벼랑을 따라 뛰어가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섯 사람 : 오정(五丁)은 산을 옮기고 만균(萬鈞)을 들 수 있었다는 촉왕(蜀王)의 역사(力士) 다섯 명을 가리킨다. 《수경주(水經注)》 권27 〈면수(沔水)〉에 “진 혜왕(秦惠王)이 촉(蜀)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길을 알지 못하자, 다섯 마리의 석우(石牛)를 만들어 꼬리 밑에 황금 덩어리를 놔두고 황금 똥을 누는 소라고 하였다. 촉왕이 다섯 명의 역사에게 끌고 오게 하여 길이 만들어지자, 진나라가 장의와 사마조로 하여금 길을 찾아 촉을 멸망시켰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토천에 길을 낸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시금 …… 꾸짖는다 : 선위사의 임무를 맡았으므로 토천의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간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왕존(王尊)이 익주 자사로 가다가 공래산(卭郲山) 구절판(九折阪)에 이르자, 어자를 꾸짖으며 “말을 몰아라. 왕양은 효자요, 왕존은 충신이니라.”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선위사는 외국의 사신이 입국했을 때, 그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관직이다. 《광해군일기》 14년 4월 6일 기사에 이민구를 교리에 임명한 기록이 있는데, 그 아래에 “이민구는 당시 선위사로서 왜의 사신을 부산에서 접견하게 되어 있었는데 실직이 없었다. 이에 비국이 계청하여 관직을 제수하였다.〔敏求時以宣慰使, 接倭使于釜山, 而無實職. 備局啓請, 除拜館職.〕”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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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전집 제3권 / 시(詩)○영남록(嶺南錄)
영남록은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의 작품. 3월에 임지로 가서 이듬해 4월 돌아올 때까지
공검지에서〔公儉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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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 버들은 새 정자 둘러싸고 / 隄柳護新亭
호수 물결은 낮에도 어둡구나 / 湖波當晝冥
맛난 순채 나물 여기서 나는데 / 已專蓴菜美
푸른 벼 밭도 이 물에 의지하네 / 兼倚稻田靑
말술 마실 봄 풍경 남았으니 / 斗酒春還在
꾀꼬리 소리 저물녘에 들을 만하여라 / 流鶯晩可聽
가는 말에 가벼운 채찍을 / 征驂有輕策
잠시 노부 위해 멈추라 / 暫爲老夫停
공검지(公儉池) :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에 있는 저수지로, 삼한 시대에 축조되었다.
월파정에서〔月波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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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에선 배가 말이나 마찬가지 / 水驛船如馬
나루터에 해오라기 마치 사람 같네 / 津梁鷺似人
바람 머금은 고즈넉한 섬에 날 저물고 / 風含孤嶼晩
햇살 따뜻한 온 강은 봄날일세 / 日暖滿江春
경치가 우리 땅 같지 않은데 / 景物非吾土
연무 자욱한 물결에 떠가노라 / 煙波送此身
창랑에서 어부에게 묻는다면 / 滄浪問漁父
도리어 갓끈 먼지를 빨고 싶으리 / 還欲濯纓塵
월파정(月波亭) : 현재의 경상북도 선산(善山) 지역에 있었던 정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1에 〈등월파정(登月波亭)〉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소주에 “낙동강 가에 있으니 곧 선산 땅이다.[在洛東之上, 卽善山地.]”라고 하였다. 또 같은 책에 수록된 〈황주월파루기(黃州月波樓記)〉에 “우리나라에 월파정이라고 불리는 정자가 세 군데 있는데, 나는 세 곳에 모두 가 보았다. 하나는 영남의 낙동강 가에 있다.[東國之稱月波亭者三, 余得而盡見之, 一在嶺南之洛東.]”라고 하였다. 이민구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중이므로, 이 정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창랑(滄浪)에서 …… 싶으리 : 물이 맑다는 말이다.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夫辭)〉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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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전집 제3권 / 시(詩)○영남록(嶺南錄)
추석에 달을 보지 못하다〔中秋不見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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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투기하는 아낙 현묘한 베틀 놀려 / 天關妬婦弄玄機
뜬구름 보내더니 맺혀 돌아가지 않네 / 爲遣浮雲結不歸
외로운 밤 항아는 부질없이 흐릿하고 / 獨夜姮娥徒脈脈
삼경의 천궁은 더욱 아른거릴 뿐 / 三更閶闔轉依依
공연히 달 따라 시름겨운 눈 치켜떴다가 / 虛隨老兔懸愁眼
문득 휘장 밝히는 성긴 반딧불 마주하네 / 却對疏螢點薄幃
고향 산하와 본디 떨어져 있으니 / 故國江山元自隔
비바람에 어두워짐 그대로 맡겨 두련다 / 任敎風雨晦淸輝
지난해는 관새에서 맑은 빛 바라보며 / 去年關塞對淸光
술자리 파하고 집 생각에 남몰래 상심했지 / 罷酒思家黯自傷
오늘 밤은 뜬구름이 사정 알아주는데 / 今夜浮雲還解事
타향에서 꺼져가는 등불에 또 옷 적시네 / 異鄕殘燭也霑裳
만 리의 날씨 일정하기 어려워 / 陰晴萬里應難定
은하수를 삼경에 바라볼 수 없네 / 河漢三更不可望
묻노니 광한궁 정전의 나무는 / 借問廣寒前殿樹
가을 맞아 몇 가지나 자랐는가 / 秋來能得幾枝長
항아(姮娥) : 달의 이칭이다. 본래 후예(后羿)의 처인데, 남편이 서왕모(西王母)에게서 얻은 불사약을 훔쳐 먹고 달 속으로 도망쳤다는 전설이 있다. 《搜神記 卷14》
천궁 : 창합(閶闔)은 하늘에 있는 천제(天帝)의 궁궐문을 가리킨다. 또 창합풍(閶闔風)이라 하여, 정서풍(正西風)의 가을바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부(說郛)》 권109 상(上)에 “팔절의 바람을 팔풍이라 하니, 입춘에는 조풍, 춘분에는 명서풍, 입하에는 청명풍, 하지에는 경풍, 입추에는 양풍, 추분에는 창합풍, 입동에는 부주풍, 동지에는 광막풍이 이른다.〔八節之風, 謂之八風, 立春條風至, 春分明庻風至, 立夏清明風至, 夏至景風至, 立秋凉風至, 秋分閶闔風至, 立冬不周風至, 冬至廣莫風至.〕”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달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말하고 있으므로, 천궁으로 풀이하였다.
달 : 노토(老兔)는 달을 가리킨다. 《동파시집주(東坡詩集註)》 권5 〈호아(虎兒)〉에 “늙은 토끼는 달 속의 물건이라, 빠른 말을 타지 않고 두꺼비를 탄다네.〔老兎自謂月中物, 不騎快馬騎蟾蜍.〕”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달 속에 토끼와 두꺼비가 있다.〔月中有兎與蟾蜍〕”라는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는 임금의 주변에서 소인들이 농간을 부려서 자기의 처지가 외로움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광한궁(廣寒宮) 정전(正殿) : 광한(廣寒)은 달 속의 선궁(仙宮)인 광한궁으로 달을 의미하고, 전전(前殿)은 정전과 같은 의미이다.
겨울옷〔寒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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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다듬이 소리 난간에 들려오니 / 淸砧移近曲欄頭
힘은 여린데 날씨 추워 그 소리 그치지 않네 / 力弱天寒杵未收
가을 서리와 밤 달 다하도록 두드리고 / 擣盡秋霜兼夜月
이별의 눈물과 시름을 함께 꿰매네 / 緘將別淚與離愁
처음엔 실 맺어 꿰매기 어려운데 / 初盤結縷縫猶澁
그리운 마음 서글퍼 가위질 또 멈추네 / 爲惜回文翦復休
하늘 멀리 강산이 만 리까지 뻗었으니 / 空外江山一萬里
도착할 때는 눈바람에 변방 캄캄하겠네 / 到時風雪暗邊州
그리운 마음 : 회문(回文)은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전진(前秦) 때 두도(竇滔)가 진주 자사(秦州刺史)가 되어 멀리 유사(流沙)로 가게 되자, 그의 아내 소씨(蘇氏)가 그리운 마음을 담아 전후좌우 어디로 읽어도 문장이 되는 〈회문선도시(回文旋圖詩)〉를 지어 비단에 수놓아 보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96 烈女列傳 竇滔妻蘇氏》
일본으로 가는 회답사 정립을 전송하다〔送回答使鄭岦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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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로 풍토 다르고 아득히 먼 이웃 / 風壤東西杳隔隣
밤낮으로 가도 구름 파도 넓어 끝이 없네 / 雲濤日夜浩無津
문신 새기는 남쪽 오랑캐 땅에 / 須令百越文身地
삼한에 정씨 있음을 다시 알게 하시길 / 再識三韓鄭姓人
옥 부절이 언뜻 봉래도 새벽 지나면 / 玉節乍經蓬島曙
사신 행차 꽃다운 봄을 스치리라 / 星槎定拂若華春
돌아오는 행장에 천금의 칼은 필요 없고 / 歸裝不蓄千金劍
상자 가득한 문장만이 가난에 대적하리 / 溢篋瓊琚也敵貧
정립(鄭岦) : 1574~1629.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여수(汝秀)이다. 1624년(인조2) 3월 25일에 회답사(回答使)에 임명되었다. 8월에 도성을 출발하여 이듬해 3월에 부산으로 돌아왔다. 《恬軒集 卷33 嘉善大夫工曹參判鄭公墓誌銘》
남쪽 오랑캐 : 백월(百越)은 고대 중국의 남방인 월(越) 지방에 사는 오랑캐들의 총칭이다.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삼한(三韓)에 …… 하시길 : 일본에 알려진 정씨 말고도 정립과 같이 훌륭한 정씨가 있음을 알리라는 말이다. 여기서 정성(鄭姓)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1377년 9월에 사신의 임무로 일본에 간 일이 있고, 정립과 본관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몽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봉래도 : 봉도(蓬島)는 신선이 산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사신 행차 : 성사(星槎)는 사신이 타는 배를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살면서 해마다 음력 8월이 되면 어김없이 뗏목이 떠오는 것을 보고, 그 뗏목에 양식을 가득 싣고 수십 일 동안 갔더니, 멀리 궁실(宮室)에는 베 짜는 아낙들이 많고 물가에는 소를 끌고 와 물을 먹이는 사내가 있었다. 그가 돌아와서 점술(占術)로 유명한 엄군평(嚴君平)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년 모월 모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성(牽牛星)을 범하였다.”라고 하였다. 소를 끌고 있던 사내가 견우였던 것이다. 이 고사로 인하여 사행(使行)을 성사라고 한다. 《博物志 卷10》
돌아오는 …… 대적하리 : 일본에 다녀오면서 귀한 물건을 받아오지 말고 좋은 글을 지어 오라는 말이다. 경거(瓊琚)는 아름다운 옥인데, 흔히 상대방이 보내 준 아름다운 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목과(木瓜)〉에 “내게 목과로 주거늘, 경거로 보답한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장관 신계영을 전송하다〔送辛書狀啓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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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악은 오나라 계찰처럼 훌륭하고 / 禮樂吳公子
시서는 한나라 육가처럼 뛰어나네 / 詩書陸大夫
배와 수레 타고 먼 나라로 가니 / 舟車重譯遠
풍토 다른 오랑캐 땅이라네 / 風壤百蠻殊
밤 저자에선 교주를 자랑하고 / 夜市鮫珠薦
가을 돛배에선 월나라 베를 나르겠지 / 秋帆越布輸
서리 내려 귤과 유자 익고 / 天霜深橘柚
사람들은 갈대숲으로 나가겠지 / 人物出菰蘆
글자는 왕희지의 획을 파괴하였고 / 字破羲之畫
집에는 부처 그림을 간직한다네 / 家藏釋氏圖
이기려는 마음은 시퍼런 칼날도 가볍게 여기고 / 勝心輕白刃
이익을 노려서 붉은 차조기 쫓는다네 / 射利逐丹蘇
거북이가 때때로 궤를 열고 나오고 / 龜寶時開柙
가마우지는 저물녘 호수로 들어오네 / 魚鷹晩入湖
줄지어 춤추는 이들에게 금전 던져 주고 / 金錢飛舞佾
은 부채로 노래에 가락 맞추네 / 銀箑節歌呼
색다른 풍속이 눈을 놀라게 하겠지만 / 異俗曾驚眼
이별하는 자리에 탄식을 일으키네 / 離筵更起吁
구름 물결 사이 이별하는 길에 / 雲波間別路
술 따르는 이 마음 외로워라 / 斟酌此情孤
신계영(辛啓榮) : 1577~1669.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영길(英吉), 호는 선석(仙石)이다. 1624년(인조2) 회답사 정립, 회답부사 강홍중과 함께 서장관의 신분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예악은 …… 훌륭하고 : 신계영을 칭찬한 말이다. 오공자(吳公子)는 오나라 계찰(季札)을 가리킨다.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周)나라의 음악을 듣고 열국(列國)의 치란 흥망을 알았다고 한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시서는 …… 뛰어나네 : 신계영의 문장 솜씨를 기린 말이다. 육대부(陸大夫)는 한나라의 육가(陸賈)를 가리킨다. 그는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주선을 잘한 결과, 월왕 위타(尉他)로부터 황금을 듬뿍 선물로 받고 돌아왔다. 《史記 卷97 陸賈列傳》 《논어》 〈자로(子路)〉에 “《시경》 3백 편의 시를 아무리 잘 외운다 하더라도 정사를 맡겨 통달하지 못하며,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전대를 잘하지 못한다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는 말이 있다. 먼 나라 : 중역(重譯)은 한 나라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이중, 삼중의 통역을 거치는 것을 말하므로, 먼 나라를 의미한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섭정하던 때에 천하가 태평해지자, 월상씨(越裳氏)가 중역(重譯)을 통하여 와서 주공에게 꿩을 바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오래도록 거센 비바람을 내리지 않고, 바다에도 파도가 일지 않은 지 지금 3년이 되었으니, 아마도 중국에 성인이 있는 듯한데, 왜 가서 조회하지 않느냐.’ 하므로 왔습니다.”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韓詩外傳 卷5》
교주(鮫珠) : 남해의 바닷속에 교인(鮫人)이 사는데,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된다고 한다. 남해(南海) 밖에서 물고기처럼 물속에 거하며 비단을 짜는 교인이 물 밖으로 나와 인가에 묵으면서 비단을 팔고 헤어질 적에, 이별을 아쉬워하며 자기의 눈물로 진주를 만들어 주인의 그릇에 가득 채워주고 떠났다는 전설이 진(晉)나라 좌사(左思)가 지은 〈오도부(吳都賦)〉 주(註)에 나온다.
붉은 차조기 : 단소(丹蘇)는 자소(紫蘇)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 잎이 땀을 내며 속을 조화시키는 효능이 있어 해수(咳嗽), 곽란(癨亂), 각기(脚氣), 심복통(心腹痛) 등을 다스리는 약재로 사용된다.[
거북이 : 귀보(龜寶)는 거북이를 말한다. 《천중기(天中記)》 권57에 “귀보는 원귀(元龜), 공귀(公龜), 후귀(侯龜), 자귀(子龜) 등 네 종류가 있다.”라고 하면서 각각의 크기를 설명하였다. 또 《설부(說郛)》 권33 상(上)에 “서태위(徐太尉) 언약(彦若)이 광남(廣南)으로 갈 때 작은 바다를 건너게 되었는데, 물이 낮은 곳에서 유리병 하나를 얻었다. 그 속에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작은 거북이 있었는데, 길이는 1치(寸) 쯤이고, 병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병의 목이 아주 작았으므로 어떻게 그 속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저녁때가 되자 배가 한 쪽으로 기우는 것을 알고 살펴보니, 많은 거북들이 배로 올라오고 있었다. 언약이 두려워하여 유리병을 바다에 던지자 거북들이 흩어졌다. 조금 뒤에 언약이 뱃사람에게 말하자, 뱃사람이 ‘그것이 이른바 귀보이니, 세상에 드문 영물입니다. 그런 영물을 만나고도 갖지 못했으니 안타깝습니다.〔此所謂龜寶也, 希世之靈物, 惜其遇而不能有.〕’라고 했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검령〔劍嶺〕 울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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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귀신이 공을 이룬 곳이며 / 富媼成功地
우공도 옮길 생각 그만둔 산이라네 / 愚公息慮山
하늘로 솟아 단련한 돌들 남아 있고 / 入天餘鍊石
통하는 골짜기는 관문처럼 막혀 있네 / 通谷限封關
둘러싸여 검할을 보존할 수 있으니 / 環衛存鈐轄
제방을 험한 곳에 설치하였네 / 提防設險艱
가을바람이 해를 불어 / 秋風吹日馭
아득히 험한 산에 오르네 / 杳杳上孱顏
[주-D001] 땅 귀신 : 부온(富媼)은 지신(地神)을 말한다.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에 “후토(后土)의 부온이 삼광(三光)을 밝힌다.”라고 했는데, 그 주(註)에 장안(張晏)의 말을 인용하여 “온은 늙은 어머니를 일컫는 말이다. 땅이 어머니가 되므로 온이라 한다. 해내가 안정된 것은 부온의 공이다.〔媪老母稱也, 坤為母, 故稱媪. 海内安定, 富媪之功耳.〕”라고 하였다.[주-D002] 우공(愚公)도 …… 산이라네 : 산이 너무 높다는 표현이다. 우공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북산(北山)의 우공이 나이가 아흔에 가까웠는데, 집 앞에 태항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이 막혀 있는 것이 싫어서, 그 산을 옮기려고 자손들을 데리고 삼태기에 산을 파 담아 발해(渤海) 바닷가로 날라다 부었다. 지수(智叟)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여생에 산의 일부분도 파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공이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마음이 고루하구나.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은 손자를 낳을 것이고, 그 손자는 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자자손손 끊임없이 이어질 것인데, 산은 더 높아지지 않을 것이니, 산이 어찌 평지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지수가 대답을 못하였다. 산신(山神)이 산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 상제(上帝)에게 보고하니, 상제가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그 산들을 옮겨 주었다.”라고 하였다. 태항산을 옮기려고 했던 우공이지만, 검령은 너무 높아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말이다.[주-D003] 단련한 돌 : 상고 시대에 복희씨(伏羲氏)의 누이인 여와씨(女媧氏)가 오색(五色)의 돌을 달구어 뚫어진 하늘을 기웠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사기(史記)》 〈삼황기(三皇紀)〉에 “공공씨(共工氏)가 축융씨(祝融氏)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해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들이받아 무너뜨리자 천주(天柱)가 끊어졌으므로, 여와씨가 오색의 돌을 달구어 하늘을 기웠다.”라고 하였다.[주-D004] 검할(鈐轄) : 지방의 벼슬 이름이다. 《송사(宋史)》 〈직관지(職官志)〉에 “총관검할사(總管鈐轄司)는 군려(軍旅)와 둔수(屯戍)의 일을 맡아 본다.”라고 하였다.[주-D005] 험한 산 : 잔안(孱顔)은 큰 산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말한다.
망신루의 운자에 맞춰 짓다〔望辰樓次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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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의 민풍 팔민과 흡사해 / 溪洞民風似八閩(계동민풍사팔민)
생선 비린내 나그네는 익숙지 않네 / 魚腥不慣客來人
수레 몰아 다시 어디를 유람하려는가 / 襜帷更欲游何處
푸른 바다 보이는 동쪽은 이미 땅끝인데 / 滄海東頭已絶垠
그 후에 고을 사람들이 민땅은 오랑캐 풍속이 행해지는 곳이니, 민(閩)자를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청하였다.
그 뜻이 가상하여 다른 글자로 고쳤다.
망신루(望辰樓)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에 있는 누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546년(명종1)에 흥해 읍성 동편에 건축하였으며, 1809년(순조9)에 중수하였다. 박장원(朴長遠)의 《구당집(久堂集)》 권1 〈망신루부(望辰樓賦)〉에 “이것은 어쩌면 두보의 시 ‘높은 누대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네.’라는 뜻을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此豈非杜子美之句危樓望北辰之意乎.]”라고 하였다.
팔민(八閩) :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별칭이다. 옛 민땅으로 여덟 부(府), 주(州), 군(軍)을, 원나라는 복주(福州), 흥화(興化), 건녕(建寧), 연평(延平), 정주(汀洲), 소무(邵武), 천주(泉州), 장주(漳州)의 팔로(八路)를, 명나라는 팔로를 팔부(八府)로 고쳤는데, 청나라가 이어받으면서 생긴 이름이다. 중국의 복건성이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므로, 역시 바닷가에 위치한 계동의 풍속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동지〔冬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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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동지에 북쪽 변방의 길손 되어 / 去年冬至客龍荒
변방 외로운 성에서 눈서리 만났었지 / 絶塞孤城對雪霜
만 리 멀리서 관문 닫은 이날인데 / 萬里閉關還此日
한밤의 고향 꿈 또 타향에서 꾸누나 / 二更歸夢又他鄕
빠른 세월에 귀밑머리 세는데 / 匆匆歲序欺雙鬢
끝없는 하늘의 마음을 일양에서 느끼네 / 衮衮天心感一陽
버선 실처럼 볼품없는 재주 부끄러운데 / 自愧寸能猶襪線
나아질 길 없이 해만 길어지네 / 無因添得日暉長
북쪽 변방 : 용황(龍荒)은 북쪽 변방을 뜻한다. 용은 흉노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용성(龍城)을 가리키고, 황은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뜻의 황복(荒服)을 가리킨다. 이민구가 1623년(인조1)에 장만(張晩)의 종사관이 되어 함경도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용황은 함경도 지역을 뜻한다.
관문 닫은 : 폐관(閉關)은 동짓날을 의미한다. 《주역》 〈복괘(復卦) 상(象)〉에 “동짓날에 관문을 닫아 장사꾼과 여행자가 다니지 못하게 하며, 임금은 사방을 시찰하지 않는다.〔至日閉關, 商旅不行, 后不省方.〕”라는 내용이 있다.
끝없는 …… 느끼네 : 11월이 되어 양(陽) 하나가 생성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버선 실처럼 : 말선(襪線)은 여러 가지 기예가 있으나 어느 하나도 능통하지 못한 사람, 또는 재능이나 학문이 보잘것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오대(五代) 시대 한소(韓昭)가 여러 가지 재주를 익혀 전촉(前蜀)의 후주(後主)에게 은총을 받자, 조사(朝士) 이태하(李台蝦)가 “한소의 재주는 버선을 꿰맨 실처럼, 풀어도 쓸 만한 긴 실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韓八座事藝, 如拆襪線, 無一條長.〕”라고 비웃은 고사가 있다. 《天中記 卷29》
고전번역서 > 동주집 > 동주집 전집 제4권 > 시 > 최종정보
동주집 전집 제4권 / 시(詩)○가림록(嘉林錄) 가림(嘉林) : 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의 옛 이름이다.
서쪽 교외에서 술 마시며 작별하다〔西郊飮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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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햇살에 가을 잎 밝게 빛나고 / 淡日明秋葉
차가운 띠풀이 가느다란 샘물줄기 덮었네 / 寒茅覆細泉
정은 벗님 술에 더 깊어지고 / 情深故人酒
내쫓긴 신하 전별연에 마음 다 털어놓네 / 意盡逐臣筵
황량한 들판에 기러기 처음 날아와 / 野瘦初迎雁
성긴 숲에 매미 소리 그쳤네 / 林疏已息蟬
남쪽 물가 천 리 길에 / 湖湘千里道
돌아보며 거듭 눈물 흘리겠네 / 回望重潸然
남쪽 물가 : 호상(湖湘)의 호는 동정호(洞庭湖), 상은 상강(湘江)을 의미하는데, 모두 중국의 남쪽에 있다.
여기서는 이민구가 부임하는 임천을 가리키는 말이다.
흥을 달래다〔遣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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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부여 땅 / 地闊扶餘國(지활부여국)
강물이 푸른 바다로 이어지네 / 江連碧海潮
천년 제왕의 기운 다하고 / 千年王氣盡
구월이라 장기도 없구나 / 九月瘴煙消
기러기 소리에 서릿바람 세차지만 / 鴻雁風霜急
임금과 어버이 생각에 멀리서 눈물 흘리노라 / 君親涕淚遙
희끗희끗 양쪽 귀밑머리 / 蕭蕭雙鬢髮
참으로 성명의 조정 저버렸네 / 眞負聖明朝
차가운 안개〔寒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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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 무렵 강 안개 짙더니 / 天明江霧重
저물녘 더욱 어두워지네 / 日晩轉陰森
표범이 숨으려 하나 골짜기 어이 찾을까 / 豹隱寧尋谷
까마귀 울려고 해도 숲을 분간 못하네 / 烏啼不辨林
거문고와 책은 추위에 더욱 윤나지만 / 琴書寒更潤
발은 쌀쌀해지면 도리어 사라지네 / 簾箔爽還沈
고향을 무슨 수로 바라볼까 / 故國何由望(고국하유망)
산천에 절로 안개 짙어라 / 山川只自深
표범이 …… 찾을까 : 안개가 짙다는 것을 표현함과 동시에 은둔하려고 해도 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표은(豹隱)은 표범이 숨는다는 말로, 능력 있는 사람이 은둔함을 가리킨다. 《열녀전(列女傳)》 권2 〈도답자처(陶答子妻)〉에 “남산에 검은 표범이 있는데, 안개 속에서 7일 동안 있으면서도 내려와 먹지 않는 것은 어째서이겠는가.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무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숨어서 해를 피하는 것이다.〔南山有玄豹, 霧雨七日而不下食, 何也. 欲以澤其毛, 而成文章也, 故藏而遠害.〕”라는 말이 보인다. 이 시는 안개를 읊고 있으므로, 이민구가 이 고사를 이끌어 자신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까마귀 …… 못하네 : 위의 구와 마찬가지로 안개가 짙다는 사실과 함께 사면령이 내려지려고 해도 내려질 수 없다는 말이다. 남조(南朝) 송나라 유의경(劉義慶)이 강주 자사(江州刺史)에서 파직되었을 때, 그의 첩이 밤중에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내일은 틀림없이 사면령이 내릴 것입니다.〔明日應有赦〕”라고 하였는데, 그해에 다시 남연주 자사(南兗州刺史)로 기용되었고, 〈오야제(烏夜啼)〉라는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舊唐書 卷29 音樂2》
고을 수령〔領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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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되니 천지의 너그러움 깊이 알아 / 領邑深知天地寬
임금 은혜에 감격해 공연히 눈물만 흘리네 / 感恩空有淚汍瀾
마을에 성곽 둘러 있어 우양이 싫어하고 / 村墟帶郭牛羊病
들 물이 강에 이어져 기러기는 춥겠지만 / 野水連湖雁鶩寒(강물은호수로이어져)
차조는 도령의 술잔에 이바지하고 / 秔秫自供陶令酌
생선은 유랑의 소반과 같지 않네 / 魚鮮不似庾郞盤
이제 밀려난 신세 익숙하다만 / 從今一任推擠慣
시인이 녹만 축낸다 읊을까 부끄럽다 / 但愧風人詠素餐
차조는 …… 이바지하고 : 고을에서 생산되는 차조로 술을 빚어 마실 수 있다는 말이다. 도령(陶令)은 진(晉)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지내다가, 전원으로 돌아가 시와 술을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생선은 …… 않네 : 밥상에 생선이 반찬으로 올라온다는 말이다. 유랑(庾郞)은 남조(南朝) 제(齊)나라의 유고지(庾杲之)를 가리킨다. 〈유고지전(庾杲之傳)〉에 “청빈함을 스스로 힘써서, 밥을 먹을 때 오직 구저, 약구, 생구 잡채만 있었다.〔清貧自業, 食唯有韮葅蘥韮生韮雜菜.〕”라고 하였다. 《南齊書 卷34 庾杲之列傳》 이처럼 채소만 먹었던 유랑과는 달리 이민구는 생선 반찬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영광 군수 정몽뢰에게 부치다〔寄靈光守鄭夢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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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대에 좌동어 각각 찼는데 / 明時各佩左銅魚
한 줄기 강물에 서신도 막혔구나 / 一帶江湖阻尺書
영포에서 늘그막 관리로 머물고 / 靈浦暮年淹吏隱
가림에서 저물녘 관사 닫았네 / 嘉林落日閉官居
풍진 세상에 오랫동안 사귀었으니 / 交期久許風塵際
이별의 한 내리는 눈에 다시 놀라네 / 離恨還驚雨雪初
못난 신세 늙고 병들어 / 養拙乾坤覺衰病
백발로 서로 그리는데 고을 누각 비었네 / 白頭相憶郡樓虛
정몽뢰(鄭夢賚) : 정양필(鄭良弼, 1593~1661)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몽뢰, 호는 추천(秋川)이다. 《승정원일기》 인조 6년 2월 26일 기사에 “전라 감사의 서목. 영광 군수 정양필의 병이 심하므로 파출할 일.[全羅監司書目. 靈光郡守鄭良弼, 病重罷黜事.]”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가 영광 군수였음을 알 수 있다.
좌동어(左銅魚) : 군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좌동어는 지방관이 차는 패물인데, 구리로 만든 물고기 형태의 부절(符節)의 왼쪽 반을 말한다. 두목(杜牧)의 〈춘말제지주농수정(春末題池州弄水亭)〉에 “마흔 넷 지방관, 양쪽에 좌동어 찼네.〔使君四十四, 兩佩左銅魚.〕”라는 내용이 보인다. 《御定全唐詩 卷522》
영포(靈浦)에서 …… 머물고 : 정양필이 영광 군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영포는 영광이고, 이은(吏隱)은 하급관리가 되어 이록(利祿)에 연연하지 않으며 은자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가림(嘉林)에서 …… 닫았네 : 임천 군수로 재직하는 자신을 읊은 것이다. 가림은 임천의 옛 지명이다.
탄신절을 멀리서 축하하다〔誕節遙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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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뜰 찬 화톳불이 한겨울 추위 녹이고 / 虛庭寒燎破窮陰
절하고 춤추는 별빛 북극 임해 있겠지 / 拜舞星光北極臨
성인이 천 년 만에 나와 왕위에 오르시고 / 聖作千年開寶曆
칠 일 만에 양 생기니 하늘 뜻 알겠네 / 陽生七日見天心
붉은 성에 의장 펼치니 조정 위의 고요하고 / 朱城仗引朝儀靜
대궐 향로 불에 새벽빛 짙으리 / 紫殿鑪薰曙色深
강호의 이 마음 진실로 괴로운데 / 湖海此情良自苦(호해)
흰머리에 부질없이 옛 화려한 비녀 꽂았네 / 白頭虛戴舊華簪
절하고 …… 있겠지 : 임금의 생신을 축하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배무(拜舞)는 조정의 하례 의식(賀禮儀式) 때 백관(百官)이 무릎을 꿇어 절하고 발을 구르며 춤추는 의식을 말한다. 북극(北極)은 임금을 의미한다.
칠 일 …… 알겠네 : 《주역》 〈복괘(復卦) 단(彖)〉에 “그 도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한다는 것은 하늘의 운행이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天行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음양 소장(消長)의 도가 반복하여 번갈아 찾아오는 것을 말한다.
승지 이천장이 부쳐온 시에 화답하다〔酬李承旨 天章 寄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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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가을 이별의 꿈 승정원에서 헤어져 / 淸秋別夢散銀臺
홀로 가을 기러기 짝해 만 리 길 왔네 / 獨伴霜鴻萬里來
늙어 가는 천지에도 반가운 친구 있어 / 垂老乾坤靑眼在
깊이 시름하는 강해에 편지 돌아왔네 / 窮愁江海素書回(강해)
섣달에 핀 매화는 이제 꺾을 만한데 / 梅花破臘初堪折
겨울 지낸 대는 반쯤 부러졌어라 / 竹樹經寒半欲摧
서울에서 즐기던 곳 아련히 떠올리니 / 遙憶長安行樂處
벗님은 누굴 위해 술동이 여시려나 / 故人尊酒爲誰開
승지(承旨) …… 시 : 이천장(李天章)은 이명한(李明漢, 1595~1645)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천장, 호는 백주(白洲),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명한의 《백주집(白洲集)》 권8에 〈기자시(寄子時)〉라는 작품이 있으며, 그 아래에 이민구의 시가 부록(附錄)되어 있다. 자시(子時)는 이민구의 자이다.
동주집 전집 제4권 / 시(詩)○가림록(嘉林錄)
정묘년(1627, 인조5) 정월 초하루〔丁卯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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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죽 소리가 추운 잠을 깨우니 / 爆竹驚寒寢
먼 타향에 옛 풍속 전해지네 / 殊方故俗傳
닭 울음소리에 묵은해 마감하고 / 鷄聲分舊歲
새벽빛에 새해 시작하네 / 曙色進新年
머나먼 변경에 던져진 신세 / 忽覺投荒遠
속절없이 백발만 늘었어라 / 空知得白偏
도소주가 백엽주 따르리니 / 屠蘇隨柏葉
몇 사람에게 앞을 양보하려나 / 合讓幾人先
도소주(屠蘇酒)가 …… 양보하려나 :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말이다. 도소(屠蘇)와 백엽(柏葉)은 모두 술 이름으로, 이 술을 마시면 사기(邪氣)를 쫓을 수 있다고 한다. 《어정월령집요(御定月令輯要)》 권5 〈도소주(屠蘇酒)〉의 주석에 “온 가족이 동쪽을 향하고, 젊은 사람으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마신다.〔舉家東向, 從少至長, 次第飲之.〕”라고 하였으므로, 이 술을 마실 때 젊은 사람부터 마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민구가 몇 사람에게 앞을 양보하게 될 것인가라고 자문한 것은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는 말이다.
관직을 그만둔 후에 비에 막히다〔解官後阻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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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넘긴 병에 인끈 던졌는데 / 投紱經年病
어젯밤에 가을바람 불었지 / 秋風昨夜生
돌아가고 싶어도 강물 가득하니 / 欲歸江水滿
잠시 구름 개길 기다리네 / 暫待海雲晴
고향은 시름겨운 꿈을 이끌고 / 故國牽愁夢
외로운 성에는 석별의 정 둘렀네 / 孤城帶別情
가을 매미가 위태로운 잎을 안고 / 涼蟬抱危葉
생각 있어 사람 가까이서 우는구나 / 着意近人鳴
수원 부사 이시백과 함께 독성에 오르다〔同李水原時白登禿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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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성 오솔길에 구름 덮였는데 / 孤城徑路繞寒雲
이 부사와 함께 말을 달려가네 / 飛騎相隨李使君
바다 향해 뻗은 산은 저 멀리서 끊어지고 / 山向海門低處盡
물은 들 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네 / 水從原野畫中分
선림의 시원한 바람 풍경 소리 전하는데 / 禪林爽籟傳虛磬
객탑 가을 풍광에 저녁노을 마주했네 / 客榻秋光對暮曛
소슬한 백년 인생 돌아봄에 한스러워 / 蕭瑟百年臨眺恨
외기러기와 나팔 소리 누대에 기대 듣노라 / 斷鴻殘角倚樓聞
이시백(李時白) : 1581~1660.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壽谷集 卷6 外曾祖議政府領議政延陽府院君李忠翼公墓表》 이시백을 수원 부사에 임명한다는 내용이 《인조실록》 2년 8월 24일 기사에 보인다.
독성(禿城) : 독산성(禿山城), 혹은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산성으로, 도성(都城)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이다.
안개 낀 새벽에 동작나루를 건너다〔霧曉渡銅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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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성 새벽길 나선 말 서리 밟는 소리 나고 / 遙城曉馬蹋霜鳴
모래톱에 도착해 뜨는 해 바라보네 / 正到沙中見日生
기러기는 날아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데 / 旅雁自飛還自宿
찬 파도는 끝도 없고 소리도 없다 / 寒波無際復無聲
나루 정자는 세월 흘러도 여전하고 / 津亭閱世依依在
강변 나무는 사람 맞이해 차례로 지나네 / 江樹迎人歷歷行
세모에 안개 속을 오르내리니 / 歲暮沿洄雲霧裏
흐르는 물에 잠시 갓끈 씻고 싶구나 / 臨流暫欲濯吾纓
갓끈 씻고 싶구나 : 탁오영(濯吾纓)은 내 갓끈을 씻는다는 말로, 세속을 초탈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의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는 말에서 나왔다.
한강에서〔漢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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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강 백 이랑에 비췻빛 물결 일어나고 / 長湖百頃翠生鱗
고운 돌과 맑은 모래 산뜻하게 눈에 든다 / 錦石晴沙觸眼新
언덕 위 난간에서 더위 물리치고 / 岸上朱闌排暑氣
강 가운데서 맑은 날 더운 먼지 씻노라 / 江心晴日洗炎塵
나는 오리는 물 좋아해 늘 물가 의지하고 / 飛鳧愛水常依渚
새끼 제비는 배 스쳐가며 사람 피하지 않네 / 乳燕衝舟不避人
저물녘 마름 바람이 나그네 소매에 불어오니 / 向晩蘋風吹客袂
물살 헤치고 가려 해도 나루 몰라 하노라 / 凌波欲往更迷津
마름 바람 : 빈풍(蘋風)은 개구리밥이라는 수초의 잎에서 일어나는 바람이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대저 바람은 땅에서 생기고, 푸른 개구리밥의 뾰족한 잎에서 일어난다.〔夫風生於地, 起於靑蘋之末.〕”라고 하였다.
마포에서〔麻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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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따뜻한 물살에 목욕하는 까마귀 날고 / 江深波暖浴烏飛
포구 끝까지 안개 일어 푸른 산빛 감춰지네 / 極浦生煙斂翠微
맑은 흥취 봄 물가 따라 갔다가 / 淸興却隨春渚去
조각배 저녁 조수 따라 돌아오지 않네 / 扁舟不逐暮潮歸
쟁반에 오른 별미 처음으로 회를 맛보고 / 登盤異味初嘗膾
얼굴 스치는 서늘한 바람이 옷을 입게 하네 / 吹面虛涼欲進衣
서호의 무한한 술을 가져다 마시며 / 領取西湖無限酒
그대 위해 저물녘까지 머물러 감상하노라 / 爲君留賞到斜暉
창연정에서 동양위를 위해 짓다〔蒼然亭爲東陽尉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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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석〔砥柱〕
넓고 넓은 두 강 줄기 / 浩浩二江源
태고 때부터 달려 흐르지 / 奔流自太古
누가 땅에 꽂힌 병풍을 가지고 / 誰將揷地屛
하늘 받치는 기둥이라 부르는가 / 喚作支天柱
고산(孤山)
푸르고 푸른 뭇 산의 기세 / 蒼蒼衆山勢
큰 강과 함께 뻗어 가는데 / 欲與大江逝
버티고 선 한 봉우리 있어 / 賴有一支峯
머리 돌려 울타리 되었네 / 回頭爲捍蔽
상연대(爽然臺)
높은 누대는 무더운 여름과 동떨어져 / 高臺隔炎夏
유월에도 서늘한 바람 불어온다 / 六月涼風吹
너른 들판에 큰길 나 있어 / 曠野有官道
행인들 그칠 때 없구나 / 行人無已時
창연정(蒼然亭)에서 …… 짓다 : 창연정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던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세운 정자이다. 신익성의 《낙전당집(樂全堂集)》 권8 〈창연정설(蒼然亭說)〉에 “회수 가에 폐허가 된 언덕이 있다. 내가 그 꼭대기를 밀어 판판하게 만들고, 정자를 세워 이름을 창연이라 하였다.[淮上有廢丘, 余乃夷其顚而亭之, 命之曰蒼然.]”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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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전집 제7권 / 시(詩)○관동록(關東錄)
영랑호에서〔永郞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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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호수 지축에 자리 잡아 / 名湖據坤軸
만경창파 빈 골짝에 파고들었네 / 萬頃浸空曲
서쪽으로는 서린 대관령을 깎아 먹고 / 西刳大嶺蟠
옆에는 푸른 바다 가깝구나 / 旁占滄溟蹙
천지가 처음 만들었을 적에 / 天地所委鑿
처음부터 청탁이 나뉘지 않았으니 / 未始分淸濁
둥근 못이 드넓게 펼쳐져 / 環泓浩涯涘
만물을 모두 함축하였네 / 百物俱含蓄
관동에는 호수 많아 / 關東富淵澤
넘실대는 물결 날마다 보지만 / 氾濫日在目
여기 와서 까마득히 넓은 물 보니 / 及此獲溔淼
앞서 본 것들 아련히 잊게 된다 / 茫然喪前矚
자욱하게 가을 안개 깔려 / 冥濛秋靄集
물과 하늘 어우러져 푸르다 / 水與空色綠
숨었다 나타났다 모래섬 많아 / 隱見洲陼多
오르내리려니 물굽이 알 길 없다 / 沿溯迷隈隩
일찍이 듣자니 옛 선인이 / 嘗聞古仙人
여기 외진 곳에서 놀았다지 / 遊戲玆區僻
영랑이 다시 오지 않으니 / 永郞不重來
누가 신선 마차 보았으랴 / 孰睹飆車迹
아득히 상상할 겨를도 없이 / 未暇寄遐想
조화옹 솜씨에 감탄하네 / 感歎造化績
높은 산 깊은 물 자연스레 만들어져 / 崇深鍾自然
우 임금 공로에도 열리기를 마다했네 / 禹功謝疏闢
사해가 모든 강물 받아 주니 / 四海受群流
실로 우주의 주머니이거늘 / 實惟宇宙橐
어찌 이 거대한 골짝 밖에 / 奈何巨壑外
따로 용과 맹꽁이 사는 영역 열었나 / 別開龍黽域
방장산 사이를 한계로 삼아 / 限以方丈間
염수와 담수로 성질 나뉘네 / 鹹淡性分易
나는 제방을 터서 / 我欲決堤防
모두 섞어 막히지 않게 하고파라 / 渾淪使不隔
영랑호(永郞湖) :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금호동, 영랑동 일대에 걸쳐 있는 석호이다. 신라의 화랑 영랑(永郞)이 이곳의 풍취에 도취되어 머물렀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둘레가 7.8km, 면적이 약 1.2㎢
대관령 : 대령(大嶺)은 대관령을 가리킨다. 대관령은 강릉의 진산(鎭山)으로 신라 때는 대령, 고려 때는 대현(大峴) 혹은 굴령(堀嶺)이라 했다.
신선 마차 : 표거(飆車)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신거(神車)를 가리킨다. 환린(桓驎)의 《서왕모전(西王母傳)》에 서왕모가 사는 궁궐에는 표거우륜(飆車羽輪)이 아니면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雲笈七籤 卷114》
높은 …… 마다했네 : 영랑호가 자연적으로 깊게 만들어져서 치수(治水) 사업을 했던 우 임금의 공로에도 바다와 통하지 않고 호수로 남았다는 말이다.
거대한 골짝 : 거학(巨壑)은 바다를 가리킨다.
방장산 …… 나뉘네 : 영랑호가 동해와 대단히 가까이에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염담(鹽淡)은 짠 바닷물과 싱거운 호수의 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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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시집 제1권 / 시(詩)○철성록1(鐵城錄一)
이일상이 위원 적소에 있으면서 문득문득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뜻이 있었으므로 시로써 위문하다
〔李一相渭原謫所忽忽有輕生之意以詩相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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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가 서울에서 만 리도 더 되니 / 渭水從天萬里過
유배객 날마다 찬 물결 소리 듣겠지 / 流人日日聽寒波
산에 가득 눈 비가 이른 가을에 내리고 / 漫山雨雪乘秋早
사방 벽 바람 서리 밤에 많이 들어오겠지 / 繞壁風霜入夜多
고단한 신세 오직 그대와 같은데 / 身事艱難唯爾共
집안 소식도 뜸하니 내 마음인들 어떠할까 / 家聲零落奈吾何
두 곳의 유배 생활 동병상련인데 / 羈棲兩地堪同病
다만 강담이 멱라에 가까워 두렵구나 / 只恐江潭近汨羅
이일상(李一相) : 1612~166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이다. 1628년(인조6) 17세로 알성 문과에 급제했으나, 나이가 어려 벼슬 대신 공부에 열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또한 척화신으로서 화의를 반대해, 이듬해 탄핵을 받아 영암(靈巖)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평안북도 위원(渭原)으로 이배되었다. 《南溪集 續集 卷21 禮曹判書贈右議政李公神道碑銘》
위수(渭水) : 중국 장안(長安) 북쪽을 흐르는 강인데, 여기서는 이일상의 적소(謫所)인 위원을 가리킨다.
다만 …… 두렵구나 : 이일상이 삶을 포기할까 염려된다는 말이다. 멱라(汨羅)는 초(楚)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투신자살한 곳이다. 이일상의 적소가 위원이므로 굴원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일상도 위수(渭水)에 투신할까 염려된다고 읊은 것이다.
동주집 시집 제1권 / 시(詩)○철성록1(鐵城錄一)
허유선이 강릉에서 보낸 편지와 옷감을 받다〔得許惟善江陵書兼惠衣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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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가을 지나가는 기러기에 편지 부치기 어려워 / 淸秋過雁繫書難
상담에 도착하니 한 해가 저무는 때라네 / 及到湘潭歲向殘
서쪽 해는 매일 멀리 변방 사막으로 지고 / 西日每沈沙塞遠
동쪽 구름은 여전히 차가운 설봉에 걸렸네 / 東雲仍阻雪峯寒
꼭꼭 여미어 먼 곳에 비단 보내 주니 / 題封絶域唯端綺
병들고 궁하지만 애써 밥 먹노라 / 疾病窮途強一餐
녹문에서 길이 은둔했다지만 / 見說鹿門長避地
내 신세 생각하니 눈물만 줄줄 흐르네 / 轉思身許涕汍瀾
허유선(許惟善) : 허보(許𡧰, 1585~1659)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유선, 호는 동강(東岡)이다. 《東州集 文集 卷10 處士東岡許公墓碣銘 幷序》
맑은 …… 때라네 : 허보에게서 오랜만에 편지를 받았는데, 시기적으로 한 해가 저무는 때였다는 말이다. 상담(湘潭)은 초나라 충신 굴원이 참소를 받고 쫓겨났으며 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된 곳이라 하여, 흔히 귀양지의 별칭으로 사용한다. 여기서는 이민구의 유배지인 영변(寧邊)을 의미한다.
녹문(鹿門)에서 …… 흐르네 : 관직에 나갔다가 유배 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녹문은 녹문산(鹿門山)으로, 후한(後漢)의 은자(隱者) 방덕공(龐德公)이 유표(劉表)의 간절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은 채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다가 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
난리 때의 일을 기술하여 배천 홍경택에게 부치다〔追述亂離寄洪白川景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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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가 동쪽으로 땅에 떨어져 / 天狗東墜地
만백성 어육이 될 뻔했지 / 萬姓欲爲魚
살기가 푸른 하늘에 요동치고 / 殺氣盪穹碧
전쟁의 피가 도랑에 넘쳐났네 / 戰血沸溝渠
한 조각 남한산성 / 一片南漢城
참담히 임금 수레 떨어졌네 / 慘澹飄龍輿
나는 당시 강화도에 들어가 / 我時入海島
흐르는 눈물로 늘 소매 적셨지 / 灑淚每霑裾
전해 들으니 배천 군수는 / 傳聞白州守
칼 맞아 목숨 위태롭다지 / 鋒刃縷命餘
깜짝 놀라 오장이 타들어가고 / 驚呼五情熱
분개하여 기분 풀리지 않네 / 感憤氣未舒
북쪽 나루에서 군사 막았지만 / 北津阻甲兵
책임 다 못해 눈 마르도록 울었네 / 眼枯違命車
어느새 사세가 뒤집어져 / 俄頃事反覆
가족들 거친 곳에 버렸네 / 百口委榛墟
정성껏 글을 지어 보내준 것은 / 殷勤機杼贈
실로 유해를 막 수습한 때였지 / 實及收骸初
가득한 벗의 정의 / 藹然友朋誼
마음에 새겨 길이 간직하리 / 銘鏤長內儲
내가 국법에 저촉되었다가 / 逮余觸邦憲
다행히 법망 성글어 벗어났는데 / 幸脫網羅疏
그대는 서울 입구에 누웠다가 / 君方臥京口
배 타고 고향집으로 돌아갔지 / 舟載返鄕廬
영결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 熟知當永訣
애통하게도 소매 잡지 못했네 / 痛莫摻其袪
도깨비 땅으로 쫓겨난 신세 / 竄身魑魅區
만 리 멀리서 외로이 지낸다네 / 萬里邈離居
죄인은 사람들이 외면하니 / 刑徒衆所棄
오점을 씻을 수 없구나 / 點汚不可除
늘 두려웠지 눈 감기 전에 / 常恐瞑目前
친구 편지 끊어질까봐 / 曠絶故人書
문득 받아 본 몇 줄의 글 / 忽覩數行墨
귀한 보배가 손에 들어온 듯 / 落手重硨磲
오랫동안 헤어진 회포 얽히고설키니 / 綢繆久別懷
애타게 그리운 마음 다시 어떠했으랴 / 飢渴復何如
죽어가는 혼을 되불러주고 / 招回濱死魂
애타게 그립던 마음 풀어주네 / 耿耿中心攄
손에 움켜쥐니 주옥과도 같은데 / 盈把比珠玉
꿈에서 깨는 듯 한숨만 느는구나 / 夢覺增累歔
덧없는 인생 각각 늙어가고 / 浮生各短髮
세상은 까마득히 험난하네 / 世路莽崎㠊
나는 늘그막에 쫓겨남 편안히 여겨 / 吾衰安放逐
객지 거처 외진 시골에 있다오 / 客寓在窮閭
앞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 前期迫朝夕
어찌 세월을 아까워하랴 / 焉敢惜居諸
나의 병은 근래 회복되어 / 予病近蘇息
푸른 강 내려다보네 / 傲睨滄江虛
긴 가래와 좋은 보습으로 / 長鑱與良耟
거친 밭 일굴 만하네 / 亦足理荒畬
게다가 고기 생각도 없으니 / 況無肉食慕
저녁밥 반찬 텃밭 채소면 그만이네 / 晩飯甘園蔬
서로 바라봐도 들과 구릉에 막혔으니 / 相望間原陸
어이하면 함께 나무하고 낚시하며 살아보나 / 何由偶樵漁
시운은 양구를 만났고 / 時運遘陽九
세상은 날마다 병드네 / 宇宙日瘡疽
방공은 끝내 홀로 떠났고 / 龐公竟獨往
공자도 돌아가자고 탄식하셨지 / 尼父歎歸歟
아아 우리 함께 노력한다면 / 嗚呼俱努力
거의 좋은 명예로 마무리하리라 / 庶幾終宴譽
배천(白川) 홍경택(洪景澤) : 배천은 황해도(黃海道) 연백(延白)의 옛 이름이다. 홍경택(洪景澤)은 홍집(洪1582~1638)으로,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경택, 호는 연자(燃髭)이다. 이 시의 내용 가운데 배천 군수[白州守]라는 말이 나오므로 홍집이 배천 군수를 역임한 것으로 보이는데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천구(天狗)가 …… 뻔했지 :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여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말이다. 천구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운성(隕星)으로, 천구가 떨어지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다.
한 …… 떨어졌네 : 병자호란 당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 고립된 것을 말한다.
북쪽 …… 울었네 : 이민구가 강화도를 지키고 있었지만 강화도가 함락되어 통곡하였다는 말이다. 북진(北津)은 강화도의 갑곶진(甲串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명거(命車)는 임금이 하사한 수레인데, 여기서는 임무, 책임의 의미로 풀이하였다.
어느새 …… 버렸네 : 이민구가 병자호란 당시 두 아들과 조카딸을 잃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정성껏 …… 것은 : 기저(機杼)는 베틀과 북이라는 의미로, 전하여 문장을 구성하는 기량을 뜻한다. 위(魏)나라 조영(祖瑩)은 자가 진범(珍范)인데 문학으로 세상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가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문장은 모름지기 베틀에서 나와 일가의 풍골을 이루어야 한다. 어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으리오.〔文章須自出機杼, 成一家風骨, 何能共人同生活也.〕”라고 하였다. 《魏書 卷82 祖瑩列傳》 여기서는 홍집이 가족을 잃은 이민구를 위해 위로의 글을 지어 보내준 사실을 읊은 것이다.
죄인 : 원문은 형도(形徒)이나 의미상 형도(刑徒)가 타당하므로 죄인이라 번역하고, 원문도 바로잡았다.
문득 …… 듯 : 홍집이 보내준 편지가 귀한 보배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차거(硨磲)는 서역(西域)에서 생산되는 문합류(文蛤類)의 가장 큰 것으로 이를 다듬은 것은 칠보(七寶)의 하나로 장식에 사용되었다.
애타게 : 기갈(飢渴)은 주림과 목마름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주린 사람이 밥을 찾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간절함을 의미한다.
세월 : 거저(居諸)는 일거월저(日居月諸)의 준말로,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시경》 〈일월(日月)〉에 “해와 달이 하토를 굽어본다.〔日居月諸, 照臨下土.〕”라고 하였다.
시운(時運)은 양구(陽九)를 만났고 : 혼란한 세상을 만났다는 말이다. 양구는 음양도(陰陽道)에서 수리(數理)에 입각하여 추출해 낸 말로, 4천 5백년 되는 1원(元) 중에 양액(陽厄)이 다섯 번 음액(陰厄)이 네 번 발생한다고 하는데, 1백 6년 되는 해에 양액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엄청난 재액(災厄)을 말할 때 쓰는 용어이다. 《漢書 律歷志上》
방공(龐公)은 …… 떠났고 : 혼란한 세상을 만나 은거한 사실을 말한다. 방공은 후한(後漢)의 방덕공(龐德公)으로, 방공 또는 방거사(龐居士)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남군(南郡)의 양양(襄陽)에 살았는데,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초빙하자 나아가지 않고 가솔을 모두 거느리고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後漢書 卷113 龎公列傳》
공자(孔子)도 돌아가자고 탄식하셨지 : 도(道)가 행해지지 않자 돌아가고자 했던 공자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진(陳)나라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돌아가자, 돌아가자. 우리 무리의 젊은이들이 광간하여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으나 재단할 줄을 알지 못한다.〔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라고 하였다.
關山:국경이나 주요 지점 주변에 있는 산
동주집 시집 제3권 / 시(詩)○철성록3(鐵城錄三)
이천장 형제가 상기를 마친 뒤에 멀리까지 은근한 편지를 보내 주었다. 또 쌀값을 물으며 굶주리고 곤궁한
삶을 염려해 주니 우의가 성대하였다〔李天章兄弟制除後遠書勤渠且問米價軫念飢窮友誼藹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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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한 시절이라 만남과 이별에 울부짖으니 / 時危聚散各嗚呼
천지 풍진 속에 모두 상란 겪었구나 / 天地風塵喪亂俱
초막살이 삼 년에 눈물 다 말랐고 / 草上三年雙淚盡
관산 만 리에서 한 몸 외로워라 / 關山萬里一身孤
빈 들보에서 꿈 끊어져 형제 그렸더니 / 空梁夢斷懷聯璧
고향 소식 전해 주니 구슬로 갚을 걸 생각하네 / 故國書傳想報珠
타향에 쌀이 귀한지 흔한지 묻지 마라 / 莫問他鄕米貴賤
지난날 구학이 궁도에 이어졌네 / 向來溝壑接窮途
이천장(李天章) …… 뒤에 : 이명한(李明漢, 1595~1645)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천장, 호는 백주(白洲)이다. 아우는 이소한(李昭漢, 1598~1645)으로,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이다. 이들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아들인데, 1635년(인조13)에 아버지상을, 이듬해에 어머니 상을 당했다. 《淸陰集 卷27 吏曹判書白洲李公神道碑銘》 이 시는 1639년에 지어진 것이므로, 어머니 상까지 모두 마친 때로 추정된다.
천지 …… 겪었구나 : 이민구는 병자호란으로 두 아들을 잃은 뒤였고, 이명한은 부모상을 당한 뒤이기 때문에 이렇게 읊은 것이다.초막살이 …… 말랐고 : 이명한 형제가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하며 슬퍼했다는 말이다.
빈 …… 생각하네 : 이명한 형제를 그리워했는데 마침 그들이 소식을 전해 주므로 시로 답한다는 말이다. 연벽(聯璧)은 두 구슬이 서로 연했다는 말로, 둘이 똑같이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진서(晉書)》 권55 〈하후담열전(夏侯湛列傳)〉에 “담(湛)은 풍채가 아름다우며, 반악(潘岳)과 사이가 좋아서 나가면 수레를 함께 타고, 앉으면 자리를 같이하니, 서울 사람들이 연벽(聯璧)이라 칭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명한 형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타향에 …… 이어졌네 : 이명한 형제가 쌀값을 물었으므로 답한 내용이다. 미(米)는 원문의 자형(字形)이 분명하지 않아, 제목에서 유추하여 보충하였으나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구학(溝壑)은 구렁과 계곡을 가리키는데, 굶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쌀값이 비싸서 곤궁한 유배지에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영변 후 20수 〔寧邊後 二十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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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자가 세운 삼한의 나라요 / 箕子三韓國
단군 전설 전하는 만고대지만 / 檀君萬古臺
관하에 시대는 이미 변하였고 / 關河時已變
가는 세월에 병만 깊어간다 / 歲月病相催
강물은 오히려 동쪽으로 돌고 / 積水猶東滙
뭇 산은 북쪽에서 뻗어 왔네 / 群山自北來
전쟁은 수많은 한을 남겨 / 兵戈千種恨
늙어가며 슬픔만 남았어라 / 老去獨餘哀
18
서북쪽에 뭇 산들 모였고 / 西北千山合
동남쪽에 두 하천 서렸네 / 東南二水蟠
맑은 구름은 바다로 떠가서 사라지고 / 晴雲浮海盡
지는 해는 강 건너 차갑구나 / 落日度江寒
사부로 부른들 부를 수 있을까 / 詞賦招何得
대궐문 바라볼 수도 없네 / 脩門望亦難
화려한 술잔 비어 가엾으니 / 自憐金錯罄
공연히 빈 술병만 마주했네 / 空對玉壺乾
겨울날〔冬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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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닭 시끄럽게 울어 오경이 끝나니 / 隣鷄亂叫五更終
문틈으로 희미하게 새벽빛 들어오네 / 隙戶微明曙色通
백발이 갓을 찔러 백설처럼 얽혔고 / 華髮衝冠縈雪白
쇠한 얼굴은 술기운에 붉어지네 / 衰顏帶酒上潮紅
종일토록 북방 기운이 하늘에 이어져 어둡고 / 三時朔氣連天暗
만 리 변경 관새 끝까지 닿았네 / 萬里邊庭接塞窮
산골짜기에서 적막하게 문 걸어 닫은 채 / 寂寂閉門山壑裏
꺼진 화로 곁에 앉아 허공에 글자 끼적인다 / 土壚灰冷坐書空
종일토록 …… 어둡고 : 하루 종일 겨울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말이다. 삼시(三時)는 봄, 여름, 가을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아침, 점심, 저녁을 의미한다.
꺼진 …… 끼적인다 : 진(晉)나라의 은호(殷浩)가 제명(除名)되어 평민으로 전락한 뒤에, 하루 종일 공중에다 뭔가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몰래 엿보니, 바로 돌돌괴사(咄咄怪事)라는 네 글자였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黜免》 이 고사를 원용하여 유배지의 적막한 생활을 읊은 것이다.
섣달 그믐밤에〔除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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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변방에서 자꾸 늙어가는 몸 / 支離塞外老相催
하루만 지나면 또 새해로세 / 又見新年隔日回
자면서도 남은 밤 가는 게 걱정이고 / 睡裏正愁殘夜過
깨어서는 새벽 오는 게 두렵구나 / 醒時却恐五更來
산천 만 리에 온통 얼음과 서리 덮였지만 / 關河萬里氷霜盡
천지에 봄날 찾아와 비와 이슬에 열리겠지 / 天地三春雨露開
즐거운 흥취 살아갈수록 줄어드니 / 懽趣正隨生事減
어찌 신년 축하주를 자주 접하랴 / 豈宜頻接頌椒杯
앉아서 시간 따져보니 덧없이 흘러 / 坐算更籌忽忽過
잡아도 멈추지 않으니 어이할까 / 相留不住奈將何
고향 생각 종소리 따라 벌써 끊어지고 / 鄕心已逐鍾聲斷
나그네 눈물 물시계에 더해져 수위 높아지네 / 客淚還添漏水多
늙은이라 세월 자꾸 흐르는 게 두렵고 / 老畏流年頻荏苒
가난하여 덧없는 세상 불우함에 상심하네 / 貧傷浮世轉蹉跎
살아가며 내게 가장 필요한 일 있으니 / 人生最有關身事
술동이 앞에서 취해 노래함을 저버리지 말아야지 / 莫負尊前倚醉歌
즐거운 …… 접하랴 : 늙어가는 처지라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다는 말이다. 송초배(頌椒杯)는 신년을 축하하는 술을 의미한다. 옛날에 신년(新年) 초하루가 되면, 초주(椒酒)를 가장(家長)에게 올려 헌수(獻壽)하던 풍속이 있었는데, 진(晉)나라 유진(劉臻)의 처(妻) 진씨(陳氏)가 글을 잘하여, 일찍이 신년 초하룻날 〈초화송(椒花頌)〉을 지었다고 한다.
동주집 시집 제4권 / 시(詩)○철성록4(鐵城錄四)
잠에서 깨다〔睡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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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사립문 적막하고 저물녘 바람 맑아 / 林扉寂歷晩風淸
안석에 기대 있다가 잠깐 잠들었네 / 隱几無營小睡成
물 줄자 교룡이 이 가을에 잠복하고 / 水落蛟龍秋偃蹇
산 깊어 승냥이와 범이 한밤에 날뛰네 / 山深豺虎夜縱橫
동호 부락에는 여전히 화살 전해지고 / 東胡部落猶傳箭
북해 국경에는 군사대치 풀리지 않았네 / 北海封疆未解兵
돌아갈 꿈 묘연한 변방의 길 / 歸夢杳然關塞道
두 강에 찬 비 내리는 서쪽 성에 있노라 / 二江寒雨在西城
북해의 일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동호(東胡) …… 전해지고 : 국경이 안정적이지 못해서 급보가 오간다는 말이다. 동호는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 흉노의 서쪽에
살고 있었다. 전전(傳箭)은 옛날에 전쟁을 할 때 화살을 쏘아서 호령(號令)을 전달했던 것을 말한다.
신 서방이 찾아와 만나니 기뻤다〔喜申郞來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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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성에서 서울까지 / 鐵城去京師
길이 천백 리나 떨어졌지 / 道阻千百里
일찍이 유배 가는 사람 보면서 / 嘗觀謫戍行
서쪽 바라만 봐도 이가 시렸는데 / 西望已酸齒
내가 쫓겨 올 적에는 / 自余放逐來
먼 길이 가까운 길 같았네 / 涉遠如涉邇
때로는 돌아가는 꿈 꾸지만 / 時雖夜夢歸
가지 못하고 중로에 그쳤지 / 未及中路止
자네가 지금 나를 생각해 찾아오니 / 君今念我至
말은 병들고 마부도 일어나지 못하네 / 馬病僕不起
만남을 어찌 바라지 않았으랴만 / 相見豈非願
거리 멀어 힘들게 하였으니 부끄럽다 / 地遐愧跋履
관산을 이미 넘기 어려운데 / 關山旣難越
몇 곳에서 바람과 물 맞섰을까 / 幾處逆風水
게다가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때라 / 況兼秋冬交
찬 서리가 옷을 파고들었겠지 / 天霜逼衣被
몸 돌보지 않고 만남을 중히 여겼으니 / 輕身重會面
옛사람 중에도 누가 이런 의리 있었나 / 此義古誰似
동주집 시집 제5권 / 시(詩)○철성록5(鐵城錄五)
이창언에게 주다〔贈李昌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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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살아가며 / 人生天地內
만남과 헤어짐 우연 아니지 / 合散非偶然
관서 지역은 도성과 떨어져 / 西州距京輦(서주거경연)
길이 아득히 천 리나 되는데 / 道路渺且千(도로묘차천)
아아 나와 이군은 / 嗟我與李君
무슨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나 / 會面何由緣
갑자기 세상 법망에 걸려 / 忽爾遭世網
나부끼듯 먼 곳으로 쫓겨왔네 / 飄颻遠徂遷
여러 식구들 다 죽었으니 / 百口盡零落
이 한 목숨 기꺼이 버릴 수 있네 / 一命甘棄捐
어찌 정다운 벗과 친척 없으랴만 / 豈無故親懿
산천에 막혀 멀리 떨어졌지 / 契闊限山川
그대 만나 나그네 신세 달래 주니 / 逢君慰旅泊
병 많아도 오랜 병석에서 벗어났다네 / 多病豁沈綿
농촌 이야기 주고받고 / 綢繆農里言
시서도 토론하였지 / 討論詩書篇
어울려 깊은 시름 풀다 보니 / 提携破幽悁
어느덧 오 년 세월 지났어라 / 荏苒經五年
초면이던 사람이 구면 되었으니 / 新知成舊識
외진 변방 생활 다시 한하지 않노라 / 不復恨窮邊
긴 바람이 외로운 기러기에 불어 / 長風吹孤雁
쓸쓸하게 구름 너머로 날아가네 / 慘惔凌雲煙
해후한 강과 바다의 새들 / 邂逅江海禽
그림자 돌아보며 서로 가련해하네 / 顧影還相憐
산하가 아득히 우거지니 / 關河莽紆鬱
떠도는 나그네 어찌 돌아갈까 / 游子何當旋
가을하늘에 대화성 사라지고 / 秋旻大火沒
맑은 이슬이 날로 흥건히 내리네 / 淸露日漣漣
늙고 게을러 낮에도 누워 있기 일쑤인데 / 衰慵晝多臥
어진 그대 덕에 일어났네 / 起余賴吾賢
거친 밥이 참으로 보잘것없지만 / 麤糲誠至薄
길이 함께 먹고 자길 바라노라 / 永願同飽眠
대화성 사라지고 :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大火)는 28수(宿) 중의 하나인 심성(心星)으로, 음력 5월을 상징하는데, 음력 7월이 되면 심성이 서쪽으로 내려간다. 《시경》 〈칠월(七月)〉에 “7월에 심성이 서쪽으로 내려가거든, 9월에 옷을 만들어 주느니라.〔七月流火, 九月授衣.〕”라고 하였다.[
어진 …… 일어났네 : 이창언이 글을 배우러 오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인데, 일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누워있는 상태에서 일어나 앉는 행위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각심을 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공자가 《시경》을 가지고 자하(子夏)와 문답하면서 자하를 칭찬하여 “나를 일깨운 자는 상이로다.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하구나.〔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라고 하였다. 《論語 八佾》
밤에〔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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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나그네 많은 걱정에 괴로운데 / 久客苦多慮
어이해 밤마다 떠오르나 / 如何當夜生
서리 앉은 처마에 지는 달빛 희고 / 霜簷殘月白
눈 덮인 집에 새벽 등불 밝구나 / 雪屋曙燈淸
변방 기러기 더 멀리 날아가고 / 塞雁遠逾去
마을 닭은 추위 속에도 우는구나 / 村鷄寒亦鳴
서울까지 천 리 길 / 長安一千里
잠 못 든 채 돌아가는 길만 그리고 있노라 / 不寐數歸程
장백산가. 강계에 사는 김하림에게 주다〔長白山歌贈江界金夏琳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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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한 장백산 / 長白山屹起
천지 동쪽에 서려 / 盤踞天地東
힘찬 기세 곧장 뻗어 푸른 하늘에 닿았네 / 大勢直上磨靑空
북쪽으로 바다에 막혀 달리다 돌아오는 듯 / 北阻溟浸走却回
원기 쇠하지 않아 / 元氣未洩
울창하고 뭉클하네 / 岪鬱而沖融
서쪽 줄기 물과 함께 횡으로 달려 / 西支橫騖竝水行
마냥 일렁이는 발해까지 달려가네 / 曼行遠赴渤澥之渢渢
목마른 용 현이의 궁에서 물 마시고 / 龍父渴飮玄夷宮
꿈틀꿈틀 백 리를 달려서 그치지 않다가 / 夭矯奔頓百里不止
천 리에서 한 번 서리니 / 千里一屈蟠
솟아나 몽라와 개마가 되고 / 發爲蒙羅蓋馬
특출하게 드높은 적유령 되네 / 別爲狄踰之穹窿
네 성을 형성하여 / 開爲四城
큰 변방 통제하고 / 控扼大藩
커다란 도회지 만들었네 / 作爲都會雄
진기한 새와 동물이 / 珍禽奇物
그 정기 독차지 못해 / 不得擅其精
괴걸한 사람들 / 有魁夫傑士
간혹 그 사이에서 나오니 / 間出乎其中
타고난 자질이 어찌 무디고 둔하랴만 / 受材豈皆椎且駑
안타깝다 그 속에 묻힌 채 생 마치도록 / 惜也沈抑汩沒甘長終
사철 짐승 쫓으며 활 소리 울리니 / 四時逐獸鳴桑弓
추로가 멀어 통할 길 없을 뿐 / 鄒魯逖矣無由通
당초 타고난 자품 다른 건 아니라네 / 匪伊厥初殊嗇豐
네가 지금 머리 묶고 책 끼고 와서 배우니 / 汝今結髮擔書事游學
밭갈이 짝 잃고 사냥꾼 무리 잃어 / 耕亡其耦獵失曹
변방 사람들 손가락질 하며 어리석다 헐뜯겠지 / 塞俗指笑訕愚蒙
어머니는 조석으로 문에 기대 바라보지만 / 亦知慈母朝暮倚門望
효자는 입신하여 큰 일 기약하네 / 孝子立身期業崇
풀이 끊임없이 이어져 먼 길까지 나 있으니 / 草生綿綿在遠道
위로 봄 햇살의 은공에 보답하려 하네 / 欲以上報春暉功
보지 못했는가 장백산의 영약을 / 曷不見長白山中產靈藥
사람들이 뭇 풀처럼 천시하지만 / 其人賤視凡卉同
캐서 먼 곳으로 가져가면 / 斸來携持走絶國
보화처럼 값져 화산 숭산보다 높다네 / 價重璧金齊華嵩
세상에 진귀한 갖가지 물건이 / 貝珠孔翠銀錫銅
산지 떠나 가게에 들어가 백공의 손을 거치지 / 離土入肆充百工
좋은 보배는 본고장 떠나야 명성이 높아지고 / 至寶越鄕聲乃隆
옥은 쪼고 다듬어야 무지개처럼 빛난다네 / 玉經琢雕光奪虹
저 아름다운 사람아 / 彼美者子
그대는 갇히지 마라 / 勿守藩與籠
아 저 아름다운 사람아 / 嗟哉彼美者子
그대는 갇히지 마라 / 勿守藩與籠
현이(玄夷) : 아홉 오랑캐 종족 중 하나이다. 나머지는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풍이(風夷), 양이(陽夷)이다.
몽라(蒙羅) : 몽라골령(蒙羅骨嶺)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몽라골령은 지금의 함경남도 초황령(草黃嶺)이다.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본국 산맥은 몽라골령에서 시작하여, 장령산(長嶺山)이 되고 두리산(頭里山)이 되며, 두백산(頭白山)이 되고 개마산이 되며, 그 아래가 동옥저이다.”라고 하였다.
추로(鄒魯)가 …… 아니라네 : 백두산장백산근처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성인의 글을 배우지 못한 것일 뿐이지, 타고난 자품이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못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추로는 맹자(孟子)의 고향과 공자(孔子)의 고국을 아울러 이른 말이다.
보화처럼 …… 높다네 : 장백산에서 나는 약초의 값이 비싸다는 말이다. 화숭(華嵩)은 화산과 숭산(嵩山)의 병칭으로, 중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華山높이 2,437m의 험준한 바위산으로 조양봉(동봉, 2,090m), 낙안봉(남봉, 2160m), 연화봉(서봉, 2,080m), 운대봉(북봉, 1,614m), 옥녀봉의 다섯 개의 주봉 중 가장 높은 것은 남봉[南峰]으로 높이는 2154.9m이다. 그 외에도 약 36개의 작은 봉우리가 있다. 嵩山1,512m
세상에 …… 물건이 : 패(貝)는 조개, 주(珠)는 옥구슬, 공(孔)은 공작(孔雀), 취(翠)는 물총새, 은(銀)은 은, 석(錫)은 주석, 동(銅)은 구리로, 모두 진귀한 물건을 나열한 것이다.
동주집 시집 제7권 / 시(詩)○철성록7(鐵城錄七)
메뚜기〔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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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만물 양육하니 / 大鈞播亭毒
갖가지 사물이 다 있다네 / 萬族靡不有
많은 벌레 가운데 메뚜기가 / 蝗於百蟲內
목숨 받은 것도 우연은 아니지 / 受命亦非偶
나쁜 기운 덕에 살아가니 / 生成資沴氣
이놈의 재앙 오래되었네 / 茲患從來久
반드시 국정이 잘못될 때 기다려 / 必俟邦政失
재해를 오히려 더 부추기네 / 爲害猶指嗾
태평한 세상에도 혹 면치 못하니 / 世泰或未免
아마도 양구를 만나서이리 / 豈亦遘陽九
아득한 삼황오제 이전에도 / 邈矣皇王前
이 무리들이 있었던가 / 厥類已存否
기린과 봉황이 후세에 없었으니 / 麟鳳後代無
못된 종자들이 가라지처럼 많아졌지 / 惡種滋稂莠
괴이하다 너희들이 하룻밤 사이에 / 怪汝一夜間
구름처럼 모여 남쪽 밭 다 덮으니 / 雲凝蓋南畝
마치 큰 물결 넘실대듯 / 瀰漫若洪潮
밭두둑 이쪽저쪽을 다 덮어버려 / 畔岸迷左右
푸르던 들판이 쓸어낸 듯 깨끗하니 / 濯濯野田靑
수많은 말에 짓밟힌 듯하여라 / 酷經萬馬蹂
가만히 마을 주민들 이야기 들어보니 / 靜聽閭里談
백 세 노인도 탄식하네 / 嗟傷百年叟
미물이라도 입과 배가 있어 / 物微具口腹
곡식 갉아먹으니 미움 사는구나 / 噍咀足致咎
다만 의아하게도 어진 조화옹이 / 但訝造化仁
이런 놈 만들다니 참으로 어긋났네 / 鍾是眞相負
봄누에가 뽕잎 먹으면 / 春蠶食桑葉
길쌈하는 여인 분주하고 / 紅女爲奔走
농부가 어린 새싹 아끼니 / 農夫惜稚稼
태우고 묻는 것은 성인도 취한 방법이지 / 焚瘞聖所取
사람의 마음은 사랑과 미움이 다르지만 / 人情分愛惡
하늘의 뜻이야 후박이 있을손가 / 天意何薄厚
재앙은 그 종류 많기도 하니 / 災凶浩多門
불쌍한 건 가난한 백성들이지 / 可哀實窮蔀
측은해서 오장이 타들어가니 / 惻愴肝肺熱
하늘 우러르며 늙은이 괴로워하노라 / 瞻卬勞白首
하늘이 만물 양육(養育)하니 : 대균(大鈞)은 하늘을 가리킨다. 균(鈞)은 옹기가 만들어지는 녹로(轆轤)로서, 녹로에서 온갖 그릇이 나오듯이 하늘이 만물을 생성한다고 보아 하늘을 대균이라 하였다. 정독(亭毒)은 양육한다는 말이다. 《노자(老子)》 제51장에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자라게 하고 길러 주며, 양육하고 키워 준다.〔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라고 하였다.[
태평한 …… 만나서이리 : 시운(時運)이 좋지 않은 때를 만나면, 태평한 시절에도 메뚜기의 피해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큰 재액(災厄)을 말할 때 쓰는 용어이다. 《漢書 律歷志 上》
임금의 은혜를 입어 아산으로 이배되다〔蒙恩移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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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물결이 바퀴 자국의 고기 일으키니 / 恩波一起轍中鱗
천 리 먼 곳 아산으로 새로이 정해졌네 / 千里牙州入望新
누르고 흰 빛의 신선한 생선과 파릇한 채소로 / 黃白鮮魚紅綠菜
몇 년이나 이 몸을 더 기를지 모르겠네 / 不知留養幾年身
임금의 …… 이배(移配)되다 : 《승정원일기》 인조 21년 10월 16일 기사에 영변에 유배 중인 이민구를 아산으로 이배한다는
의금부(義禁府)의 계(啓)가 있다.
연주를 바라보며〔望延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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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에서 아산 바라볼 때는 / 淸川江上望牙山
새도 돌아오지 않는 동남쪽 끝이었는데 / 極目東南鳥不還
오늘 서호에서 돌아보니 / 今日西湖回首處
연주가 어느덧 흰 구름 속에 있구나 / 延州已在白雲間
연주(延州) : 평안북도 영변군의 옛 이름이다.
갑신년(1644, 인조22) 1월 1일에 쓰다〔甲申元日試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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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한 잎이 벌써 명협에 돋아나니 / 新年一葉已抽蓂
나그네 심사 그저 멍하여 먼 물가 바라본다 / 羈思茫然望遠汀
바닷가 얼음과 서리가 봄에도 서걱거리고 / 海岱氷霜春淅淅
강호의 물결은 낮에도 캄캄하네 / 江湖波浪晝冥冥
구름 비낀 북쪽 하늘 시름 속에 푸르고 / 雲橫極北愁中碧
나무 둘러진 종남산 꿈속에 푸르구나 / 樹繞終南夢裏靑
누가 생각해 주나 썩은 선비가 난세 만나 / 誰念腐儒遭世亂
지금도 백발로 떠돌이 신세 탄식하는 것을 / 至今垂白歎漂零
새해 …… 돋아나니 : 갑신년의 정월 초하루가 되었다는 말이다. 명(蓂)은 명협(蓂莢)이라는 풀로, 요(堯) 임금의 뜰에 났는데, 매월 초하루부터는 매일 한 잎씩 났다가, 16일부터는 매일 한 잎씩 떨어졌으므로, 이것을 보고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주집 시집 제8권 / 시(詩)○아성록1(牙城錄一)
공진의 곡성에 오르다〔登貢津曲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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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래 긴 강 호수 백 리나 뻗어 / 城下長湖百里通
서쪽 하늘 바라보니 드넓게 공중에 떠 있네 / 天西一望浩浮空
잔물결이 교인의 장터 깨끗이 씻고 / 纖漪淨拭鮫人市
아름다운 경치가 맑게 호자궁까지 이어졌네 / 秀色晴連瓠子宮
포구에 들어오는 생선과 소금에 세금 많이 붙는데 / 逗浦魚鹽征稅重
강을 오르는 배에는 나르는 짐이 많구나 / 上江舟楫轉輸雄
보게나 둥실 떠 있는 갈매기의 가벼운 날개 / 請看泛泛輕鷗羽
떠도는 백발 늙은이와 꼭 닮았구나 / 正似飄飄白髮翁
덧없는 인생 머문 곳에 우거하니 / 浮生着處寓微躬
서쪽과 남쪽 떠돌며 천지 가운데 살아가네 / 漂泊西南天地中
칠 년 동안 부운포의 눈 먹다가 / 七載去餐雲浦雪
봄날 공진의 바람에 의지했네 / 一春來倚貢津風
섬에 일렁이는 파도는 천 겹으로 푸르고 / 波搖島嶼千重碧
누대에 내리쬐는 햇살은 온통 붉구나 / 日射樓臺萬縷紅
죽어 가는 이 몸 아직도 늙은 두 눈 남아 / 垂死尙餘雙老眼
늘 좋은 경치 바라보며 떠도는 신세 위로하네 / 每憑形勝慰萍蓬
공진(貢津)의 곡성(曲城)에 오르다 : 공진은 1523년(중종18)에 군향(軍餉)을 쌓아두기 위해 아산(牙山)에 설치한 창고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관방(關防)〉의 충청도 기록에 돌을 쌓아 만든 공진창성(貢津倉城)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곡성은 이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잔물결이 …… 씻고 : 물가에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읊은 것이다. 교인(鮫人)은 전설 속의 인어(人魚)를 말한다. 남해 물속에 사는 교인이 비단을 잘 짰는데, 물 밖으로 나와 인가에 머물면서 매일 비단을 짜다가, 작별할 무렵에 눈물을 흘려서 구슬을 만들어 주인에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太平御覽 卷803》
아름다운 …… 이어졌네 : 날씨가 맑아서 시계(視界)가 멀리까지 트인 것을 읊은 것이다. 호자궁(瓠子宮)은 한 무제(漢武帝) 때 호자(瓠子)에 세운 궁이다. 황하수가 범람하여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복양현(濮陽縣)에 있는 호자의 둑이 무너지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를 시켜 터진 곳을 메우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에 무제가 사방에 가 봉선(封禪)한 뒤에, 친히 이곳으로 와 급인(汲仁)과 곽창(郭昌)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징발하여 메우게 하고 선방궁(宣房宮)을 세웠는데, 이곳이 바로 호자궁이다. 《漢書 卷6 武帝紀》
칠 …… 의지했네 : 영변에서 7년 동안 유배 생활하다가, 아산으로 옮겨 와서 봄을 맞았다는 말이다. 운포(雲浦)는 영변의 청천강에 있는 포구로 보인다. 《동주집(東州集)》 시집 권2 〈삼첩서회(三疊書懷)〉에 “땅 넓은 부운포〔地闊浮雲浦〕”라는 구가 있고, 〈영변(寧邊)〉에 “강물이 부운포에 넘실대고〔江漲浮雲浦〕”라고 하였다.
백석 어촌에서〔白石漁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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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호수는 서해로 이어지고 / 平湖控西海
저 멀리 모래톱이 길게 뻗어 있네 / 地迥洲渚長
아득히 펼쳐진 소금 땅 / 瀰漫斥鹵場
예부터 농사에 방해되었지 / 自古耕鑿妨
산이 포구에 서려 있으니 / 有山蟠浦口
마치 거북이 꼬리 감춘 듯 숨어 있네 / 隱若龜尾藏
어부의 집들이 벌집처럼 / 漁屋類蜂戶
이어진 등성이에 빽빽하게 늘어섰네 / 櫛櫛枕連岡
길 따라 향배 나뉘어 / 巷陌分向背
남향집도 있고 북향집도 있구나 / 門戶異陰陽
낮과 밤에 두 번 밀물 들어와 / 晝夜再上潮
배들이 바람 따라 드나드니 / 舴艋隨風揚
상아 돛대와 띠풀 뜸이 / 牙檣竝茅棟
울타리 옆에 밧줄로 매여 있네 / 紼纚繫籬傍
아침과 저녁으로 시내에 안개 자욱하고 / 朝晡煙在川
술 익어 뜸 아래 향기롭다 / 酒熟篷底香
생계를 파도에 맡겼으니 / 生涯寄波濤
바다가 곧 창고라네 / 巨壑爲倉箱
사내들 반쯤 빈둥거려 / 丈夫半浮居
아낙들 행상에 나서니 / 婦女實行商
비린 생선을 먼 저자에 내다 파느라 / 魚腥走遠市
머리에 이고 날마다 바삐 돌아다니지 / 頂戴日奔忙
벌거벗은 다섯 살 꼬마는 / 赤身五歲兒
집안 살림 어려운 줄 모르지만 / 不知室處涼
땡볕 아래 새우와 게 잡느라 / 觸熱拾蝦蟹
갯벌을 큰 길처럼 누비네 / 泥水猶康莊
배 조종할 날 다시 언제일까 / 操舟復幾時
크든 작든 모두 가업 계승이네 / 大小俱肯堂
숲에서는 짐승 발자국 뒤쫓고 / 山林跡獸蹄
늘어선 가게에서는 행장 보따리 삼가네 / 列肆謹裝囊
백성들 저마다 수고롭게 일하며 / 四民各劬勞
온갖 재화가 농상과 유통되네 / 萬貨通農桑
사물의 이치 거의 비슷하니 / 物理庶可齊
상도를 지키는 게 중요하지 / 貴在事天常
노쇠한 이 몸 괴롭게 떠도나니 / 吾衰苦漂泊
못난 분수에 거친 음식도 달기만 한데 / 拙分甘秕糠
소반 마주하니 잘 차린 음식에 부끄럽고 / 臨盤愧飣餖
밥만 축내니 마음 아프다 / 素餐中黯傷
아아 장차 어디로 갈까 / 嗟嗟將奚適
끝내 바닷가에서 늙으리라 / 終老蛟蜃鄕
백석(白石) : 충남 아산시 영인면 백석포리 일대로 추정된다.
가업 계승이네 : 긍당(肯堂)은 긍구긍당(肯構肯堂)의 준말로,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한다는 뜻이다. 《서경》 〈대고(大誥)〉에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동주집 시집 제8권 / 시(詩)○아성록1(牙城錄一)
운산 유생 김지한에게 부치다. 인하여 같은 고을에 사는 선비 이소번과 승려 친구 모하가 지난날 내가 철성에 있을 때 자주 왕래하고 외와 채소를 보내 주었던 일이 생각나기에 작품 안에서 언급하였다〔寄贈雲山儒金之僩因懷同邑士子李昭蕃禪友暮霞向鐵城時數過從兼餽瓜蔬篇內有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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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포구에 봄 깊어 가고 날 저무는데 / 南浦春深白日晩
아산에서 서쪽 바라보니 운산 멀구나 / 牙山西望雲山遠
운산의 선비들 재능이 풍부했는데 / 雲山邑子富材力
헤어진 뒤로 자고 먹는 소식 끊겼구나 / 別後音塵阻眠飯
생각해 보니 그대가 글자 묻고 비로소 깨우쳐 / 憶爾問字始擊蒙
내게 와서 눈보라 속에 글 읽었지 / 從我讀書風雪中
영변 사는 김계선에게 부치다〔寄寧邊金繼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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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 흘러가는 서북쪽은 곧 영변인데 / 浮雲西北是延州
철옹산 하늘 찔러 검푸른 빛 시름겹네 / 鐵甕攙天翠黛愁
수루의 뿔피리 소리에 상심한 지 칠 년인데 / 戍角傷心曾七載
변방 기러기 머리 돌리니 또 가을일세 / 塞鴻回首又三秋
아직도 꿈에서는 높은 산에 오르려고 / 猶憑夢想乘危障
애써 이 몸을 작은 배에 싣네 / 強委形骸寄小舟
원헌은 요즘 건강한가 / 原憲近來知健否
무산의 안개비 속에 초가 정자 그윽하리 / 茂山煙雨草亭幽
원문 출처: 김왕석 [수렵야화]
동물들의 왕국 무산(茂山)
영국왕실박물관의 연구원인 리치박사와 일본인 와다교수 일행의 학술조사단은 1935년 10월초 만주에서의 동물연구를 끝냈다. 시작한 지 꼭 1년만에 연구를 끝내고 다음 연구지역인 조선으로 건너갔다. 와다교수는 직접 조선총독부와 교섭했는데 총독부는 처음에는 함경북도 무산(茂山)의 삼림에는 후데이센진(不逞鮮人·불온조선인) 등이 드나드는 위험지대라는 이유로 허가를 하지 않으려 했으나 와다교수의 강한 요청에 의해 결국은 허가를 해주었다.
소위 후데이센진은 만주의 비적 출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들이었으며 강도나 살인행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이 순수한 학술단체인 동물연구대원들에게 위해를 가할리가 없었다.
연구대원들은 두만강을 건너서자 이젠 비적들에게 습격당할 위험이 없어졌다고 한바탕 웃었다.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큰 강이었는데 북쪽은 만주, 남쪽은 조선땅이었다. 리치박사는 우선 그 강에서부터 만주와 조선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만주의 강은 온통 다갈색의 흙탕물이었으나 두만강은 무섭도록 맑은 물이었다. 깊이가 10 m나 될 것 같았는데도 바닥의 자갈이 그대로 보였다.
"뷰티풀, 원더풀 !" 리치박사가 감탄사를 연발했으나 맑은 건 강물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먼지가 뿌연 하늘도 수정처럼 맑아지고 있었다. 먼지에 가려 붉게 변색되던 만주의 태양도 본래의 모습대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었다. 기후도 달랐다. 세월이 거꾸로 흐르듯 그곳의 기후는 따뜻했다. 만주에서는 이미 여름이 가고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으나 그곳에서는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있는 가을이었다.
만주에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가을이니 봄이니 하는 계절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건 한달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그와 엇비슷한 계절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선에는 여름이나 겨울만큼 긴 봄과 가을이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아름다운 계절이 왔다. 조선인들은 자기들의 땅을 금수강산이라고 부른다는데 리치박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산일대의 산들은 아름답게 단풍이 들고 있었다. 학술상으로 봐서는 그곳은 동만주 일대와 같은 타이가(침엽수 삼림지대)지대였다
시베리아의 툰드라(동토지대 ; 冬土地帶)지대남쪽에 있는 광대한 타이가 남쪽끝이 바로 무산이었다.
사실 무산과 서쪽 백두산 사이, 두만강 남쪽 일대에는 수해(樹海)라고 불리는 광대한 침엽수림이 있었으나 거기엔 침엽수가 아닌 활엽수들도 섞여 있었다. 수해 안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섞여있는 혼합림들도 있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그곳의 산과 산림들은 더없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되고 있었다.
캡틴 강(姜)은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일본에게 조국을 빼앗길 무렵에 조국을 탈출했던 그는 이제 20여년만에 다시 조국땅을 밟게 된 것이었다.
캡틴 강은 강원도 출신 포수였다. 강원도에서 대대로 사냥을 해온 집안이었으며 그도 총 솜씨가 뛰어나 20세때 벌써 왕실 어용포수들의 보조포수가 되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 보조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어용포수였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인들이 갖고 있던 총을 내놓으라고 포고를 하자 총을 갖고 동남아로 탈출했다. 그때 영국 왕실박물관에서 그의 탈출을 도와줬기 때문에 그는 그후 줄곧 영국왕실박물관에서 일을 해왔다.
리치박사는 그걸 알고 몇 번이나 그가 고향에 다녀올 기회를 만들어 주려했으나 성사하지 못하고 있던 참에 조선의 무산지역에서 동물연구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리치박사는 박물관장의 재가가 내려졌을 때도 그 사실을 캡틴 강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가 와다교수의 준비가 완전히 끝나고 출발준비를 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사실을 캡틴 강에게 알려주었다. 캡틴 강이 조국 땅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본 다른 대원들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들을 마중하러 나온 윤원술(尹元述) 포수도 정중하게 캡틴 강을 위로하면서 인사를 했다.
윤포수는 직업포수가 아니었다. 그는 유복한 지주였으며 사냥은 취미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산 일대의 산림과 그곳에 서식하는 동물들을 윤포수보다 더 잘 아는 포수는 없었다. 그는 무산의 산과 삼림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산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와다교수는 간곡히 그에게 안내를 부탁했다고 한다. 리치박사도 첫눈에 그가 아주 젊잖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만족했다. 리치박사 일행은 두만강을 건너 무산 마을에 도착하면 곧바로 무산령 서쪽 기슭에 설치한 연구소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윤포수는 그 계획을 변경시켰다. 국경을 넘는 데 수속의 시간이 걸려 그 길로 연구소로 가려면 도중에 야영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았기에 야영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야수들이 위험하다는 말이었다.범이나 표범들이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겨울잠을 앞둔 불곰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설치고 있는 것이 뭣보다 위험했다. 윤포수는 그런 불곰이 설치고 있는 지역에는 포수들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몇 년 전 늦가을에 함부로 무산의 삼림 안을 돌아다니던 경성(京城)포수 두 사람이 범에게 참살 당한 후부터 포수들은 10월과 11월에는 무산의 삼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리치박사를 비롯한 다섯 명의 대원들은 그 말을 듣고 긴장했다. 아름다운 무산의 다른 일면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무산은 극동의 황금사냥터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몇 년 전에도 미국의 루즈벨트포수(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카)가 30여 명의 사냥꾼들과 같이 그곳에서 사냥을 했고 영국 런던엽우회(獵友會) 회장인 콜든경(卿) 등 세계의 명포수들이 그곳에서 사냥을 했다. 무산은 동물분포상으로 봐서 구북구(舊北區)의 남단에 속해 있었으나 구북구에 서식하는 동물들의 대부분이 몰려 있었다. 시베리아나 만주에 비해 기후가 덜 춥고 산들이 높고 광대한 삼림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산에는 위험한 맹수들도 많았으며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냥꾼들도 적지 않았다. 윤포수는 일행을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넓은 마당과 추녀가 하늘 높이 휘어진 아름다운 기와건물들이 있는 집이었다.
리치박사는그 집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는 개들을 보고 놀랐다.열 마리쯤 되어보였는데 모두가 눈처럼 흰털들이 나 있었다.
귀가 뾰족하고 꼬리가 말려올라간 점은 아이누개와 비슷했는데 그 개는 아이누개의 두배나 될 것 같았다. 큰 놈은 60 Kg이나 된다는 대형 개들이었다. 리치박사는 여러 종류의 개들을 사육하는 전문가였으나 그런 개는 처음 봤다. 일본에는 비슷한 모습의 개들이 있었으나 털 색깔과 체구가 달랐다.
"풍산개입니다. 조선사람들이 자랑으로 삼고있는 사냥개이지요."
그 개는 만능개였으며 새종류 사냥도 잘하며 주로 멧돼지 사슴 노루 등을 잡는다고 한다. 세 마리가 협력하면 웬만한 멧돼지는 포수들이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숨이 끊어져 있다는 말이었다. 리치박사는 그 말을 수긍했다. 그럴만한 개들이었다. 개들의 눈빛은 다갈색이었는데 독수리의 눈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그건 사냥욕과 투지가 강하다는 걸 뜻했다.
개들의 양어깨 사이는 보통개들보다 좁았다. 어깨가 넓으면 믿음직스럽게 보이지만 그건 적과 격투를 하는데는 방해가 되었다. 적의 가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리는 개에 비해 어깨 폭이 아주 좁았다. 개와 이리를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어깨 폭을 보는 것이었다. 풍산개는 이리처럼 어깨 폭이 좁은 개였다. 그 대신 뒷다리들이 튼튼했다. 풍산개들의 뒷다리는 다부지게 옆으로 벌어지고 있었으며 웬만한 타격을 받아도 쓰러질 것 같지 않았다. 특히 개들의 두목이라는 큰 수컷은 좁은 어깨와 넓은 엉덩이 때문에 전체의 모습이 세모꼴로 보였다.
그 개는 수백 마리의 멧돼지와 노루를 잡았으며 여덟 마리의 곰과 두 마리의 표범도 잡았다고 한다. 두목 개는 마치 훈장처럼 전신에 상처자국이 있었다.
훌륭한 사냥개였다. 리치박사는 손을 내밀면서 그 개를 불러봤다. 두목 개는 박사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천천히 다가섰다. 꼬리를 흔들면서 아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경계를 하며 으르렁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개는 침착하게 자기를 부르는 낯선 사람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두목 개는 리치박사에게 적의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듯 가볍게 꼬리를 흔들면서 인사를 했다. 리치박사는 두목 개의 몸을 만져봤다. 길고 거친 털밑에 두터운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개들의 출신지인 풍산은 산악지대였으며 높이 2천 m나 되는 고산들이 주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란 풍산개들은 늘 산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큰 체구와 두터운 근육, 그리고 떡 벌어진 하체들은 그래서 생긴 것이라는 말이었다. 리치박사는 풍산개들을 1급 맹수 사냥개로 단정했다. 그는 윤포수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돌아갈 때 두 마리의 풍산개를 얻어 가기로 했다.
조선땅에 들어선 리치박사를두 번째로 놀라게 한 동물은 꿩이었다.
윤포수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박사는 다음날 새벽 산기슭 삼림속에 설치되었다는 연구소로 출발했는데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는 들판을 보고 놀랐다. 그곳은 수확이 끝난 밭이었는데 수백 수천 마리의 꿩들이 앉아 있었다. 꿩들이 앉아있는 밭들은 페르시아의 주단처럼 찬란했다. 적색 청색 녹색 흰색 등으로 아롱진 지면들은 아침해가 떠오르자 점점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꿩들이란 정말 아름다운 새들이었다. 색채들이 뚜렷했으나 열대지방의 새들처럼 천한 원색(原色)이 아니었다. 꿩의 아름다움에는 귀부인의 품위가 있었다.
꿩들은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자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갔는데 이번에는 하늘을 오색으로 수놓고 있었다. 긴 꼬리의 깃털들이 더 없이 아름다웠다.
꿩들이 날아올라가는 하늘 상공에는 철새들이 줄을 지어 날아오고 있었다. 시베리아나 북만주에서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날아오는 새들이었다. 매년 기러기 오리 고니 등 수천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북쪽에서 날아온다는 윤포수의 말이었다. 조선땅은 동물둘에게 축복받은 땅이었다.
무산에 있는 야산 기슭에는 많은 사냥꾼들이 개들을 데리고 꿩사냥을 하고 있었다. 꿩은 비록 근시(近視)이기는 했으나 예민한 청각을 갖고 있는 새였다. 그 청각을 활용하면 사람들에게 쉽게 잡힐 위험이 없었는데도 그 새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 새는 자기의 보호색과 은신술을 너무 믿고 있었다. 사실 꿩이 숲속에 숨어 있으면 사람의 눈으로는 잘 식별되지 않았으며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발견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꿩은 사냥꾼들이 가까이 와도 날아가지 않았다. 그게 그 새의 나쁜 습성이었다. 사냥꾼들은 그런 습성을 이용했다. 사냥개를 사용한 것이었다.
꿩은 아무리 은신술의 명수라고 해도 개의 코는 속이지 못한다. 개의 코는 어김없이 숨어있는 꿩을 발견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특히 포인터와 세터들이 그런 일을 잘했다. 잘 훈련된 포인터나 세터는 재주를 부렸다. 거의 예술적인 경지에까지 도달한 재주였다. 그 개들은 가까이에 있는 꿩의 냄새를 맡으면 우선 몸짓으로 그걸 포수에게 알려준다. 이제부터 수색하겠다는 신호다.
사냥개는 그리고 서서히 접근하면서 냄새를 따라 꿩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한다. 그러면 그곳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한발을 들어올린다. 총을 쏠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다. 어리석은 꿩은 그때까지도 자기의 은신술을 믿고 있었으나 개들은 그걸 역이용했다. 사냥개는 꿩들을 너무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꿩이 여러 마리가 있을 경우에는 사냥개는 한꺼번에 다 날리지 않고 한 마리 한 마리씩 날려 올린다. 포수들이 차례로 쏠 수 있게 ….
사냥개들이 덤벼드는 시늉을 하면 꿩은 그제야 발각된 것을 알고 후다닥 날아오르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꿩은 몸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얼마간의 활주가 필요했다. 활주를 한 꿩은 강한 나래질을 하며 몸을 부상시키는데 그런 나래질 소리가 요란했다. 그래서 포수들에게 자기의 위치를 알려준다. 노련한 포수는 그때 벌써 꿩을 발견하지만 서둘지 않는다. 꿩이 무거운 몸으로 날아가려면 아직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공중으로 솟아올라간 꿩은 일단 공중에서 멈춰 날아갈 방향을 정하려고 한다. 그때가 발포의 기회였다. 포수가 그 기회를 놓졌다고 해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아름다운 꿩의 몸 색깔은 뚜렷한 과녁이 되었으므로 상당한 거리에까지 날아가도 발포를 할 수 있었다. 노련한 포수는 꿩이 날아가는 속도 등을 감안하여 꿩이 목을 빼고 날아가는 바로 앞에 총탄을 보낸다. 그러면 총탄은 꿩의 머리에 명중된다. 노련한 포수는 살점이 많은 몸통을 상하게 하지 않고 먹지 못하는 머리를 맞힌다.
총탄에 맞은 꿩은 그대로 떨어진다. 그러면 사냥개의 다음 역할이 시작된다. 사냥개는 쏜살같이 달려가 꿩을 물고 온다. 꿩이 아직 살아있으면 머리를 물어 죽인 다음 한쪽 날개쭉지와 몸을 가볍게 물고 주인 앞으로 운반한다. 사냥개는 물고 온 꿩을 살며시 놓고 주인을 쳐다본다. '내 재주가 어떻습니까.' 하고 묻는 표정이다. 주인은 그 멋진 재주에 만족하여 사냥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꿩사냥에서는 포수와 사냥개는 일체가 되어 움직인다. 서로간에 미리 약정된 절차에 따라 멋있게 꿩을 잡아 수렵의 본능을 만족시킨다. 꿩사냥은 사냥의 진수를 만끽하게 한다. 세계 각지의 포수들이 꿩사냥을 즐겼다. 특히 조선의 꿩사냥터는 세계의 사냥꾼들이 동경하는 곳이었다. 그때도 무산의 산기슭에는 경성 등에서 온 사냥꾼들뿐만 아니라 멀리 일본에서 온 사냥꾼들도 있었고 서양인도 있었다. 각종 사냥개들은 저마다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그곳은 마치 포수와 개들의 경연장과 같았다.
개들 중에는 풍산개들도 있었다. 풍산개는 날개가 달린 동물보다는 네 다리가 있는 동물을 전문적으로 잡는 사냥개였으므로 포인터나 세터처럼 아기자기한 세기(細技)는 부리지 못했으나 그래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주인을 도와주고 있었다.
풍산개는 포인터처럼 숨어있는 꿩에게 바싹 접근하여 포인트를 하는 기술은 없었으나 그래도 숨어있는 꿩들을 공중으로 날려올리고 있었고 총에 맞은 꿩을 물고 오기도 했다. 풍산개는 만능의 사냥개였다.
윤포수는 포인터나 세터는조선의 사냥터에서는 제약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털이 짧은 포인터는 추위를 타기 때문에 한겨울에는 사냥을 못했다. 세터는 털이 길기는 했으나 가시덤불이 많은 한국의 사냥터에서는 그 긴 털이 가시에 걸려 볼품없는 모양이 되고 때로는 피를 흘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사냥개들은 가끔 희생되기도 했다. 사흘 전에도 세터 한 마리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날개에 총상을 입고 달아나던 꿩을 쫓던 개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인 포수가 수색을 해보니 꿩도 개도 없었다. 숲속에 핏자국이 있었고 커다란 고양이의 그것을 닮은 발자국이 있었다. 표범의 발자국이었다.
표범은 날개에 상처를 입고 있던 꿩을 잡으려다 개가 쫓아오는 걸 보고 꿩 대신 개를 잡아간 것 같았다. 불쌍한 개는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살육자의 밥이 되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전날에는 포인터 한 마리가 봉변당해 피투성이가 되었다. 상대는 족제비였다. 몸무게가 고작 3 Kg정도밖에 안되는 족제비에게 그 열배나 되는 사냥개가 당한 것이었다. 하긴 족제비란 짐승은 겁이 없는 놈이었다. 족제비는 토끼는 물론 노루에게도 덤벼들어 잡아먹는 악바리였다.
포수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오는 포인터를 보니까 그 목에 족제비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개가 족제비를 물고 오는 것이 아니라 족제비가 개의 목줄을 물고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족제비는 포수가 달려오는 걸 보고 개를 놓아주고 도망갔지만 개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목줄을 끊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으나 그 개는 더 이상 그곳에서 사냥을 하지 않으려 했다.
만약 그게 포인터가 아니고 풍산개였다면 그 따위 족제비쯤은 앞발로 후려쳐 손쉽게 죽였을 것이었다. 풍산개는 상대가 표범일 경우에도 그리 쉽게 당하지 않았다. 풍산개 큰 놈은 표범과 거의 같은 몸무게를 갖고 있었고 힘도 그만큼 강했기 때문에 표범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풍산개가 두 마리만 있으면 표범과 대등한 싸움을 벌였고 세 마리면 도리어 표범을 사냥하려고 했다. 윤포수는 실제로 표범이 세 마리의 풍산개에게 쫓겨 나무 위로 피신해 있는 걸 총으로 잡은 일도 있었다.
풍산개는 험한 산악지대에서 자란 개였기에 야생짐승과 같은 야성과 투지를 갖고 있었다. 그 개는 야생 짐승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상대가 범이 아니면 별로 겁을 내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포인터나 세터는 날짐승 외에 네다리 짐승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표범과 같은 무서운 맹수가 있는지도 몰랐고 족제비같은 하잘것 없는 작은 짐승이 그렇게 덤벼들줄 몰랐다. 무산은 황금 사냥터였으나 꿩이나 날짐승만을 잡으려는 사냥개들에게는 위험한 사냥터이기도 했다.
윤포수는 리치박사에게 그것은 또한 동물학자들에게도 위험한 실습장소라고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원시림 속에 설치된 연구소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불곰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길이가 40 Cm가 넘는 발자국과 그 반쯤되는 발자국들이었다. 새끼를 데리고 있는 어미곰의 발자국이 이어져 있는 잡목림을 피했다. 새끼를 데리고 있는 곰은 미친 곰이며 범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늦가을의 곰이란 움직이는 것이면 뭐든 잡아먹으려고 덤벼드는 맹수였으므로 윤포수는 곰들이 들어가고 있는 잡목림을 피했다. 리치박사는 그런 윤포수의 행동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연구대원들은 동물들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동물들과 다투는 일은 하지 말아야만 했다.
와다교수가 마련한 연구소는침엽수의 원시림 한가운데에 있었다.
주위에는 나무들이 울창했고 가까운 곳에 맑은 물이 솟아나오는 옹달샘이 있었다. 그리고 2 Km쯤 북쪽에 가면 두만강의 지류도 있다고 했다. 삼림안은 조용했으나 어디서 딱다구리가 나무를 찍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무에 오르내리는 예쁜 다람쥐들의 모습도 보였다. 연구소는 전에 일본인 산림기사들이 원시림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지어놓은 통나무 사무실을 확장 개조한 건물이었다. 비록 통나무로 지었고 마른 풀로 지붕을 덮은 집이었으나 30평 쯤 되는 건물이었고 별도로 대원들이 잠잘 건물도 있었다.
건물에는 튼튼한 문과 유리가 끼어진 창틀도 있었다. 건물 안에는 석유 드럼통으로 만든 난로와 책상 의자 침대 등도 마련되어 있어 임시연구소로 쓰기에는 큰 불편이 없을 것 같았다. 개조하여 쓰여진 노송나무에서는 산뜻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었고 난로 안에서 타는 송진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만주에서 거처했던 흙집보다는 한결 깨끗하고 편리한 사무실이었다.
윤포수는 자기집에서 부리던 젊은 머슴 세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지게에 산더미같은 짐을 지고도 묵묵히 걸어왔다. 만주의 일꾼들은 시키는 일들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게으른 사람들이었으나 그곳 일꾼들은 맡은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캡틴 강이 그랬고 윤포수와 그의 머슴들도 그랬다. 윤포수는 열흘마다 머슴들을 교체하기로 했으며 새로 오는 머슴들은 그때마다 연구소에 물자를 공급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소의 대원들은 식량이나 생활필수품의 부족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리치박사는 그날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범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엄한 소리였다. 리치박사는 고양이과 짐승들 중에서 큰 소리로 우는 건 사자뿐인줄 알았는데 범은 사자보다도 더 힘찬 소리로 울고 있었다. 큰 덩치에서 나오는 무거운 소리였는데 아주 먼곳인 것 같기도 하고 아주 가까운 곳인 것 같기도 했다. 윤포수는 그 범이 있는 곳은 10리(4 Km)나 떨어진 곳이라고 말했다.
윤포수는 범이 자기의 영토권을 확인시키느라 운다고 말했다. 동족인 범이나 곰 표범 이리들에게 자기의 영토 내에서 빨리 물러나라는 경고였다. 물론 경고의 대상 중에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윤포수는 몇 년 전 그 건물에서 삼림실태조사를 하고 있던 일본인 기사들도 그 범의 울음소리에 신경쇠약이 되어 제대로 일을 끝내지 못하고 그곳에서 떠났다고 말했다. 사실 범의 울음소리에는 뭔가 사람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이 있었다.
리치박사는 세계 각지에서 뭇 맹수들을 연구한 학자였으나 그도 그날 밤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 범과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범은 리치박사의 흥미를 끌었다. 와다교수도 범에게 흥미를 갖고 있었다.
범은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들 중에서가장 덩치가 크고 가장 강한 동물이었다.
특히 시베리아 만주 조선의 북부에 서식하는 범들은 엄청나게 덩치가 컸다.
많은 사람들이 범과 사자가 싸움을 하면 어느쪽이 이기겠느냐는 질문을 하는데 리치박사는 만주에서 범을 연구한 후부터는 주저없이 말했다. 그야 당연히 범이 이긴다는 답변이었다. 사실 몸무게 400 Kg이나 되는 시베리아 범과 고작 200 Kg의 아프리카 사자가 싸움을 한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하긴 사자가 감히 자기보다 두 배나 큰 범에게 덤벼들 것인지가 의문이었지만.
리치박사는 전날밤 연구대원들의 잠을 설치게 한 범을 조사하기로 하고 조선범들의 분포와 특징을 윤포수에게 물어봤다.
윤포수는 조선범들은 거의 멸종상태에 있으며 그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역은 백두산과 무산 사이의 삼림뿐이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조선범들을 마구 사냥하고 쫓아버렸다는 것이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범들은 한성(漢城) 주위의 산에까지 돌아다녔으나 일본인들이 그들을 거의 멸종시켰다.
일본인들은 범을 해수(害獸)로 규정하여 군인과 경찰관까지 동원하여 몰이사냥을 했다. 그때문에 매년 몇십 마리의 범들이 죽었고 나머지 범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북쪽으로 도망갔다. 북쪽으로 이동한 조선범들은 백두산 무산 등의 산림에서 살거나 아예 만주로 넘어가버렸다. 윤포수는 일본인들의 그런 조치는 잘못된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범이 해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범이 산간마을을 덮쳐 인축에 해를 끼친 사실은 인정했으나 그 피해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범에 의한 피해는 대개의 경우 과장되어 퍼져나갔다.
사람이나 가축을 상습적으로 덮치는 일부 식인범을 예외로 한다면 범은 함부로 사람에게 덤벼들지 않는 동물이었다. 사람들로부터 먼저 공격을 받았거나 새끼를 데리고 있는 어미범이 신경과민이 되었거나 몹시 배고픈 상황이 아니면 범은 사람을 피했다. 사실 늘 산중을 돌아다니는 나무꾼들이나 심마니 또는 스님들은 범을 그렇게 겁내지 않았다. 그들은 범쪽에서 사람들을 피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며 설사 우연히 범과 만났다고 해도 사람 쪽에서 공격하거나 급히 도망가는 따위의 짓을 하지 않으면 범은 사람을 보고도 모른체 했다.
물론 식인범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너무 늙거나 불구가 되어 다른 야생짐승들을 사냥할 능력이 없는 범들일 경우가 많았다. 한번 사람을 잡아먹은 범은 그게 버릇이 되어 계속 사람들을 습격했는데 그런 범들은 철저하게 추적하여 잡아야만 했다. 일본군이 들어오기 전의 조선은 대체로 그런 정책을 썼다. 캡틴 강이 왕실어용엽사로 있던 시기만 해도 조선에서는 원칙적으로 범을 잡으면 안되게 되어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범을 산군(山君)이라 부르면서 존경했다. 적이라기보다 벗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조선 사람들은 범을 산군이라 부르면서 존경했으나 그건 만주 사람들이 범을 왕대님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는 것과는 달랐다. 만주 사람들은 범을 산신령 그 자체로 보고 신격화(神格化)시켜 범이 아무리 횡포한 짓을 하더라도 그 피해를 감수했으나 조선 사람들은 범을 불가침의 성역인 산신령으로는 보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은 인축에 해를 끼치는 범은 주저없이 사냥했다. 원칙적으로는 이유없는 범사냥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조선의 포수들은 사실상 범사냥을 했다.
범을 잡은 포수는 관가에 출두하여 벌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그건 형식에 그쳐 사실은 매를 때리는 시늉만 했다. 범사냥은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고 예외적으로 인축을 해친 범만은 해수로 간주되어 포수들이 동원되어 사냥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모든 범을 해수로 간주하여 무차별 사냥을 감행했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무용을 자랑했고 값비싼 호피(虎皮)를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1920년대에는 조선의 중부와 남부 일대에서는 범이 사라졌다.
그 결과 호환(虎患)은 사라졌으나 그 대신 늑대와 멧돼지들에 의해 피해가 속출했다. 범이 없어진 조선의 산림에는 늑대와 멧돼지들이 우글거리게 되었고 그들에 의해 피해가 늘어났다.
윤포수는 조선의 중부와 남부의 산간지대에서는 근 10여넌 동안이나 늑대와 멧돼지들의 피해를 받았다고 말했다. 윤포수는 조선에는 대체로 세 종류의 범이 서식한다고 말했다. 반도의 중부 이남의 산림에는 비교적 체구가 작은 범이 서식했고 백두산 주위 산악지대에서는 체구가 크고 털이 긴 범이 서식했다. 그리고 드물기는 했지만 무산 등 동북 산악지대에는 색깔이 흰 거대한 범들이 북쪽에서 내려와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윤포수는 남부에 사는 범은 조선의 고유종이며 백두산 주변에 사는 범은 만주범과 같은 종류이며 무산에 나타나는 범은 시베리아범 또는 우수리범이라고 말했다.
리치박사는 만주에서 이미 만주범 또는 동북호라는 범과 시베리아범 또는 우수리범이라고 불리는 범도 관찰했으나 조선에서만 서식한다는 범은 보지 못했다.
그 조선범은 만주범과 종류가 같은 범일까, 아니면 종류가 다른 범일까? 범뿐만 아니라 짐승들은 같은 종류라도 더운 지방에서 사는 짐승보다 추운 지방에 사는 짐승이 체격이 컸다. 추운 기후조건이 그렇게 만든다는 학설이었다.
사실 리치박사는 만주에서 연구를 한 결과 추운 북만주에 사는 곰 멧돼지 사슴들은 인도나 동남아 등지에 사는 동족들보다 체구가 한둘레 크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조선반도의 북쪽에 사는 범과 남쪽에 살았던 범도 같은 종류인데 기후탓으로 몸 크기가 달라졌을 뿐일까. 윤포수는 확답을 피하면서 어젯밤에 울었던 범이 바로 조선범이라고 말했다. 조선범의 발자국은 쉽게 발견되었다. 윤포수가 어젯밤 범이 울고 있던 곳을 정확하게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윤포수의 말대로 그 범의 발자국은 시베리아범이나 만주범의 그것보다 한둘레 작았다. 발자국으로 봐서는 40관(약 150 Kg) 내지 50관(약 200 Kg) 정도의 범으로 보여졌다.
윤포수는 그러나 그 범의 체구가 작다고 위험도가 낮은 것은 결코 아니며 조선범은 도리어 큰 범들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했다. 조선범은 사람들 가까이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선범은 또한 영리하고 기민했으며 만주범이나 시베리아범과 싸워도 결코 지지 않았다. 특히 험준한 산들이 많은 조선땅에서는 만주범 따위엔 영토를 빼앗기지 않았다. 조선범은 바위를 잘 탔으며 바위를 오르내리면서 자유자재로 공격을 가했는데 몸 움직임이 비교적 둔한 만주범은 거기에 당해내지 못했다.
"조선범은 바위타기의 명수입니다. 포수들도 그놈에게 어이없게 당하지요."
리치박사 일행은 그 범의 발자국을 따라가 봤다. 박사는 조심스럽게 추적하면서 도중에 범의 똥을 발견하자 그걸 갖고 갔던 봉지에 소중하게 담았다. 윤포수는 그런 걸로 뭘하느냐고 짐작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박사는 그 똥을 분석하더니 그 범이 전날 멧돼지를 잡아먹었다고 말했다. 똥 안에 멧돼지의 털이 있었던 것이다.
범의 똥에서는 또한 꿩털과 뼈도 나왔는데 리치박사는 범이 죽어있는 꿩을 발견하여 먹은 것이라 생각했으나 윤포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범은 동작이 기민하기 때문에 꿩도 잡아 먹는다고 말했다. 바위나 나무 뒤로 숨어 접근했다가 갑자기 덮쳐 꿩이 높이 날아오르기 전에 잡아먹는다는 말이었다. 정말로 놀라운 짐승이었다. 범은 자그마한 산을 하나 넘고 계곡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산을 오를 때는 천천히 가던 범이 산에서 내려갈 때는 꽤 빠른 걸음으로 일직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목적지를 정해 그리로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리치박사는 산정에서 멈췄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큰 바위 뒤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의 망원경은 영국해군이 사용하는 고성능 망원경이었으며 1 Km 이내에 있는 물건은 어김없이 잡을 수 있었다. 산중턱에서부터 계곡까지 꼼꼼하게 살피고 있던 망원경에 움직이는 물체가 잡혔다. 노란 낙엽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건 노란 낙엽과 같은 색깔이었으나 검은 줄이 움직이고 있었다. 범이었다. 박사는 거기에 망원경의 촛점을 맞춰놓고 조금씩 조금씩 기어내려갔다. 그는 끈기있게 산중턱까지 기어가더니 손으로 윤포수를 불러 망원경을 넘겨주었다.
윤포수는 박사가 정해주는 방향으로 망원경을 맞추다가 깜짝 놀랐다. 범이 있었다. 거기서 계곡까지는 500 m 이상이 되었는데도 망원경 속에는 범의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리치박사의 행운이었다. 자기도 그렇게 쉽게 조선범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몇 년 전 그곳에 왔던 미국인 루즈벨트포수는 한 달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면서도 범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리치박사는 도착 이틀만에 범을 볼 수 있었다.
범은 전날 먹다 남겨둔 멧돼지 고기를 뜯고 있었다. 알맞게 삭은 멧돼지고기를 먹는데 정신이 팔려 자기를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리치박사는 그 범은 만주범이나 시베리아범과는 다른 종류의 범으로 봤다. 체격이 작을 뿐만 아니라 모습도 달랐다. 그 범은 정말 아름다웠다. 만주에서 범사냥을 하던 백계 러시아인 포수들이 조선범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그렇게까지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만주범은 뚱뚱하고 길고 너덜너덜한 털에 덮여 있었으나 조선범은 비로드처럼 매끄러운 털과 균형잡힌 몸매를 갖고 있었다. 털의 색깔도 선명했다. 샛노란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새겨지고 있었다. 인도나 동양권의 범들은 색깔이 불에 그을린 것처럼 우중충한데 비해 조선범의 그것은 밝고 선명했다. 그리고 조선범은 만주범에 비해 체구가 작았으나 인도범보다는 컸다. 조선범은 인도범과도 종류가 다른 범들인 것 같았다. 조선범은 독립된 종류이거나 다른 범들과는 구별지어야 할 아종(亞種)으로 보였다.
조선범의 관찰은 약 30분으로 끝났다. 멧돼지 고기를 다 먹어치운 범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다가 갑자기 긴장했다. 범은 아마도 망원경에서 반사되는 빛을 본 것 같았다. 범은 바로 망원경의 초점을 노려보더니 훌쩍 숲속으로 뛰어들어가 모습을 감춰 버렸다. 리치박사는 범이 멧돼지고기를 뜯어먹던 곳에 가봤다. 멧돼지는 50관(약 200 Kg)이나 될 것 같은 큰놈이었으나 대가리 일부와 발굽만이 남아 있었다. 박사는 그 멧돼지가 끌려온 자국을 거꾸로 추적해 멧돼지가 범에게 습격당한 곳을 찾아냈다. 멧돼지는 엄청 큰놈이었으나 이렇다할 저항도 못한 것 같았다.
범은 산중턱에서 계곡에 있던 멧돼지를 발견하고 달아나는 멧돼지의 방향을 보면서 지름길로 덮쳤다. 조선범의 상투적인 사냥법이었다. 범은 멧돼지의 등에 올라타 짓눌러 쓰러뜨린 다음 목줄을 따버린 것 같았으며 피가 한꺼번에 쏟아진 장소가 발견되었다. 과연 무서운 살육자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진 몰라도 연구대원들은 그후로는 조선범을 보지 못했다. 조선범은 멀리 피해버렸으며 그 울음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자기의 영토에 침입한 사람들이 보통내기들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피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리치박사는 짧은 관찰시간을 아쉬워했으나 그래도 관찰결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범의 분비물과 털 그리고 범의 이빨과 발톱자국들이 남아있는 멧돼지의 대가리와 뼈 등을 수집했고 범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발자국 탁본(拓本) 등을 만들었다. 윤포수는 박사가 운좋게 조선범을 볼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으나 박사의 그 다음 일에 대해선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 넓은 원시림 속에서 어떻게 어떤 동물을 찾아낼 것인가.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박사는 넓은 원시림 속을 덮어놓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박사는 삼림속에 있는 뭇짐승의 길을 찾아 그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삼림에 있는 짐승길은 뭇짐승들이 공동으로 다니는 큰길과 각기 달리 다니는 작은 길들이 있었다. 큰길은 북쪽으로는 만주, 남쪽으로는 백두대간과 장백정간, 서쪽으로는 개마고원 백두산 등으로 통하는 대로였고 작은 길은 각종 짐승들이 물이나 먹이터를 찾아다니는 소로였다.
박사는 길에 남아있는 발자국 똥 털 등을 조사하면서 필요에 따라서는 길의 요소요소에 덫을 설치했다. 표본 짐승을 잡을 계획이었다. 박사가 갖고온 덫은 쥐덫만한 크기였으나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졌고 강력한 용수철이 붙어 있었다. 덫에는 많은 종류의 짐승들이 걸렸다. 들쥐 다람쥐 산토끼 등이 가장 많았으나 두 마리의 살모사까지 잡혔다. 만주 같으면 벌써 눈이 내릴 계절이었으나 그곳에는 아직도 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살모사는 남향의 낙엽 밑에 숨어 돌아다니는 들쥐나 다람쥐 토끼 꿩 등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들 작은 짐승들뿐만 아니라 큰 짐승도 위험했고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살모사는 조선의 산간지대에서는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주는 동물들었다.
특히 새끼를 낳고 겨울잠에 들어가기 전의 살모사는 몸에 영양을 비축하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했고 그만큼 독성이 강하고 피해도 컸다.
덫에 걸린 살모사들은 몸길이가 60 Cm 정도의 작은 뱀이었으나 몸서리칠 정도로 징그러웠다. 잿빛 바탕에 암갈색의 둥근 무늬가 있었고 세모꼴의 대가리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다. 붉은 혀를 날름거렸고 그 사이에 긴 독아(毒牙)가 보였다.
인도의 코브라는 신경독(神經毒)이었으나 살모사는 출혈독(出血毒)이었으며 그놈에게 물리면 몸이 시커멓게 썩어가면서 죽었다. 살모사는 난태생(卵胎生)이며 그곳 살모사는 매년 초가을에 열 마리 내외의 새끼를 낳는데 살모사가 새끼를 낳는 시기와 장소에는 그들의 천적이 몰려들었다. 무산지역에서의 살모사는 양지바른 잡목림 안에서 새끼를 낳는데 살모사와 같이 덫에 걸린 족제비들이 바로 그걸 노리고 몰려든다고 한다. 인도의 망구우스처럼 한국의 족제비들도 무서운 독사를 없애는데 한몫을 했다.
윤포수가 안내한 산기슭 잡목림에는 또 다른 살모사 사냥꾼들이 있었다.
리치박사는 처음에 그게 무슨 짐승인지 몰랐으나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어보니까 멧돼지였다. 소만큼이나 큰 멧돼지였다. 와다교수는 멧돼지는 일본에도 서식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멧돼지는 아무리 커도 집돼지보다 더 크지는 않다고 말했다. 일본의 멧돼지는 50관(약 200 Kg)이 상한선이었다. 그런데 그 멧돼지는 80관(약 300 Kg)이 넘어 거의 1백관(약 400 Kg)에 가까울 것 같았다. 리치박사도 구라파의 삼림지대에 서식하고 있는 멧돼지도 그렇게 크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주에서도 그런 멧돼지는 보지 못했다.
윤포수는 그 멧돼지는 떠돌이 수컷이라고 말했다. 멧돼지는 암컷을 중심으로 가족 단위로 무리지어 사는 짐승이었으나 늙은 수컷들 중에는 혼자서 돌아다니는 놈들이 있었다.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할 의무에서 벗어나 멋대로 방랑하는 놈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멧돼지는 정착성이 강한 동물이었으며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 동물들이었으나 늙은 떠돌이 멧돼지는 그 예외였다. 그놈들은 일정한 정착지도 없이 수백리나 되는 넓은 지역을 돌아다녔다.
늙은 멧돼지는 오랜 경험에 의해어느때 어디에 가면 좋은 먹이가 있고 어느곳이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늙은 멧돼지는 장백정간을 서남쪽으로 타고 내려가 백두대간까지 내려가기도 한다고 했다. 범이나 표범 곰들도 그런 거물급 멧돼지에게는 덤벼들지 않았다. 잡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반격당해 치명상을 입을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늙은 멧돼지가 조심하는 건 오직 총을 가진 포수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멧돼지들처럼 마을이나 그 인근 밭 가까이는 가지 않았으며, 언제나 깊은 산속이나 삼림 속으로만 돌아다녔다.
리치박사 일행은 200 m 거리에까지 접근, 멧돼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건 멧돼지의 위장법이었고 은신술이었다. 그런 놈이 숲속에 엎드려 있으면 사람들은 그걸 흙더미로 오인하고 바로 그 옆을 지나가면서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늙은 멧돼지는 그곳에서 뱀사냥을 하고 있었다. 콧등과 송곳니로 낙엽들을 헤치면서 뭔가를 찾고 있었는데 밤이나 도토리 따위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멧돼지는 살모사를 발견하자 주저없이 덤벼들어 발로 짓밟고 송곳니로 찍어 눌렀다. 살모사는 멧돼지의 발이나 콧등을 물려고 했으나 멧돼지는 그런 저항은 무시했다.
멧돼지는 쉽게 뱀의 대가리를 물고 국수처럼 말아 먹었다. 멧돼지에게는 뱀의 독에 대해 면역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독사에게 물려 죽은 멧돼지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윤포수가 말했다. 멧돼지는 그날 정오께 살모사 사냥을 중단했다.
가장 싫어하는 외적이 나타난 것이었다. 땅꾼이었다. 살모사를 전문으로 잡는 땅꾼 두 사람이 그곳에 나타나 긴 막대기로 낙엽을 뒤적이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살모사를 약용으로 쓰고 있었다. 푹 삶아서 진국을 강장제로 마시기도 했지만 독한 술에 담아 뱀술을 만들어 마신다는 이야기였다. 리치박사도 그후에 살모사 술을 구경했는데 커다란 유리병에 노란 액체와 뱀이 잠겨 있었다. 뚜껑을 따보니 강한 향기가 풍겼으나 박사는 그걸 맛보지는 않았다. 땅꾼들은 윤포수를 보더니 두 손을 모아쥐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윤포수는 지주로서가 아니라 인격자로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땅꾼들은 아래쪽이 불룩하게 쳐진 쌀자루를 갖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열서너 마리의 살모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역시 땅꾼들은 멧돼지보다는 한 수 위인 살모사 사냥꾼이었다. 윤포수는 그들과 잠시 산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땅꾼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땅꾼들은 심마니 세 사람이 불곰을 만나 혼이 났다는 이야기와 사향노루를 잡으려던 포수 한 사람이 살모사에게 물려 죽을뻔 했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그리고 강 건너에 표범 한 마리가 나타나 그 인근 마을사람들이 겁을 먹고 있다고도 했다.
"그 표범을 본 일이 있는가 ?"
"없습니다. 그러나 발자국들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고 마을의 개 한 마리가 물려 죽었는걸요."
개가 물려죽었다면 그건 살쾡이는 아니었다. 살쾡이가 아무리 사나워도 개를 물어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표범이 나타났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곳은 범의 영토이기도 하고 표범이 감당못할 불곰들이 돌아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치박사도 그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날 하오 강을 건너 마을로 갔다. 땅꾼들의 말대로 마을사람들은 모두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윤포수를 보자 호소했다.
"나리, 어젯밤 표범이 나타나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물고 갔습니다."
좀 이상한 일이었다. 염소 우리 안에는 여러 마리의 염소가 있었는데 표범은 왜 하필이면 태어난지 얼마 되지않은 새끼를 물고 갔을까. 표범은 한끼에 고기 15 Kg 정도는 쉽게 먹을 수 있는 짐승이었다. 그런데 몸무게 10 Kg이 넘는 염소들은 그냥 두고 고작 1 ∼ 2 Kg밖에 안되는 새끼를 물고 갔을까. 연구대원들은 그 표범의 발자국을 추적해 봤다. 표범은 침엽수림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염소 새끼를 뜯어먹었는데 그곳엔 다른 발자국이 또 있었다. 암컷인 것 같았다. 염소 새끼를 먹어치운 표범들은 계속 깊은 삼림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리치박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계속 추적했다.
그날 하오 늦게 박사는 어느 숲속에서 멈췄다. 박사의 망원경에 큰 고목(枯木)이 한 그루 잡혔는데 그 고목 밑둥에 공동(空洞)이 있었다. 박사는 그 공동에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공동 안에 동물이 있는 것 같았다. 추적하고 있던 두 마리의 표범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표범이 고목 공동에 들어간다는 건 이상했다.
그건 어쩌면 표범이 아닌지도 몰랐다. 리치박사는 공동 속에 들아간 동물의 정체를 알기 위해 끈기있게 관찰하고 있었다. 박사의 그런 노력은 한 시간 후에 큰 대가를 얻었다. 고목나무 공동 속에서 짐승이 나온 것이었다.
"저건 표범이 아니야. 저건 시라소니야. 틀림없는 시라소니야."
리치박사는 감탄하고 있었다. 시라소니가 무산에 살고 있다니? 윤포수는 시라소니를 토표(土豹)라 부르고 있었다. 시라소니는 고목나무 공동이나 토굴 안에서 살기 때문이었다.
시라소니는 고양이과 동물이었지만보통 살쾡이와는 달랐다.
시라소니는 몸길이 1 m나 되며 표범보다는 작았으나 큰 개만큼이나 컸다. 시라소니는 굵고 다부진 다리와 큼직한 발을 갖고 있었다. 범의 그것처럼 묵직한 앞발이었다. 그게 그놈의 주무기였다. 그 발로 적들을 후려치면 웬만한 적은 그자리에서 죽었다. 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었기 때문에 사냥개들도 그 앞발에 바로 맞으면 치명상을 입었다. 시라소니는 맹수였으며 사냥개가 함부로 덤벼들 수 없었다. 시라소니가 사람을 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삼람 안에서는 범 표범 다음가는 살육자였다. 노루 사슴은 물론 멧돼지도 사냥했다.
망원경에 잡힌 시라소니는 아름다웠다. 노랑 바탕에 검은 점무늬가 뿌려져 있었으며 쪼뼛한 귀도 멋이 있었고 호박색의 눈동자도 맑았다. 시라소니의 전체적인 모습은 표범을 닮았다기보다 범을 축소시켜 놓은 느낌을 주었다. 꼬리도 표범에 비하면 짧았다. 시라소니는 그 어느 고양이과 짐승보다 순발력과 도약력이 뛰어났다. 시라소니는 앉은 자리에서 가볍게 2 m 이상을 뛰어올랐다.
그래서 시라소니는 꿩이나 산비둘기 등을 곧잘 잡아먹었다. 다른 짐승들에게는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윤포수도 언젠가는 시라소니의 놀라운 재주를 본 일이 있었다. 윤포수는 그때 멧돼지의 발자국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약 10 m쯤 전방에서 장끼 한 마리가 갑자기 요란스런 날개소리를 내면서 뛰어나왔다. 장끼는 이미 활주를 끝내고 날개짓을 하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장끼가 2 m 이상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을 때 숲속에서 소리도 없이 짐승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 짐승은 날개가 없었는데 분명 공중으로 나는 것 같았다.
노란 색깔의 그 짐승은 꿩보다 훨씬 빨랐다. 그 짐승은 꿩의 뒷다리를 꽉 물고 땅으로 떨어졌다. 윤포수는 그때까지 그 짐승이 표범인줄 알았는데 그 놈이 땅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 꼬리가 아주 짧다는 사실을 알았다. 윤포수는 그제야 그 짐승이 시라소니라는 걸 알아차리고 그쪽으로 달려갔으나 시라소니는 없었다. 어느새 도망가버린 것 같았다. 윤포수는 또한 시라소니가 오소리와 싸우는 장면도 목격했다.
오소리는 족제비과의 동물이었으며성질이 아주 사나운 짐승이었다.
그놈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으며 사냥개는 물론 사람에게도 덤벼들었다. 그러나 오소리가 시라소니에게 덤벼든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다. 시라소니에게는 범처럼 강한 앞발이 있었다. 시라소니는 덤벼드는 오소리의 몸 위를 훌쩍 뛰어 넘었다. 그리고 오소리가 돌아서기 전에 앞발로 오소리의 등을 내려쳤다. 두 번 세 번 내려치자 오소리의 몸에서 피가 흘렀고 오소리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라소니는 끝내 추격하여 기어이 오소리를 죽여 물고갔다. 시라소니는 오소리의 천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리치박사는 마치 옛친구를 본 것처럼 시라소니를 보고 반가워했다. 시라소니는 전에 유럽에서도 서식하고 있었다. 꽤 많은 수의 시라소니들이 유럽의 삼림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나 10여 년 전부터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시라소니는 유럽에서 멸종되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영리하고 사냥을 잘 하는 동물이 왜 유럽에서 멸종된 것일까. 유럽의 사냥꾼들은 그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유럽의 시라소니는 멸종되었으나 북미나 캐나다 알래스카의 시라소니는 건재했다. 그곳 시라소니들은 옛날 아시아대륙과 미국대륙의 땅이 붙어있을 때 건너간 동물이었으니 그곳의 환경에 잘 적응하여 상당한 수가 아직도 살고 있다는 리치박사의 말이었다. 물론 원종인 극동의 시라소니들도 시베리아나 북만주의 침엽수림에 서식하고 있었는데 그 일부가 무산에서도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과연 무산은 동물들의 왕국이었다.
리치박사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 시라소니들이 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에 수색영장도 없이 그들의 가택을 조사했다. 고목의 밑둥에 패어있던 구멍이 입구는 사람이 겨우 기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으나 그 밑은 거의 한평이 될 정도로 벌어지고 있었다. 시라소니는 사냥을 하면 사냥감의 일부를 물고 오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뼈들과 털들 중에는 놀라운 것이 있었다. 거기에는 멧돼지의 뼈도 있었고 곰의 뼈도 있었다. 아직 완전히 성장한 멧돼지나 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라소니가 그런 대형동물들까지 사냥할 줄은 몰랐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곳엔 큰 마르모트의 뼈가 있었는데 그 동물은 조선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이었다. 주민들이 다르바간이라고 부르고 있는 설치류는 만주나 시베리아 몽고 등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이었다. 시라소니들이 멀리 만주에까지 사냥을 하러 나간다는 증거는 또 있었다. 만주의 꿩털이 발견되었다. 조선산 꿩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새였다. 시라소니가 매우 부지런한 동물이며 행동반경이 아주 넓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으나 설마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만주에까지 가서 원정사냥을 할 줄이야.
리치박사는 시라소니가 그렇게 부지런한 동물이기 때문에 조선땅에서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박사는 또한 그 동물이 매우 조심스러우며 밤에만 활동하는 것도 그들이 살아남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윤포수는 시라소니가 살아남기 어려운 점도 있다고 지적했다. 시라소니는 다른 동물들에게 잡혀먹힐 염려는 거의 없었으나 가장 무서운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었다. 만주나 조선 산간마을에 사는 사냥꾼들은 시라소니를 발견하면 그냥 두지 않았다. 시라소니의 아름다운 모피도 탐이 났지만 그보다도 그 고기가 문제였다.
대체로 육식동물의 고기란 맛이 없는 법이었고 특히 고양이과 동물들의 고기는 고약한 냄새가 나고 질기고 맛이 없었다. 그래서 고양이과 동물의 고기는 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시라소니는 예외였다. 시라소니의 고기는 쇠고기보다도 맛이 있었다. 구워도 좋고 삶아도 좋지만 육회로 먹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윤포수는 몇 년 전에 일본인 삼림기사들이 시라소니의 고기를 육회로 먹는 걸 보고 몇 점 먹어봤는데 아주 연하고 고소했다. 사냥꾼들이 시라소니를 잡으려고 기를 쓰는 건 바로 그때문이었다.
윤포수는 앞으로는 사냥꾼들에게 시라소니를 잡지 말라고 충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조선땅의 시라소니가 언제까지 서식할지 의문이었다. 아무튼 리치박사 연구팀이 무산에서 시라소니를 발견하고 그 생태를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리치박사는 그곳에서 약 석 달동안 연구를 하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진 1월께는 산에서 내려와 다른 곳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멀리 지리산까지 내려가 조사를 했다.
리치박사는 조선에 서식하는 동물들을 두루 살펴봤다. 그리고 가장 인상에 남은 동물로 무산의 범과 멧돼지 백두산의 검은 담비 설악산의 산양 지리산의 늑대를 들었다. 리치박사는 그러나 한반도 전지역을 통해 가장 조선적인 동물은 꿩과 노루라고 말했다. 꿩과 노루는 한반도 어디에 가도 볼 수 있었으나 리치박사가 말한 조선적인 동물이란 그런 뜻이 아니었다. 가장 조선의 지세나 자연환경에 조화된 동물이며 조선 산림의 대표적인 정착(定着)동물이란 뜻이었다.
리치박사는 조선의 사냥꾼들이 가장 많이 잡는 동물이 바로 꿩과 노루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많이 잡혀도 그들은 조선땅에서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자연에 가장 조화되어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잡혀 죽는만큼 번식을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윤포수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리치박사의 말이 옳다고 했다. 그는 리치박사는 역시 세계적인 학자라고 존경했다.
사실 조선에서 가장 천대받고 있는 꿩과 노루는 조선 동물을 대표하는 동물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꿩은 그 아름다운 자태 때문에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영국 미국 등 일부 나라에서는 조선의 꿩을 사로잡아 자기들의 삼림에서 번식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노루에 대해서는 외국사람들은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허리가 활처럼 굽어진 그 자그마한 동물은 겉보기에도 초라했다. 그래서 조선을 방문한 외국의 사냥꾼들까지도 노루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한국의 노루는 세 종류가 있었다.보통 노루라고 하는 대표적인 종류와 보노루 또는 고라니 라고 하는 보통 노루보다 더 작은 것과, 그와 크기 생김새가 비슷한 사향노루 였다.
고라니가 보통 노루보다 다른 점은 노루에게는 자그마한 뿔이 있는데 비해 고라니에게는 그게 없고 대신 주둥이 밖으로 뾰족하게 나온 송곳니가 있다는 점이었다. 리치박사가 그들 노루가 한국의 자연조건에 가장 잘 조화된다고 말한 것은 노루가 사계절에 따라 높은 산 깊은 삼림 또는 인가 부근의 산림을 오르내리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루는 추위나 더위에 강한 짐승일뿐 아니라 그걸 가장 잘 이용하는 짐승이었다.
다른 짐승들은 추운 겨울이 오면 되도록 바람을 덜 타고 햇볕이 스며드는 양지바른 곳으로 이용하는데 노루는 반대로 응달진 곳으로 이동했다. 몸에 지방도 없는 동물이었지만 노루는 추위에 강했다. 노루는 겨울에는 그렇게 춥고 그늘진 산이나 삼림속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외적들과 멀리 할 수 있었고 사냥꾼들을 피할 수도 있었다. 노루는 여름에는 대담하게 인가 부근의 야산에까지 내려왔다.
노루는 여름이 되면 인가 부근 야산에서 대담하게 먹이를 찾고 암수가 교미를 하는 등 부지런한 활동을 한다. 그때는 노루는 무성한 풀밭에 죽은 듯이 엎드려 외적을 피하기도 하고 발각되면 빠른 주력으로 도망간다. 노루는 그렇게 체구가 작은데도 6 ∼ 7 m나 도약하는 짐승이며 그 어느 짐승도 그 주력에는 따라가지 못한다. 만약 노루가 나쁜 버릇만 없다면 그들을 잡을 짐승은 없을 것이었다.
나쁜 버릇이란 노루에게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강한 애착심이 있어 도망가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전에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버릇이었다. 노루는 사냥꾼에게 쫓길 경우에도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다가 추격자와의 거리가 2 ∼ 3백 m쯤 떨어지면 정지하여 되돌아갈 궁리를 했다. 물론 사냥꾼은 그때 총을 쏘아 노루를 잡았다. 사냥꾼들뿐만 아니라 범 표범 곰 늑대 살쾡이 심지어는 독수리까지 노루를 잡았다.
노루는 그렇게 많이 잡혔으나 그렇다고 모든 노루가 다 잡히는 건 아니었다. 노루는 워낙 수가 많았고 또 은신술의 명수였기 때문에 전체의 수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잡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많이 잡힌다고 해도 노루는 그만큼 번식을 했다. 노루의 번식력은 놀라웠다. 노루는 평소 암수가 짝이 되어 돌아다닌다. 일부일처의 가족제도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짝이 죽지않는 한 그 짝과 같이 사는 것으로 보여졌다.
그러기에 노루는 쉽게 교미할 수 있었고 거의 어김없이 임신하여 새끼를 낳았다. 보통 여름에 교미하는데 수태를 확실히 하기 위해 몇번이나 되풀이한다.
암컷은 그 결과 수컷의 정자를 자궁에 받게 되는데 정자가 암컷의 자궁으로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난자와 만나 임신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리치박사는 암노루에게는 수컷의 정자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난자와 결합시키는 능력이 있거나 아니면 정자와 난자가 결합된 태아의 성장을 필요한 시기까지 억제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리치박사가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암노루의 출산시기가 일정하지 않다는데 있었다. 암노루는 초봄에서 가을까지의 사이에는 언제든지 출산을 했다. 새끼를 키우는 좋은 시기를 선택해 새끼를 낳는 것 같았다. 그래서 노루새끼의 생존율은 높았다. 노루는 1년에 한번씩 한 마리 또는 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새끼는 어미 배에서 떨어지면 몇 시간 이내에 걸어다녔고 며칠 후에는 사람보다 빠르게 뛰어다녔다.
리치박사는 생후 3개월쯤 되는 노루새끼 두 마리를 망원경으로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새끼들은 아주 지혜롭고 민첩했다. 새끼들은 응달진 삼림속에서 앞서가던 어미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들 뒤에는 아비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따라오고 있었다. 리치박사는 그걸 보고 감탄했다. 노루 가족이 그렇게 긴밀한 협동생활을 하고 있는 한 그들은 조선땅에서 결코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치박사의 조선동물 조사보고서에는 그 어느 동물보다도 노루에 관계되는 부분이 많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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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함경도 무산이 타이가 지역의 남쪽이라는 글이 압권입니다. 현 알타이산의 남단이 타이가 지역에 포함되어 이를 바탕으로 백두산임을 우리가 알아냈는데, 무산은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뻗어간 백두대간에 있었으니 타이가지역의 남단이란 표현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주 좋은 내용의 글입니다.
"연주를 바라보며〔望延州〕"에서 서호는 동정호를 말하나요?
"長湖"라는 단어가 몇 번씩 나오는데요. 그 뜻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장강 호수?, 긴(넓은) 동정호?, 장강 동정호?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