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
일본 나가사키현 |
면적(㎢) |
709.01 |
인구(명) |
31,786(2014년) |
쓰시마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쓰시마시(市)에 속한다. 시 아래 6개읍(이즈하라[嚴原町], 미쯔시마[美津島町], 도요타마[豊玉町], 미네[峰町], 가미아가타[上縣町], 가미쯔시마[上對馬町])이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특히
대마도에는 멧돼지가 많아 에도시대에 멧돼지 퇴치를 담당하는 번사(藩使)를
두기도 하였다. 산촌에서는 숯제조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이었기 때문에 산림의 벌채가 심했으나 이후 조림이
이루어졌다. 바다장어·오징어·도미잡이와 전복·소라·성게·천연김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이즈하라 항은 대마도의 주요
어항으로 오래전부터 번성하였으며 식당, 술집 등 번화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어획고가 줄면서 상업적인 활기도 줄어들었다. 매년
8월에는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린다.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골군 일본 본토 정벌을 위해 대마도에 상륙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마도를 근거지로 조선의 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폐해가
막심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였고 굶주린 왜구들에게 쌀을
제공하는 회유책과 벼슬을 하사하는 귀화정책 등의 정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되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李從茂)가 200척의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대마도의 수비가 완강했고 복잡한 지형의 현지사정에 어두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마도의 지명은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이 그 예가 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쓰시마도주(島主)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였으며
그의 장인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이후 대마도 번주 소우지[宗氏]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이
활발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이며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두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쓰시마의 중심지역인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소 요시토시를 기리는 반쇼인(萬松院)등이
남아 있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가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있으며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부근에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향토사료관이
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가 대마도 미네초(峰町)에 소재한 엔추지(圓通寺)라는 사찰에 세워졌다. 그리고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新羅國使朴堤上公殉國碑)가 있다. 그는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등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대마도에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한다. 도둑이 없고, 아가씨가 없고, 욕심이
없다. 많은 것도 세 가지 있는데 자판기, 물고기, 산이 많다.
우리역사 바로알기 대마도 탐방 캠프 <상>
배반의 땅 대마도
경남일보 정영효 기자 [기사입력일 : 2015년 02월 11일 (수)]
경남도교육청이 주최하고, 본보가 주관한 ‘2014 우리역사 바로알기 대마도 탐방캠프’가 지난 2~4일(1차)과 4~6일(2차) 2차례에 걸쳐 도내 중학생들을 비롯한 인솔교사, 멘토 등 총 168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이번 탐방에 참가한 도내 중학생들은 ‘우리역사 바로알기’라는 주제에 걸맞게 일본 대마도에 스며있는 우리 선조들의 숨결과 흔적을 직접 체험했으며, 특히 나라의 빼앗긴 망국의 아픈 역사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에 본보에서는 (상)배반의 땅 대마도 현황과 (하)경남의 미래세대들이 찾은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해 본다.
“일본 땅이지만 일본 같지 않고 우리나라 같은 땅, 우리나라의 선조들이
선진문물을 전해주고 통상을 통해 보살펴 주었지만 오히려 일본의 우리나라 침략 전진기지 역할을 한 배반의 땅”
대마도는 일본 본토 보다 우리나라에 더 가깝다 보니, 애증이 교차하는 섬이다. 부산·경남에서 채 120리(49.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마도는 창원~진주간 거리 보다
더 짧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일본으로 들어가는 큐슈 후쿠오카까지
145km나 돼 일본인들은 찾기 힘든 섬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달음이면 닿을 수 있어
대마도에서는 일본인관광객 보다는 한국인관광객들이 더 많다. 심지어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 모두가 한국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렇다 보니 대마도에는 한국어가 적힌 안내판은 물론 간판, 흔적들이 즐비하다. 이 때문에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섬이다.
◇현황
일본 본토보다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대마도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딸린 섬으로, 전체가
쓰시마시(市)에 속한다. 시
아래 6개정(이즈하라, 미쯔시마, 도요타마, 미네, 가미아가타, 가미쯔시마)이 있고, 이즈하라에
시청사가 소재하고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 수로인 만제키세토(萬關瀨戶)에
의해 상(북섬)·하(남섬) 두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다. 섬 전체 면적은 708.66㎢로 울릉도의 10배, 거제도의 2배 크기다. 인구는 2014년
말 현재 3만1786명이며,
해마다 줄고 있는 추세다. 지정학적으로 한국과 일본 본토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자연
환경
대마도에는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곳이 많다.
아소만의 산, 바다, 점점이 떠 있는 무수한
섬들, 리아스식 해안은 우리나라 남해안의 절경과 못지않게 아름답다. 일본의
해변 100선에 선정된 미우다해수욕장에서의 천연해변과 에메랄드 빛 바다는 이국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과 인공으로 조성된 그린파크해수욕장 역시 섬 특유의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다.
◇경제생활
대마도는 88%가 산지로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는 중계무역으로 살림을 꾸려왔다. 지금은 주민들은 주로 어업과 임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업이 대마도 경제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진주조개 양식과 와카타 벼루, 타이슈 도자기, 토속주(시라타케, 야마네코), 카스마키(카스테라를 말아 놓은 빵), 오징어, 전복, 소라, 표고버섯, 메밀국수, 로쿠베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역사
대마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우리나라로부터 석기·청동기문화를 전래받았으며, 백제·신라·고려·조선시대 때에는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군신관계에 있었다.
고려시대 사료에는 고려 공민왕 때 대마도 만호가 사자를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마도주의
관직이 고려의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사용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대마도가 고려의 속령이나 속주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1년(1419년)에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했으며, 조선왕조실록 세종편 기록에는 “대마도는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있는 우리나라 땅이다”고 명시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계림에 속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이었다. 1870년 일본이 무조건 삼킨 것이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돌려 주어야한다”고 일본에 반환 요구하였으나 한국전쟁
반발로 무산됐다고 한다.
2005년에는 마산시의회(현 창원시의회)가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에 나선 날을 ‘대마도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흔적들
대마도에는 우리나라의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을 비롯 구한말인 1906년 볼모로 잡혀와 순절한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와 대마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의 정략결혼을
알려주는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
조선의 통신사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 등이 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사망한 정사 한천석과 부사 박세양 등 113명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우리역사 바로알기 대마도탐방 캠프 <하>
미래세대들이 찾은 우리의 역사
경남일보 정영효 기자 [기사 입력일 : 2015년 02월 12일 (목)]
우리의 선조들이 겪었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대마도에서의 2박3일간 역사탐방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대한민국 50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대, 즉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과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황녀의
애통한 흔적은 대마도를 찾은 우리 중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대마도에서 2박3일간의 일정 따라 찾은 우리 역사는 이곳을 찾은 미래세대에게
이제는 더 이상 아픈 역사를 만들지 않고, 후대에 자랑스런 역사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탐방
첫날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을 출발한 대마도 탐방팀은 1시간 10분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 히타카츠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대마도 풍경은 여느 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터미널
주변은 국제여객터미널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한산했다. 여객선에서 내리는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해
택시와 버스 5대 정도, 10여대의 승용차만 주차돼 있을뿐
복잡한 우리나라의 국제여객터미널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국수속을 하는 여객터미널에는 일본어 보다는
한국어 안내판이 더 많았다. 일본 땅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대마도에서의 첫 코스는 미우다 해수욕장과 와니우라 한국전망대. 미우다 해수욕장의 에메랄드 빛 바다는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대마도 최북단에 위치한 와니우라 한국전망대는 우리나라까지는 채 49.5km 밖에 안된다. 일본 후쿠오카가 147km나 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마도는 한국에 더 가까운 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맑은 날이면 맨눈으로 부산·김해·통영까지 볼 수 있다. 한국전망대 오른편에 조선역관 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서 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돼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을 비롯해 113명의
사절단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다. 조선역관 순난지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에서
숙연함이 느껴진다. 310년 넘게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 순난지비의
오른쪽 섬에는 눈엣가시 같이 일본해상자위대 건물이 우리나라를 향해 우뚝하게 서 있어 볼썽 사납다.
한국전망대와 조선역관 순난지비를 뒤로 하고 1시간 넘게 달려 에보시타케 전망대에 도착했다. 겹겹이 얽힌 산과 바다 위에 더 있는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리아스식해안이 함께 어울린 아소만의 전경은 대마도에서 가장 좋은 풍광을 자랑한다.
이어 일본왕의 직계와 바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를 신으로 모시는 와타즈미 신사에서 들렀다. 일본내에 크고 작은 신사들이 80만여 개가 존재하고 있는 관광해설사의
설명에 ‘일본은 신사의 나라’임을 알게 했다.
탐방 첫날 마지막 코스는 일본제국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동남아 등 세계를 상대로 침략전쟁의 야욕을 갖게 단초가 된 만제키세토(운하)와 만제키바시(만관교). 만제키세토는 아소만과 미우라만 사이에 인공적으로 개설된 운하, 즉
일본제국이 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대마도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1900년 개설한 운하이며, 그 위에 건설된 다리가 만제키바시이다. 러 ·일전쟁 때 만제키세토에서 최상의 상태로 대기하던 일본 함대가 9개월에
걸친 항해로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동해상에서 격파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제국은 조선 침략은 물론 전쟁을 노골화했다. 탐방팀들이
만제키세토와 만제키바시를 찾은 시각, 해협과 다리 위로 부는 거센 바람은 최근 일본에서 불고 있는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마치 120년전 일본제국의 탐욕스런
외침 처럼 쨍쨍거렸다.
◇탐방 2일째
2일째에는 주로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적인 발자취를 더듬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애한(哀恨)이 서려 있는 금석성터 내에 소재한 덕혜옹주 결혼봉축비를 비롯해
대마 역사자료관, 조선통신사비, 성신지교린비 등 우리나라와
밀접한 자료와 흔적들이 즐비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최익현 선생 순국비, 여몽연합군과 왜군의 전투에서 죽은 왜군을 기리는 코모다하마 신사, 멀리
한국의 산을 볼 수 있다는 카미자키 전망대와 그 인근에는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했던 흔적들도 찾았다. 2일째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스며 있는 곳을 탐방함으로써 당시 일본제국의 만행과 야욕을 확인,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대조선무역항이었던 오후나에 선착장을 탐방한 뒤 덕혜옹주의 비련이 남아 있는 금석성터와 우리나라의 문화재 및 고고역사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대마 역사자료관을 들렀다.
금석성의 외문 겸 망루인 노문(櫓門)을 지나면 덕혜옹주 결혼을 축하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봉축비는 1931년 다케유키와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으로 그
후 이혼으로 없앴다가 한국관광객이 늘어나자 2001년 11월
복원됐다. 나라를 빼앗겨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대마도주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한 비련의 주인공인 덕혜옹주의
애끊는 삶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1978년 12월 개관한 대마
역사자료관의 전시관에는 한반도 양식인 세형동검과 동경은 물론 한반도에서 전래된 청자와
불상, 대장경 등이 전시돼 있고, 폭 27㎝, 길이 16.58m나
되는 대형 채색 두루마리 그림의 조선통신사 행렬도도 있다.
대마 역사자료관 앞에는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
쓴 아메노모리 호슈 현창비가 있다. 여기서 성신지교린이라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이웃끼리 교류한다’는 뜻이다. 내려가는 길에
조선통신사비가 우뚝 서 있었다.
이즈하라 주택가에 위치한 수선사에는 최익현 순국기념비가 있다. 최익현은 을사조약 후 항일의병운동을 일으킨 인물로 대마도에
유배됐다가 단식끝에 순절했다. 1986년 건립된 이 비는 비록 작은 비석이지만 조선의 기개와 선비정신을
몸으로 보여준 것으로 선생의 애국심이 그대로 녹아 있다.
아소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카미자키 전망대 지척에 일본군이 훈련하던 곳, 포가 있었던 자리, 군인들이 묵었던 병사적(兵舍跡) 등이
일본제국의 호전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탐방
마지막 날
5000여년 전부터 근세에 이르는 유적과 문화재 등을 보관해 놓고 있는 미네마치 역사자료관을 찾았다. 이 자료관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와 주민이 사용했던 지게, 물레, 새끼꼬는 기계 등 농사기구, 민속고고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미네마치 역사자료관을 마지막으로 아쉬운 2박3일간의 역사탐방이 끝났다.
일본 본토보다 더 가까운 섬 대마도의 자연에 빠지다
우동섭 여행작가 xyu2000@naver.com [한국경제 기사 입력일 : 2017-03-12]
부산에서 1시간. 일본보다 오히려 한국에 더 가까운 대마도는 담백한 섬이다. 대마도를
걷다 보면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숲과 바다, 아기자기한 마을, 소박한
사람들이 자아내는 담백한 매력에 마음이 정화된다. 가족과 함께 부산 여행을 가는 김에 대마도 여행도
함께하는 건 어떨까. 따스한 봄을 맞아 대마도로 떠나보자.
대마도의 절경 에보시다케 전망대
대마도 최고 절경은 무엇보다 대마도 남서쪽 아소만에 있는 에보시다케 전망대다. 까마귀가 모자를 쓴 형상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에보시타케는 아소만을 사방으로 조망할 수 있는 대마도 유일의
전망대다. 베트남의 하롱베이를 연상케 하는 리아스식 해안과 완만한 경사의 섬들이 무리를 이룬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일출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황금빛으로 물든 섬들이 교향곡을 연주하듯 황홀한 풍경을 그린다.
일본은 신도의 나라답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신사를 볼 수 있다. 숲과 나무로 우거진 청정지역
대마도에 신사가 여럿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 에보시다케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와타즈미 신사는 대마도 대표 신사로 손꼽힌다. 이곳은 뱃길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 도요타마 히매와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해궁이다. 와타즈미 신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은
신사문이다. 바다 속에 세워져 만조 시에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려 신비롭다. 와타즈미 신사의 또 다른 명물은 낙락장송이다. 땅으로 드러난 아름드리
소나무의 뿌리가 길게 드리워져 마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해수욕을 하고 싶다면 대마도 북쪽 가미쓰시마초에 있는 마우다하마 해수욕장으로 가보자. 일본 100대 해변으로 꼽히는 이곳은 에메랄드빛 섞인 푸른 바다에 작은 섬이 떠 있어 풍광이 아담한 것이 특징. 인적이 드문 데다 개발 흔적이 적어 태고의 해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마도에서는
보기 드문 고운 입자의 천연 모래해변으로 바닷물도 깊지 않아 아이들이 해수욕을 즐기기에도 무리가 없다. 마우다하마
해수욕장에서 북서쪽으로 15분을 달리면 가미쓰시마초 북쪽에 있는 한국전망대에 갈 수 있다. 맑은 날에는 부산을 조망할 정도로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에메랄드빛으로
가득한 해안과 대마도 전망이 가슴까지 탁 트이게 한다. 전망대 내부에는 조선통신사 행렬 등의 그림과
여러 자료가 전시돼 있다.
대마도에서 바라보는 우리 역사, 이즈하라 항구
대마도에서
가장 번화한 이즈하라 항구 마을은 대마도를 여행하면 반드시 둘러보게 되는 곳이다. 쇼핑몰과 맛집이 운집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작은 항구도시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즈하라 항구 마을은 골목을 곳곳을 누비는
즐거움이 있지만, 한국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면 더욱 의미있는 여행을 할 수 있다.
이즈하라 항구 마을 가네이시조(금석성)의 외문인
노문을 지나면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931년 덕혜옹주와 대마도의 백작이었던 소 다케유키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일제의 대한 제국 황실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강제정략결혼을 한 덕혜옹주는 결혼 전부터 앓아왔던 정신질환을 극복하지
못하고 소 다케유키와 이혼하고 말았다. 외롭게 서 있는 비가 덕혜옹주의 쓸쓸했던 삶과 닮았다. 이즈하라 항구 마을 서쪽 주택가에 있는 수선사에는 최익현 순국기념비가 있다.
최익현은 을사조약 후 항일의병운동을 일으킨 인물로 대마도에 유배됐다가 단식 끝에 순절했다. 1986년
건립된 이 비는 비록 작은 비석이지만 조선의 기개와 선비정신을 몸으로 보여준 것으로 애국심이 비 곳곳에 녹아 있다. 이즈하라 항구 마을 중앙에 있는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은 대마도의 역사적인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한국인이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한반도 양식의 세형동검과 청동거울, 백제, 가야 등에서 전래된 청자와 불상, 17m 길이의 조선통신사 행렬도
등이다. 대마역사자료관 근처에는 조선통신사 비가 우뚝 서 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으로 한·일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을 기념해 1992년
세워졌다.
고구마 면을 가쓰오부시에 말아먹는 로쿠베
대마도를 대표하는 음식은 단연 로쿠베다. 대마도 특산 고구마로 반죽한 면을 가쓰오부시 육수에 말아먹는 음식으로,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대마도에서 가장 유명한 로쿠베 맛집은 이즈하라마초의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근처에
있는 란테이다. 3대를 이어 영업하고 있는 이곳은 수제로 면을 뽑기 때문에 면발의 쫄깃함이 대마도 최고다.
800도 이상의 열로 달군 화강암에 해산물을 구워먹는 이시야키도 대마도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화강암에서
원적외선이 방출되기 때문에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 해산물에 간을
하거나 양념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해산물 고유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갓 잡아올린 신선한 해산물을 옹기종기
모여 직접 구워먹는 즐거움이 삼겹살을 구워먹는 것 못지않다.
350년 역사의 전통 간식 가스마키는 카스테라를 동그랗게 말아 만든 대마도의 별미. 고소한
풍미로 가득한 카스테라가 단팥을 감싸고 있는데, 고소함과 달콤함의 절묘한 조화에 부드러운 식감까지 한입
먹으면 계속 먹게 되는 중독성이 있다. 대마도에서 가장 유명한 가스마키 맛집은 상대마도의 히타카쓰항에
있는 야마하치 제과다. 오랜 역사에 촉촉한 식감이 인상적이어서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여행정보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마도 히타카쓰항과 이즈하라항으로 향하는 여객선이 매일
출발한다. 모든 여객선이 8~9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여객터미널로
서둘러 가야 한다. 누림여행사(nulimtour.com)가 ‘대마도 일주 1박2일’ 상품을 출시했다. 매일 출발하며 주요 관광지인 한국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에보시다케 전망대,
만관교 등을 둘러보고 이즈하라항에서 면세점 쇼핑도 할 수 있다. 17만9000원부터. (02)757-2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