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촌 아재 아지매, 나의 큰 아부지 큰 어메.
<나의 아버님(鄭 月字 柱字)은 진주 정씨 족보를 네 질이나 사놓으셨다.(1960년대? 발행 판. 1975년 발행 판. 1981년 발행 판. 1998년 발행 판.) 집안과 혈육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이기도 하였지만, 아마도 부친이 고정 수입을 가진 공무원 신분이었기에 족보 출판사 외판원의 좋은 먹잇감이어서도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사진 참조) 윗대 조상님들은 생략하고, 나의 할부지 “정 國자 汶자”부터 시작한다. 字가 성용(聖庸)이며 임진년(1892년) 3월 13일에 나셨다. 대한제국 말기 세상이 어지러울 때, 양반으로 신분 상승하고자 했던 평민들이 돈 주고 벼슬을 사던 공명첩(空名帖)이 횡행하던 그 시절, 나의 할부지도 공명첩을 산다. (공명첩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경제력이 그만만하였고, 한편 공명첩을 파는 관청의 입장에서 봐도 할부지의 사회적 체통이 어만만하였다는 증좌다.) 족보에 올린다. 벼슬 이름, ‘임정 중추 3품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우선, 지금 이 글의 제목이 ‘화촌(華村) 아재’이니 택호(宅號: 옛 갱상도 말 ‘태꾸’)에 대해서 언급하자. 옛 시절, 남자가 두 갈래 땋은 머리를 풀어 상투로 틀어 올리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격을 올려 대접 받는 계기는 결혼이었다. 혼례를 올리고 각시가 가마를 타고 와 시집 동네에 땅을 디디면 마을 어른들이 모여 대개 그 각시의 본향 이름을 따서 신랑은 ‘00아재’, 신부는 ‘00아지매’라고 명명하였다. ‘화촌 아재’는 ‘화촌 아지매’가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 이름이 ‘화촌’(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이란 말이다. 그게 '태꾸'다.
족보 사진에서 아래 칸으로 내려가 보자. 오늘 이 글의 주인공, 영(永)자 민(敏)자 어른 이름이 나온다. 자(字)는 내명(乃明)이고 을유년 11월 11일 생이시다. 제일(祭日: 떠나신 날)이 음력 3월 14일이라고 나의 아부지가 푸른 잉크로 써놓으셨다. 명절 때 마다 마을 풍물패 상쇠잡이셨다. 낮에는 농사일로 부지런하셨고 밤에도 부지런하셔서 3남 5녀를 낳아 알뜰히 키우셨다.
화촌이란 동네는 내 고향 마을(고성군 회화면 삼덕리 치명)로부터 10여 리 떨어져 있다. 족보에 기록되기를 화촌 아지매는 ‘전주 최씨 규영의 여식이며, 무오년 5월 2일생이다.'라고 적혀 있다. 화촌은 최씨 집성촌이다. 고성에서 제일 세력이 강한 3대 성씨가 최(崔)·허(許)·리(이李)다. 명실상부, 그 마을엔 임란의병 최강장군묘지와 도산서원이 있다. 아지매가 시집오실 때 갖고 오신 자필 문집이 한 궤짝이었다고 한다. 동네 처녀 총각들이 혼례할 때 딸려 보내는 서간문을 아지매가 모두 썼다 한다. 인물이 단아하고 조요하였으며 말씀이나 걸음걸이가 단정하였다.
♣ 어릴 적 기억 단상 ♣
+ 아래채에 누에를 키웠다. 뽕잎 따는 걸 돕기도 했다. 누에가 뽕잎 먹는 소리가 사각사각 이슬비 내리는 소리였다.
+ 1960년 대, 장녀 순이 누나 결혼식이 생각난다. 겨울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 손님들이 방에 마당에 담장 밖에 차고 넘쳤다. 아래채 고방에서는 숙수(熟手: 잔치와 같은 큰일이 있을 때 음식을 만들고 배분하는 총책)와 그를 돕는 이들이 분주하였다. 큰집 바로 옆 작은 여울 건너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 멍석을 깔고 상을 차려 걸인들을 따로 대접하였다. 그때 잔치는 최소 2박3일. 밤늦도록 잔치는 이어지고, 동네 처녀를 차지한 외간 남자(자형)를 겁주기 위해 집안 젊은 남자들이 집전하는 통과의례(‘신랑 다루기’라 했다)가 있었다. 열 명이 둘러앉기도 비좁은 방에 스무 댓 명이 둘러앉고 방 가운데는 걸펀하니 술상이 놓이고―광개토대왕 만한 술독도 방구석에 뜨윽하니 한 자리 차지하고―집안 형님 한 분이 집 바깥, 뒷간으로 돌아가 방안, 신랑이 앉은 자리 옆구리 사이로 시커먼 식칼을 쑤욱 찔러 넣는 게 아닌가! (흙벽이라 가능한 일) 자칫 손 한 마디 길이라도 측량이 어긋나면 사람이 크게 다칠 수 있는 장난을 그렇게 하다니.....
마당에서는 횃불을 밝혀 놓고 동네 사람 모두 어울려 놀았다. 막춤판이었다. 둘째 아부지(정 영永자 주柱자: 회화 면장 정 o준의 부친)가―그 분 그때가 40대였을까?―지게 방아 작대기를 왼손 오른손에다 펼쳐 묶고 공중 제비차기를 하며 마당을 휘돌았다.
그 다음 날 낮, 신랑 다루기 2탄, 대청마루 대들보에 길고 흰 광목을 걸고 거꾸로 신랑의 두 발목을 공중에 매달고 마른 명태로 신랑의 발바닥을 매우 쳤다. 치면서 “야 이놈아, 느거 장모한테 술 한 상 채리오라 캐라! 채리올 때 까지 계속 치겠다!”
+ 1970년 대, 어느 세월에 화촌 아재 병이 깊어졌다. 병원으로 가는 택시를 불렀다. 그때는 콜택시를 ‘하이야’(‘임차하다’'hire'의 일본식 발음?)라 했다. 마을 사람들이 전송하러 집 앞에 모였다. 아재가 하이야 뒷자리에 앉으셨다. 하이야가 출발했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화촌 아재는 목을 외로 꼬고 뒷 창문으로 내다 보셨다. 그때, 화촌 아재의 까아만 눈빛이 생각난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마을, 가족, 이승과 이별하던 눈빛,
처연하였다.
+ 세배 갈 때마다 화촌 아지매는 세뱃돈을 주지 않으셨다. 대신 축원 덕담은 짧고 알찼다.
♣ 화촌아재, 화촌아지매 슬하 ♣
1녀 정o순. 살림 밑천. 한 세상 열심히 사시고 지금은 요양원.
1남 정o성. 진주사범 출신. 평생 교직 헌신.
2남 정o광. 서울대 철학과, 노조운동, 민청학련 사건 20년 징역, 서울지하철노조위원장. (아버지가 본 받으라고 내게 훈계하신 몇 구절. “o광이는 방안에서 공부하고 집안사람들은 들에 일하러 나갔는데 갑자기 밖에 비가 와도 그걸 모르고 마당에 늘어놓은 곡식 몽땅 비를 맞혔다는구만.” “연습지 종이 한 장을 써도 연필로 초벌, 그 위에 펜으로 두 벌, 그 위에 붓글로 세 벌을 써서 공부했다더만.”)
3남 정o규. 가난한 집 아래 위 형제간에 칭겨 공부를 제대로 못함. 내 어린 어느 날 산에 같이 나무하러 갔다. 그때 땀 닦고 잠시 쉬면서 내게 붉은 망개(청미래덩굴) 열매를 따 주시며 “범아, ‘망개를 먹어도 이승이 좋다.’카는 속담, 니는 아나?” 그 속담의 힘으로 지금까지 뻔질 나게 잘 살고 있다.
2녀 정o숙. 한 살 누나. 곱고 단아한 모습. 큰 엄니를 빼박았다. 공부도 잘 했고. 솜씨가 좋아 수예 병풍을 만들기도. 하늘이 그녀를 특별히 사랑하사 일찍 데리고 가셨다.
3녀 정o희. 모범 공무원 생활.
4녀 정o란. 근본 예수님 제자.
5녀 정o숙. 이화여대 출신. 상쾌발랄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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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촌 아재 아지매, 그리운 두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