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이미영
영원하자. 이 말에 선뜻 자신이 없다. 무엇이 영원에 속할까 하여 검색 창에 띄워 보았더니 ‘플라스틱은 영원하다.’가 첫눈에 들어온다. 이 문장에는 망설임 없이 동의를 보낸다. 앞날을 염려하는 많은 사람이 영원과 플라스틱의 조합을 엮어냈다. 어두워진 마음으로 웹 서핑을 하다가 머리가 맑아지는 정보를 얻는다.
대부분 영원을 먼 미래와 연결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꾸로 아주 먼 과거에 두었단다. 낯설지만 그들의 세계관은 과거 지향적이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지구가 존재해왔다는 것에 무게를 둔 사고이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다스리셨으니 앞으로도 그러할 거라는 인식이다. 영원은 자동으로 미래에 닿아 목을 앞으로 빼게 되는데 뒤를 돌아본다니 그들의 세계관이 이상하게 들린다. 모세 시대부터 전해진 경구를 엮은 탈무드는 지혜의 책이라고 확신했는데 이제 와서 의문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플라스틱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앞날은 두려워하는 청춘을 자주 본다. 나는 사랑을 하고 오래도록 함께 행복하자고 가정을 꾸린 새댁을 안다. 그의 손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다. 어릴 적부터 이모 같은 마음으로 지켜보았기에 착하고 예쁜 그를 닮은 아기를 벌써 기다렸다. 그는 몇 년째 남편의 손만 꼭 쥐고 다닌다. 그가 살아온 평안한 날들을 아이에게 물려줄 자신이 없어서라고 말끝을 흐린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고 외치는 다이아몬드 독점사업자의 광고에 현혹되었나 보다. 보통 사람들은 금강석이 돌에 붙어있을 때는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떼어가려고 기를 쓰지 않는다. 장인의 손에서 모질게 깎이고 연마된 후에라야 그 광채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금 새댁의 손에 낀 반지가 돋보이는 날은 분명 주름지고 마디가 굵어진 손가락에 끼워진 날 일게다. 지나온 날들을 말없이 증명하는 손 위에서 더 반짝일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과거에서 이어진 영원을 실현하고 있는 줄 알지 못한다. 나는 감히 고대 이스라엘식 영원을 느껴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날이다. 편안해 보이는 아버지가 차갑게 누워있었다. 당신은 그칠 줄 모르고 우는 딸의 손을 잡아주지도 않고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누운 나무 상자에 뚜껑을 덮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막아도 결국 나를 떼 내어버렸다. 세상이 닫힌 것 같았던 그때 크고 따뜻한 손이 흐느끼는 어깨를 꼭 붙들어주었다. 내 손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아기 단풍잎 같았던 손이 아버지가 닫는 세상을 다시 활짝 열어주었다.
영원이 먼 미래에 닿아 있는 줄 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것이 지금 함께 있고 앞으로도 이어진다는 사실을 쉬이 잊는다. 아버지는 딸의 초등학교 1학년 때 한순간을 새겨두고 내가 갈팡질팡할 때마다 응원가처럼 들려주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반 아이들이 모두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혼자 손을 번쩍 들고 칠판 앞으로 나가던 딸의 모습을 가슴팍에 새겼다. 어릴 적에 주저함 없이 나아갔으니 너는 언제나 그럴 거라고 마법을 걸어주었다. 아버지가 내게 그러했듯이 내 아들에게도 배운 대로 응원가를 지어주었다. 최고의 순간을 새겨두었다가 녀석이 힘겨울 때마다 불러준다. 아버지는 나의 과거로 돌아가도 아들에게서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거둘 수 있다. 미래는 새로운 탄생이 아니라 과거가 낳고 기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몸의 기억으로 깨닫는다.
영원의 상징이라고 큰 소리로 유혹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영원을 의심한다. 플라스틱을 하찮게 여기면서 쉽게 영원과 한 묶음으로 엮는다. 불확실하다는 미래와 연결 지은 영원 때문에 두려움에 싸인다. 지나온 날들을 조금씩 꺼내 본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우리가 영원할 것이 아니라 영원의 한순간에 참여한다는 것을 제때에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사랑을 하여 나를 낳고 마법 같은 노래를 부르며 키웠다. 아버지의 날들보다 더 나은 내일을 물려줄 자신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목적 없이 그저 사랑하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병들어 꼼짝없이 누워있을 때 손자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간간이 미소 지었다. 지팡이에 의지해 억지로 걸음을 떼는 할아버지 앞으로 손자가 달려온 날이다. “우리 할아버지야.” 하고 친구들에게 자랑스레 말하던 순간을 내내 잊지 못했다. 당신의 미래에게 미소 지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 “우리 할아버지야.” 하는 명랑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낭랑해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을 둥글게 사랑하고 동그랗게 손잡고 살아가자고 둥근 결혼반지를 서로에게 끼워주었겠지. 무엇보다 사랑하라고 모 없이 둥글렸겠지. 깊숙이 넣어둔 결혼반지를 꺼내어 물끄러미 바라본다. 약지 두 번째 마디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반지를 나이 든 손가락에 끼우려고 낑낑거린다. “처음보다 커져 버린 사랑 때문인가.” 혼잣말하며 피식거린다. 너는 영원의 한 가닥을 잇는 중이라고 토닥여준다.
‘우리는 영원하자.’에는 여전히 자신이 서지 않는다. 아버지의 손을 놓고 아들의 손을 잡으며 두려움을 떨쳐 보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야.” 하는 명랑한 목소리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첫댓글 물리학적으로 영원은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늘 순간만 있지요.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뿐이고 과거나 미래는 허상이지요. 우리 인간은 허상에다 목매달고 살지요. 목매다는 그게 과거일 때는 상처고, 목매다는 그게 미래일 때는 꿈이지요. 과거에 목매다는 사람일 수록 미래에 목매달게 되지요. 허상에 사로잡힌 탓이지요.
시간은 허구적인 개념이자 상대적인 개념이지요. 우주에 점 A만이 있을 때는 시간은 없습니다. 점 B가 하나 더 생기면 비로소 변화가 생기고 거리와 시간이 생기지요. 존재하는 것, 진짜로 내가 인식하는 것은 지금 이 시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든 행복하면 됩니다. ^^
과거나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할 수가 있는가?
없습니다. 허구적인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얼떨결에 한번 써보았습니다. "얼떨결에" 참 좋은 말입니다.^^
얼떨결에 쓰신 내용인데 이 정도! 우와
일상사고의 깊이가 역시 남다르십니다
과거나 미래는 허구이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에 어느 곳에 기대고 싶고 위로받거나 위안을 얻어려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과거나 미래에 대한 좌표는 삶에 용기를 갖게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작가의 말처럼 기대어 보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