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서사기행 27 / 세잔느Cezanne의 아틀리에
세잔느의 ‘목욕하는 사람들’
그림 프로방스의 햇살 맑은 한낮 나는 허공에 그리움을 그릴까 혹은 외로움을 그려넣을까 나는 무슨 꽃을 그려서 너에게로 보내고 얼마나 아득한 별을 그려서 네 가슴속에 오래 걸어놓을까 강설의 새벽에 딱 하나 남은 나뭇잎처럼 네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어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이슬이 될까 |
27. 세잔느Cezanne의 아틀리에
화가의 아틀리에에
한낮의 햇살 밝다
앙가주망engagement의 물결도
데가주망dégagement의 물결도 한 점 일지 않아
아틀리에는 평온하고 조용하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창밖의 풍경은 무성한 수목으로 숲을 덮었을 뿐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물결은 보이지 않는다
‘New Wave’는 흔적 없어도
숲은 고요하고
프로방스의 시민들은 찾아와서
위대한 예술가의 온기를 더듬으며
화구와 붓을 들고 뜰 안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화가가 놓친 세상을 마저 그려 넣는다
엑스의 북쪽 언덕에 위치한 세잔느의 아틀리에
1902년 세잔느 자신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
집은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다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
아틀리에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민들은 많다
미술의 저력이 이곳에 있다
2층의 화실로 올라가
나는 화가가 쓰던 서랍을 하나씩 열어본다
원고, 편지, 소품의 습작들, 일상의 도구들
여러 층의 서랍은 추억의 소품들로 빼곡하다
사방의 벽면에는 세잔느가 쓰던 화구들
병들, 컵과 붓과 그림들
이젤과 커다란 사다리와 난로와 의자와 술병과
그가 수집한 수많은 종류의 다른 컵들
그림을 위한 소도구들과 모형의 과일들
바구니와 조각과 그가 읽던 책들
그 가운데 무엇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서랍 속에 들어 있는 많은 편지들과
한 글자도 흐트러짐이 없는 글씨들의 섬세함이었다
글씨를 썼다기보다는 차라리
글씨로 그림을 그렸다는 게 옳으리라
그가 지닌 성격의 단면을 나는 엿본다
소도구들은 방금도 살아 숨 쉰다
주인을 잃은 물건들은 약간 쓸쓸할 뿐
손끝으로 건드리면 다시 깨어날 것만 같다
여행자인 나는 세잔느를 새로 본다
내 눈에 익은 그림을 다시 읽어보고
내가 모르는 그림을 처음 만나보며
그의 체온을 새로 읽는다
가는 자는 가고
물건들만 살아남았다
남은 것은 정겹고
떠난 것은 그립다
미구에 이 물건들도 조금씩 체온을 잃으리라
모든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열어놓은 창을 통해 보이던 생 빅투아르 산은
다른 눈이 와서 새롭게 읽으리라
세잔느가 만지던 깊이보다 더욱 깊이 만져
새로운 물결을 새로 몰고 오리라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물결을 새로 일으키리라
그림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저 인간의 붓끝에서 새로 태어날 뿐
흐리고 맑음이 없다 어쩌면
세상이 있어 그림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있어 세상이 태어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