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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연일 열대야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청합니다. 소나기 소식이 반갑지도 않은 것은 그것이 덤으로 줄 습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쨍하고 더운 것이 낫지요. 이 습기 찬 더위는 견디기 더 힘듭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신세지지만 그 덕에 감기로 고생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적응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봤자 한달이다, 하고 버팁니다. 한편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1년 열두 달을 살 수 있을까요? 하기야 그렇게 되면 또 그런 환경에 익숙해질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한된 기간이기에 견디기 힘든지도 모릅니다. 어서 지나가라 하며 수용하기보다는 쫓아낼 생각으로 버티니 힘들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지나갈 것이면 어서 지나가라 하는 거죠.
어쩔 수 없이 저도 방학을 했습니다. 한달 정도, 길면 달포 정도 방학, 산행을 멈추었습니다. 정말 비에 젖는 것이 아니라 땀에 젖어 내려오면 하루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 듯하여 쉬기로 하였습니다. 겨울방학도 하는데 당연히 여름방학도 해야지요. 사실 이렇게 쉬다가 다시 시작하려면 좀 어렵기는 합니다. 사람이 그렇잖아요. 게을러지는 일에는 빨리 적응하여도 뭔가 좀 해보려고 하면 몸이 굼떠집니다. 땅에 붙어있는 몸을 떼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나이들어가며 더욱 힘드렁지기도 합니다. 뭐 이까짓 나이에 벌써 아우성이냐 하겠지만 그런 생각으로 박차고 일어나기는 합니다. 아무튼 아침에 조금 시간의 여유가 생겨 느긋해집니다. 그런데 사실 별 차이도 없습니다. 그렇게 익숙해지니까요. ㅋㅋ
아무튼 이 8월을 어떻게든 팔팔하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건강하십시오. 언제나 말하듯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ㅎㅎ
2024년 8월 3일 김종우 목사 드림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편 64 : 1 - 2)
<탈출>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재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해 크고작은 수해를 당합니다. 장마 때나 아니면 갑작스런 호우로 인하여 당하고 여름이면 닥치는 태풍 때문에 당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대비하여도 침수로 당하고 산사태로 당합니다. 그런 자연재해도 평소에 대비하는 태도에 따라 그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재해도 급이 높아진다는데 있습니다. 그후 변화나 환경오염 등으로 발생하기도 합니다. 잘 아는 대로 세계적으로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가는데 대비하는 태도는 더딥니다. 그야 당장 내 앞에 닥치지 않으면 그다지 서두르려 하지 않습니다. 하기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한둘이겠습니까? 급한 불부터 꺼야지요.
자연재해와 더불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소위 우리 스스로 저지르는 일들입니다. 인재(人災)라고 하지요. 인간들이 잘못한 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재난입니다. 어쩌면 자연재해에 인재가 겹치기로 발생하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물론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재난에서도 많이 경험합니다. 인간이 안이하게 다르었다든지 아니면 너무 이익에 집착하다 안전문제를 소홀히 다루었다든지 해서 발생합니다. 그렇게 주의를 하고 사고 발생 후 사후조처를 취한다 해도 개인의 이기심이나 기업의 이기심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지요. 희생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든 것입니다.
기나긴 다리 위, 안개가 자욱합니다. 차량들이 속도를 줄이려 생각하지도 않고 평소대로 질주합니다. 그만큼 자신만만한 듯합니다. 아마 머리로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별 위험을 느끼지 못합니다. 전조등을 켜고 그냥 달립니다. 앞차도 그렇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설마 뭔 일이 있으려나 싶겠지요. 더구나 공항으로 향하는 다리입니다. 짧지도 않습니다. 바다 위를 길게 달리는 길입니다. 잘 아는 ‘인천대교’ 낮이든 밤이든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 눈앞이 짙은 안개로 자욱합니다. 그럼에도 해외로 나가는 길, 시간보다 좀 이르게 도착하고 싶어들 하지요. 그러니 달립니다. 신호등도 없습니다. 내쳐 달리면 됩니다.
갑자기 ‘쾅’하고 추돌합니다. 그 후에는 너나할 것 없이 달려와서 추돌한 차를 다시 추돌합니다. 일단 부딪치면 차선이 돌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달려오던 차들이 계속 추돌합니다. 전 차선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럼에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됩니다. 사람들이 나옵니다. 기가 막일 일입니다. 모두가 마음만 급하지요. 승용차뿐만이 아닙니다. 대형 화물차도 껴듭니다. 때로는 뒤집어집니다. 그런 가운데 웬 군용차가 역시 추돌합니다. 그 충격으로 한 마리 대형 개가 뒤쳐나옵니다. 이어 여러 마리가 뒤따릅니다. 그리고 나와 있던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여기저기 울부짖음이 들팁니다.
사람들이 희미한 안개 속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일에 공포가 휩싸입니다. 어떨결에 서있던 사람들은 무참히 쓰러집니다. 피투성이가 됩니다. 시야가 흐릿한 가운데 무슨 일인지 제대로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개들이 오락가락하며 사람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대형 교통사고로 인하여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거기에 더하여 웬 괴물이냐 이거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벌어져 있고 사람들은 도망다니느라 또 다른 재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일단 목숨부터 지켜야 합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피할 길을 찾습니다.
사고 현장에 딸을 유학 보내려는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이 있습니다. 공항 가는 길에 이 재난을 함께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정부 기관의 중요 자리에 있으니 안보실장과 통화하며 사태를 보고하며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통사고보다 이 괴물체입니다. 사고로 인하여 인명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괴이한 개들 때문에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하려 촐동한 헬기가 그만 추락하는 불상사까지 겹칩니다. 더불어 추락하면서 다리에 충격을 줌으로 다리 중간이 붕괴됩니다. 차량 추돌사고로는 인명 피해가 없었지만 문제는 이 개들 때문에 인명사고가 크게 발생하였습니다. 도대체 이 개들의 정체가 무엇이죠?
국가안보실에서 비밀히 추진하였던 계획이 있었습니다. 말인즉 테러 대응책이랍니다. ‘PROJECT SILENCE’라는 이름의 작전입니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고 해도 자그마한 실수라도 생기면 그 여파는 대단히 크게 나타납니다. 더구나 요즘은 대부분 컴퓨터로 조정합니다. 한 사람이 가만앉아서 자판기나 두들기면서 상황을 이끌 수 있습니다. 편하지요. 빠르지요. 대단한 문명의 이기입니다. 그러나 편하고 빠르기에 그 반대, 재난으로 바뀔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상황만 좀 다르게 설정하였을 뿐 그렇고 그런 재난 이야기입니다. 다만 사랑받던 배우의 유작이기에 기꺼이 관람하였습니다. 영화 ‘탈출’(PROJECT SILENCE)을 보았습니다.
재림 예수는 누구 자손일까?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약속을 몇 번 할까요? 그런데 약속은 왜 합니까? 지키려고 합니까, 깨려고 합니까? 당연히 지키려고 합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약속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수는 있는데 맞는 말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약속을 하지 않았으니 지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왜 지키기가 어려울까요? 그게 앞으로 일어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복음송 가운데 그런 거 있지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사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내일 일을 알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안다, 모른다? 모릅니다. 아무리 찰떡 같이 약속을 해도 피치 못할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할 수 있고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길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어기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개인의 약속은 날아가는 겁니다.
성경이 무슨 책이라고 배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어린아이 식의 대답은 하지 않기 바랍니다. 성경은 언약책입니다. 즉 약속을 기록한 책입니다. 약속을 혼자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은 반드시 상대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 취급 받습니다. 약속은 서로 잘 아는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약속입니다. 성경을 딱 펼치면 구약과 신약, 곧 약속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사이에 한 약속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무엇을 약속하셨을까요? 오늘 하나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찾아온 우리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키지요. 무슨 약속을 하셨는지 모른다면 약속을 어떻게 지킵니까? 그러니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태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 교회 잘 다니고 때로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는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수준을 넘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아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무슨 약속을 하셨지요? 창 2 :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마라, 먹는 날 반드시 죽는다. 그 말은 안 먹으면 죽는 일이 있다, 없다? 없다. 죽지 않을 수도 있구나, 그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무엇을 약속하신 겁니까? 영생입니다. 죽지 않으니 영생 아닙니까? 그런데 먹어요, 안 먹어요? 먹었습니다. 하나님 뭐라고 약속하셨지요?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아담이 여태 살아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우리는 때로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없다?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말씀하시면 무조건 이루십니다. 생각하고 계획하시면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혹시 믿지 못해도 하나님 말씀은 절대로 믿습니다. 사 14 :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어느 날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데 두 소경이 따라옵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뭐라고 소리 지릅니까? 마 9 : 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자 보십시오. 예수님을 부르는데 뭐라고 부르지요?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다른 데 보면 예수님을 보통 어떻게 부르나 보겠습니다. 마 8 : 5 - 6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주여’ 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서기관은 ‘선생님’하고 부릅니다. 제자들은 뭐라고 부르지요?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역시 ‘주여’하고 부릅니다. 요 3장에 보면 밤에 니고데모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르지요. 뭐라고 부릅니까? ‘랍비여’하고 부릅니다. 역시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대부분 ‘주’ 아니면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소경들은 뭐라고 불렀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불렀습니다.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런데 이 소경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겠습니다. 마 12 :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 15 :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마 20 : 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다윗의 자손’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이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 걸까요? 지금 하나님 백성, 유대인들이 누구를 기다리고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메시야입니다. 메시야가 뭐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보통 ‘구원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본래의 의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이 당신의 일꾼을 이 땅에 세우실 때에 그 증표로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십니다. 그것은 오늘날 대통령이 취임할 때 국민 앞에서 선서하는 것과도 같은 행사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 가운데 세우시는 일꾼은 크게 3 가지입니다. 첫째, 제사장입니다. 무슨 일을 합니까?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 의식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는 일을 맡았으니 제사장입니다. 둘째,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달해주는 사람입니다. 모세를 비롯하여 사무엘, 엘리야나 엘리사 등 구약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구약에는 많은 선지서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이 모두 선지자들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등등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자들이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목사, 강도사나 전도사가 해당되겠고 천주교에서 말한다면 일반적 사제나 주교, 추기경이나 교황도 선지자라고 하겠지요. 물론 구약시대 선지자와 신약시대의 목자들은 차이가 좀 있습니다. 그런 거야 나중에 더 자세히 배우도록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왕입니다. 이 세 가지 직분의 사람을 세울 때에는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람이 가서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 직분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그 직분을 받아도 사람이 그 직분을 수행할 때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구약에는 많은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왕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을 더 두둔하다 벌을 받았고,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대로 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왕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하나님의 속을 뒤집어놓은 왕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부터 그랬습니다. 누구입니까? 사울 왕입니다. 왕이 될 때는 겸손했지만 일단 왕권을 쥐고 나니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상하십니다. 삼상 15 : 10 - 1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이 세우시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하여 일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니까.
하나님 백성은 온전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완전히 구원해줄 수 있는 메시야입니다. 그는 하나님처럼 다스려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메사야를 기다리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아담이 범죄하던 때부터 약속되었고 예언되었습니다. 아담이 누구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었지요? 뱀입니다. 그러니 뱀은 하나님 백성의 철천지원수입니다. 잡아야 해요 말아야 해요? 잡아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이 뱀 잡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범죄케 한 뱀에게 저주하십니다. 창 3 : 14 - 15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뱀을 누가 상하게 한다고요? 그것도 머리를 상하게 한답니다. 뱀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겁니다. 누가요? ‘여자의 후손’이.
우리는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이 여자요, 남자요? 남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아담, 즉 남자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사람으로 오셨으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있지요.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려면 그 여자는 남자와 관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남자의 후손이 되니까요. 때가 되어 하나님의 사자가 유대 땅에 있는 한 처녀에게 나타납니다. 눅 1 : 30 - 34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사내를 알지도 못하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잉태할 것을 말씀합니다. 실제로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누구요? 예수입니다.
자 그런데 그 천사의 말한 내용 중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위를 저에게 준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다윗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겁니까? 바로 예수입니다. 32절 다시 읽습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하니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그렇게 약속(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겔 34 : 22 - 24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한 목자를 세워 양떼를 먹이게 하는데 그가 누구라고요? ‘내 종 다윗’이라 합니다. 지금 이 예언의 말씀을 누구를 통해서 하시는 겁니까? 바로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실제로 다윗 왕이 다녀간 지 약 400년 뒤의 사람입니다. 에스겔 선지자 입장에서는 한참 옛날 사랍니다. 그렇다면 옛날 그 다윗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지요. 더구나 에스겔은 예언서입니다. 그 때 당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일어날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나타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백성을 구원하고 다스릴 자입니다. 물론 선지자가 지금 말을 하고는 있지만 자신은 그가 누구일지 모릅니다. 그냥 하나님의 대언자로 장래 일을 약속 곧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오실 메시야 곧 예수입니다.
이제 마태복음 1 : 1절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라고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제 다윗의 자손이라는 의미를 알만 합니까? 누구를 의미한다고요? 바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입니다. 여러분, 궁둥이하고 엉덩이하고 같은 말입니까, 다른 말입니까?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구약에 사용한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신약에 사용한 헬라어입니다. 앞의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예수 앞에 나온 두 소경이 예수님을 부르는데 뭐라고 불렀다고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믿었다는 증거입니까?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경들이 하나님 예언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도 알고 있었는데 서기관 바리새인들, 지도자들이 모를 리 없지요.
문제는 성경을 알고 있는데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장로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성경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말씀하고 약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 곧 약속한 목자를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고 믿겠느냐 하는 것도 숙제입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어리버리한 청년 예수를 메시야라고 믿었을까요? 그 모습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겠지요. 그 하신 일과 하신 말씀을 보고 믿은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요 10 : 37 - 38 “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한 마디로 나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일이라도 보고 믿어라 그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옛날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거든요. 다시 오시면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기독교백화점에 있는 사진 들고 다니면서 찾으시렵니까? 참으로 막연한 신앙이고 어리석은 기다림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신앙생활 할까요? 다시 말하지만 진정으로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있다 한들 너무 막연하게 기다리거나 아니면 어리석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림 때 하나님 백성보다 성경을 더 모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더구나 성경 배우러 다닌다고 하면 대놓고 막습니다. 자기는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배우려고 돌아다니면 극구 막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지금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낮에 오신대요, 밤에 오신대요? 밤입니다. 왜 밤입니까? 정말 깜깜한 밤에 오시는 겁니까? 그러면 시차가 있으니 오늘 우리나라에 오시면 저쪽 미국에는 내일 오셔야 하겠네요. 그런 밤이 아닌 줄 압니다. 한 마디로 지식이 깜깜하단 말입니다. 성경을 알아요, 몰라요? 모릅니다. 그러니 깜깜한 밤입니다. 그 때 오신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깜깜하면서도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반대로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문제가 심각합니다. 스스로 무지무식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배우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다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하나님이 탄식하지 않으셨습니까.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답니다. 무슨 지식이요? 세상 지식이 아닙니다. 호 6 : 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세상사람들이 모른다고 하면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모릅니다. 무엇을 모른다고요? 자신이 믿고 있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 말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오늘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그리스도인들, 목사님들 신부님들을 비롯하여 성도에 이르기까지 다들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안다고 할까요, 잘 모른다고 할까요? 신학 공부도 하고 교회를 몇 년 다녔는데,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데 말하면서 콧방귀 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백성이나 지도자들이나 성경을 외웠답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알았답니까, 몰랐답니까? 외워도 모르면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고 신앙하면 한 마디로 꽝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신앙하지만 과연 하나님인지 아닌지 구분을 합니까? 무엇으로 분별하지요? 오죽하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아무튼 예수님 분명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떻게 어디로 오실까요? 구름 타고 오신다고요? 손오공처럼? 참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이번에는 누구의 자손으로 오십니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늘에. 곧 영계에 계십니다. 그런데 다시 또 육신을 입고 오신답니까? 또 죽으시려고? 그런 일 없습니다. 막연히 재림 예수 기다리다가는 초림 때 유대인들처럼 오셔도 모릅니다. 그렇게 신앙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물어보는 사람도 없어요. 관심도 없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신앙하고서 천국이나 가겠다고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답니다. 모르면 망합니다. 지옥이란 말입니다. 여태 교회 다니고 신앙한 것이 모두 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러 다니지도 못하게 막고, 그러니 깜깜해졌습니다. 과연 밤이지요. 정말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정신 차립시다. 그리고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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