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실로 일관, 가야마(香山武俊) 대좌
- 이응준이 태어나던 때를 전후로 하여 조선의 운명을 둘러싼 외세와 봉건세력, 그리고 개혁 및 민중세력 간의 싸움은 그 도를 더하여 갔다. 이러한 시대적 풍파를 짊어진 1890년 8월 12일에 이응준은 평남 안주(安州)에서 농부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당에 다니다가 안주읍내 한약방과 점포에서 심부름 등을 해 돈을 벌었다. 비록 작은 읍내이기는 했지만 그는 안주에서 도시생활을 맛보았고, 또 이 속에서 꿈을 키웠다.
이러한 생활도 노일전쟁의 여파로 끝나게 되어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안주읍내에서 맛본 도시생활과 이 속에서 키워온 꿈, 그리고 격변해가는 세상사에 대한 목격이 그를 시골마을의 초동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즉 그는 남아로 태어나 향촌 벽지에 묻혀 일생을 마친다는 것이 너무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자나깨나 고향을 탈출하는 시기만을 남 몰래 노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1906년 4월 부모의 돈 3원 50전을 가지고 단신으로 가출, 서울의 객주집에서 잔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이때 당시 한국군 참령(參領, 지금의 소령)이었던 이갑(李甲)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의 도움으로 이응준은 1906년 가을에 보성중학 1회로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이 수학기간 동안 그는 광무제의 양위,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을 보고, 당시 강화진위대장이었던 참령 이동휘가 이끄는 학생대의 일원으로 대한문 앞 시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사건의 와중 속에서 2학년 1학기를 마친 그는 이갑의 뜻에 따라 한국육군무관학교로 전입하였다. 즉 '나라의 먼 앞 일을 생각해 군사학을 배워 실력을 연마하도록 하라'는 이갑의 뜻에 따라, 무관학교에 전입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1907년에 이미 군대를 해산시킨 일본육군은 무관학교를 인수하고 학생들을 일본에서 교육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갑은 이응준에게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선 군인이 있어야 한다. 더우기 일본 군사학을 배울 기회가 그리 쉽지 않으니 두말 말고 가서 배우고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그는 1909년 9월에 다른 한국무관학교학생들과 더불어 일본육사의 예비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없어지는 속에서도 그는 일본군사학의 진수를 배워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1912년 12월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14년 5월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임관하여 '성실한 노력으로 실력을 쌓아 일본출신의 장교들과 떳떳하게 겨루자'고 다짐하면서 그는 '의연한 자세로 착실히 근무'를 계속해 나갔다. 이응준이 일본군 장교로서 착실히 생활하던 중, 그의 지주이자 후원자였던 이갑이 1917년 6월 망명지에서 병고로 죽고, 또 1919년에는 3·1운동이 터져 나왔다. 이런 속에서 병을 핑계로 자택요양하겠다는 명목으로 동경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에서 매일같이 일본육사 동문인 이청천과 김광서를 만나 구수회의를 거듭하였다. 그 결과 3인은 '국외로 탈출하여 여러 선배지사들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결론내리고, 각자 출발 자금을 조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망명하는 최종순간에 이응준은 '동양3국의 실력배양과 일치협동'을 들고 나와 설득하는 조선군 사령관 宇都宮대장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탈출을 단념하였다. 그리하여 국외망명과 독립운동이라는 원래의 계획은 사라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순간의 선택은 그를 전혀 다른 방향에 들어서게 하였다. 즉 이때 망명한 이청천과 김광서는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사로서 자신들의 삶과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만, 이응준은 일본군장교로서 오욕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독립군이 되기를 단념한 그는 실력주의라는 모토 하에서 '한국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는 평이 나돌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일본군으로서 충실하게 근무하였다. 이런 속에서 그는 일선지휘관으로 중국에 파병근무하기도 하고, 또 경성의전(현재 서울의대의 전신) 배속장교, 병사구(현재의 지방병무청에 해당) 장교로 한국과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대좌로 진급하였다. 그리고 해방 두달전인 1945년 6월에 중국 대륙과 만주로 군수품을 수송하는 원산항의 수송업무를 책임지게 되었고, 여기에서 그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군정, 국방경비대창설에 남겨진 족적
- 해방직후인 8월 21일 소련군이 원산에 상륙하자, 소련군의 포로가 되는 것만은 면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는 칼과 권총, 망또 그리고 가방만을 가지고 그 길로 원산을 떠나, 그 다음날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대좌라는 일본군 고급장교출신인 것에 대한 자숙의 심정과 친일파 숙청에 대한 염려로 세상 표면에 나서기를 주저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출신들이 '건군(建軍)'운동을 위해, 또 일본군 출신자의 연락을 위해 군사단체를 만들자고 하자, 일본군출신자 중 원로격인 그는 8월 하순 새로 결성된 조선임시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경기여고에서 열린 창립대회에 모인 일본군장교와 하사관출신 70여명은 창군을 위해 노력하고, 치안확보를 위해 치안대총사령부를 설치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김석원을 대표로 동 사령부를 설치하고, 한편으로는 임시정부와 건국준비위원회와 접촉할 것을 논의하고 그 담당자로 이응준과 김석원 등을 선정하였다. 조선군사임시위원회는 일본육사출신자들이 중심이 되고, 원용덕 등 만군출신도 참여한 것이었다. 군사준비위원회를 인민위원회 측에서 흡수하려 하였지만, 영관급 회원들이 반대하여 그 연결은 무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산하의 치안대총사령부가 당시 인민위원회와 연결된 학병동맹을 견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9월 초 성북서의 접수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미군진주 이전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되어 인민위원회 측과 대립하면서 자신의 활로를 모색하던 군사위원회는 미군이 진주하자 군사위 대부분의 의견에 따라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미군정과 협력관계에 들어갔다. 미군정과 협력하겠다고 생각하던 이응준은 46년 1월 4일 미군정의 출두요청에 따라 군정청에 들어갔다. 친일파로 숙청되지 않을까 불안해 하던 그를 맞이한 것은 국방경비대 창설의 실무책임자인 군정청 국방부의 아고(Argo)대령이었다. 이응준의 우려와는 달리 당시 경무부장인 조병옥에게서 이응준을 추천받은 아고는 그에게 미군정의 국방경비대 창설계획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뜻밖의 요청을 받은 군정청을 나온 그는 일본군 출신자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국측과 손을 잡고 장래 국군을 창설하는 모체를 만든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 다음날인 46년 1월 5일에 미군정 국방부 고문으로 취임하고 업무를 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일본군의 군복을 벗은지 반년만에 다시 미군정의 군대일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로써 이응준은 한국군창건의 주도세력의 하나로 역사 위에 새겨지게 되었다. 국방부 고문으로서 업무를 시작한 그에게 미군은 경비대 창설에 관한 기초적 방안, 즉 군의 주둔위치, 병력과 편성, 모병 등에 관해 문의하였다. 이러한 요구에 그는 '각 도청 소재지를 군의 주둔위치로 하고, 보병중대로 부터 시작해 점차로 대대, 연대, 여단, 사단까지 편성하고, 20세 전후의 청년 지원자 중에서 신분·사상을 감안하여 모병한다'는 안을 제출했다. 이와 같은 안은 당시 경찰력을 보조하는 경찰예비군을 창설하려던 미군정의 의도와 일치되면서 대부분 그대로 실시되었다. 그런데 앞의 계획안 중 '사상과 신분 검열을 통한 모병' 즉, '지원할 때 주거지 경찰의 신분 증명서를 첨부토록 하여 좌익계열이 군에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경비대 건설이라는 자체방침에 따라 미군정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공군대의 건설이라는 그의 생각은 군대건설에 있어 사상과 신념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당시 건군운동 참여자들의 일반적 생각을, 또한 사상과 신념을 뛰어넘어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당시의 여망을 좌우라는 정치적·이념적 잣대로 왜곡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들을 추천하는 것을 통해 간부난에 허덕이던 국방경비대의 창설과 강화에 이바지하는 한편 구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이 군대에서 자신의 존재기반을 마련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또 미군정에 의해 창설되면서 명분이 약했던 경비대와 국방부의 명분을 강화시키기 위해 일본 육사 15기로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 임정의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렬을 국방부장으로 추천하여, 유동렬이 국방부장(후에 통위부장으로 개칭)으로 임명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경비대의 명분과 물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 민간인의 신분으로 동분서주하였던 이응준에게 46년 6월에 미군정은 '정식군인의 신분으로 일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임관을 권유하면서, 그를 육군대령으로 임관시켰다. 구일본군 출신으로 자숙해야 한다는 자신의 초기 생각과는 달리 해방된지 10개월도 되지 못해 다시 미군정에 의해 육군대령으로 임명되면서 공식적인 군대생활이 개시되었다. 그리고 임관 후 감찰총장으로 보직을 받고 군의 사상적 통일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였다. 실제로 당시 국방경비대는 간부들의 경험 부족, 또 간부인원의 부족 등으로 정신교육을 시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간부들 자신의 구성도 잡다하였다. 즉 대체로 일본군·만주국군·중국군 출신으로 대별되어 출신군별 파벌이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반탁지지자와 극우적 성향을 갖은 인물과 찬탁지지자와 좌익성향자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편부당'(不偏不黨, '이념에 상관없이 경비대를 운영하겠다'는 생각)이라는 미군정의 당시 방침으로 말미암아 공개적으로 반공군대 건설을 주창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각 부대의 감찰을 엄격히 하여 '군인으로서의 정신자세'를 유지하도록 하는 한편 잡다한 출신의 장교들이 하나로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렇듯이 이응준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군기의 유지와 단결을 이루려 힘썼다. 경비대의 증강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미군정은 연대편성을 여단편성으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가장 먼저 미군정은 서울 부근에 제1여단을 설치하고 이응준을 초대여단장으로 임명하였다. 1여단은 그 예하연대를 서울 태릉과 강원도 춘천과 강릉에 두고 38선전역을 관할하는 부대이다. 이응준은 1947년 12월 1일 취임하자 38선의 경비를 엄중히 하는 한편 장병의 훈련과 장비의 개선, 그리고 편성의 보완 등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렇게 38선의 경비를 담당하였던 그는 일시 부산에서 신생 3여단의 편성임무를 받아 그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1여단으로 복귀하였다. 이렇듯이 이응준은 초기 경비대의 확대편성기에 실병지휘관으로 부임하여 경비대의 창설, 강화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초대 육군참모총장, 반공군대 건설의 본격화
-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그는 장택상의 천거에 의해 1948년 11월 20일 1여단장 겸 초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취임 10일 후인 12월 1일 육군 준장으로, 다음해 2월 4일 소장으로 진급되었다. 이렇게 급속도로 진급한 그는 참모총장으로서 전 장병의 사상을 통일하고, 군기가 엄정하고 훈련이 잘된 군대를 만드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하였다. 그리하여 장병의 일상지침으로 '사병훈'을 시달하였는데, 이것은 '군기와 상관의 명령 복종 및 상하관의 단결, 책임완수, 부정행위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한편 극렬 파괴분자의 배격'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이범석 국방장관의 국군3대선서와 더불어 각 소·분대장에게 배포하여 매일 아침 낭독케 하여 그 철저한 실천을 기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예하 각 부대를 순시하면서 38선 경계강화와 교육훈련 철저를 고취했다. 이렇게 참모총장으로서 일상적으로 사상통일과 대북대결의식을 고취하였던 그는 48년 10월의 여순군반란을 계기로 군내에 남아 있는 좌익세력들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미군사고문단의 지휘 하에 예하 정보계통의 인력을 총동원하여, 군간부가 부족해질 정도로 대규모 숙군을 단행하였다.
군참모총장으로 안으로는 좌익숙청과 밖으로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 제주의 빨치산 토벌에 전력하던 중, 1949년 5월 5일 발생한 강·표월북사건으로 그는 사직하게 되었다. 즉 강원도 인제군 현리부군 제 1선에 배치되었던 강태무와 표무원이 그 부하를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 발생하여 그것에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의 자리를 물러났던 것이다. 이것은 총장 취임 반년 만에 일이었다. 그리하여 집에서 쉬던 그는 49년 6월에 다시 대구 제3사단장의 보직을 받아 관내 빨치산 토벌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빨치산의 사체와 노획무기의 보고를 통한 전공 인정이라는 방식으로 토벌전을 강화하면서 동북부 산악지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3사단은 전과에 있어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그런데 신성모 국방장관이 이응준을 거세하고자 작전실패를 이유로 50년 1월 그에게 대기발령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그리하여 두세달을 쉬던 그는 김성수의 덕택으로 다시 광주 제5사단장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빨치산토벌작전이었다. 그는 백운산 일대에 있는 빨치산을 공격하기 위해 예하 2개 연대를 이 지역에 배치하여 작전에 진력하였다. 이런 속에서 2개월후 6·25의 발발을 맞이하였다.
6·25, 퇴장하는 창군원로
- 6·25의 발발은 민족사적으로 비극일 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보듯이 이응준 자신에게도 비극(?)의 시작이었다. 5사단장으로 빨치산 토벌임무에 몰두하던 중 6·25가 발발하자, 자신의 휘하 연대를 서울로 보내고 자신은 사단사령부 병력만을 인솔하여, 한마디로 병졸 없는 장수로 미아리 고개 등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후퇴하여 수원지구 사령관, 전남편성관구 사령관, 서남지구 사령관 등에 임명되어 패잔병수습과 신병모집을 통해 전투부대를 편성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그리고 8월 초 이후에는 마산지구 계엄사령관, 제주지구 계엄사령관, 전남지구병사구 사령관, 전남계엄 민사부장 등에 보임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그의 경력, 특히 후방지구에서의 계엄사령관 등의 임무는 모두 3개월 이내에 취해진 인사조치로서 이것의 이면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이응준 견제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범석으로 부터 국방장관직을 계승한 신성모 시절 계속되는 이러한 견제로 말미암아 이응준은 더 이상 군내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50년 11월에 사표를 내고 군을 떠났다. 예편 후 그는 친척과 현역 군인들, 그리고 이기붕의 도움으로 지내다, 1951년 10월에 김홍일의 뒤를 이어 상이군인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전쟁의 발발과 이곳저곳에로의 편력, 그리고 예편은 그 원인이 어디있건 간에 군인 이응준이 역사에서 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이응준이 계속해서 퇴장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신성모가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 등으로 장관직으로 부터 물러나고, 일본육사 동기생인 신태영이 국방장관직을 맡고 있었던 52년 4월에 그는 현역으로 다시 복귀해 육군대학 총장으로 보임되면서 11월에는 중장으로 승진되었다. 육군대학 총장으로 근무하던 중 53년 5월에는 미군신병의 훈련상황, 엘레븐워즈의 미군참모대학과 등 미군 군사교육상황을 견학한 그는 미군사고문 단장 라이언 장군의 추천에 의해 53년 6월에는 제1훈련소장으로 전임되어 미국의 훈장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54년 6월에는 육군참모 차장과 그이후 군편제위원회 위원장, 장군진급심사 위원장, 중앙징계위원장, 정병심사위원장 등 보직을 받아 55년 9월까지 군전반의 통괄사무에 주력하였다. 이렇듯이 일시 군에 복귀하고 중장에 까지 승진하여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이기는 했지만, 후방근무의 행정직이었던 편력이 보여주듯 이미 군대에서의 그의 역사는 종반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종반전은 대부분의 퇴역장성들이 그러하듯이 '허세(虛勢장관'으로 끝이 났다. 즉 그는 55년 9월 체신부장관 임명과 동시에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58년 9월에는 장관직을 사임하고 10월에 자유당 성북을구 당위원장이 되어 4·19때까지 활동하였다. 이러한 정치활동에 이어 4·19로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때 강원도 철원지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63년에는 신정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반공연맹 이사장직과 5공화국 시절에는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 6·25의 발발로 시작된 그의 퇴장과정은 55년 체신부 장관의 임명으로 완결지워지고, 그 자신은 정치에 동원되는 '예비역 장성'이 되었던 것이었다.
주요참고문헌
- 이응준, {회고 90년}, 산운기념사업회, 1982.
육군본부, {창군전사}, 육군본부, 1980. 한용원, {창군}, 박영사,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