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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사마천의 사기(史記) 열전(列傳)
제 3노자(老子), 한비자 열전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와 이야기하였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 ..... 군자는 성덕(盛德)이 있으나 그 용모는 우매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대의 교만한 기상과 욕심 많음과 얼굴과 태도를 꾸미는 일고 산만한 뜻을 버리라. 그런 것은 그대의 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이것뿐이다."
공자는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안다. 물고기가 잘 헤엄친다는 것도 안다.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달아나는 자에게는 그믈을 칠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질할 수 있으며, 나는 것에게는 주살을 쏘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용에 대하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다. 그는 용과 같은 존재이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아서, 그의 학문은 스스로 숨기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敎化)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게 하였다.
[임주(任註); 도덕경은 짧으니 언제 한 번 소개하려 한다. 아주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주나라에 살더니 주나라의 덕이 쇠미하게 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 함곡관에 이르자 관을 지키는 관리인 윤희가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장차 숨으시려고 하시는데, 귀찮으시더라도 저를 위하여 글을 지어주십시오."
이에 도덕경 상하편 5천 언으로 도와 덕의 뜻을 말하고 가버렸는데, 그의 최후를 아는 사람이 없다.
장자[莊子 BC365?∼BC290?]의 이름은 주(周)이다.
그의 학문은 넓어서 엿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요점은 노자의 말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말에 귀결(歸結)한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 10여만 언은 대체로 거의가 우화(寓話)이다.
당세의 노성(老成)한 학자라도 장자의 논리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지 못하였다.
그의 말은 넓고 심원한데다 제멋대로 자적(自適)하였으므로 왕공, 대인으로부터는 훌륭한 인재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임주(任註); 장자는 시원하고 통쾌한 책이다. 10만 자가 넘어 분량이 많기는 하나(이 사기 전체는 52만 6천 5백 자) 상당히 재미있다. 통상적인 개념을 뛰어 넘는 생각이 대단히 많다. 남과 말을 하여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장자를 읽으면 효과를 볼 것이다. 그러나 장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논어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역사적인 대결에서 항상 패배하였다. 말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 실제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소개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의 경우 주역을 읽어 이해하는 정도보다는 훨씬 손쉽게 장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비 [韓非 BC280?∼BC233]
한비는 한나라의 여러 공자 중의 한사람이다. 형명법술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 귀착점은 황제, 노자였다. 한비는 말더듬이여서 입으로는 잘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글은 잘 지었다. 이사[李斯 ?∼BC 208]와 함께 순경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자기의 재주가 한비를 따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한비는 조국 한나라가 땅은 깎이고 국력은 쇠약하여 가는 것을 보고 자주 한왕에게 글을 올려 진언하였으나, 한왕은 그것을 채용하지 않았다. ...
한비는 남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세난(說難; 이 경우는 설을 세로 읽는다)>을 지었다. 그러나 한 비 자신을 마침내 진(秦)나라에서 비명(非命)에 죽게되어 스스로 그가 말한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체로 남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나의 지식으로 상대편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나의 말하는 능력이 나의 의사를 충분히 밝히기가 어렵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내가 자유롭게 말을 구사하여 하고자 하는 말을 남김없이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남을 설득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설득하려는 상대자의 심리(心理)를 완전히 파악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그 마음에 맞추어 하는 데에 있다.
설득하려는 상대자가 높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사람일 경우에 후한 이익의 문제를 가지고 말하면, 상대자는 곧 나를 품위가 없는 속물(俗物)이라고 하여 비천하게 여겨 반드시 버리고 멀리할 것이다.
설득하려는 상대자가 후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일 경우에 높은 명예를 위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상대자는 나를 생각이 없고 세상물정에 멀다고 하여 반드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득하려는 상대자가 실상은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면서 겉으로는 높은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처럼 꾸미는 자일 경우에 [임주(任註); 이런 경우가 가장 많다고 본다.] 높은 명예를 위한 일을 이야기하면, 겉으로는 말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체하고 실지로는 멀리하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에게 많은 이익을 위한 이야기를 하면 속으로는 몰래 그의 말만은 채용하면서 드러내서는 그 사람을 버릴 것이다. 이런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임성삼 주(註); 이 후 여러 가지 논리적인 분석이 있다.]
대체로 용이라는 동물은 길들여서 가까이하여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 지름 한 척의 역린(逆鱗; 방향이 거꾸로 난 비늘)이 있다. 사람이 만일 그 역린을 건드리면 용은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 임금에게도 또한 역린이 있다. 설득하려는 자가 임금의 역린을 건드림이 없어야 거의 성공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임성삼 주(註); 결국 아부를 잘하는 사람은 이것을 다 생각해서 하거나, 천성적으로 할 줄 아는 것일 수 있다. 대단한 재주이다. 대체로 보통의 재주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니 포기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이 좋을 지 모른다. 모든 것을 이렇게 잘 분석한 한비도 군주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제 명에 죽지 못하지 않았는가?]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노자가 소중히 여기는 도는 허(虛)이고 무(無)이면서 자연에 따라 응하고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는 말이 현묘(玄妙)하고 오묘하여 알기가 어렵다.
장자는 도덕의 뜻을 부연하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게 논한 것이다.
제 6오자서 열전
[임성삼 주(註); 중국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같다. 반드시 읽어보기 바란다.]
제 7중니(仲尼) 제자 열전
[임성삼 주(註); 공자 제자들에 대해 적었다. 논어(論語)를 읽기 위해서는 이 제자들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간단히 세 사람만 소개한다.]
안회(顔回)는 노나라 사람으로 字는 자연(子淵)이다. 공자보다 30 세 아래이다. 공자는 말하였다.
"어질구나 안회는. 한 도시락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것으로 더러운 빈민굴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남들이면 견디지 못할 것인데 안회는 그 도를 계속 즐기는구나."
"안회는 어리석은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사행활을 살펴보면 배운 것을 모두 활용하고 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임금이 등용하면 벼슬하여 도를 행하고, 임금이 버리면 숨어 살면서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로구나."
[임주(任註); 공자의 3 천 제자 중에 숨어서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안회가 들어온 이후로 제자들과 더욱 친근하여 졌었다."
"안회가 학문을 좋아했다. 그는 성내는 것을 남에게 옮기는 일이 없었으며, 과실을 두 번 다시 저지르는 일이 없었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일찍 죽었으니, 지금은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없다."
...
중유(仲由)의 자(字)는 자로(子路)이다. 공자보다 9 세가 젊다.
자로는 성질이 거칠고 야비하고 용력(勇力)을 좋아하였으며, 뜻은 강직(剛直)하였다. 수탉의 깃으로 꾸민 갓을 쓰고 수퇘지 가죽으로 만든 띠를 띠고 다녔다. 공자를 업신여기고 포악한 짓을 하곤 하였다. 공자가 예를 베풀어 점진적으로 자로를 유도하였다. 자로가 뒤에는 유자의 옷차림을 하고 예물을 갖고 와서 공자의 문인(門人)을 통하여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
자로가 물었다.
"군자도 용맹(勇猛)을 좋아합니까?"
"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을 좋아하고 의가 없으면 문란하여지고, 소인이 용맹을 좋아하면서 의가 없으면 도적이 된다."
자로는 한 가지 교훈을 듣고 아직 실천하기 전에는 새로운 교훈을 듣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한 마디의 말을 듣지 않고도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로일 것이다."
"자로가 용기를 좋아함은 나를 앞서나 그것을 알맞게 사용할 줄 모른다."
"자로 같은 사람은 제 명에 죽기 어렵다."
"다 떨어진 헌 무명 도포를 입고 여우 가죽과 담비 가죽의 털 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자로이다."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반란이 일어났다. 자로는 성 밖에 있다가 소문을 듣고 달려갔다. 성문에서 도망가는 공자의 제자 자고를 만났다. 자고가 자로에게 말했다.
"왕은 달아났으니 그대는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공연히 화를 받지 않게 하시오." 자로가 말하기를
"그 사람의 밥을 먹은 사람은 그 사람의 화난(禍難)을 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하고 들어갔다. 자고는 도망갔다.
반란자가 대(臺)에 올라가 있었다. 자로는 반란의 주모자를 죽이게 내 놓으라고 하였다. 듣지 않으니 대에 불을 놓으려고 하였다. 무사를 내려보내 자로를 공격하게 하였다. 자로는 여러 곳에 칼을 맞았으며 또한 자로의 갓 끈이 끊어졌다. 자로는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하고 갓끈을 매고 죽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슬프다, 자로가 죽겠구나."
"자로를 내 제자로 얻은 뒤부터는 악한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임주(任註); 유교에서는 죽을 때까지 몸가짐을 단정하게 한다는 뜻으로 자로의 이 이야기를 자주 한다.]
단목사(端木賜)의 자는 자공(子貢)이다. 공자보다 31 세 어리다.
자공은 말재주가 좋았는데, 공자는 항상 그 말재주를 꾸짖어 경계하였다.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안회는 누가 더 나으냐고 물으니 자공의 대답이,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알 뿐입니다."
[임주(任註); 제나라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를 치려 하자 공자는 자공을 보내어 말리도록 하였다. 자공은 제나라를 비롯하여 연속적으로 다섯 나라를 방문하여 뛰어난 말재주로 전 중국의 판도를 바꾸어 놓는다.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오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 이때 자공의 말솜씨 때문이었다. 이 자세한 내용이 책에 있다.]
[임주(任註); 이 이외에도 많은 제자의 이야기가 있으나 일단 위의 세 사람의 이름만을 기억하기 바란다.]
제 8상군(商君) 열전
상군[?∼BC 338]은 위나라의 여러 서얼(庶孼) 공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름은 앙이고 성은 공손씨이다.
[상앙이 진(秦)나라에 가서 나라의 임금을 설복시키어 체제를 바꾸려 하자 진나라의 대신인]
두지가 말하였다.
"이익이 백 배나 되지 않으면 법을 변경하지 않으며, 공이 10 배나 되지 않으면 그릇을 바꾸지 않는다. 과거의 법을 사용하면 큰 잘못이 없고, 예를 따르면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
상앙이 말했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나라에 편리하고 이익이 있으면 법을 바꾸는 것이다."
왕이 법을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임성삼 주(註); 중국에서 몇 번 이렇게 완전히 나라의 법을 개혁한 일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개혁이 성공하여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 가혹한 법으로 중국을 통일한 후 15 년만에 진나라는 망했다. 한 고조 유방은 진(秦)나라를 점령하고 상앙의 이 복잡한 법을 폐하고 간략한 법 세 조목만을 발표하여 인심을 얻었다. 한 나라는 400 년을 지속하였다.
그 후 송(宋)나라 때 왕안석이 신법(新法)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려 하였으나 신법파와 구법파의 싸움으로 결국 송나라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조광조의 개혁도 결국 실패하였다. 흔히 개혁파는 정의로운 사람들이고, 반개혁파는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기 이익만을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적으로 개혁을 시작하는 사람은 청렴하고 정의로우나 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이 많으면 개혁은 반드시 실패한다.
다시 원 줄거리로 돌아가 진(秦)나라가 국력을 길러 춘추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데 기여한 새로운 법을 살펴본다.]
백성으로 열 집, 또는 다섯 집으로 통, 반을 구성하여 서로 죄를 적발하게하며, 또한 죄에 연좌(連坐)하게 한다.
죄지은 자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허리를 자르는 형벌을 준다. 고발한 자에게는 적의 머리를 베어온 자와 같은 상을 준다. 자기의 죄를 숨긴 자는 적에게 항복한 자와 같은 벌을 준다(사형 - 가족까지)....
상공업을 하는 자와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노예로 만든다.
모든 국민의 대우를 군공(軍功)에 따라 행한다.
농사를 잘 짓는 자를 우대한다.
사사로운 싸움은 엄금한다. ...
법령이 갖추어진 후 상앙은 백성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 두려워 세 길 되는 나무를 국도(國都)의 남문 밖에 세워두고, 백성을 모아 이 나무를 북문에 옮겨 놓는 자에게 10 금[10 냥이면 400 만원?]을 주겠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의심스럽게 여기어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상금을 50 금으로 올렸다. 한 사람이 그것을 옮기자 즉석에서 50 금을 주어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새 법을 반포하고 시행하였다.[BC 359]
새 법을 시행한 후 한 해가 지나니 진(秦)나라의 많은 백성들이 수 천명이나 법이 불평하다고 항의하였다. 이 때 태자(太子)가 법을 범하였다. 상앙은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태자를 법대로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태자에게 형벌을 시행할 수 없으므로 그의 스승 중 한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다른 스승의 얼굴에 먹물로 문신을 하였다. 다음날부터 모든 사람들이 법을 따랐다.
새 법을 시행한 후 10 년이 되자 진나라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다.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지 않으며, 도둑이 없고, 집안은 넉넉하게 되었다. 백성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용감하고, 사사로운 싸움을 겁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새 법이 불편하다고 하던 자들이 이제 와서는 몰려와서 좋다고 말하였다. 상앙은 말하기를
"이런 사람들이 교화(敎化)를 문란하게 하는 백성들이다."고 하고 모두 변방의 살기 힘든 고장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그 뒤로 백성은 감히 법령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이 후 진시황이 통일할 때[BC 221]까지 진나라는 전쟁에서 거의 진 적이 없다. 그 동안 장의, 저리자, 감무, 범수 등 여러 정승들이 있었으나 이 상앙의 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였다. 법을 제정하여 모든 국민이 예외 없이 지키는 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부강하게 된다. 그리스, 로마의 예와 이 진(秦)나라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가혹한 법을 만든 상앙은 나중에 태자(太子)가 즉위한 후 정치적으로 약하게 되어 반항하다 잡혀 죽었다.]
제 9 장 소진[蘇秦; 풀이름 소, 벼이름 진]열전
[임성삼의 주(註); 가난한 유세(遊說)객이었던 소진은 6 나라가 진(秦)나라에 대항하는 합종책을 내세워 6 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과거 동양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을 소진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말을 잘하는 법을 알고 싶으면 자세히 읽어 볼 것. 현대의 개념과는 다르나 중국의 웅변을 대표한다.]
태사공은 말한다.
소진 형제 세 사람은 다 제후(諸侯)를 유세하여 이름을 드러내었다. 그 술책은 권모, 변작(變作)에 능통하였다. ...
소진은 민간의 미천한 데서 몸을 일으켜 육국을 연결하여 종적인 맹약을 맺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蘇秦 ?∼BC317 백과사전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신. 제(齊)나라의 귀곡자(鬼谷子)에게 사사하였다. 처음 진(秦)나라의 혜왕(惠王)을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뒤에 연(燕)나라의 문후(文侯), 조(趙)나라의 숙후(肅侯), 한(韓)나라의 선혜왕(宣惠王), 위(魏)나라의 양왕(襄王), 제나라의 선왕(宣王),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을 각각 설득하여, 이 6국의 연합을 성공시켰다(合從). 6국이 세로로 나란히 결속하여 서쪽의 진나라에 대항하려는 것으로, 소진 스스로 종약(縱約)의 우두머리가 되어 6국의 상(相)을 겸하고, 종약의 서를 진나라에 보냄으로써 진나라는 수십 년간 동방진출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 안되어 동서연형설(東西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때문에 합종이 깨져 제나라로 피신하였는데, 그 곳에서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제 10 장 장의(張儀)열전
장의는 위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鬼谷)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술(學術)을 배웠는데 소진은 스스로 장의를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장의는 다 배우고 나서 제후를 유세하였다. 초나라의 정승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초나라의 정승이 구슬을 잃어버렸다. 정승의 문하 사람들이 장의를 의심하고 말하였다.
"장의는 가난하고 행실이 좋지 않으니 반드시 이 사람이 구슬을 훔쳤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장의를 잡아다가 수백 대의 매를 쳤다. 그래도 장의가 승복하지 않으니 드디어 그를 놓아주었다. 그의 아내가 말했다.
"가엾어라, 당신께서 글을 읽어서 유세(遊說)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런 욕된 일을 당하겠습니까?"
장의가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나의 혀를 보아주게. 아직 있는지 없는지."
"혀가 있습니다."
"그러면 됐어"
[임성삼의 주(註); 사람의 일생동안 자기의 잘못이 아니면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 때 억울함만을 생각고 한을 품으면 안된다. 자기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만 남아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장의는 진(秦)나라를 위하여 외교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다. 소위 연횡책이다. 소진과 장의 두 사람은 변설의 대가이나 인간적인 성품으로는 존중받지 못하였다.]
[張儀 ?∼BC 309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정치가·유세객(遊說客). 위(魏)나라 출신.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에게 사사했다. 초(楚)나라에서 유세했을 때 초나라 정승의 옥을 훔쳤다는 혐의로 수백 대의 태장을 맞았기 때문에 아내가 유세를 중단하자고 권했지만 <내 혀만 있으면 걱정없다>고 했던 고사는 유명하다. 소진이 그의 합종책(合縱策)을 유지하기 위한 책략으로 장의를 진(秦)나라에 보내 혜왕(惠王)을 섬기게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혜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고 진나라를 위하여 연(燕)·조(趙)·위·한(韓)·제(齊)·초 등 6개 나라에서 유세하여 각각 진나라와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은 연형책(連衡策;서쪽의 진나라와 동쪽의 6개 나라가 횡으로 동맹한다는 뜻)을 성공시켜 합종책을 깼다. 혜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에게는 신임을 얻지 못했고 신하들로부터도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위나라로 도피하여 정승으로 있다가 1년 후에 죽었다. 소도진과 함께 제자백가(諸子百家) 종횡가(縱橫家)의 한 사람이다.]
제 11 저리자, 감무 열전
[임성삼의 주(註); 두 사람 모두 진(秦)나라의 승상이었다. 이 두 사람보다 동양에서 흔히 언급(言及)되는 사람으로는 감무의 손자 감라가 있다.]
감라(甘羅; 달 감, 새그믈 라)는 감무의 손자이다. 감무가 죽은 후 감라는 나이 12 세에 진나라의 정승 여불위[임성삼의 주(註); 진시황의 실제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사람]를 섬겼다.
[임성삼의 주(註); 전체 이야기가 길고, 여러 사람이 관계되는 것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 있다. 그러나 12 세에 외교문제를 해결하여 상경(上卿)이 되었다.]
제 13 백기, 왕전 열전
[임성삼의 주(註); 이 두 사람의 장군이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기는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전쟁을 잘하는 장수였다고 생각한다.]
백기[白起]는 용병을 잘했으며 진의 소왕을 섬겼다. 진 소왕 13 년에 장수로서 한나라의 신성을 쳤다. 그 다음 해 한(韓), 위(魏)나라의 군대를 이궐에서 공격하여 머리 24만을 베고 또 장수 공손희를 포로로 하였으며, 5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 다음 해에 위나라를 쳐서 공략시키고 크고 작은 성 61 개소를 탈취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큰 나라가 70 개의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뒤에 조(趙)나라를 치고, 초(楚)나라를 취하였다.]
소왕 34 년에는 위나라를 쳐서 머리를 벤 것이 13 만이나 되었다. 조나라와 싸워 병사 2 만을 황하 속에 수몰(水沒)시켰다. 소왕 43 년에는 한(韓)나라를 공격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키고 머리를 벤 것이 5 만이었다. ....
조(趙)나라의 사졸(士卒) 40 만이 백기에게 항복하였는데 백기는 이렇게 생각했다.
"... 조나라의 사졸들은 마음이 잘 변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이들을 죄다 죽여버리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드디어 간사한 계책을 써서 그들을 죄다 구덩이에 생매장하여 죽이고, 어린아이 240 명만 남겨 조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전후 통산하여 조나라 군사의 머리를 벤 자와 포로로 한 자가 45만 명이었다. 조나라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백기는 자기의 공로를 믿다가 죄 없이 사형을 당했다.]
진왕은 사자를 보내 그에게 칼을 내려주면서 자결하게 하였다. 무안군이 칼을 끌어잡고 막 자결하려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지경에 이르는가?"하고는 한참 뒤에 말하기를,
"내 본래 죽어야 마땅할 것이다. 항복해 온 조나라 군사 수십만 명을 속여서 죄다 구덩이에 생매장해 죽였으니, 이것으로 죽기에 넉넉하다."
고 하고 드디어 자살하였다. 그가 죽은 것은 진 소왕 50 년 11 월이다. 죽었으나 죽을 만한 죄가 아니었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가엽게 여겨 향읍(鄕邑)마다 그를 제사한다.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세속의 상말에 '자[척(尺)]도 짧은 곳이 있고, 치[촌(寸)]도 긴 곳이 있다'고 한다. 백기는 적을 잘 헤아리고 임기응변하여 기이(奇異)한 꾀를 냄이 무궁하며 명성은 천하를 진동하였다. 그러나 자기 몸에 미치는 화에서 스스로를 구출하지 못하였다.
왕전은 진시황 11 년에 장수가 되어 조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가장 강한 초나라를 치기 위해] 왕전은 군사 60 만의 장수가 되었으며 진시황은 몸소 패상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왕전은 가면서 진시황에게 좋은 농토와 집을 많이 주기를 여러 번 청하였다. 진시황이 말했다.
"장군은 가시오. 어찌 가난함을 근심하오."
왕전이 말했다.
"대왕께서 저를 신임하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농토를 청하여 자손의 기업으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크게 웃고 말았다. 왕전이 국경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보내어 좋은 농토 주기를 청구한 것이 다섯 번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임금에게 청하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왕전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저 진왕[시황제]은 조포(粗暴)하여 남을 믿지 않는다. 지금 나라를 텅 비우면서 진나라의 모든 무장군인을 나에게 위임하였다. 내가 많은 토지를 청하여 자손의 기업을 삼아 자신의 신변을 견고하게 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면 도리어 진왕은 나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같이 주도면밀(周到綿密)한 사람이 출전한 전쟁에 패할 리가 없다. 그러나 군자(君子)는 아니다.]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왕전은 진나라의 장수가 되어 여섯 나라를 평정하였으며, 이 후에도 왕전은 노성(老成)한 장수여서 진시왕이 그를 스승으로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을 보필하여 덕(德)을 세워서 그 근본을 튼튼하게 하지 못하고, 진시황의 뜻에 영합하여 자신이 용납되기를 꾀하여 몸이 다할 때까지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손자 왕리에 이르러 항우의 포로가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백기와 왕전은 각각 단소(短所)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