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옷에 손을 댄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5 : 21 – 43(마9:18-26, 눅8:40-56)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라 온 한 여인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기 위해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믿음으로 고침도 받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혈루증은 여성의 생식기에서 출혈하는 자궁 내막염으로 자궁암입니다. 율법은 혈루증을 앓는 자의 침상까지도 만지면 부정하며 그와 접척하는 사람도 부정하고 했습니다.(레15:19-30) 성전에도 올라갈 수 없어서 하나님께도 예배도 드릴 없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와 함께 할 수 없는 버려진 자였습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즐기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있고, 이웃과 친구도 있지만, 그들과도 함께 할 수 없어서 외롭게 사는 사람은 버려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두 해를 앓아 온 여인은 버려진 자였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버려진 자들입니다. 모든 죄인은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않는 여인과 다를 바 없는 버려진 자들입니다.
버려진 그 여인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막5:26) 죄로 인하여 버려진 죄인들도 구원받기 위해 우상과 신들을 섬기며 노력하지만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았다는 것과 ‘열두 살’된 야이로의 딸의 ‘열둘(12)’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같은 ‘완전’을 의미합니다.
열두 살의 야이로의 딸이나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의(義)가 없는 완전 타락한 죄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며,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을 고쳐주셨던 것처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죄인의 구주이십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은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쭉정이 속에 알곡이 있는 것처럼 죄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버려진 자’와 ‘잃어버린 자’는 같으면서도 전혀 다릅니다. ‘버려진’ 쭉정이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불에 태우지만 ‘잃어버린’ 알곡은 생명있기 때문에 곡간에 들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여인은 등불을 켜고 온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았습니다.(눅15:8) 예수님께서도 잃어버린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마리아에 수가라 하는 동네에 남편 다섯이 있었던 여인은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길으러 나온 그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요4장)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도 사람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으로 버려졌지만, 그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시며 구원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막5:27,28)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막5:27), 그의 잠자던 영은 깨어났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도와주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9)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게 된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하였던 것처럼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나사렛 예수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소리 지를 수도 없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막5:27)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대변해 줍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큰 무리를 뚫고 바쁘게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그의 믿음과 용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12:10)고 말씀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아 온 그는 약한 자가 되어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의 믿음은 가장 강해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 수 있었습니다.
‘옷 가’(44)라고 한 것은 옷 끝에 달린 많은 술들 중에 한두 가닥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이 아닙니다. 옷 끝에 달린 한두 개의 술에 손을 대어도 자신의 병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강한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막5:23)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의 최고의 지도자로서 야이로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혈루증을 앓은 이 여인의 믿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의 믿음이 큰 믿음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능력이 있다고 하는 어떤 분에게 찾아가서 안수받기를 원하는 믿음이 아닙니까? 안수하는 그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다가 자신의 머리나 아픈 곳에 대고 ‘아멘, 믿습니다’라고 하는 믿음은 수치스러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예수님에게 안수하여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맹인 바디메오처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고침을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누구에게 배워서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게 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자신의 믿음대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 큰 무리에 밀려 바쁘게 가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에워싼 큰 무리를 뚫고 들어가는 것은 병들어 고생한 여인으로서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혈루증을 앓는 부정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에게 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막5:27)라고 성경은 말씀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7)
놀라운 것은 그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즉시 혈루증이 그쳤습니다.(44)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습니다. 그의 병이 나은 줄을 몸이 깨달았습니다.(막5:29) 열두 해를 고생한 혈루증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물며 예수님도 모르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돌이켜서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46),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습니다.(막5:30)
예수님께서 누가 손을 대었는가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않아 온 그 여인이 고침을 받은 것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는 것과 그 여인이 천대받는 부정한 병을 가진 여인이 아님을 무리에게 공표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베드로가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밀어서 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며(막5:32)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4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떨며 예수님께 나아와 두려워 떨며 엎드려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47) ‘두려워 떨었다’는 것은 예수님도 모르게 음밀하게 고침을 받은 것이 탄로되어서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심을 알고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두려워한 것은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전지하신 분이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속이고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도 예수님의 전지하신 분이심을 몰랐을 때는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도 모르게 옷을 댄 것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을 알았을 때는 예수님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전지하신 분이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고 예수님까지 속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 앞에 두려워하며 떨게 됩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떠는 것은 경건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내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교회 안에서 큰소리치며 자신의 교만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성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부정한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면 예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옆드려 겸손하게 됩니다.
열두 해를 앓아 온 혈루증을 고침받은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리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과 병고침 받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습니다.(47)
우리는 본문 말씀을 예수님 당시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않았던 그 여인이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로만 생각하면 이 말씀은 재미있는 옛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구속사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개인적으로 말할 수 없는 숨겨진 죄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도와 달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기에는 막힌 담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강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댄다는 것은 골방의 음밀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주님 앞에 나아가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기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아무도 모르게 성전에 올라와서 한쪽 구석에 엎드려 혼자 울다가 날이 새기 전에 돌아가는 사람을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고 고침받은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9)고 축복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댐으로 그렇게도 괴롭히던 혈루증도 고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평안의 복도 받았습니다.
평안은 세상에서 누리는 현재의 평안의 복이기도 하지만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는 평안의 복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는 믿음으로 구원받으시고 인자가 오시는 날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평안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