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얼굴 모습을 보면 대충, 남아시아인과 북방 아시아인의 특징이 보인다.
남 아시아아인의 특징은, 얼굴이 둥글고 눈이 크고 쌍꺼플이 있다.
북방 아시아인의 특징은 얼굴이 길고 눈이 길고 매서운 편이고 쌍커플이 없다.
나는 섞인 것 같다.
방송에서 ‘고려거란전쟁’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저들도 중앙 아시아에 같이 살 땐 같은 부족이었거너나, 옆의 친구였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거란족과 韓族은 둘 다 북방 아시아인이기 때문이다.
황하문명은, 벼를 작물화 시키면서 소를 같이 가축화 하였다.
황하 문명이 뻬이찡 원인 인지 아니면 또 다른 부족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들의 문명이 아시아인들에는 특히 남아시아인들에게는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말이 가축화 된 곳은 중앙 아시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초원지대이다.
그리고 바로 옆의 메소포타 문명은 이집트 문명과 함께 밀을 작물화 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 유럽을 비롯해서 서양은 빵이 주식이 된 것이다.
따라서 말을 가축화한 민족이 밀을 주식으로 함이 분명해 보인다. 밀은 초원 지대가 생육조건 맞았다.
말을 가축화 하고 밀을 주식으로 한 민족의 일부가 동진 하였다.
그들이 북방 아시아인이다.
고조선 부여 발해 고구려 고려 신라 백제 등 한국 고대 중세 근대에 탄생 소멸하였던 모든 나라들은 북방 아시아인들이 새운 나라들이다.
중국 대륙은 사실 中華라는 말이 틀린 말이다.
중국 역시 북방 민족이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진족의 요나라 몽골족의 거란, 금나라 돌궐과 한족이 합쳐서 세운 발해, 고구려와 백제의 원류가 된 부여, 그리고 몽골의 징기스칸의 원나라.
마지막 중국 대륙은 청나라가 지배했다.
청나라는 금나라의 후신이다.
엄밀히 이야기 하면 중국은 漢族의 나라가 아니다. 한족은 남아시아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것은 북방 아시아인들이다.
남아시아인들은, 남하하여, 중국의 남서부 오지의 소수 민족이 되었고,
동남아 민족의 기원이 되었고, 심지어 일부는 배를 타고 태평양과 동남아의 여러 섬들을 지배하여 나라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제주도 일본의 오끼나와 타이완 등도 전부 남아시아인들이 세운 나라였다.
북방 아시아 인들의 특징은 얼굴이외에도, 몸집이 크고 날렵했다. 그들의 주식은 밀과 고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말을 잘 탔고, 전투에서 잘 싸웠다.
그래서 우리나를 기마민족이라고 하고 활을 잘 쏜다고 중국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파르티안 샷’은 궁기병이 쓰는 기술의 일종. 동양에서는 '배사(背射)법'라고도 한다.
고대 파르티아 왕조가 즐겨 활용한 궁기병들이 로마군에 맞선 역사적 정황을 인용하여 'Parthian Shot'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즉 고대부터 쓰이던 용어가 아니라, 19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말을 달리며 상체를 좌측으로 돌려[3] 진행 방향의 직후방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모습이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투창이나 총, 석궁도 가능하기에 넓은 의미에선 말 위에서 등을 돌려 적을 향해 투사체를 날리는 기법이라 보면 될 듯 하다.
중세 시대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폄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개인 단위라면 몰라도 집단 단위가 되면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이게 약간의 훈련만으로 되는 일이었다면, 세계를 정복할 기세로 날뛰던 몽골족의 전술을 배워 써먹은 나라가 왜 단 하나도 없었을까?
또한 격렬히 흔들리는 마상에서 고삐를 놓은 채로 하반신만으로 몸을 고정한 채 활을 쏜다는 것 자체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며 평화로운 환경에서 주변이 텅 빈 상태로 혼자서 여유롭게 펼치는 기예와 전쟁 중 당장 마주친 적을 경계하면서 주변의 동료들과 대열을 유지하면서 부대 단위로 활을 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는 일이다.
보통 말을 잘 타는 민족들 사이에서는 어지간하면 공통으로 내려오는 이미지로 훈족이나 몽골이 이 기술을 구사했으며, 고구려의 경우에도 무용총 벽화 등을 통해 사용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에도 보인다.
이성계가 쿠테타를 일으켜서 조선을 세운 다음, 시애의 난, 몽학의 난, 인거의 난, 괄련의 난, 희량의 난, 인좌의 난, 경래의 난 그리고 갑오란이 있었지만, 스스로 왕이 되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조선 왕조가 끝장에 다다르고 마침내 일어났던 갑오농민 전쟁 마저도 이씨왕조를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왕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간신무리를 쫃아내야 한다는 데서 머믈렀다.
서울을 함락했던 괄련의 난 때도 인조 대신 왕족을 세웠지 이괄이 스스로 왕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징옥은 스스로 대금제국 황제 라고 스스로 칭하였지요. 대금제국이라는 뜻은 금나라를 이어받았다는 겁니다.
금나라는 여진족들의 나라인데, 그때 압록강 두만강 주변에서 흩어져 살던 부족이었지요.
금나라는 1115 년 아골타가 만주 시베리아 함경도 일대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모아 몽고족 갈래인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웠는데, 120 년간 유지하다가 원나라에게 무너졌다.
그런데,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신라사람이라는 겁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 김부의 자손들 가운데 마의태자의 패거리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한패가 백두산을 근거지로 한 만주땅으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그 중의 지도자가 아골타라는 겁니다.
이것은 전해져 내려오는 야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중국역사는 漢族을 근본으로 한 중화사상이 으뜸입니다. 분명 근세까지 중국을 지배했던 청나라 만주족의 역사는 중국 역사에서 이미 변방 취급을 받기 시작한거죠.
한족 역사를 중심으로 동북공정, 서남공정, 서북공정까지 역사왜곡을 이미 끝을 냅니다.
그들이 청나라 만주족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1778 년 대청제국 건륭황제가 황명을 내려 펴낸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금나라와 이징옥의 대금제국 대청제국의 뿌리인 동북아시아 역사를 집대성한 책인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뿐만아니라 흉노, 숙신, 읍루, 동호, 북위, 예맥, 말갈, 선비, 거란, 몽골, 여진이 모두 한 할아버지 자손임을 밣히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수도가 두개였습니다. 백제는 산동성에 큰 수도 있었고,
신라는 지금의 만주 길림성에 큰 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있습니다.
명나라를 없애고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이름은 愛新覺羅奴兒哈赤 인데 愛新覺羅는 신라를 잊지말자라는 뜻입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만주족이 세워지고 중국의 마지막 황제의 자손들의 타큐멘터리에서도 그들의 원래 성은 김이었다는 증언이 있었지요.
걸출한 장군 이징옥이 스스로 난을 일으켜 대금황제가 되었던 배경에는 이렇듯 숨겨진 역사가 있는 겁니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어쩌면 동북아 역사 전체에 대한 반란입니다. 국가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편가름이죠.
그래서 전 동북아 역사는 중국사 한국사 일본사로 나뉘어 쓰기 보다 같이 쓰여져‘동아시아 역사를 주장을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