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난로의 추억
겨울이 일찍 시작되고 한겨울이 1월 중순쯤 끝난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긴가 민가? 애매모호한 시름에 잠긴다. 지난여름 한 번도 맞지 않는 기상청예보를 신뢰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겨울은 올 것이고 닥칠 겨울추위를 또 걱정부터 했다.
한 겨울에도 냉수욕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찬 기운이 감도는 가을만 다가와도 찬물에 손을 담그기도 싫어졌다.
인생무상이 아니고 세월비련歲月悲戀일까?
매일 세안할 적마다 보던 거울에서 느끼지 못하는 사이 꽤 많은 안면주름이 발견되니 비련이 느껴진다.
어느새 세월이 내 안면을 짓밟아 놓고 가 버렸나?
금주 지나면 한겨울추위가 냉큼 몰려온다는 예보에 걱정이 덜컹 앞섰다.
생각다 못해 아이디어를 짜냈다.
허지만 내 아이디어는 아니다.
아내의 얄팍한 한수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아내에겐 가스요금과 전기요금이 부담스럽고 내겐 ‘사는 날까지 스트레스 받지 말자’로 입막음하지만 여자들 마음은 안 그런가 보다.
“여보, 우리 집은 정남향이니까 낮엔 보일러 안 때도 따뜻해요.”
“난 안 돼! 내 비염 한번 도지면 알잖아? 병원비가 더 든다. 체력상실도 이만저만 아니고.”
“그럼 좋은 수가 있어요.”
그렇게 해서 타협점을 찾은 것이 석유난로다.
아내의 말을 순순히 따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전의 추억을 불현 듯 재현해 보고 싶어서였다.
그땐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장과 함께 필수 설치하던 것이 연탄난로였지만, 가스 때문에 동치미국물 배터지도록 마시고 당장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것이 석유난로였다.
참 따뜻하고 안전했다.
그리고 명품가방처럼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좋아! 그럼 낮엔 석유난로 때보자. 그런데 사이즈는 어느 정도 해야 하나?”
“사이즈는 무슨 사이즈에요. 당신 방만 석유난로 때세요.”
“뭐? 그건 불공평한데?”
“우린 걱정 마세요. 더우면 오히려 숨을 못 쉬겠어요. 얼굴도 화끈거리고요.”
작은 며느리가 아내를 거든다.
몇 번 절충안을 내 봤지만 소용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옛 시절 추억으로 간다. 그렇게 해서 구입한 것이 석유캠핑난로다.
하필 캠핑난로냐고?
인터넷을 뒤져 아무리 찾아도 가정용소형난로, 그러니까 예전에 사용하던 그런 난로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예전부터 이름 있던 H사의 캠핑난로를 주문했다.
캠핑난로가 도착 한날 때맞춰 기온도 곤두박질쳤다.
사용설명서를 꼼꼼 읽어보고 자동점화장치 스위치를 눌렀다.
참 발전했구나. 예전엔 이런 장치가 없었는데.
몇 분 안 돼 난로의 열통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아내가 올려 놓은 주전자가 입에서 입김을 호호 불어댄다.
문득, 학창시절 연탄난로위에 ‘벤또’ 올려놓고 점심시간기다리던 기억이 술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좋은데?”
아내가 비식 웃었다.
나는 만족해서 쓰던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한참 후.
아내가 방문을 빼꼼 열고 점심준비 다됐단다.
방에서 나오니 썰렁한데 아내는 여전히 반팔이다.
“안 추워?”
“이 날씨에 춥다니요? 사람 살기 딱 좋은데?”
“으메?”
더 말 붙일 것이 없어 묵묵히 점심을 살뜰하게 처분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순간 숨이 탁 막혔다.
방안 가득한 기름 냄새 때문이다.
마치 침선낚시선 타고 공해로 나갈 때 선실로 새어들어 오던 그 냄새와 흡사했다.
석유냄새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기업의 제조기술이 퇴보한 건가? 아니면 내 코가 너무 예민해진 건가?
아내를 불렀다.
“냄새 안나?”
내가 묻기도 전에 아내가 먼저 소리쳤다.
“아휴! 석유냄새! 얼릉 문 열어요.”
아내의 명령 같은 호통에 한 번 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반품해요. 이건 불량이네요.”
허지만 H사 고객센터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고객님. 먼저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고객님의 불편사항을 해소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 기술진의 답변입니다. 고객님께서 석유난로의 심지를 너무 낮게 책정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일 수 있으니 사용법을 좀 더 자세히 숙지하시고 그래도 하자가 발생하면 재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따뜻한 겨울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세 번 이 답변을 읽었다.
왜냐면 내 기억속의 석유난로는 분명히 심지를 아주 낮게 내려 동그란 열망이 거무스레해도 전혀 석유냄새가 안 났는데. 지금은 열통이 빨갛게 달지 않으면 냄새가 날수 있다네?
나는 잠시 벙벙했다.
아낀다고 구질구질하지 말고 석유 팡팡 때고 후꾼후꾼하게 살아라. 그런 말 같아 삶의 질이 향상됐다기보다 소비성향이 향상된 기분이어서다.
다시한번 내 생각을 정리한다면.
“예전엔 그랬어도, 지금은 저低 란 건 없고 중中과 고高만 있다 이말 아냐?”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새 선택의 폭에 제동이 걸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밀려와서 입맛이 씁쓰레했다. 갈수록 없는 놈은 더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 접어들었구나! 그런 생각에 혓바늘이 돋칠 것 같았다.
첫댓글 소시민이 살아가는 모습을 적나라 하게 말씀해주셔서 참제미있게
읽엇 슴니다.
요즘이 가장어중간 할 때라서 온돌 하기에도 어중간 하네요
추억 속에 난로 저에게도 함께 느낄수있어
좋슴니다.
ㅋ
동시대를 함께 살며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위안됩니다
오랜 시간 함께 소통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날씨가 추워 저서 벌써 난로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저도 좋은글 보면서 올겨울더욱 춥다하니 손난로 하나라도 장만 해야 겟슴니다.
ㅎ
김일수님은 난로 없어도 걱정 없을 줄 알았는데....ㅋㅋㅋㅋㅋ
고운밤되세요
추억속에 연탄 난로와 석유 난로 본격적인 겨운 한파를 생각하게 되네요
좋은글 제미있게 잘보았슴니다.
추억이 없다면 얼마나 사는데 한기들까 싶습니다.
고운밤되세요
솔방울 주어다 난로 피우고
그위에 도시락 구어 먹던 어린시절이 생각 납니다.
오!
산아래님도 그런 추억을 간직하고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고운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