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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2
#요한계시록 #Revelation 19:4-5
4 또 二十四 長老와 네 生物이 엎드려 寶座에 앉으신 하나님께 敬拜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The twenty-four elders and the four living creatures fell down and worshiped God, who was seated on the throne. And they cried: "Amen, Hallelujah!"
Et ceciderunt seniores viginti quatuor, et quatuor animalia, et adoraverunt Deum sedentem super thronum, dicentes : Amen : alleluja.
καὶ ἔπεσαν οἱ πρεσβύτεροι οἱ εἴκοσι τέσσαρες καὶ τὰ τέσσερα ζῷα, καὶ προσεκύνησαν τῷ Θεῷ τῷ καθημένῳ ἐπὶ τῷ θρόνῳ λέγοντες Ἀμήν, Ἁλληλουϊ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보좌를 둘러앉은 24명의 장로들은 천사들은 아니고 구약의 성도 12명과 신약이 사도 및 제자 12명으로 구성된 장로회일 것이다. 물론 요한 사도도 이 장로회에 포함되어 있겠지만 아직은 그가 살아있기 때문에 공석으로 남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요한 사도는 자신이 죽은 이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을 환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24장로회에 자기자신도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보좌를 호위하는 네 생물은 선지자 에스겔이 보았던 네 생물과 동일하며 이들은 그룹이라 일컫는 천사이다. 에스겔은 각각의 생물마다 머리 사면에 네 종류의 동물의 얼굴이 있다고 본 반면에 요한 사도는 각 생물에 하나의 얼굴만을 보았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천사는 육체가 없는 영체이므로 주님께서 에스겔에게는 에스겔에게 주실 예언에 맞게 생물을 보여주셨고 요한 사도에게는 요한 사도에게 주실 예언에 맞게 생물을 보여주신 것 뿐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둘러있는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항상 그 찬란한 영광을 보고 있기 때문에 찬양의 내용도 주저리주저리 미사여구가 필요없고 단지 아멘 할렐루야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늘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실제로 보지 못하고 그저 믿음으로만 희미하게 볼 수 밖에 없는 우리들로서는 여러가지 불필요한 말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땅의 성도들의 찬양이 마냥 영혼없는 껍데기 미사여구로만 이뤄져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찬양은 네 생물과 24장로들의 찬양처럼 간결한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5 寶座에서 音聲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敬畏하는 너희들아 작은 者나 큰 者나 다 우리 하나님께 讚頌하라 하더라
Then a voice came from the throne, saying: "Praise our God, all you his servants, you who fear him, both great and small!"
Ex vox de throno exivit, dicens : Laudem dicite Deo nostro omnes servi ejus : et qui timetis eum pusilli et magni.
καὶ φωνὴ ἀπὸ τοῦ θρόνου ἐξῆλθεν λέγουσα Αἰνεῖτε τῷ Θεῷ ἡμῶν, πάντες οἱ δοῦλοι αὐτοῦ, οἱ φοβούμενοι αὐτόν, οἱ μικροὶ καὶ οἱ μεγάλοι.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이들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찬송하는 이들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신분과 역할을 의미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것은 억지로나 강압적으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우러른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찬송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들을 향한 보좌의 음성은 물론 1차적으로는 하늘의 성도들이 대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마지막 날이 오지 않은 시점에서의 이 땅이 성도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좌의 음성은 마지막 날을 고대하는 이 땅의 성도들의 신앙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서 주시는 명령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 땅에서 주님의 종이 하늘에서도 주님의 종이고, 이 땅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하늘에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이 땅에서 주님께 찬송하는 이들이 하늘에서도 주님을 찬송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성도들도 빈부귀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부귀한 성도나 빈천한 성도나 모두 주님의 종으로서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야 하며 하늘에서는 이 땅에서의 빈부귀천의 차이는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주님을 경외하지도 않으며 주님께 찬송하지도 않는 자들은 제 아무리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유력 신자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주님께 속한 자도 아니고 주님의 종도 아닌 것이다.
#20210812
#신명기 #Deuteronomy 28:58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는 무한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그들의 언어로 책에 기록하게 하신 율법과 계명 뿐이었다. 만약에 여호와께서 긍휼이 없는 신이었다면 설령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더라도 당신의 그 무한하신 속성만큼이나 무한한 계명들을 부여하셨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선택받았다는 기쁨보다는 도저히 지킬 엄두도 내지 못할만큼의 규례들 때문에 숨이막혀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열가지 계명과 그것들에 기초한 세부 규례들만을 지키도록 지정하셨고 그것도 언제든지 살펴볼 수 있도록 책과 문자로 남겨주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 다섯권의 모세의 책들만으로 충분하였으나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여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섭리해 오셨는지와 그들에게 보내신 선지자들의 이야기들이 더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분의 태생과 사역에 대한 것들과 그분에게서 직접 가르침과 사명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들이 교회와 성도의 신앙에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기록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제는 신구약 66권이라는 성경을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앙을 위해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66권의 신구약 성경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아내야 할 책임과 의무와 권리가 있다.
아예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성경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에 교회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성경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을 받고 유익을 누리는 혜택을 입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표면적으로 교회에 속하여 성경을 받았으면서도 성경을 따라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고 단지 자기 스스로의 완악한 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매사에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로 지적능력이 부족한 자들은 성경이 너무 방대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내팽개치고 기도모임이나 예배나 교회봉사 등의 외적인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자들은 아무리 교회 생활을 수십년 하더라도 예수천당 불신지옥 수준의 지식에서 더 자라지 못하고 별달리 신령한 열매를 이루지 못한다. 반면에 지적능력이 탁월한 자들은 성경이 너무 단조롭고 뻔하며 다 아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성경에서는 더이상 새로운 진리를 찾을 수 없다 하여 소홀히 여기고 자기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여러가지 사상들에 몰두하게 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신실한 자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런자들은 단지 성경의 가르침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정치나 경제 등에도 손을 뻗치기 때문에 복음의 순수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성경을 너무 버겁게만 여긴다거나 너무 식상하게만 여기는 것은 모두 성경을 뒷전으로 하게 되는 시발점이고 성경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20200812
#레위기 #Leviticus 19:4
4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라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찾지 말라는 것이며,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는 것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이는 십계명의 1-2계명에 해당한다. 여호와 외의 다른 신들이 헛되다는 것은 그 신들은 세상을 창조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짓지도 않았으며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도 않는데다 결정적으로 존재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신들이 생기는 이유는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자기들의 육신의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여호와를 없는 존재로 치부해버리고 지각할 수 있는 피조물들에 무언가 신성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하늘의 일월성신을 비롯하여 바람과 번개와 천둥과 일식과 월식 등의 자연현상들, 무성한 나무, 가공할만한 짐승, 심지어 곤충들까지 신으로 섬기는 우를 범해 왔다.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들 보기에 여러 피조물들의 장점만을 모아서 융합시킨 존재를 상상하여 신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건 자기들이 만든 헛된 신들을 섬기기 위해 금, 은, 동, 철, 목, 석 등의 재료들로 그 형상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헛된 신들을 섬기고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무언가 신령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육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호와 보시기에 사람들의 이 모든 행위는 자기들의 탐심에서 비롯된 헛된 짓에 불과한 것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에게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대표적인 헛된 신은 진화론에 기반한 과학과 우주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외계인이다. 무신론자인 유시민 작가의 말대로 오늘날 과학은 인류의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사람들이 과학을 절대 진리로 생각하는 이유는 과학이란 학문 자체가 눈에 보이는 사물들에 대한 원리를 탐구하는 것인데다 고도의 지성을 활용한 빈틈없는 논리로 체계를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적이라 하면 탁월한 지성을 갖춘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했겠거니 하면서 그대로 수용하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과학자들 자체도 워낙에 남들보다 탁월한 지성을 갖춘데다 관찰과 실험과 이론 등을 오랜기간 진행해 온 것으로 인해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은 수용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결국 무신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과학자라 칭했던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도 자기의 탁월한 과학적 지성으로 우주의 기원을 추론하면서 신을 부정하는데 힘쓴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 과학자들은 인류의 진화를 유전자에 내장된 모종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영향력 있는 과학자들이 자기들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결국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지극히 종교적인 목적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학자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연구를 자기 힘으로 입증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과학자들의 기본 사상이 자기들의 생각과 부합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권위를 빌미로 추종하는 것인데 이 또한 지극히 종교성을 띠는 행태이다.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과학자들은 소위 자기들의 기독교 신앙도 버릴 수 없고 과학적인 입장도 버릴 수가 없어서 둘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에 좀 더 비중을 두는 창조과학과 과학에 좀 더 비중을 두는 유신진화론이다. 그러나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은 둘 다 과학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아서 입에서 토해버릴 미지근한 무엇과도 같다. 특히나 유신진화론은 철저히 진화론에 입각해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물론이거니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들에 대해서 단 하나도 증명을 하지 못한다. 발람의 가르침처럼 신자를 미혹하는 유신진화론과 같은 거짓 이론들에 대해서 교회는 굳이 이들과 설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 저들이 우주의 나이는 137억 년이고 지구의 나이는 46억 년이며 인류는 수십만 년에 걸쳐 진화되어 왔다고 해도 우리는 그저 성경의 기록대로 우주만물은 6일 동안 창조 되었고 인류의 조상은 온전한 인간 아담과 하와 단 둘 뿐이었으며 인류의 역사는 기껏해야 6천여 년 남짓이라고 믿고 고백하면 된다. 이런 우리의 신앙고백에 대해 유신진화론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비웃고 조롱하더라도 그냥 감수하면 된다. 우리 믿음에 대한 판단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실 것이다.
이런 과학자들과는 정반대로 어떤 이들은 이 광활한 우주에는 분명 외계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 상상한다. 그들이 상상하는 외계인은 인류보다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과학과 문명이 발달해서 어떤 외계인은 인류를 생성했다고도 하고 어떤 외계인은 인류에 여러 기술과 문명을 전수했다고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상상하는 외계인을 성경과 접목시켜서 성경의 여러 기적들이 사실은 외계인이 한 것이라고도 한다. 외계인 신봉자들은 외계인들과 접속하기 위해서 어떤 과학 기술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주술행위와도 같은 의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외계인은 단순히 상상을 넘어선 신적인 숭배의 대상인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우주에 인간처럼 지성과 감성을 가진 수많은 외계인들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관점으로는 그 외계인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것이므로 사탄이 그 외계인들을 가만두지 않고 인간처럼 유혹해서 타락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말고도 외계인들도 구원하셔야 하기 때문에 결국 우주에 존재하는 외계인 종족의 수만큼 예수님께서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을 겪으셔야 했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람 이외에도 외계인들의 육체와도 연합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시며 그 이외의 존재일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따라서 이 우주가 아무리 측량할 수 없이 광활하고 별의 갯수가 무한히 많다 하더라도 지구의 인류 이외에는 다른 외계인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성경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렇게 무신론적 진화론에 입각한 과학과 범신론에 입각한 외계인 사상을 절묘하게 합성해 놓은 것이 바로 영화 어벤저스, 그 중에서도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라 할 수 있다. 토니 스타크는 울트론에 맞서기 위해 자기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쟈비스와 브루스 배너 박사의 생명공학을 이용하면 지금의 인류에서 한 단계 진화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률이 97%에서 멈추고 나아가지 않자 외계인인 토르의 능력을 빌려서 나머지 3%를 진행시켜 '비전'이라는 인간을 닮은 새로운 초능력 생명체를 만들어 낸다. 비전의 정신인 쟈비스는 한낱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한데도 자기를 창조한 스타크에게서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학습하고 진화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배제한 모든 헛된 신들과 사상들을 접할 수 있다.
#20190812
#매일성경 #에스겔 21:1-7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는 순종하는 의인들은 반드시 구원하시고 불순종하는 악인들은 반드시 멸하신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환난과 재앙에서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게 반드시 지켜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자들은 뜻하지 않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힘든 일을 주시는지 원망하기도 하고 제발 여기서 건져내 달라고 간구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신 뜻 안에서 신자가 처한 고난에서 즉각적으로 건져내 주시는 일도 있다. 그러나 이는 보편적이지 않고 아주 특별한 경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통상적으로는 마치 하나님께서 고난을 당하는 신자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내버려 두시는 경우가 많다.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사건 사고는 악인들뿐만 아니라 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임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길, 이스라엘 땅에서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의 칼로 끊으신다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의인이나 악인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을 당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와 유익이 어디있는가 하는 반문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은 이 땅에 대해 한시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의인이나 악인이나 하나님의 칼에 죽었다 하자. 그러나 이후 의인은 하나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고, 악인은 뜨거운 지욱불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의인에게 있어 이 땅에서 당하는 일시적인 재앙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한 순간의 관문에 불과하지만, 악인에게는 끝없는 고통의 시작점인 것이다. 의인은 재난을 당하면서 더욱 하나님을 의존하고 신뢰하게 되어 획기적으로 거룩함이 상승한다. 그에게 닥친 고난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더욱 많이 가깜게 하므로 하나님 나라에 더욱 가까워진다. 고난으로 인해서 겉사람은 빠르게 낡아지고 후패하여도 속사람은 그만큼 새롭게 된다. 그러나 악인은 재난을 당할수록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며 모독한다. 의인의 거룩함이 순수해지는 반면에 악인은 자기의 악이 재난으로 인해 더욱 순수해진다. 재난으로 인해 악인은 겉사람도 낡아지고 속사람도 온전히 더러워진다. 결국에 그는 마귀의 장성한 분량까지 사악해져서 마귀와 함께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백성을 타락시킨 장본인이나 그의 아들은 의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아들에게 왕위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갑작스런 불치병을 주셔서 그의 생명을 가져가셨다. 여로보암의 아들은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일찍 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그 또한 분명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의 댓가를 받은 것 뿐이라고 지껄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패역한 북 이스라엘 내에서 여로보암의 의가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 아닐까. 그가 만약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한들, 북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보다는 자기의 의 마저도 내어버리게 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타락에서 지켜주신 것은 아닐까 싶다. 이처럼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뜻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욥의 세친구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으면 교회 내의 참된 신자나 아닌 교인이나 교회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참된 성도라고 해서 담임목사의 범죄로 인한 영향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범죄하는 교회에 징계를 내리실 경우에도 참된 신자는 그 징계를 피해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교회적 징계는 참된 신자에게는 한편으로는 책망의 채찍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방편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신자는 사악한 담임목사의 범죄로 인해 교회가 당하는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잠잠히 묵묵히 겸손히 받아들인다. 또힌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신자가 교회의 어려움으로 인해 절망하지 않도록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부어주셔서 능히 견뎌내게 하신다. 따라서 참된 신자는 설령 악한 담임목사가 교회를 먹튀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교회 재건에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를 배신하고 먹튀한 담임목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발람과 같이, 가룟 유다와 같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처치해 주실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