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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龍谷이 있는 산은 현대 지명으로는 동대봉산으로 통용되지만, 금석학과 고문헌 기록에 근거한 지명은 은참산(恩站山)*이다.
조선 후기 금석학자이자 서화가인 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默, 1792~1840)의 저서 『나려임랑고(羅麗琳琅攷)』에 관련 기록이 잘 남아 있다.
이조묵은 경주 일대의 신라·고려 시대 금석문과 폐사지를 고증하면서 무장사지, 황룡사지 등이 위치한 이 산을 은참산(恩站山)**으로 기록하여 당시 산의 역사적 명칭을 밝혀두었다.
조선 시대 문헌과 금석문 고증에서는 은참산(恩站山 또는 隱霑山)으로 표기되며, 현대 지적 및 등산 지도상에서 동대봉산(東大蜂山)으로 재명명되어 쓰이고 있다.
『나려임랑고』는 경주 지역 불교 유적과 석조 문화재의 위치, 명문, 내력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귀중한 금석학 연구서이다. 황룡골 깊은 계곡의 절터 역시 은참산 영역 내의 주요 고려 시대 사찰터로 고증되는 바탕이 된다.
동대봉산(東大蜂山)이라는 산이름 자체의 지명 유래는 왕실에서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국가 관리 구역으로 정해 통제했던 ‘봉산(封山)’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후기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무덤인 연경묘(延慶墓)에 공급할 숯과 향나무를 확보하기 위해 지정된 향탄산(香炭山) 봉산(封山)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일대의 계곡 및 산림은 조선 1831년(순조 31년, 신묘년)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 연경묘에 모셔졌을 때, 왕실 제례에 쓸 제용 숯과 향을 생산·공급하는 '연경묘 향탄산'으로 봉해졌다.
경주 지역의 불령·시령·수렴포 봉표는 동대봉산과 연결되는 추령/수렛재 및 암곡, 추원리 일대 바위에는 ‘延慶墓香炭山 (연경묘 향탄산)’으로 시작하는 봉표(封標) 각석으로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왕실 봉산이었음을 명확히 증언한다.
이처럼 왕실이 입산을 금하고 나무와 숯을 관리하던 봉산(封山)의 역사가 수십 년간 이어지면서, 원래 이름인 은참산(恩站山) 대신 ‘동쪽에 있는 큰 봉산’이라는 의미의 동대봉산(東大封山/東大蜂山)이라는 통칭이 대중과 지형도상에 정착하게 되었다.
‘동쪽의 큰 봉산(東大封山)’으로 불리던 행정적·기능적 명칭이 근현대로 넘어오며 의미를 잃자, 자연스럽게 일반적인 산봉우리를 뜻하는 ‘동대봉산(東大峰山 / 東大蜂山)’으로 한자가 와전되고 변형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봉산(封山) 제도가 폐지된 일제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봉할 봉(封)’ 자의 역사적 맥락이 잊혀졌고, 산의 형태를 따서 ‘봉우리 봉(峰)’이나 ‘벌 봉(蜂)’ 자로 환자(換字)되어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등에 정착해 버렸다.
여기에다 최근 가을 억새 군락지가 유명세를 타면서 무장사지(鍪藏寺址)의 이름을 딴 '무장산'이라는 편의적인 명칭이 대중적으로 굳어지고 있는 뼈아픈 현상아져 벌어졌다. 이는 산 전체가 품고 있는 방대한 불교 유적과 역사적 맥락을 단 하나의 관광지 이름으로 납작하게 축소해 버렸다.
황룡골 황룡사지(黃龍寺址)의 백제계 고려 석탑 부재나 이조묵의 『나려임랑고』에 기록된 생생한 금석학적 가치들은 '무장산'이라는 가벼운 이름 아래에서는 그 의미가 온전히 살아나기 어렵다. 은참산(恩站山)이라는 고유 명칭이 회복되어야만, 신라의 웅장한 쌍탑과 고려 석수들이 남긴 두툼한 우동마루의 흔적이 공존하는 이 산속 폐사지들의 입체적인 역사가 제대로 조명받을 수 있다.
역사성 검증 없이 대중의 접근성이나 상업적 관광 홍보만을 염두에 두고 ‘무장산’이라는 표기를 앞장서 사용하는 현실은 지자체 행정의 얕은 역사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장봉(鍪藏峰)이나 무장사지(鍪藏寺址)라는 특정 유적의 이름을 산 전체의 대표 명칭으로 확대 해석하여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산이 지닌 고유의 역사 공간적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무장봉(鍪藏峰)이라는 명칭 역시 고서나 옛 지도에 수록된 유서 깊은 산봉우리 지명이 아니라, 20세기 후반 등산로가 개발되고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편의상 붙여진 현대의 산물이다.
신라 문무왕이 투구와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사(鍪藏寺) 전승과 억새밭이 펼쳐진 정상 부근의 지형을 결합해 근현대에 조어(造語)된 지명에 불과하다.
조선 시대 군현지도나 대동여지도 등 전통 고지도 어디에도 '무장봉'이라는 봉우리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 전체를 통칭하던 은참산(恩站山) 등의 본래 지명만 존재할 뿐이다.
1980~1990년대 이후 등산객들의 이정표 식별과 지자체의 관광자원 개발(억새 군락지 조성)이 맞물리면서, 무장사지 뒷산이라는 뜻으로 '무장봉'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공식 지명처럼 굳어졌다. 관광·등산 문화가 만든 편의적 명칭일 뿐이다.
20세기 후반에 급조된 '무장봉'이라는 이름이 정작 산의 뿌리인 '은참산'을 밀어내고, 급기야 산 전체를 '무장산'으로 부르는 주객전도의 역사 왜곡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은참산 황룡골 황룡사지가 품은 천년의 고증과 고려 백제계 석탑의 고유한 가치가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무장봉', '무장산'이라는 조악한 행정·관광용 지명에 묻혀버린 것이다.
역사적 시원과 문헌적 근거에 비춰볼 때 지자체와 대중의 이러한 가벼운 지명 소비가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현대에 쓰이는 지명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고유 역사 지명: 금석문과 문헌(『나려임랑고』 등)에 명시된 본래 산 이름 ‘은참산(恩站山)’
조선 후기 행정 지명: 왕실 향탄산 지정으로 붙은 ‘동대봉산(東大封山)’
근현대 변형 지명: 봉산의 의미가 변질되어 정착된 ‘동대봉산(東大峰山/東大蜂山)’
20세기 후반 관광용 조어: 최근 무장사지와 억새밭으로 인해 급조된 ‘무장봉 / 무장산’으로 정리된다.
한자 표기의 왜곡 과정까지 파악해 보니, 20세기 후반의 ‘무장산’이나 한자가 변형된 ‘동대봉산’ 대신, 천년 유적의 뿌리를 온전히 담고 있는 ‘은참산(恩站山)’이라는 고유 명칭을 되찾아야 할 정당성이 더욱 확고해진다.
조선 후기 금석학자 이조묵(李祖默, 1792~1840)의 저술인 『나려임랑고(羅麗琳琅攷)』의 「신라무장사비(新羅鍪藏寺碑)」 조에는
「新羅鍪藏寺碑」
在慶州府恩站山
(신라무장사비는 경주부 은참산에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조묵은 당시 경주 일대의 신라·고려 시대 금석문 현장을 직접 조사하거나 탁본을 수집하여 정리하면서, 무장사비(아미타불조상사적비)가 위치한 산의 명칭을 ‘慶州府 恩站山(경주부 은참산)’으로 또렷하게 명시하였다.
동대봉산'이나 '무장산'이라는 후대의 변형·관광용 명칭과 달리, 조선 후기 금석학자들이 현장을 확인하고 기록한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문헌적 정본(正本)임을 증명하는 1차 고증 사료로서의 의미를 디니는 구절이다.
이 짧은 한 줄의 원문 기록이야말로 은참산이라는 역사적 지명을 회복해야 하는 가장 확고하고 단단한 학술적 근거가 된다.
이조묵이 책 제목을『나려임랑고(羅麗琳琅攷)』라고 붙인 데에는 금석학적으로 매우 깊고 멋진 의미가 담겨 있다.
琳(옥 이름 림)과 琅(옥 이름 랑) 모두 빼어나게 아름다운 옥과 보석을 의미한다.
책 제목 속 비유적 의미는 '신라(羅)와 고려(麗)의 보석(琳琅) 같은 금석문들을 고찰(攷)한다'는 뜻이다.
이조묵은 땅속에 묻히거나 산중에 방치되어 잊혀가는 신라·고려의 탁본과 비석, 금석문 하나하나를 단순한 돌덩이가 아닌 '역사의 보석(琳琅)'으로 여겨 이를 귀하게 수집하고 고증했던 것이다.
책 이름에서부터 사료를 대하는 당대 금석학자의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저자 이조묵(李祖默)의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 등과 교유하며 당대 금석학과 서예계에서 높은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나려임랑고는 조선 후기 실학파와 금석학의 발달 속에 탁본을 수집하고 직접 현장을 답사하여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편찬되었다.
신라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는 주요 사찰 비석, 명문 석순, 백제·신라 관련 금석문 탁본 및 비문 목록을 망라했다.
단지 비문 내용을 옮겨 적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비석이 존재하는 위치("在慶州府恩站山"와 같은 구체적 지명)와 당시 비석의 파손·보존 상태, 탁본의 유래 등을 정밀하게 수록했다.
금석문의 역사적 사실 고증뿐만 아니라 글씨체(서체)의 미학적 특징과 가치를 입체적으로 평가했다.
조선 후기 현장 답사 및 금석문 실측을 바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후 실전(失傳)되거나 파손된 비석의 원래 위치와 명문 내용을 추적하는 가장 확고한 1차 사료로서의 독보적 가치를 지니며 표준 기준작 역할을 한다.
후대에 왜곡되거나 변형된 지명(예: 은참산 ↔ 동대봉산/무장산)과 사찰의 본래 명칭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향토사와 문화재 고증의 핵심 열쇠가 되고 지명 및 유적 복원의 열쇠가 된다.
김정희의 『금석과안록』 등과 더불어 19세기 세도정치기 속에서도 피어난 조선 금석학의 높은 수준과 학술적 깊이를 증언해 주는 고전이며 조선 후기 금석학의 결정체이다.
『나려임랑고』 「신라무장사비」 조 주요 원문을 보면
【제목 및 소재지】
新羅鍪藏寺碑 (신라무장사비)
在慶州府恩站山 (경주부 은참산에 있다)
【비석의 상태 및 고증】
碑今斷折 零碎極甚
(비석은 지금 부러지고 깨어져 파편이 매우 심하다.)
書體 卽新羅金石之優者
(글씨체는 즉 신라 금석문 가운데 매우 뛰어난 것이다.)
【음기 및 인물 언급】
陰記 有亞飡金雄元等名
(비석 뒷면(음기)에는 아찬 김웅원 등의 이름이 있다.)
새로운 사실이나 철저한 사료 고증을 제시해도, 권위나 학벌, 혹은 기존에 자신들이 써 온 기득권식 글에 갇혀 '비전문가의 주관적 견해'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벽에 부딪힐 때가 많다.
기존 향토사학계가 보이는 태도의 원인은 권위주의와 학술적 타성 때문이다.
1차 사료(『나려임랑고』 등)를 직접 대조하기보다는, 기존에 출판된 향토지나 관행적인 자료집을 그대로 베껴 쓰며 권위를 유지해 온 습관 때문인 것이다.
또 자기 오류 인정의 부담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이미 지역 신문, 지자체 보고서, 기존 저술 등에 '무장산'이나 '동대봉산', '隱霑山'으로 기고해 놓은 내용의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작용하는 것이다.
현장 실물 고증의 부재이다. 문헌에만 매몰되거나 반대로 현장 답사만 하는 경우가 많아, 백제계 석탑 옥개석의 두툼한 우동마루 같은 미술사적 실물 데이터와 1차 문헌의 지명을 결합하는 통섭적 시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에서 결국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값'이 아니라 '문헌과 실물이 증언하는 팩트'이다.
당장은 행정적·상업적 편의에 밀려 ‘은참산(恩站山)’이라는 소중한 이름이 묻혀 있는 듯 보이지만, 단단한 기록과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언젠가 역사와 학계가 제 이름을 반드시 되찾아 줄 것이라 믿는다.
‘隱霑山(은점산)’이라는 표기는 정사(正史)나 조선 시대 관찬 지리지(동국여지승람 등)의 공식 명칭이 아니라, 조선 후기 금석학자나 문사들의 필사본, 개인 문집, 그리고 일제강점기 유적 조사 기록 등에서 한자 음훈을 차용해 표기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조선 후기 금석문 조사록 및 개인 문집 (필사본)에서 조선 후기 신라·고려 시대의 금석문을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하던 학자들이 한자 恩站(은참/은점)의 음을 한자의 뜻이나 소리에 맞춰 ‘隱(숨을 은)’ 자와 ‘霑(젖을 점/참)’ 자로 달리 적은 경우이다.
은(恩) → 은(隱)으로 바뀐 건 깊은 골짜기 산중에 ‘숨어 있다’는 뜻을 살려 隱 자로 와전되었고,
참/점(站) → 점/참(霑)으로 변한 건 ‘참(站)’ 자의 한자음과 구전되는 현지 지명 음에 맞춰 霑 자로 혼용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1910~1930년대) 경주 지역 사찰터와 무장사지·황룡사지 일대를 조사하던 총독부 조사관(세키노 타다시 등)이나 야마모토 등 일본인 학자들의 유적 보고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경주남산의 유적』 관련 기록 등)에서 현지 주민들의 구전을 한자로 채록할 때 ‘隱霑山’ 또는 ‘隱霑谷’ 등의 표기가 병기되어 등장한다.
20세기 초중반 경주 지역 향토사학자들이 이조묵의 『나려임랑고』나 미수 허목 등의 기록을 재인용·연구하는 과정에서, 恩站(은참)의 한자 복사 오류나 한글 표기 '은점산/은참산'을 한자로 재번역하는 과정에서 隱霑山 표기를 혼용하여 사용했다.
『나려임랑고』에 명시된 恩站山(은참산)이 원전이자 금석학적 정본 표기이며, 隱霑山은 후대의 필사 과정이나 근현대 채록 과정에서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쓰며 발생한 와전(訛傳) 및 이표기(異表記) 사례이다.
가장 정확한 1차 사료이자 고증서인 이조묵의 『나려임랑고』에 ‘恩站山’으로 명확히 표기되어 있으므로, 한자가 완전히 다른 ‘隱霑山’은 원전을 잘못 옮겨 적은 표기이다.
조선 후기나 근현대를 거치며 현지에서 '은참산/은점산'으로 불리던 소리를 들은 이들이 정식 한자 표기를 확인하지 않고, 깊은 산중이라는 뜻의 '숨을 은(隱)'과 '젖을 점(霑)'을 임의로 조합해 붙인 전형적인 음사 오류이다.
한자가 바뀌면 그 지명이 가진 역사적 맥락(우체국/역참과 관련된 '站'의 의미 등)이 완전히 사라지고 의미 없는 한자의 조합만 남게 된다.
따라서 ‘隱霑山’ 역시 ‘동대봉산’이나 ‘무장산’처럼 되돌려야 할 잘못된 표기이며, 금석학적 뼈대를 지닌 ‘은참산(恩站山)’만이 이 지역과 황룡골 유적의 역사성을 담아내는 유일한 정태(正態)의 명칭인 것이다.
현장 답사나 고문헌 고증에 깊이 접근하지 않는 이상, 경주 지역의 여러 향토사학자들이나 연구자들조차 이러한 선명한 팩트를 놓치고 관행적인 표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 『나려임랑고』 원문의 ‘恩站山’ 표기나, 현장 석탑 옥개석에 각인된 백제계 우동마루의 구체적 조형미 같은 실물 데이터는 문헌 분석과 눈썰미를 겸비해야만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결정적 대목들이다.
향토사 연구에서 명칭 왜곡이 반복되는 까닭은 사료 재인용의 관행에서 기인한다. 1차 금석학 사료인 『나려임랑고』를 직접 교감(校勘)하기보다, 일제강점기 기록이나 근현대 교재의 잘못된 표기(隱霑山) 또는 지자체의 관광용 조어(무장산, 동대봉산)를 검증 없이 재인용해 왔기 때문인 것이다.
실물 부재와 문헌 결합의 부재때문이다. 석탑 부재의 형태적 특징(백제계 양식)과 산명의 문헌적 뿌리(은참산)를 서로 연결 지어 통섭적으로 분석하는 연구가 드물었다.
원전과 현장을 대조하며 ‘은참산(恩站山)’이라는 정확한 역사 지명과 고려 시대 백제계 옥개석의 학술적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관성적인 향토사학의 오류를 깨뜨리는 진정한 고증 작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