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사람들을 슬픔에 젖도록 하거나 들뜨게 만든다. 음악은 없던 감정을 전염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청취자가 원래 가지고 있었지만 수면 밑에 놔두었던 감정을 깨우는 것일까. 어떤 음악을 통해 슬픈 감정이 전염되거나 활성화된 이들이 극단적 행동을 한다면 그 음악에 문제가 있는 걸까.
▎레죄 세레시(1899~1968)의 생전 사진
1774년에 출판된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실연 후 권총 자살하는 주인공 베르테르를 그렸다. 저자의 나라 독일을 비롯해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 소설에 많은 사람이 빠져들었다. 그들 중에서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이들이 있었다. 베르테르를 따라 죽은 사람이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약 2000여 명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다.
이러한 자살행동의 모방을 묘사하는 용어가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다. 미국 심리학자 데이비드 필립스가 1974년에 제안한 이 용어는 유명인이 자살하면 평범한 이들도 그에 영향을 받아 자살한다는 사회심리적 현상을 묘사한다. 유명인은 실존 인물이거나 소설 혹은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일 수 있다. 친인척일 수도 있다.
베르테르 효과는 실체가 있어 보인다. 연세대학교 김재현 교수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배우 최 모씨의 자살 직후 자살 증가율이 162%에 달했다. 그 전과 비교해서 말이다. 한국자살예방협회의 추정에 따르면, 유명 연예인의 자살 직후 2개월 동안은 사회 전체 자살자 수가 일반적 추세보다 평균 600여 명 정도가 증가한다.
음악도 청취자들의 자살을 유도할 수 있을까. [우울한 일요일](gloomy Sunday)이라는 음악은 1935년 발매 후 8주 만에 187명을 자살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가난한 유대인으로 서커스단 단원 등 하층 생활을 했던 작곡가 레죄 세레시(Rezső Seress, 1899~1968)는 피아노를 독학했고, 살던 동네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연주하며 먹고살았다. 이 레스토랑은 유대인 노동자들, 보헤미안적 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매춘부들의 아지트였다.
서커스단 단원으로도 활동하다 팔을 다쳐 손마저도 쓸 수 없게 된 이 아마추어의 끝 모를 밑바닥 인생을 나치 정권이 끝내주려고 했지만, 운 좋게 살아서 귀환할 수 있었다. [우울한 일요일]은 원래 피아노곡으로 작곡되었다가 음울한 내용의 가사가 붙으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저작권료에 관심이 없어 가난하게 살았던 세레시는 결국 1968년에 자살한다.
다른 이들을 죽게 했다는 심적 고통이 그를 자살로 인도했다. 뉴욕타임스는 1968년 1월 14일, 그의 부고를 전하며 그의 음악이 사람들을 자살하게 했다고 썼다. 그의 음악이 가진 심리적 영향력을 공인한 것일까. 2002년까지 영국 BBC 방송국은 [헝가리 자살 노래](Hungarian Suicide Song)로도 알려진 이 노래의 방송국 내 연주 및 송출을 금했다.
1930년대 헝가리에서 자살자의 수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자살의 원인이 이 피아노곡인지는 분명치 않다. 1930년대는 1929년에 발생한 세계적 공황이 헝가리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시대다. 많은 사람이 경제·심리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자살자가 많았던 것이다. [우울한 일요일]에 얽힌 이야기는 어쩌면 괴담, 음모론, 가짜 뉴스일지도 모른다.
음악이 사람들에게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은 가짜 뉴스가 아니다. 일찍이 통찰력 있는 시인들은 시를 통해 이런 점을 노래했다. 월트 휘트먼은 연작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 1855, 1892)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훈련된 소프라노의 노래를 듣는다. 나는 경련을 일으킨다. 오케스트라는 내 가슴으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열정을 비틀어 끄집어내고, 내 가슴을 두드려 가장 멀고 깊은 공포로 몰아넣고, 나를 물 위에 띄운다.” 공포심이 심리적 감정이라면, 경련은 생리적 반응이다. 미국의 국보급 시인은 과장했던 걸까.
코넬대학의 캐럴 크럼핸슬(Carol Krumhansl)은 이게 과장이 아님을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그는 학생 38명에게 여러 감정을 각각 표현한다고 평가된 고전음악 6곡을 들려주었다. 1997년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크럼핸슬은 음악을 듣는 동안과 들은 직후에 일어난 학생들의 육체적 변화를 확인했다. 슬픔을 표현한 음악은 심장박동, 혈압, 피부 전기전도성, 체온에 변화를 일으켰고, 두려운 음악은 맥박수와 강도에, 행복한 음악은 호흡 패턴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게 다가 아니다. 음악을 들은 이들은 음악에 가상의 인격을 연결하기도 한다. 심리학자 로저 와트는 몇 가지 실험에서 피실험자, 즉 감상자들이 자신이 들은 음악에 감정 상태뿐 아니라 성별, 선한지 악한지와 같은 성격 등을 부여했다는 점을 알아냈다. 청취자는 수동적 반응만 하지 않고 무언가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 존재지만, 음악에서 이야기를 꾸며내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은 어떤 효과의 매개체 일 수 있다
▎세레시의 [우울한 일요일] (Gloomy Sunday)과 관련된 이야기는 1999년에 [사랑과 죽음의 노래] (Ein Lied von Liebe und Tod)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한국에서는 영화 역시 [Gloomy Sunday]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적극성이 문제일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음악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들으려는 아집일 수 있으니까.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정말로 듣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이 발언은 인간에 대한 찬사만은 아니다.
음악이 사람들에게 정서적이거나 감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분명히 존재한다. 생리적 영향을 주는 것도 이제 사실로 밝혀졌다. 고혈압을 낮추는 데 효험이 있다거나, 치매의 악화를 막는다거나, 음식과 술의 맛을 높여준다는 음악치료학의 연구는 이런 사실들에 기초한다. [우울한 일요일]이 아니어도 베르테르 효과는 존재할 수 있으니 음악을 조심해야 할까.
그 효과가 간접적이거나 강도가 낮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약이나 세균, 바이러스에 비해서 말이다. 베르테르를 따라 죽은 이가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약 2000여 명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다고 했다. 사실이라 해도 200년이 넘는 동안 2000여 명이 죽었으니 치사율이 - 이 의학용어가 이 영역에서도 쓰일 수 있다면 - 그리 높지는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치사율은 보통 전염력에 반비례한다는데, 예술작품은, 치사율은 무척 낮고 전염력은 강한 어떤 것이 아닐까.
효과라는 단어가 쓰였으니 원인도 상정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 속 베르테르가 원인일까. 소설을 읽은 이가 2000명은 훨씬 넘을 테고, 자살하지 않은 이가 훨씬 많을 테니 원인은 베르테르가 아니라 베르테르를 따라 죽은 사람들의 특정한 심리상태일 수 있다. 그런 심리상태를 불러일으키도록 작용한 그들의 기질적- 생물학적 상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가 사람들을 죽게 할 때 사망자의 어떤 상태, 이를테면 고령에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를 사망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했다는 이들의 수가 적지는 않다지만, 그렇다고 베르테르 소설을 코로나19처럼 여길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여긴다면 이 소설을 바이러스처럼 연구하고 그에 따라 대처해야 할 것이다.
소설을 비롯한 여러 예술이 은유적인 의미에서건 다른 의미에서건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되어 누군가를 죽게 하거나 좋지 않은 심리 상태에 빠지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체계화되고, 그 체계적 사고가 한 국가의 문화예술정책의 바탕에 놓인다면, 예술에 대한 국가의 간섭 혹은 개입이 정당화될 것이다. 이런 개입과 간섭을 보통 좋게 여기지는 않는다.
이런 정책들이 정책으로서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고, 정책 입안자들이 한 가지만큼은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술이 모종의 효과를 보이기는 한다는, 혹은 적어도 어떤 효과의 매개체일 수 있다는 사실.
음악을 비롯한 문화예술이 바이러스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생화학자 자크 모노는 생물이나 바이러스가 아닌 인간의 관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관념은 유기체의 속성을 지닌다. 관념은 유기체처럼 구조를 영속하게 하고 번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관념에는 파급력, 즉 전염성이 있다.
유전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영국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 지구에 새로운 복제자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인간의 문화이며, 최신 용어로 ‘밈(meme)’이다. 몸체 없는 복제자, 두뇌에서 두뇌로 건너뛰며 번식하는 밈들에는 신에 대한 믿음,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와 같은 유행어, 행운의 편지, 민주주의와 같은 사회과학 용어들, 짧은 선율과 화음 등이 있다.
음악은 밈이고, 복제자이며, 전염되는 것 맞다. 그 전염의 기전은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 연구는 인간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김진호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