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기도 유행을 타는 모양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밥그릇은 놋쇠로 된 식기에 담아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제때는 대동아 전쟁 말기 물자가 부족해지자 항공유를
만든다고 민초들에게 송진을 채취하라고 하여 멀쩡한 소나무에 상처를 내어 송진을
수탈해 갔는데 지금까지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밀양 표충사 입구 소나무 숲에 가면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서 있는데 그 밑둥치를 보면 주지껍질이
벗겨져 움푹하게 패인 흔적이 있다.
놋그릇도 대포나 탄환을 만드는 재료로 쓴다고 공출내라고 하여 뺏았아 갔다고 하는데
어떤 집안에서는 놋그릇을 빼앗기면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고 우물 속에 감춰놓고 없다고
버텼다고 한다. 제사음식을 유기가 아닌 하그릇에 담아 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집도
놋쇠그릇을 어디에 감췄던지 용케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밥그릇외에는 사발 종지 접시 쟁반
툭바리 사구 동이 등은 도자기를 썼다. 놋쇠는 깨지지 않아 오래 쓸 수 있어 좋기는 하나 무겁고
녹이 빨리 슬어 제사때는 어머니가 놋그릇 닦는데만 하루 종일 매달리기도 하셨다.
세월이 흐르자 놋그릇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양은 그릇과 스텐 그릇으로 대체되었다. 밥솥도
무쇠로 된 조선 밥솥에서 스텐이나 알루미늄으로 된 압력밥솥으로 바뀌었다. 주거형태가
아파트화 하면서 주방용기들도 많이 바뀌게 된 것이다. 삼사십년 전인가 한 때 파이렉스(Pyrex)
유리로 된 주방용기들이 신제품으로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다. 집사람도 파이렉스 편수냄비 하나를
사 와 오랫동안 유용하게 잘 썼다. 열에 강하고 투명하여 혼자 있을 때 라면 끓이는데 제격이었다.
작년에 혼자서 파이렉스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식탁에서 빈 그릇을 개수대로 옮기다가 뚜껑이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또르르 한참 굴러가다 베란다 타일 바닥에 엎어지더니 박살이 났다. 거실 바닥에는
비닐 장판이 깔여져 있어 쿳션 역할을 했지만 타일 바닥에선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타일도 제딴에는
고온에서 구워져 나온 것으로 열이나 있는 놈인데 어디서 굴러온 파이렉스란 놈이 와서 집쩌적이니
가만둘리 만무하다. 아뿔싸! 그 후 혼자서 신세계 백화점 주방용기 코너를 기웃거려 보았으나 파이렉스
주방용기를 파는 데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뚜껑만 팔면 사려고 했던 것이다.
며칠전 걷기 운동중에 아파트 쓰레기장 옆을 지나치는데 파이렉스 냄비 3점이 버려져 있었다. 혹시 뚜껑이
있나 싶어 살펴보니 모두 뚜껑이 없었다. 아마도 뚜껑이 깨졌거나 도망간 것 같았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뚜껑이 없으면 쓸모가 별로 없다. 내다 버린 사람도 아마 쓸모가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후 엊그제 쓰레기장에서 보았던 파이렉스 냄비 2개가 우리집 목욕탕 욕조 속에 들어 있지 않은가.
우리집에는 둘만 남았으니 내가 갖다놓지 않았으면 분명 아내가 갖다 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아내는 나더러
쓰레기장에서 남들이 버린 책들을 주워온다고 핀잔을 준다. 옳다 됐다. 내게도 반격의 기회가 온 것이다.
저녁때 아내에게 "뭣땜시 남이 버린 파이렉스를 주워 온 담?"했더니 파이렉스 냄비가 유용하게 쓰여서 백화점에
사려고 갔더니 보이지 않아서 사지 못했는데, 마침 쓰레기장에 누가 버렸기에 주워다 놓았다고 하면서, 당신이
버리라고 하면 다시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