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직원의 촌지 공세나 향응 제공은 관례화한 일이었습니다. 현금이 든 봉투는 물론 수백만원대의 디지털카메라를 받고 처방약을 바꾸는 사례도 있었지요. " (가정의학과 개원의 J씨)
"종합병원에 고용된 의사는 처방의 자유가 거의 없습니다. 대개 병원 고위층이나 과장의 지시에 의해 약값 마진이 높은 특정 복사 약품을 기계적으로 처방해왔을 뿐이지요. ' 오리지널 약을 환자에게 제공하지 못한 점을 자책합니다. 또 경영진 요망에 따라 환자들에게 최대한 입원을 유도했습니다." (K병원 내과 전문의 L씨)
의사들은 의약분업 전 랜딩비와 리베이트비 등 약품을 둘러싼 음성소득이 컸음을 대부분 인정했다.
최근 의약품 실거래가 제도와 의약분업 실시로 약가를 둘러싼 거품이 대부분 소멸된 때문이다.
약 판매 마진의 소멸은 특히 동네의원에 치명타를 가했다. 고가 장비를 동원한 비(非) 보험 검사가 어려울 뿐더러 입원실을 갖춘 종합병원과 달리 의약분업에서 예외인 입원환자를 거의 취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약분업을 해도 처방료 인상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과나 소아과.가정의학과 등 진찰 위주의 진료과목에선 수익이 절반 이상 감소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내과 개원의 Y씨)
"동네의원이 살 길은 오직 환자를 많이 보는 것뿐입니다. 1주일에 한번 방문이면 충분한 비염환자도 매일 오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불필요한 검사인줄 알지만 4만~5만원이라도 벌기 위해 보험이 되지 않는 초음파검사를 하자고 말할 땐 낯뜨겁기 짝이 없습니다." (내과 개원의 K씨)
젊은 의사들은 더욱 열악한 사정을 호소한다.
3년째 S대병원에서 무급 전임의를 하고 있는 K씨는 "매달 교수들의 연구비를 쪼개 받는 50만원이 수입의 전부" 라며 "전문의를 딴 지 3년이 됐는데도 생계를 위해 부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고 털어놨다.
K씨는 "그래도 의사들은 잘 산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양심 진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의사들이 잘 산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입니다. 편법 진료가 판을 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라며 씁쓸해했다.
왜곡된 제도…곪아터진 현장
캐나다 토론토의 교포 여행가이드 崔모(26) 씨. 그는 최근 서울에서 치과 치료를 받고 돌아갔다. 崔씨는 "치료비.항공료.체재비 등을 다 합해도 미주보다 싸기 때문에 교포들이 한국에서 진료받는 일이 늘고 있다" 고 말했다.
반대로 외국에 나가 진료를 받는 환자도 적지 않다. 위 육종이 간으로 옮겨진 전직 공무원 조모(60) 씨는 서울의 S대학병원에서 지난 2월 수술을 받았으나 항암 치료에 차도가 없어 6월말 미국 볼티모어의 병원으로 건너가 진료 및 신약 처방을 받고 귀국했다.
조씨 수술을 담당했던 교수는 "새로운 항암제나 치료법을 시도하려 해도 의료보험서 인정을 못받기 때문에 환자를 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면서 "우리 병원에서 매년 암환자 30~40명이 외국으로 간다" 고 했다.
한국의 진료비가 싸다고 교포들이 입국해 진료를 받고, 싸구려 서비스 때문에 국내 환자는 외국으로 나간다. 뭔가 꼬여도 한참 꼬였다. 의약분업을 계기로 곪아 있던 의약계의 문제점이 모두 드러나고 있다. 문제의 뿌리에 있는 두 기둥은 의약품 거래의 블랙마켓(음성적 수입구조) 과 저부담, 저수가 체제인 '도움 안되는' 의료보험제도다.
리베이트 등 약품 판매에서의 떳떳지 못한 큰 마진으로 수익을 꾸려온 의사와 병.의원들은 의약분업으로 이 음성적(낮은 수가 때문에 어느 정도는 용인된) 소득원을 모두 날려버리는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약사들도 마진 좋은 조제약을 권하는 등의 편법 수익원을 잃게 됐다. 의료보험은 큰 병을 만난 환자에게는 구세주가 되지 못한다. 저수가를 의식한 의료진의 왜곡 진료로 환자들은 필수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등 진료의 질이 낮아졌다.
◇ 사라진 음성수입=의사들이 지난해 11월 이후 거리로 뛰쳐나온 이유는 '배가 고프게 됐다' 는 것이었다. 정부가 의약분업 시행 전단계로 그 달 15일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償還) 제를 시행하면서 의료보험 약가를 30.7% 내린 때문이다. 이 조치로 약값 마진 1조1천5백억원(보건복지부 추계) 이 일시에 사라졌다.
정부는 대신 병.의원 수입의 최고 45.4%(내과) 가 약값이라고 계산해 의보수가를 12.8% 올렸다. 지나친 약값 마진은 정부와 의료계가 묵시적으로 용인한 음성소득이었다. 정치.경제논리에 밀려 저수가를 고집해 왔던 정부는 수가 인상 대신 이를 용인해온 셈이다.
이 조치의 위력은 엄청났다. 연세대 의대 박은철 교수가 분석한 서울 종로구의 한 내과 개원의는 종전까지 월 매출액(2천3백94만원) 의 57.7%를 약 판매에 의존했다. 약 판매액의 절반이나 되는 6백90만원이 수익이었다.
하지만 실거래가 상환제 이후 그의 월수입은 98만원으로 줄었다는 게 朴교수의 계산이다. 약값 마진이 수입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것을 이 개원의도 처음 알았고 정부도 "이 정도인 줄 몰랐다" 며 놀랐다.
◇ '감기 의료보험'=5년여간 백혈병 치료를 받아온 金모(11) 군의 부모는 연간 3천만~4천만원의 치료비 중 절반 가량을 본인이 부담해왔다. 법정 본인 부담금은 20%에 불과하지만 보험에서 인정하지 않는 진료가 많아 가정이 거덜날 지경이다.
서울중앙병원의 한 교수는 "백혈병 환자에게 적혈구 촉진제는 15일까지, 구토예방제는 하루에 두 알로 제한해 보험 인정을 해주기 때문에 비보험진료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복지부 관계자마저도 중(重) 질환에 의보 혜택이 제대로 가지 않는 현상을 '감기(치료용) 의료보험' 으로 표현한다.
중환자가 아니라도 보험 혜택은 절반에도 못미친다. 최근 디스크 수술을 받은 K씨는 보험이 안되는 2인실 입원비.식대.선택 진료비 등으로 1백여만원 이상을 물었다. 보험으로 된 것은 수술비 중 27만원이었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창엽 교수팀이 최근 전국 2백24개 병원을 대상으로 진료비를 조사한 결과 본인 부담금률이 평균 51.7%에 이르렀다. 현행 의료보험은 진료비 할인제에 불과하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사라진 필수 서비스=20년째 당뇨를 앓아온 金모(62.서울 신길동) 씨는 최근 말기 간암 진단을 받았다. 복부에 혹이 있었으나 주치의가 한번도 배를 만져보지 않은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손으로 만져보는 촉진(觸診) 은 사라진지 오래다. S대 내과 전문의 K씨는 "진료 건수를 늘려야 수입이 돼 3분 진료를 해야하는 현실" 이라며 "환자가 진료대에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 촉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말했다.
동네약국 약사의 하소연
"일반 약 마진이 10%를 넘지 않는 데 비해 조제약은 30~40%에 달한다. 의약분업 전에는 가급적 조제를 권해 하루 40~50건을 처리했다." (서울 영등포 N약국 朴모 약사)
"사타구니 완선에 바르는 연고를 사러온 환자에게 한 달간 복용하는 8만원짜리 조제약을 권했다. 제대로 치료하려면 약을 먹어야 한다는 말만 하고, 간과 위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점은 말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울 강북 B약국 林모 약사)
약사들은 의약분업 전에 마진이 큰 조제약을 주로 권했던 것을 대부분 시인했다.
대형 M약국 金모 약사는 "조제약은 미리 만들어져 있지만 환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체중.신장.배변 횟수 등 10여가지 항목을 직접 쓰도록 했다" 고 말했다.
그는 "일부 약국은 입심 좋은 판매원을 채용해 마진이 70~80%나 되는 영양제를 주로 팔았다" 고 털어놨다.
B약국 林약사는 "오리지널 약 대신 마진이 좋은 복사약을 주로 팔았다" 며 "하지만 이는 병.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 밝혔다.
약사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렇게 하소연한다. 개업경력 10년째인 N약국 朴약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마진이 많은 조제약이나 복사약을 열심히 팔아봐야 한 달에 3백만원 정도 순익을 올릴 수 있었다" 고 했다.
그는 "구멍가게 수준인 수입내역을 보면서 이것이 약사 자격증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니 한심했다" 고 말했다.
문제는 의약분업으로 동네 약국 사정이 더욱 어려워진 것. 마진이 많은 자체 조제약이나 일반약 판매가 크게 줄어든 데다 환자들이 우선 병원부터 찾는 바람에 손님이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반면 병원 앞 대형 약국에 환자가 몰리면서 동네약국이 소외당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朴약사는 "약사 혼자 하루 수십건의 처방전을 처리하지 못해 전산직원이나 약사를 더 고용해야 하는 등 갈수록 수입구조가 열악해지고 있다" 고 말했다.
그는 "이달 순익은 2백만원을 밑돌 것 같다" 며 "처방전이 필요없는 한약 조제나 건강식품 판매에 매달리고 있지만, 그래도 수입이 늘지 않으면 약국을 정리하고 대형 약국에 취직하겠다" 고 말했다
환자 최우선 제도 도입을
정부와 의료계간 갈등의 끝은 어디인가.
의약분업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상태가 6개월 가량 계속되고 있다.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간다. 국민·의료계·정부 모두 지칠 대로 지쳤다.
의약분업 혼란은 그러나 의료계 대변혁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의약품 블랙마켓(음성적 수입구조) , 과잉 진료·조제 등 의약계의 누적된 문제점들이 모두 노출됐다. 의사나 병·의원의 음성적 수입을 전제로 해 저부담 저수가(酬價·보험공단이 의료기관에 지불하는 진료비) 를 유지해온 의료보험 제도의 문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기존 의료 시스템도 분해 상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상황은 근본에 메스를 대는 의료개혁을 할 좋은 계기다.
전문가들은 차제에 땜질식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뿌리를 치료하고 '환자 최우선' 의 의료개혁을 하자고 제안한다.
◇ 곪아터진 제도·관행〓1977년 의료보험이 출발할 때 낮게 책정됐던 의료보험 수가 체제가 누적되면서 '저수?ㅐ鄕仄? 의 문제점이 이번에 한꺼번에 표출됐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 의약분汰?의사들의 수입을 이렇게 급감시킬 줄 예상하지 못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이후 네차례에 걸쳐 수가를 36.5% 올렸지만 아직 원가의 80%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음성수입이 거의 없어진 만큼 전문인인 의사들에게 적정 수입구조를 보장하는 조치가 필요하며 그 대신 편법·부당행위를 강하게 규제해야 한다. 잘못 설계된 의료보험으로 인한 환자들의 불만도 폭발했다.
감기와 같은 질병은 3천2백원으로 해결했지만 암과 같은 중병을 앓으면 의료보험 혜택은 잘해야 절반이다. 제도 탓에 서비스의 질도 낮아졌다.
공공의료 시설은 전체 의료기관의 10%에 불과하다. 예산부족으로 의료보호비가 체불돼 병원.약국이 의료보호 환자를 기피하고 있다.
대학병원만 선호하거나 약국에서 맘대로 약을 요구하는 국민의식도 고쳐야 할 관행으로 나타났다.
◇ 대책〓보건사회연구원 조재국(曺在國) 보건산업팀장은 "의료 제도 개혁과 함께 의료에 대한 국가 재정 부담을 일차적으로 대폭 늘려야 한다" 며 "국민의 의료비 부담도 함께 올려 적정 부담·적정 수가 체제로 가야 환자 서비스를 쇄신할 수 있다" 고 강조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국민의료비 지출과 국민의 소득 대비 의료보험료 부담은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따라서 지역의료보험의 50% 국고지원 약속을 이행하고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는 한편 국민도 보다 나은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보험료를 더 부담해야 한다는 데 동의해야 한다.
울산대 의대 조홍준(趙弘晙) 교수는 "국민부담을 올리기 위해서는 예방접종이나 만성질환자의 투약시기를 사전에 알려주는 등 국민에게 친숙한 서비스를 해주는 게 전제조건" 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질환자 본인 부담금 상한제▶본인부담금 하향조정▶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한 차등 수가제▶선택적인 포괄수가제 등의 대책을 서두르고,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초음파·병실 차액·자궁암 검진·예방접종·한방 첩약 등 필수적인 서비스에 보험혜택을 주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의료수준 부끄러운 세계 58위
한국의 의료 수준은 세계 58위. 태국.말레이시아.튀니지.알바니아보다 뒤처진다. 세계 13위인 한국의 경제력(지난해 국내총생산 4천67억달러 기준) 이 무색하다.
세계보건기구(WHO) 의 '세계보건 2000' 보고서에 드러난 한국 의료의 현주소다. WHO는 ▶환자 만족도▶공공의료 수준▶소외계층 의료서비스▶진료비 부담 규모▶의료부문 재정부담 규모 등을 주요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의료개혁이 제대로 되려면 과잉.편법 진료와 오진.불친절 등 수준 미달의 의료 서비스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약분업을 실시하고, 국민이 의료비를 더 부담해봐야 소용이 없다.
실제로 지난 1년새 소비자보호원에 접수된 의료서비스 관련 민원이 1만7백건에 달하고 있다.
반면 제왕절개 수술률은 43%(세계 1위) , 병.의원에 큰 수입을 주는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장치 보급률은 1백명당 4.7대(세계 3위) 라는 기형적 기록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의료기관과 약국들이 의약분업 실시로 약값 마진이 없어지자 검사.진료 횟수를 늘리는 등 과잉.편법 진료는 더욱 기승을 부릴 조짐이다.
전문가들은 의료시스템을 환자 위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미국처럼 ▶병원 장비▶의사 경력.의료사고 여부▶진료내역서 등을 소상히 공개해 환자들이 좋은 병.의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들이 동료의 진료에 대해 사후 평가.감시하는 제도를 도입해 과잉 진료.오진을 가려내는 것도 대안이다.
암메드코리아 신우섭 이사는 "적정 진료를 위해선 미국처럼 어떤 질병에는 어떤 처방이 필요한지를 정해 놓은 '표준 치료' 시스템의 확립도 시급하다" 고 말했다.
불필요한 정부 규제를 푸는 것 또한 급선무다. 연세대 김한중 보건대학원장은 "정부가 의료기관 설립.운영에 관한 각종 규제를 풀어 병원이 적극적으로 변화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고 강조했다.
서울대 문옥륜 보건대학원장은 "적정 진료를 유도하려면 1~3차 병원의 수가 차이를 넓히는 등 의료기관의 성격.품질에 맞춰 수가를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