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詩가 더 달았다"
피 팔던 부랑아, 詩에 빠졌다…시인 김신용
"몸에 익으면 노동도 생각만큼 힘들지 않지만
그 때문에 시 쓰는 시간이 사라지는 건 고통"
15세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 계모도 떠났다, 전국을 떠돌았다
막장 광부도 했다, 피도 팔았다
물건도 훔쳤다, 교도소에 갔다 부랑과 노동의 20년…
시가 내게로 왔다, 나를 살렸다
이 시인과 비교하면, 그 어떤 작가도 '귀공자'다. 이 사람은 지독히 가난했고, 어지간히 고달팠다.
시인 김신용(65)이다. 그가 15세 소년이었을 때, 토목기술자였던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져 "나 죽으면 느그들 굶어죽는데이"라는 탄식인지, 유언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계모는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나갔고, 아버지 말대로 그는 굶어죽기 직전이었다. '거기 가면 밥이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무임승차나 무전취식으로 시작해, 피를 팔아 밥을 사먹는 쪼록꾼(매혈)도 해봤고, 물건도 훔쳐 감옥에도 갔다. 더는 피도 팔 수 없게 됐을 때, 햇살에 비친 지게를 보고 지게꾼이 됐다. 막장에 들어가 석탄도 캐봤고, 공사판에서 100㎏이 넘는 짐을 지는 노동으로 10여 년을 보냈다. 도둑, 모리배, 작부, 노동자가 몰려 사는 서울역 뒤 '양동'의 일세방(하루하루 방값을 내는 방)에 기거하며 그는 서울의 환부와 치부를 핥고 맛봤다.
- ▲ 부랑아 출신 시인 김신용은 자연의 속살을 보는 탁월한 시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는 요즘 소래포구에서 멀지 않은 집 근처 갯골생태공원(경기도 시흥)을 거닐며 이곳 자연을 눈여겨보고 있다. 무작정한 자연 예찬이 아니라 생명체의 고요한 아우성을 대신 들려주는 작업이다. 내년쯤 시집‘바자울에 기대다’로 엮여 나올 예정이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험한 인생으로 치면 그보다 더한 이가 어디 없을까마는, 놀라운 것은 그가 놀랍도록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1988년 그가 첫 시집을 냈을 때, 우리 시단은 '진짜 시인이 나타났다'고 들떴다.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의 부랑아출신 전위작가), 제2의 천상병이라고 떠들썩했다. 부랑과 노동의 20년, 그리고 화려한 등단과 문학상 수상.
그사이 20년이 또 흘렀다. 시흥 소래포구가 보이는 갯골 근처에 사는 김신용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 등단 후 그는 결혼했고, 아내와 그는 몇년 전까지 수의(壽衣)를 지어 팔면서 돈을 모았다. 중국산 수의에 밀려 이제는 그 일도 끊어진 지금, 부부는 배추벌레가 배춧잎을 파먹듯 살금살금 그 돈을 쓰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집엔 궁핍 대신 희한한 안심(安心)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개였다…품삯의 뼈다귀에 침 질질 흘리는 오뉴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혼자 떠돌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이었나.
"원자폭탄이 떨어진 비키니섬의 거북이가 된 느낌이다. 눈멀고 귀먹어 방향 감각을 상실한 거북이는 바다로 가지 못하고 육지로 육지로 걸어가다가 말라 죽는다. 윤리성·도덕성이 사라지고 동물적인 감성만 남는다. 음식이 앞에 있으면 그게 누구 것이든 그냥 손을 뻗어 먹게 되는 상황이다."
―16세부터 10년의 인생을 기록한 자전적 소설 '고백'에 보면, '차라리 고아였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대목이 나오더라.
"갑자기 떠돌게 되니 어디 가야 밥이 나오는지를 몰랐다. 추락하는 길만 남았던 거지. 오늘 밤은 서울역에서 자고, 내일은 부산역에 가 있는 무임승차 생활을 하면서 세상 이치를 조금씩 배웠다. '대합실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할까. 그런데 60년대, 10대의 공장월급으로는 하루 두 끼밖에 먹을 수 없었다. 밥값 외상이 밀리면 도망치고, 좀 더 나은 데 있나 하며 떠도는 인생이 반복됐다. 그러다 피도 팔고, 수술도 하고…."
―병원에서는 2개월에 한 번 이상 매혈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더 자주 하기 위해 주사자국을 안 보이게 하려고 상처를 내는 얘기가 소설(자전적 소설 '고백')에 나오더라.('피를 만들기 위해 밥을 먹고 밥을 먹기 위해 그 피를 뽑아야 하는 모순의 생'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매혈이 합법이던 시대, 적십자병원에서 380cc의 피를 뽑고 600원씩 받았다. 남대문서 밥 한 그릇에 100원쯤 할 때니 피 한 번 뽑으면 이틀 밥값이 생겼다. 어떤 여자는 피 팔고 나오다 쓰러져 병원에서 깜짝 놀라 뽑은 피를 도로 넣어준 일도 있었다."
―정관 수술은 어떻게 하게 됐나.
"내가 스물네 살 때, 정관수술을 받으면 800원을 줬다. 3일치 밥값이다. 당시 의사들은 수술장려금 같은 것을 받으려고 수술을 많이 하려고 했다. 이름만 바꿔, 이미 수술한 사람을 또 수술을 시키는 거다. 나도 그렇게 두 번 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생각을 하나.
"상식적으로, 윤리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겠지만, 눈멀고 귀 먼 거북이처럼 방향 감각을 상실한 인생은 그게 가능하다."
―지게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피를 더 팔면 죽는다더라. 어느 날, 청계천에서 지게가 눈에 들어왔다. 저 지게를 지면 밥이 들어오나 싶더라. 그 일을 하고부터 세 끼 밥벌이를 하게 됐다. 스물여섯에 양동에 일세방을 얻고 비로소 노숙을 벗어났다."
―자살도 두 번이나 시도했다.
"첫 감옥 생활에서 하도 괴롭힘을 당해 목을 맸다. 20대 때, 부산에 내려갔더니 인생 더 살아 뭐하나 싶더라. 여관방에 들어가 물도 없이 침으로 녹여 수면제 서른 몇알을 먹었다. 유서를 쓰다가 잠든 이후 기억이 없다. 다음날 여관주인에게 발견돼 병원에 실려 갔는데, 내가 8일 만에 깨어났다고 하더라."
―깨어나니 어떻던가.
"살아난 게 부끄럽더라. 간호사에게 왜 살렸느냐며 욕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그래 어디 머리 디밀고 살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더라."
―승려가 되려고 한 적도 있다.
"80년 교도소에 들어가 불교 교리 공부를 했다. 불교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출감 한 후 서울의 한 절에서 인부로 일하며 공부했다. 자꾸 머리를 깎으라는데, 고민고민 하다가 그만뒀다. 절의 돌아가는 꼴도 그랬고…. 무엇보다 나는 시가 더 좋더라."
―어쩌다 전과가 5범이나 됐나.
"서울역 부근에서 부랑아로 지내던 10대 시절, 처음 감옥에 갔다. 함께 부랑 생활하던 아이가 술 취한 리어카꾼에게 접근해 짐을 대신 배달해 주겠다고 했다. 그 리어카에 있던 물건을 팔아서 밥을 사먹었다. 나만 붙잡혔는데, 죄목이 사기죄였다. 그 다음엔 서울역 선로에서 나온 고철을 훔쳐 절도죄로 감옥에 갔다. 서울역에서 날치기 사건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형사들이 범인을 잡으러 다니더라. 내가 했다고 했다. 배고프고 추우면 그렇게 감옥에 들어갔다. 80년 계엄시절의 겨울, 주머니에 복면·칼·장갑을 넣고 파출소 앞을 지나갔다. 당연히 검문을 당했고, 그렇게 강도예비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너무 몸이 상해 감옥에서 추스르고 나오려고 그랬다."
―인터넷에 보니 아리랑치기까지 했다고 나오더라.
“아직도? 지난해 시선집 ‘부빈다는 것’을 냈을 때 출판사에서 소설 ‘고백’ 시절의 선전 문구를 그대로 갖다 썼다. ‘고백’은 내 얘기에 들은 얘기 30% 정도를 가미해 쓴 소설이다. 아리랑치기가 뭔지 아나. 그건 돌을 들고 사람 머리를 때리는 거다. 흉악한 죄다. 아리랑치기 사건 종범이 무기수로 내가 있던 감방에 들어왔다. 그 사람이 자기 자서전 좀 써달라며 그 얘길 하더라.”
―감옥은 범죄의 학교가 아닌가.
“들은 대로 했다면 내가 대단한 범죄자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런 얘기가 문학에 어떤 도움이 될까는 생각했지만, 실행하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건 아마도 책 때문일 거다. 책 속에서 그런 인생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깨달았다. 책이 있어 내 인생이 달라졌다.”
- ▲ “일을 해야 밥 먹는데, 밥 먹기 위해 일하면 책을 못 읽는 것이 괴로웠다. 그럴 땐 노동, 밥을 포기했다”고 말하는 기묘한‘게으름뱅이’김신용 시인.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88년 현대시사상에 발표된 김신용의 첫 시 ‘양동시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골목에 있었지요/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창녀촌이자 빈민굴인 양동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지만 ‘문학적 승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첫 교도소 문을 나서며 노트 한권 분량의 시를 갖고 나왔다는 그는 26세부터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돌입, 43세에 첫 시집을 냈다. 적잖이 험한 인생을 살아온 그를 시인으로 키운 건, 무엇이었을까.
―부산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만 다녔는데, 문학 공부할 겨를이 있었나.
“어릴 때부터 책이 좋았다. 방학에는 하루 세 권씩 읽었다. 16세 때, 부산서 유치장에 들어갔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들어온 대학교수를 만났다. 그가 책을 줬는데 이상의 날개 등이 담긴 시집이었다. 그 사람한테서 문학이론도 듣고, 유치장서 보리밥 맛있게 먹는 법까지 많이 배웠다.” (보리밥은 한 오십번쯤 씹으면 고소하다고 한다)
―교도소에서도 공부할 수가 있었나.
“60년대 교도소는 ‘인문학의 시대’였다. 부설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책 세 권씩 빌려볼 수 있었는데, 한 방에 20~30명이 있으니 한 번에 수십 권의 책이 들어왔다. 서로 돌려보고, 우리끼리 독후감 토론도 하고 콘테스트까지 했다. 못사는 시대였지만 ‘배워야 한다’는 열망도 강했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가 보니 ‘돈의 시대’가 되어 있더라. 책 보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
―어떤 책을 읽었나.
“소설·수필·시 같은 문학 책과 철학 책을 주로 읽었다. 잡범으로 들어와 책 읽고 자생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을 만큼 사람이 다양해 책도 가지가지로 읽었다. 자본론도 거기서 읽었다. 산업화가 되면서 막일 일당이 올라가면서 몇달 돈 벌어 놓고, 얼마간은 일을 안 하며 책만 읽었다. 일을 해야 밥 먹는데, 밥 먹기 위해 일하면 책을 못 읽는 것이 괴로웠다. 책을 읽으면 밥 떨어지고, 밥 벌려면 책을 못 읽는 아이로니컬한 상황. 그럴 땐 노동, 밥을 포기했다.”
―책 읽는 게 그렇게 좋은가.
“추운 날 동시상영관에 들어가 영화를 본다고 치자. 해가 지고 배가 고파서 극장 밖에 나오면 추위가 확 몰아친다. 바윗돌에 얼굴을 대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보는 동안은 정말 몰입이 되지 않나. 몰입된 순간 말이라도, 현실이 잊히니 행복한 거다. “
―그 짧은 쾌락 때문에?
“쾌락이란 단어는 너무 변태적이지 않은가. 몰입이라고 하자. 중독, 몰입의 순간이다. 양동에 살 때도 ‘비타민(마약) 한 대 맞을라요?’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글 읽고 쓰는 데 몰입해 내 인생이 결딴났는지는 몰라도 술·도박·마약으로 몰락하는 거에 비하면, 지금까지 잘살고 있는 거 아닌가.”
―책에서 밥도 술도 안 나오는데 왜 공부하나. 문학이 돈보다 더 고결한가.
“24세 때, 그 수술은 내 젊은 목을 치고 가는 칼날이었다. 나는 그냥 글이나 쓰다 죽으련다 하는 마음이었다. 결혼해 애를 낳을 것도 아니고 글이나 쓰다가 죽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의 고결함 같은 말은 먹물 든 놈들의 허황한 말에 불과하다. 그저 좋아서 미칠 수 있다는 게 좋았을 뿐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시(詩)를 사랑했나.
“쓴 걸 다 태워버리고 이눔의 시 다신 안 쓴다고 한 적도 있다. 시라면 이가 갈렸다. 이거만 쓰면 밥값 떨어지고 방값 밀리니까. 그런데 밥값 방값 내자고 또 일 나갈 생각하니 너무 허무한 거다.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알려주는 건, 글 쓰는 것, 책 읽는 것뿐이었다.”
―지게꾼, 막일꾼이 시 쓴다고 비웃음도 많이 샀겠다.
“그랬지만, 공사판에서 뼈가 굵어지면서는 별로 듣지 않았다. 나는 상관없이 주머니 속에 두세 편의 시를 넣어 다녔다. 쉴 때 꺼내 보고, 술 먹다 다시 읽어보고. 누가 보고 나서 좋다고 하면 그게 좋더라. 데뷔도 그렇게 했다. 88 올림픽 앞두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보도블록을 까는 일을 했다. 서울역 뒤편에서 전시를 한 무명의 부산 화가와 친구가 되어 인사동 실비집이란 대폿집에 가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인·소설가·화가·음악가를 봤다. 일이 없는 날, 혼자 찾아가 술 한 잔 마시며 시를 보고 있는데, 누가 글 좀 보자더라. 다섯 편을 읽더니 자기가 현대시학 추천 시인(김선유)인데, ‘형님 시처럼 좋은 거 못 봤다, 빌려달라’고 하더라. 며칠 후 일세방 주인이 ‘6호실 전화 받아’ 하더라. 현대시사상 창간 준비를 하던 편집장 최승호 시인이 인사동 귀천(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하던 찻집)에서 만나자더라. 대학 노트 한 권 분량을 들고 나갔다가 그렇게 데뷔하게 됐다.”
―어땠나.
“얼떨떨했지 뭐. 데뷔 후 조선일보에 기사 나오자 각처에서 일세방 집으로 전화 오고 난리가 났다. 일종의 유명인사가 된 거다. 내 삶이 유난스러우니까 그렇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 밑바닥에서 구르다 나온 시인이 없었으니까. 두 번째 시집 나오고 나서야 내가 이제 시인인데, 정치·경제 책을 읽어 사회를 보는 눈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는 압축파일이고, 소설은 설명한다. 왜 시인가.
“소설을 쓰려면 밀실이 필요하다. 집필 시간이 기니까 생활비도 필요하고. 나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에게는 시가 더 편해서 시를 쓰게 된 건지도 모른다.”
―시인이 되고 비로소 ‘문단’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어땠나.
“처음엔 사람들 만나 술 한잔 먹으면 좋더니, 나중엔 싫어지더라. 글로 쓸 땐 괜찮은데, 내 살아온 얘기 자꾸 하다 보니 나를 팔아먹는 것 같더라. 어떤 문학 모임이나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나는 아웃사이더… 어떤 문학모임에도 가입 안해
―왕따인가.
“좋은 말로는 아웃사이더. 그런 데 휩쓸려 다니면 내 개성이 죽는 거 같아 싫더라.”
―열다섯 이후 거의 30년이나 지나서 가정을 꾸렸다. 바깥에선 들어가고 싶고, 들어가면 나가고 싶은 게 가정 아닌가.
“식당 밥이 입에 배어 갓 결혼해서는 밥이 맛없어 못 먹겠더라. 부랑아 정서를 버리지 못해 나가면 집을 잊어버렸다. 이젠 당연하게 느껴진다. 불편하고 아니고 하는 차원은 벗어났다. 입던 옷 또 입으면 편하듯이.”
―시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 없나.
“시 창작 기법을 강의해달라고 하는데, 돈 받고 시 창작 교실 같은 건 안 한다. 그건 돈 버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내 얘기를 시로 쓰면 백 편이요, 소설로 쓰면 장편’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첫 한 줄을 쓰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시인 최승자도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이라 쓰지 않았나. 부끄러움을 과감히 드러낼 수 있는 용기, 그걸 예술로 승화시키는 감성이 있으면 된다. 승화만 된다면, 시인의 치부는 독자에겐 치유의 기능이 있다.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길을 찾게 해준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는 서정주식 표현을 빌리자면, 김신용을 키운 8할은 뭔
가.
“부랑(浮浪)이지.”
―그럼 나머지 2할은 뭔가.
“인간에 대한 사랑. 그런데 ‘8할이 바람’ 그런 건 시인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따지고 들어가면 허구투성이다. 시인이니까 할 수 있는 이미지의 말일 뿐이다.”
―이제 좀 안락한가?
“떠돌이 이후 삶은 다 안락했다. 글 쓸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었다.”
몸을 팔아 밥을 먹던 소년은 청년이 되어 힘을 팔았다. 중년부터는 시를 팔아 산다. 한 사람의 인생이 ‘문명의 발전사’의 축약본 같다. 그는 김신용이다. 시인 김신용.
[박은주의 快說]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목질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환상통’ 중)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그늘!
(‘민달팽이’ 중)
첫댓글 참 인간적으로 공감이 가는 분이시네요
김신용 시인의 소금이란 시를 읽고 순도높은 글에 감동 받았지요 .
힘들다구 짜증내는것도 사치구나!!!
방랑의 올레길을 돌며 사신 시인의 삶에 가슴이 많이 아프네요...
잘읽고 갑니다~
마레님 반가워요^*^
오우



이쁜이(나)님


워요





) 인사동에서 

(일 있을때마다)만난답니다






^^*
나는 (혼자인지몰라도) 김신용님과 엄청 친하답니다
그분의 시집이 대여섯권 있고,,,,우린 인사동에 실비집도 자주갔고, ,,,,,
시로 "현대시학"에 등단을 시킨 "김선유"님도,,,(
나는 김신용님의 힘든 삶을 존경하며,,,,이런 삶이 오늘날,, 김신용을 엄청 괜찮은 시인으로 만든거라 생각합니다
정말 이런 시인만 있다면,,, 하는 증말 멋진분이랍니다
소피아님 반갑습니다. 건안하시지요?
마음이 찡 합니다
모나고 날카로운 삶속에서 살아내신 님은
진정 시인이십니다
바위틈에 핀 꽃 같은 삶에 마음이 아팠지요.
처절한 삶에 근접해 사시면서 영혼만은 풍요로왔던 시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