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나치는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었을까?
과연 독일은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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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나치 독일이 핵무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으며,
그렇게 했다면 어떤 시나리오가 가능했을까?
나치가 이 최후의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투입된 노력과
어떤 과학자들이 있었는지 함께 알아보자.
재래식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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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은 확실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려고 노력했지만,
정권은 주로 재래식 전쟁 전쟁 무기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자원을
투입하기를 원했다. 핵무기 프로그램 개발은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세계적 과학계 선구자는 모두 독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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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두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개발을 미국에 뺏기고 말았다.
그 유명한 물리학자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 이론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독일인이였다.
세계적 과학계 선구자는 모두 독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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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높이 평가받는 이론물리학자는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제커였다. (1912–2007)
세계적 과학계 선구자는 모두 독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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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학자 오토 한(1879–1968)는 방사능과
라디오화학 분야에서 뛰어난 두뇌였다.
이 세 명의 과학자들은 결국 제3제국 지도자들을 핵 연구
프로그램 추진으로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의 핵 분열 발견으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지만,
한은 실제로는 이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진 않았다.
폴란드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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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바로 그 날,
나치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쪽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라늄 클럽', 즉
'우란베라인(Uranverein)'이 생겨났다.
'우라늄 클럽'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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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핵물리학자 쿠르트 디브너(1905~1964)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핵에너지 프로그램을 지휘한 인물이다.
제국연구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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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물리학자 로버트 에이브러햄 에사우(1884–1955)는
1939년에 우라늄 클럽의 첫 회의를 시작했다.
물리학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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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물리학자 발터 게를라흐(1889년 ~ 1979년)는
독일 제국 연구 위원회의 물리학 부문 책임자였다.
독일의 원자력 에너지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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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늄 클럽의 또 다른 회원은 에리히 슈만(1898-1985)으로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의 핵에너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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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지 않은
한 사람은 1933년 10월에 미국으로 이민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879–1955)이었다.
대통령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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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온 사람이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의 서명이 있었고 그건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는데, 편지의 내용은
'독일인들이 아마도 핵폭탄을 연구하고 있을 것'이라는 경고의 메세지였다.
참혹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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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동료 물리학자 레오 실라드 (1898–1964)가 쓴 편지에
자신의 서명을 추가하도록 요청 받았다. 헝가리 태생의 실라드는
1933년에 핵 연쇄 반응을 구상했다.
그 과정이 군사적으로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내재된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맨하탄 프로젝트의 결과가 된 것은 바로 이 편지때문이였다.
덴마크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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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치 독일의 유럽 정복은 계속되었다.
1940년 초, 히틀러는 덴마크를 침공했다.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 (1885–1962)가
이론 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한 곳은 코펜하겐 대학이었다.
게슈타포의 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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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보어는 20세기의 선도적인 물리학자 중 한 명이었고,
원자 구조와 양자 이론을 이해하는 데 기초적인 공헌을 했다.
독일의 덴마크 침공 이후, 보어는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았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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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지금까지 독일의 핵무기 개발 사업에 크게 관여했던
하이젠베르크는 (표면적으로) 보어가 나치를 위해 이끌고 있는
우라늄 클럽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덴마크의 수도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그보다 앞서 1934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이다.
그 유명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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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물리학자가 정확히 무엇을 논의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지만,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의 임박한 승리와 자신이 최초의 원자폭탄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자랑했다고 주장했다. 어느 모로 보나,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지도 아래 독일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1943년 보어와 그의 아내는 덴마크에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탈출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독일, 야심적 핵무기 개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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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치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크게 우란마슈인(원자로) 개발,
우라늄 및 중수 생산,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등
세 가지 방안으로 확대되었다.
텔레마르크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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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노르웨이 텔레마르크에 있는 르주칸 폭포 옆
베모크 발전소에서 중수를 생산하려고 시도했다.
중수는 원자로에서 1차 냉각수로 사용되는데, 당시
이 생산은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1943년 영국
특공대와 노르웨이 저항군의 습격을 통해 발전소를 파괴했다.
비핵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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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전쟁이 연합군 쪽으로 기울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고위 지휘관들은
핵 프로그램에 등을 돌렸고, 대신
V-1과 V-2 로켓 같은 '기적의 무기' 생산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으며,
그것이 전쟁의 결과를 어떻게 바꿨을까?
나치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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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나치는 어디에서도 폭탄을 생산하지 못했다.
애초에, 제국은 과학적 기술면에서 연합군과 경쟁할 수 없었다.
둘째, 1943년까지 자원과 재정은 심각하게 부족했다.
셋째, 히틀러는 애초에 이 정도 규모의 무기가 발명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나치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말을 빌리자면,
히틀러는 "모든 혁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항공기의 잦은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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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정권이 핵무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더라도,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유일한 항공기는
러프트바페가 보유한 하인켈 He 177 Greif뿐이었다.
그러나 사고가 잦은 것으로 악명 높은 이 비행기는
일본에 핵무기를 투하하는 데 사용된 미국의
B-59 폭격기와는 강도나 크기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기술 노하우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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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독일군이 V-2 로켓에 핵탄두를 장착하려면,
그 장치는 파인애플 크기를 넘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핵개발에 성공 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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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히틀러가 핵무기를 사용했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데 성공했을까?
전쟁이 한창이던 그 시점에 미국은
독일 폭격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독자적인
핵 프로그램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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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소련은 넓은 영토의 여러 먼 지역에서
대량의 군수품을 생산하고 비축하고 있었으며,
이는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
가능성은 낮지만 무서운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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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히틀러가 핵폭탄을 투하했다면,
영국은 항복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미국은 휴전을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스탈린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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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치는 동부 전선으로 모든 병력을 분산시켜
붉은 군대를 격퇴하거나 스탈린과
새로운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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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여 나치 정권은
세계 최초의 핵보유국으로서 유럽 전역에서
최고 통치자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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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역사의 흐름은 매우 달랐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연합군은 슈투트가르트 인근 하이게를로흐의 실험용
핵더미(사진)를 비롯한 각종 핵시설을 체계적으로 해체했다.
맨하튼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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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나치로부터 탈출한 독일 과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뛰어난 두뇌들 중 많은 사람들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함께 일했다.
핵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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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핵폭탄을 고안하고 로스앨라모스에서 개발된 핵무기를 사용하여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것은 미국이었다.
이 사건은 무서운 새로운 핵 시대를 열게 되었다.
출처:
(History) (HistoryExtra)
(Scientific Americ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