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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지리산+백아산)
1965 구례. 중앙대 문예창작과
1990 빨치산의 딸 1996 조선일보 고욤나무
아버지의 해방 일지
[첫 부분]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니 우리 집안에 유머가 있었다기보다 혁명을 목전에 둔 듯 진지한 그들의 어떤 행위나 삶의 방식이 유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웃기긴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내 아버지 고상욱씨는 이십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자본주의의 중심 서울로 향하지 않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심지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 터를 잡았다. 자본주의의 적인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자가 아직 자본의 맛도 보지 못한 깡촌을 택하다니 이 또한 코미디다. 하지만 독재정권 치하에서 사회주의자가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버지는 초짜 농부가 되었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는 제법 근사한 때도 있었으나 농부로서의 아버지는 젬병이었다.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였다. 아버지는 일삼아 ‘새농민’을 탐독했고 ‘새농민’의 정보에 따라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농사를 ‘문자농사’라 일축했다.
“새농민이 원제 김을 매라고 하먼 풀이 암만, 허고 그때꺼정 잘도 지둘레주겄소. 새농민이 뭐라거나 말거나 풀이 나먼 난 대로 뽑아야제, 워디 농사가 무자로 지어진답디까?”
어머니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문자에 대한 아버지의 절대적인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자에 대한 확신으로 아버지는 ‘공산당 선언’을 읽었고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테다. ‘전문가들이 오직이 잘 알아서 써놨겄어!“
어머니는 혀를 차며, 아버지가 돋보기를 낀 채 ’새농민‘이나 각종 영농서적에 코를 박고 있는 사이,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섰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으면 그나마 덜했지만 문자로 짓는 아버지의 농사는 번번이 망했고, 그해 겨울에도 내 부모는 망한 농사의 후유증으로 남은 벌레 먹은 밤을 일삼아 까는 것으로 기나긴 겨울을 견디는 중이었다. 산 그림자가 거뭇거뭇 손바닥만 한 마을을 점령하는 와중에 사상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인내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밤 까다 말고 엉덩이에 좀이 쑤셔 마실을 나갔던 아버지가 웬 여인네 하나를 꽁무니에 달고 왔다.
오가는 것이라고 바람뿐 적적하기 짝이 없는 산골 겨울에 물릴 대로 물려 있던 나는 드디어 아버지가 한눈이라도 팔았나, 나에게 배다른 형제자매라도 생기는 것은 아닌가, 흥미진진한 연속극을 지켜보는 심정으로, 기왕이면 한 재산 뚝 떼어줄 가진 것 많은 작은어머니를 고대하며 빼꼼 방문을 열었다. 에게, 광주리를 인 그 여인네는 인물로나 몸매로나 차림새로나 작은어머니 감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여 어머니의 상대가 되지 않을 듯했다. 그 여인은 말하자면 민중의 전형과 같은 생김새였고 나는 취향마저 빼도 박도 못하게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에게 다소 실망하여 찬바람에 진저리를 지면서 냉큼 문을 닫았다.
간 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들려준 바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여인네를 안방으로 이끌었다. 아버지가 환갑 다 되어 난생처음 장만한 시골집은 코딱지만 한 방 두 개뿐이라 안방에서 오가는 대화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양 환히 들렸다.
”소쿠리를 팔러 왔는디 그만 나갈 때를 놓쳤다마. 엄동설한에 워디서 잘 것이여. 당산나무 밑에서 코를 빼고 안겄는 것을 내가 우리 집서 자자고 델꼬 왔네. 후딱 밥부텀 채리소.“
”참말 죄송시럽그만이라. 따신 방은 무신. 외양간이라도 좋응게 하룻밤 신세 쪼까 지겄어라.“
인물은 박색이었으나 방물장수의 목소리를 갓 지은 찰밥처럼 좌르르 윤기가 흘렀다. 사회주의자고 뭐고 남자란 죄 야들야들한 암컷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나는 모양이었다. 안방에 쫑긋 귀를 세운 채 나는, 그렇다면 사회주의보다 더 강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봐도 지극히 현실적인 결혼을 뇌세포에 각인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콩 심은 데 반드시 콩이 나는 것은 아닌 법이다.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피를 받고 그런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다. 남들에게는 빼도 박도 못하는 빨치산의 딸이겠지만.
”외양간은 무신. 방이 두 개나 되는디.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씨요. 뭐흔가. 후딱 상 안 채리고!“
아버지의 호통은 나지막한 신음으로 막을 내렸다. 보나마나 어머니가 아버지의 허벅지를 슬몃 꾜집었을 터였다. 나 주려고 허리 통증 참아가며 실로 꿰지도 않고 선반에 얹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어 말린 곶감을, 비 한 방울 맞을까 비 오면 밭일하다 말고 한달음에 달려와 소중히 거둬들인 그 곶감을, 아버지가 눈치도 없이 집에 드나드는 아무에게나 맛이나 보라며 넙죽넙죽 집어줄 때도 어머니는 어김없이 슬몃 아버지의 허벅지를 꼬집곤 했다.
”나 잠 봅시다.“
곧 두 양반이 내 방으로 건너왔다.
”밥이야 채리겄제만 잠은 딴 디서 자라고 허씨요. 우리 집이 방이 워딨소? 아래 성남댁에 빈 방 많찮에라.“
행여 손님이 들을세라 어머니는 아버지 귓가에 다소곳이 속삭였다. 신기하고 해도 무방할 지경의 예민한 감각으로 국방군의 포위 직전 아지트를 빠져나와 곡성군 당을 살렸다는 전설 속의 혁명가 아버지는 국방군이나 경찰이 포위하지 않는 한 조심성이란 눈곱만큼도 없어 어머니가 귓전에 속삭이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부르르 진저리를 치면서 귀를 쓱쓱 비비고는 큰소리로 받아쳤다.
”우리 집이 방이 왜 없어? 야랑 자면 되잖애?“
”아이고, 다 듣겄소. 워디서 자로 댕긴 줄도 모르는 여자를 워치케 야하고 재운다요? 베룩이라도 옮으먼 워쩔라고.“
일주일이 멀다고 부엌 천장의 그을음을 일일이 숟가락으로 닥닥 긁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깔끔쟁이 어머니는 낯 모르는 여인네의 벼룩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근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의 눈빛은, 누군가 사진으로 그 찰나를 포착했다면, 처형 직전의 독립운동가나 학살당한 동지의 시신을 목도한 혁명가라 해도 믿을 만큼 진지하다 못해 비장했다. 내가 풋, 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어머니가 꽁무니를 내리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와 하룻밤 새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그날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 평소 된장찌개와 김치밖에 내놓지 않던 어머니는, 찬장에 고이 모셔둔 새 접시까지 총동원하여 당신으로서는 최대한의 극진한 식사와 잠자리를 대접했다. 민중에게.
아버지의 민중이 그날 밤 내게 남긴 것은 벼룩이었다. 대신 가져간 것은 서까래에 매달아놓은 마늘 반접이었다. 나는 한달 가까이 북북 몸을 긁으며 민중을 욕하다가, 혁명가를 탓하다가, 그러다가 불현듯, 낄낄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사라진 마늘 반접이 내 부모의 진지에 대한 통렬한 배신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배신당한 당사자들은 나와 달리 배신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깟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배신당했다고 분해하기는커녕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민중이 마늘 반접 따위 훔치지 않고도 배곯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 방물장수 여인네가 마늘 반접과 맞바꾼 코티분을 주근깨 오종종한 얼굴 위에 허옇게 두드리고 돈 많은 늙은 영감탱이라도 후리러 출동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 부모는 그럴 가능성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순수한 사회주의자였다. 물정 모르는 촌뜨기였다.
돌이켜보면 감옥살이를 마치고 현실로 복귀한 뒤 내 부모의 삶은 일거수일투족이 그러했다. 내 아버지는 정치적으로만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사회주의자였다. 말했다시피 초짜 농부인 아버지는 일에 관해서라면 조금의 인내심도 없었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아버지는 시간마다 집에 와 소주 한잔을 마시고 신문을 몇줄 읽고 다시 밭으로 나갔다. 집에 올 때마다 아버지는 온갖 야생 식물의 씨앗과 먼지와 흙을 몸에 달고 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달려 나와 옷을 털어라, 양말을 벗어라, 손발을 씻어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회주의자답게 담대한 아버지는 바지를 두어번 툭툭 털고는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개헌티 이만히 말을 했어도 알아들었겄소. 옷 털고 손 씻는 것이 멋이 월매나 힘들다고 번번이 속을 뒤집는가, 나가 참말 복장이 터져서 못 살겄소.“
어머니는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르며 아버지이 몸에서 떨어진 풀씨와 먼지를 일일이 손으로 쓸어 담았다. 태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도를 넘는다 싶을 즈음, 신문을 좌악 펼치며 일갈했다.
”알고 봉게 당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구만.“
옷 털고 손 좀 닦자는데 웬 사회주의?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읽고 있던 니체를 내려놓고 아버지를 주시했다.
”사회주의의 기본은 뭐여?“ 속도 없는 어머니, 아는 것 나왔다고 냉큼 알은척을 하고 나섰다.
”그야 유물론이제라.“
”글제! 글먼, 머리는 둿다 뭣혀! 생각혀봐. 사람은 하나님이 여개 사람이 있어라, 고런 시답잖은 말 한마디 했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먼지로부터 시작됐다 이 말이여. 긍게 자네가 시방 쓸고 담고 악다구니를 허는 것이 다 우리 인간의 시원 아니겄어? 사회주의자는 일상에서부텀 유물론자로 살아야 하는 법이여.“
시원이라니. 국졸 아버지 입에서 방언처럼 터져나온 고급 어휘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먼지에서 유물론으로의 비약은 좀 심했다 싶었는지 어머니도 이번에는 그냥 국으로 엎드려 있지는 않았다. 최소한 찍 – 소리는 냈다. 아이고, 말은 청산유수제. 고거 생각해낼 시간에 옷이나 한번 털제, 라고 돌아서면서. 아버지에게는 들리지 않게 고시랑고시랑했던 것이다.
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 한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물론 본인은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
인부 서넛이 흰 국화 장식을 들고 조문실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고른 이십만원짜리였다. 내가 백만원짜리를 선택하자 어머니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 죽으면 썩어문드러질 몸땡이, 비싼 꽃으로 처바르먼 뭐 할 것이냐.“
사회주의자답게 유물론적인 결론을 내린 뒤 나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기어이 제일 싼 장식을 골랐다. 이 대학 저 대학 떠도는 고작 보따리 장사일 뿐이긴 하지만 아버지 가는 길, 난생처음 호화로웠으면 싶었고 통장을 탈탈 털면 그만한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나는 그냥 어머니 뜻에 따르기로 했다. 무슨 주의란 게 원래 그런 것인지, 내 부모만 유독 그런 것인지, 아버지나 어머니나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고집이 쇠심줄보다 질겼다. 그 고집을 꺾을 자신도 없거니와 사회주의자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을 테니 아버지도 서운치는 않을 거라 계산속이었다.
인부들 뒤로 황사장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어이, 동상.“
황사장이란 불과 한시간 전 인사를 나눈, 이 장례식장의 공동 사장 세명 중 한명이었다. 인구 이만 칠천의 좁은 동네답게, 알고 보니 황사장은 사촌오빠의 동창이자 아버지를 이곳으로 모시자고 극구 주장한 아버지의 정치적 동료 – 그러니까 채 백명도 되지 않는 이 동네 민노당원 – 인 박동식씨의, 피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피를 나눈 것과 진배없는 절친한 동생이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작년에 미리 준비한 선견지명도 있는 박동식씨는 어제 처음 만났는데, 자기가 내 아버지를 삼촌으로 모셨으니 나도 자기를 오빠로 모셔야 한다며 십년은 본 듯이 곰살맞게 굴었다. 어머니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평소보다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나는 아버지 임종 직전 팔자에 없는 오라버니를 두게 되었고, 그러니까 족보를 따지자면 한 시간 전에 만난 황사장 또한 나의 오라버니가 되는 셈이었다. 혈육 하나를 보내고 둘을 얻었으니 손해본 장사는 아니라고 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나는 한시간 전에 오라버니가 되고 만 황사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머님헌티 인사나 쪼까 드릴라고.“
말은 여전히 반토막이었다. 하기야 보자마자 말을 놓은 자가 한시간 뒤라고 말을 높일까. 평소라면 언제 봤다고 반말입니까. 동지섣달 칼바람처럼 쏘아붙였을 것이나 여기는 내 부모의 고향, 그것도 하필 아버지가 간 날, 나 생긴 대로 막 놀아날 수는 없었다. 나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누이동생처럼 다소곳이 어머니를 불렀다.
머리를 다친 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순천의 종합병원으로 옮겨질 때도, 생사를 가르는 수술을 결정할 때도, 어머니는 눈물 한방울 떨구지 않았다. 수술을 하면 목숨은 살릴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어머니는 그 진의까지 정확하게, 그러니까 목숨은, 의 은이라는 조사의 독특한 사용까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어머니는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 선상 같으먼, 긍게 의사 선상 아부지라먼, 의사 선상은 워쩔라요?“
의사 선생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다소 거북스러웠을 어머니의 질문에 의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받아쳤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영감님이라도 계속 보고 싶을 만큼 사랑하시면 수술해야죠.“
수술이 성공해봤자 식물인간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말 한마디의 책임마저 지지 않으려는, 서울 말씨 똑 부러지는 의사가 거슬렸으나 어머니는 그딴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핵심만 중요한 사회주의자답게, 사소한 일상 따위 돌아보지 않는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도 없는디 그거이 먼 사람이라요. 안 할라요.“
쿨한 사회주의자의 쿨한 답변에 쿨한 서울 의사는 쿨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아버지는 뇌압 때문에 뇌간이 눌려 숨을 멈출 때까지 일주일에서 열흘은 걸릴 거라던 의사의 예연과 달리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목숨줄을 놓았다. 술이 과하다 싶을 때마다 어머니는 물려줄 것도 없는 자식에게 병수발까지 시키고 싶냐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지겡이 되믄 혓바닥을 칵 깨물고 죽어불제 살아 있가니!“
아버지는 본디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랬다. 병수발 들 겨를도 없이 아버지는 떠났다. 그것도 내가 긴 병수발을 위한 준비물품을 가지러 잠시 나간 사이에.
아버지의 시신이 우리보다 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한 뒤에야 어머니는 죽음을 실감했는지 눈물 바람이었다.
”엄마, 여기 사장님께서 좀 보자시네.“
하도 울어 진이 빠진 어머니는 넋도 다소 나가 내 말을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사장이 넙죽, 어리둥절한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울다 말거 허둥지둥 맞절을 했다. 고개를 드는 황사장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고 선상님을 잘 알그마요.“
그제야 어머니의 눈빛에서 경계가 사라졌다. 사회주의자답지 않게 어머니는 낯선 사람, 낯선 것에 대해 경계가 심하다. 어머니에게는 익숙한 것,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다. 그중 가장 익숙하고 좋은 것이 사회주의이고 동지들일 뿐이다. 어머니는 몇시간 전 세상 떠난 아버지가 북한을 비판하면 파르르 날을 세우던, 누가 보면 천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섦게 울던 어머니는 눈 촉촉이 젖은 황사장을 그 이상의 촉촉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아직은 약간의 경계를 품고.
”우리 바깥양반을 워처케 아까요? 영감 아는 사람은 나도 다 아는디.......“
”한 십년 전에 한 번 찾아뵀어라. 아부지 소식을 아싱가 허고.“
어머니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그 그립고 간절한 날들로 돌아갈 게기가 생긴 탓일 터였다.
”아부지 함자가 워찌 되시는디?“
”황 길짜, 수짜 되싱마요.“
”황길수......“
지나간 세월이 바삭바삭 잘 말라 몇점 먼지로나 흩어져있다고 믿는 것인지 어머니의 시선이 허공을 더듬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지리산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신호와 같은 동작이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죽은 수많은 자들이 하나둘 싱싱하게 살아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이름은 모르겄는디...... 산에서는 가명들을 썼을게. 워느 맨 출신이시까?“
”간전 무수내 태생이신디 아메 모리실 것잉마요. 고 선상님 말씸 들어봉 게 여순 직후에 바로 총 맞고 시상 뜨셨다대요. 피아골로 이동할라고 섬진강 도강허다 총을 맞으셨당마요.“
민중이었던 방물장수와의 하룻밤 동침도 내켜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낯선 사내의 손을 덥석 잡고는 한없이 다정하게 토닥였다. 어렸던 그때도 지금도 나는 저러한 급작스러운 전이가 도무지 이해되질 않는다. 사상이란 저렇듯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까. 내 부모에게는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 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월매나 고생이 많았으까...... 아부지도 읎이.“
”그 세월을 워치케 말로 다 하겄어라. 이 집 저 집 다님시로......“
어머니에게 손을 잡힌 황사장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남의 장례식장에 와서 평생의 제 상처를 위로받고 있는 듯했다.
”오죽했겄어라. 암말 안 해도 다 아요. 우리덜 모다 고런 시상을 살았응게. 참말 고생 많았소. 아부지 원망도 많이 했제라.“”에레서는 철없이 그랬그만요. 내 피를 싹 바꿔부렀으먼 싶고 그랬제라. 근디 나도 늘그고 봉게 우리 아부지가 워쩐 사람이었능가 궁금허기도 허고 그려서 고 선상님을 찾아뵌 것이그마요.“
처음 만난 어머니와 황사장은 그의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였다는 단 하나로 모든 벽을 뛰어넘어 돈독한 정을 나누고 있었다. 수도꼭지라도 튼 듯 쏟아지는 헤픈 눈물이 어쩐지 미덥지 않기도 하였으나 나는 또다시 방관자가 되기로 했다. 황사장 덕분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잠시 놓여나기도 했거니와 어쩌면 진정으로 위로받는 사람은 황사장이 아니라 어머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뭐 하고 사냐, 결혼은 했느냐, 자식은 몇이냐, 호구조사가 이어지고, 그 사이 아버지의 영정은 흰 국화에 둘러싸였다. 살아생전 꽃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던 아버지였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가을 녘 아버지 지게에는 다래나 으름 말고도 빨갛게 익은 맹감이 서너가지 꽂혀 있곤 했다. 연자줏빛 들국화 몇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이나 들국화를 꺾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 한가닥이 말랑말랑 녹아들어 오래 전의 풋사랑 같은 것이 흘러넘쳤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 숨이 끊기고 처음으로 핑 눈물이 돌았다.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나오려던 눈물이 쑥 들어갔다.
*
영정 속 아버지를 봤다. 영정 속, 이라는 말이 이제 다시 실물로 볼 수 없다는 실감을 불러일으켜, 나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영정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개인적인 감상 따위 부끄럽게 만드는 단호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앞에 서면 언제나 이런 기분이었다. 좋은 옷, 예쁜 이마, 화장품, 머리 모양,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소소한 화제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그런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통일과 혁명, 인류의 진보, 그런 화제가 아닌 어떤 이야기도 아버지 앞에서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던 시절이, 꽤 긴 시절이 있었다. 어쩐지 좀 억울해서 나는 영정 속 아버지를 노려본다. 그거사 니 사정이제, 나가 머라고 했간디, 아버지는 딴청을 피우는 듯했다. 영정 속 아버지의 왼쪽 눈동자를 정면을, 오른쪽 눈동자는 45도 오른쪽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시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듯도 했고, 이면을 꿰뚫어보는 듯도 했다. 대부분 나처럼 사시인 아버지의 응시를 불편해했다. 사시가 된 것은 물론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1948년 초, 5 10 단선반대 유인물을 살포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아버지 성기에 전선을 꽂고 전기고문을 했다. 전기고문은 사시 말고도 또다른 후유증을 남겼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말했다.
”고문 중에 젤 쉬운 것이 전기고문이다. 금방 기절해붕게.“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물었다.
”어떤 고문이 젤 고통스러운데?“
”물 젖은 담요를 뒤집어씌워가꼬 딱 기절 안 할 맨치 몽둥이로 계속 때리먼 참말 죽을 맛이제. 고로코롬 때리먼 멍도 안 들어야.“
아버지는 정면을 바라보는 것인지 45도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답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평소처럼 무표정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약간 신이 난 듯도 보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 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전기고문으로 아버지의 정자는 활동성을 잃었고, 병원에서는 임신 불가 판정을 내렸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장터 주막에서 지리산에서 죽은 동지의 형을 만났다. 그는 한의사였다.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토로했더니 한의사가 약 한제를 지어주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약을 먹고 내가 태어났다. 그날 이후 최씨 성을 가진 그 한의사는 우리 집안의 명의로 등극했다. 어쩌면 진짜 명의였을지도 모른다. 삼년 넘게 나를 괴롭힌 생리통을 약 한제로 멈춘 것도 그였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나는 아버지로부터 내 탄생의 비화를 들었다. 그만큼 네가 귀한 존재라나 뭐라나. 공부 안 하고 엇나가는 나를 다독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은 뒤로 인류의 고통이 시작됐듯 아버지가 최약방의 꼬임에 넘어가 한약을 먹는 바람에 나의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열일곱의 나는 믿었다. 그 무렵 읍내 오거리에서 최 약방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다. 환갑 넘어 눈도 안 좋았을 그는, 스스로 지은 약을 먹고 개안한 것인지 눈이 나보다 밝아, 저 멀리서 나를 보며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나를 이 세상에 불러낸 원흉을 일별도 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에게 동생이 하나뿐이었다는 걸. 일찍 어머니를 잃어 그가 업어 키운 아들 같은 동생이었다는 걸, 자기 몫까지 잘 살라는 동생의 유언을 그에게 전해준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는 걸,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 대신이었다. 그러니 나는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용돈 쥐여주며 귀여워했을 조카였던 셈이다. 그 마음 쌩깐 것이 늙어서야 마음에 걸렸다. 그래봤자 그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미욱하다. 아버지도 그랬다.
1982년 5월 15일,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던 나는 주말이라 집에 들렀다. 저녁을 먹을 즈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방영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금세 밥을 먹었고, 위가 안 좋았던 어머니는 한숟갈 먹을 때마다 백번을 헤아리며 씹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흑백화면 속의 젊고 아리따운 여인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이 흐린 형광등 아래 신문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백번을 세며 밥을 먹던 어머니는 화면 속 여인들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아이고, 우리 아리도 저런 데 나가보먼 쓰겄다.“
개 이름 같은 아리는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이름 덕분에 나는 숱한 홍역을 치렀다(사실 아버지가 주로 활동한 곳은 백아산보다는 백운산이었다. 그런데도 백아산의 아를 따온 것은 백운산의 백이나 운이 여자아이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그러니까 제아무리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한들 반봉건시대에 태어나 가부장제의 그늘을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 반봉건적 사유의 발로였던 것이다). 학교에서나 관공서에서나 고아리, 내 이름을 말하면 아유, 이름이 참 예쁘네, 얼굴도 참......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고 이내 말줄임표가 뒤따랐다. 나는 아리라는 이름 따위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딱 벌어진 어깨에 소도 때려잡을 듯 강건한 육체를 지닌, 그러니까 혁명 전사의 딸에 참으로 걸맞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흔한 경숙이 혜숙이 같은 이름이었다면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당황과 모멸의 순간을, 나는 당신들의 청춘을 기념하고자 했던 부모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하며 살아왔고, 살아내는 중이었다.
아무튼 미스 코리아에 나가보면 좋겠다는 말을 나는 흘려들었다. 아무리 어렸어도 그런 정도의 착각을 할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문을 보던 아버지가 큰소리로 혀를 찼다.
”쯧! 자네는 어린애한테 사기를 치고 그러나!“
그 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는 제법 냉철하여 내가 예쁘지 않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 부모는 내가 어려서부터 눈에 띄는 색깔의 옷을 사준 적이 없었고, 당신들 또한 갈아입을 옷 한 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온 뒤 서울 친척들이 입다 버린 옷만 받아 입었다. 그래서 일할 때도 와이셔츠에 양복바지 차림이었다. 여기저기 감물 든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밤을 줍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부모를 닮고자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것만 보고 자란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외모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다. 그래도 아버지 말을 들으니 갑자기 내 외모의 수준이 궁금하기는 하였다. 해서 물었다.
”내 외모가 그럼 어느 정도인데요?“
아버지는 텔레비전 화면 속의 심사위원들처럼,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더 냉정한 눈빛으로 내 전신을 천천히, 내가 정말 미스코리아 대회라도 나간 양 긴장될 정도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혀를 차며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쯧! 하의 상은 되겄다.“
하의 상, 상중하로 나눈 중에서 하의 상, 그러니까 9등급 중에 7등급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 똑 닮은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해도 딸이니 한 등급 정도는 올렸을 테지. 내 외모는 객관적으로 9등급 중에 8등급이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말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왜 화장을 하겠느냐, 옷발이라는 말이 왜 존재하겠느냐 등등...... 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수많은 말이 있었다. 그렇게 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 말고도. 아버지의 냉정한 평가 이후로 나는 외모에 관심을, 그렇지 않아도 없던 관심을 완전히 끊었다. 서른셋까지 색조 화장은커녕 기초화장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말을 굳게 믿어서였다. 하의 상이 화장해봤자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화장품 살 돈이 있으면 술이나 마시지, 뭐 그런 마음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하의 상이라는 아버지 평가에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두고두고 아버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날, 아버지와 내가 무언가를, 사람 살이에 아주 중요할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놓친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영정 속 아버지는 여전히 그거사 니 사정이제, 나가 머리고 했간디,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있을 뿐이었다.
첫댓글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 일지'를 참으로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광복 이후 우리 소설계의 최고 역작이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장편소설의 첫부분을 보내드립니다. 틈 나면 한번 읽어보십시오." - 금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