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에 길이 없는데 우애 왔노?”라는 이 말은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 계시면서 남긴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의 화두 같은 말씀입니다. 가령 우리가 영화 한 편을 보러 갈 때도 어느 영화관에서 상영하는지 알아야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영하는 영화관을 알아도 가는 길을 알지 못하거나, 길을 잘못 들면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극락에 가는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가는 길이 없으면 아예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찾아갈 수 없다면 극락이 있긴 있는 거야? 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스님은 가는 길이 없다고 했지, 극락이 없다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극락이 어디에 있는 걸까? 나이가 들면 안경을 끼고 있으면서 “내 안경 어디 있지?”하고 찾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서 “내 스마트폰 어디 있지?”하고 찾기도 합니다. 옆에서 누가 “끼고 있잖아.” “왼손에 들고 있잖아.”하고 일러주면 “아차!” 하고 금방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 돌아서서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끼고 있고, 내가 손으로 쥐고 있는 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극락은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이 마음이 극락입니다. 번뇌가 사라진 그 마음이 곧 극락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내가 알지 못합니다. 도(道)에서는 옆에서 일러주는 그 사람을 선지식이라 합니다. 잠시 돌아서서 생각한다는 것은 수행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극락을 갈망(渴望) 합니다. 극락은 중생이 사는 이 세계가 아닌 저 먼 서천(西天)에 있는 줄 압니다. 일체 번뇌가 사라진 그곳 바로 내 마음이 극락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세계를 세속(世俗)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고승 월칭(月稱:600~650)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속은 무명과 동일하다, 마음 즉 이성의 분별 작용이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런데 세속은 사물의 상호 의존성 즉 상관성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은 현상과 동일시되며 비(非) 존재적인 절대와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또한 세속은 일반 대중들에 의해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인습적 성질을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 세계에서 획득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위해(危害)도 가하지 않는 진리(諦)이다. 왜냐하면 세속제(世俗諦)는 언어적인 관습이나 생각들에 매우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지하고 미숙한 사람들의 체험 대상이다. ” 미숙한 사람이란 곧 중생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합니다. 범어 사바(Sahá)는 감인(堪忍)을 뜻합니다. 참고 인내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바세계를 인토(忍土)라 번역합니다. 중생들이 십악(十惡)을 참고 견디며, 또 이 국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자연히 중생들 사이에서 참고 견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에서 사바세계라 부르는 것입니다. <비화경(悲華經)>은 더 구체적으로 「모든 중생이 삼독(三毒)과 모든 번뇌를 인수(忍受)함으로 인토(忍土)를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삼독(三毒)은 탐진치(貪瞋痴)를 말하고, 십악은 몸으로 짓는 3가지 살생, 투도(偸盜), 사음(邪婬)과 입으로 짓는 4가지 기어(綺語),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체 만유는 인연으로 생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의지하여 저것이 만들어지는 이런 인연 화합으로 생한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지 못하고 무상(無常) 하다고 하며, 그래서 무아(無我)라 하고 무아소(無我所)라고 합니다. 실체가 없어 공(空)이라 하고, 인연 따라 변함으로 고정된 모양이 없어 무상(無相)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것이 어느 하나 없기에 변함없이 즐거워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사는 이 세계를 고해(苦海)라고 부릅니다.
<나>가 영원하고, <나의 것>이 영원하고, 일체 만법이 영원한 것이라면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극락을 찾아가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섭존자가 부처님이 묻습니다. 이는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존이시여, 세간의 지혜 있는 이는 곧 부처님과 보살과 모든 성인이시니, 모든 성인이 색은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내가 없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부처님의 색신(色身:물질)이 항상하여 변역(變易)함이 없다고 하십니까? 세상의 지혜 있는 이가 말하는바 없다는 법을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있다고 하십니까? 여래 세존께서 (항상하다고)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어찌하여 세상과 더불어 다투지 않으며 세상의 법에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세 가지 뒤바뀜을 여의셨으니, 생각이 뒤바뀜[想倒], 마음이 뒤바뀜[心倒], 소견이 뒤바뀜[見倒]입니다. 마땅히 부처님의 색신이 무상하다고 말씀하셔야 할 것인데 지금은 항상하다고 하시니, 어떻게 뒤바뀜을 여의시고 세상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고 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선남자야, 범부의 색신은 번뇌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지혜 있는 이는 색이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공(空)하고 나가 없다고 말하지만, 여래의 색신은 번뇌를 여의었다. 그러므로 항상하고 변역함이 없다(無變)고 말하는 것이다.”
@중관파의 논사들도 <실재>란 상대적이 아니고, 유한하지도 않으며, 고요하고 잡다하지 않으며 이원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생각을 초월해 있다고 일괄적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佛典에서는 실재하는 사물이 지혜를 통해서 비실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가 본래 비실재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공성(空性)은 사물을 비실재로 보게 해주는 임의적인 처방이 아니라 공성은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공성>이란 눈앞에 나타난 것들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그것들의 진정한 본질이 공성이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현상이란 <절대>의 가리어진 모습 또는 그릇된 외현(外現)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래가 색신을 여의었다는 말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섭보살이 다시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색이 번뇌로부터 생긴다고 하십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남자야, 번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루(欲漏)ㆍ유루(有漏)ㆍ무명루(無明漏)이다. 지혜 있는 이는 마땅히 이 3루의 허물을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허물을 알고 나서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의사가 먼저 병자의 맥을 짚어보고 병난 데를 알고 나서 약을 주는 것과 같다.”
욕루(欲漏)는 욕계의 견사(見思) 2혹(惑)을 말합니다. 견혹(見惑)은 갖가지 망견(妄見) 즉 사견(邪見)으로 도리를 헤아리고 분별(計度)하여 일어나는 아견(我見), 변견(邊見: 斷常 등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견해) 등의 망견이요, 사혹(思惑)은 탐진치(貪瞋痴)의 미정(迷情: 미혹한 마음) 즉 세간의 事物을 사려(思慮)하여 일어나는 망혹(妄惑)을 말합니다. 유루(有漏)의 누(漏)는 번뇌의 이명으로, 번뇌의 사물을 함유하였으므로 유루라 합니다. 일체 세간의 事體는 모두 유루법이 되고, 번뇌의 출세간의 事體를 여의는 것은 무루법(無漏法)이라 합니다. 그래서 유루의 果는 육도(六道)에 떨어지는 苦(육도)가 되고, 유루의 因은 세속적인 선악이 되어 고(苦)의 집(集)이라고 말합니다. 무명루(無明漏)는 무명이 중생을 누락(漏落)케 하여 중생이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루(漏)라 하는 것입니다. 누락이란 번뇌에 빠지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사물을 인식함에 불연속적이고 순간적인 존재들에 대하여 실체성, 동질성 그리고 상주성을 느끼게 됩니다. 즉 계속 새로워지는 불꽃이나 흐르는 강물을 하나의 동일한 불꽃, 동일한 강물이라고 파악하게 됩니다. 이것이 번뇌이기 때문에 무명루라고 하는 것입니다.
범부의 색신이 번뇌로부터 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내가 <나>를 볼 수 없기에 거울을 보고 거울에 비친 나의 그림자를 <나>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중생이 사물을 봄에는 사물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사물의 그림자(현상)를 보고 이를 실체로 알기에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부처님은 삼루(三漏)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락은 앞에서 일체 번뇌가 사라진 그곳이라고 했습니다. 삼루를 극복하면 일체 번뇌에서 해방됩니다. 번뇌가 사라진 그곳은 서천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일체 번뇌를 극복하여 자유자재로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색신이 번뇌라는 것에서 벗어나 색신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허물을 알고 멀리 여읜다”라는 말은 번뇌를 극복한다는 의미입니다. 번뇌를 극복하고 열반 곧 극락으로 가는 길을 법전(法典)은 반야 바라밀을 닦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반야(般若)란 원인(因)과 조건들(緣)에 의존하는 어떤 특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란 변증법의 부정 기능을 통해 개념의 구속에서 해방된 지성(知性)을 말합니다.
경에서는 이 길을 불이문(不二門)으로도 설명합니다. <不二>란 말은 ”있다“ ”없다“ ‘존재”와 “비존재” 등 양극단의 이중성에서 벗어난 지식을 말합니다. 즉 개념적 구별에서 벗어난 지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개념적 구별에서 벗어난 지식이란 곧 직관(直觀)을 말합니다. 직관이란 본능적으로 획득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새로운 체험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不二의 지혜란 지식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二分化하고 개념화하는 자연적 성향을 벗겨 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란 분별 즉 개념적 구축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입니다. 개념적 구축이란 허망 분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변증법>이란 <이다> <아니다>, <영원하다>, <무상하다> 등의 이러한 이중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에 내재하는 이율배반적 갈등을 해소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수보살은 이율배반적 갈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아를 상정하게 되면 자아에 대립하여 타자가 있게 된다. 자아(自我)와 비아(非我)를 구분하기에 집착과 증오가 잇따른다. 이것들에 의존하여 모든 사악(邪惡)이 솟아오른다. 집착은 쾌락을 향한 갈망을 낳고. 갈망은 모든 대상의 결함을 숨긴다. 여기에 눈멀어 애타는 사람은 대상에서 매력적인 모습을 망상해 낸다. 그리고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을 부여잡는다. 따라서 <나>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윤회는 지속되는 것이다.”
반야의 역할은 실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변화를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변화란 인식론적(주관적)인 것이지 존재론적(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는 언제나 여여(如如) 하기 때문입니다. <법성게>의 말을 빌리자면 “제법부동(諸法不動) 본래적(本來寂)”입니다. 그러므로 <직관(直觀)>하는 경지에서는 무언가를 체득했다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식이 존재하는 순간, 직관의 순수성과 충만성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직관하는 자가 직관하는 대상과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직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식입니다. 지식은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 있을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려면 거울과 거리가 있어야 나를 비추어 볼 수 있듯 알려지는 사물을 自證하려면 우리는 그 사물에서 멀리 비켜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식입니다. 지식은 분별입니다. 우리의 선악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한 태도 여부에 따라 허망 분별에서 탐욕과 증오와 탐닉이 각각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의존해 있는 존재들은 그 실체가 없습니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이 번뇌는 실체가 아닙니다. 업(행위)과 번뇌가 멈추는 것이 해탈입니다. 업과 번뇌는 분별(想像)에서 나기 때문에 분별은 그것들의 허구성을 앎으로써 멈춰지는 것입니다. 실재가 존재(有)라든지 비존재(無)라고 잘못 인식되지 않을 때 허망 분별이 사라집니다.
지식은 이성(理性)을 기반으로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理性> 또한 실재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이성은 분별의 주관적 활동입니다. 그래서 모든 분별은 다 무명의 소산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분별은 실체가 아닌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견해란 것도 허망 분별이며, 허망 분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체를 바로 보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망 분별이라고 말합니다.
그 실체를 바로보기 위에서 보살들은 2가지로 수행합니다. 그것을 지관(止觀) 수행이라고 합니다. 지(止:사마타)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수행을 말하고, 관(觀:비파사나)은 나타나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비추는 수행을 말합니다.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에 뱃길을 밝혀주는 등대와 같이 지관(止觀) 수행을 하고 극락을 찾아가는 길에도 등대와 같은 불빛이 필요합니다. 그 등대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선지식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선지식이란 지혜의 등불 역할을 합니다. 선지식의 도움으로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을 알게 되고 선지식이 깨달은 도로써 그것을 멸하는 법을 알게 되고,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에서 벗어나는 근본을 분별할 수 있게 하며, 시시비비의 속박을 벗어나게 해주는 도(道)와 세속적인 법을 분별하고, 역시 선취와 악취에서 벗어나고 열반을 분별하는 데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선지식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이 명산대찰을 찾아가고 이름난 선승을 찾아가고 고승(高僧)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바세계의 중생이란 허망한 분별을 즐겨합니다. 그 즐거운 마음 때문에 근심이 생기고 그 즐거운 마음 때문에 두려움도 생깁니다. 즐거워할 것이 없으면 근심하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극락이 무엇인지 아는 자는 가는 길을 묻지 않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