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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天下)의 강병처(强兵處) 조선(朝鮮)의 “장안(長安)=한성(漢城)”[2편]
2024년 01월 31일
○ “2편”에서는 : ‘장안(長安)’과 관련(關聯)되는 기타(其他) 사료(史料)【왕조실록(王朝實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當時)의 여러 사료(史料), 문집(文集) 등】에 대한 것들을 찾아 그 내용(內容)을 비교(比較), 검토(檢討), 해설(解說)해 보자.
「고황제【高皇帝 :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 역시(亦是) “장안(長安)”에 도성(都城)이 있었다」라는 것은, 곧 「고구려(高駒驪)의 평양성(平壤城)과 같은 곳이었다」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 ‘서한(西漢)=전한(前漢)’의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하기 전(前), 이미 이곳에는 “한성(漢城)”이라는 “성(城)이 있었다”라는 것이고, 「이 성의 서(西)쪽 모퉁이에 미앙궁(未央宮)이 있고, 동(東)쪽 모퉁이에 장락궁(長樂宮)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성(漢城)”의 그 주변이 “한성부(漢城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안(長安)은 서울이고, 한성(漢城)이자, 한성부(漢城府)”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아 “제2편”에서는 고황제(高皇帝)의 장안(長安) 도성(都城)에 대한 것을 집중적(集中的)으로 고찰(考察)해보고자 한 것이다.
➥ 특히 ‘임진년(壬辰年) 왜란(倭亂)’이 일어났을 당시(當時)의 여러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장안(長安), 한성(漢城), 한성부(漢城府) 곧 한양(漢陽)”에 대한 구체적(具體的)인 이야기들이 많다. 【한수(漢水) 북안(北岸)에 있어 한양(漢陽)이란 지명(地名)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장안(長安)”과 관계(關係)되는 구체적(具體的)인 풍부(豐富)한 이야기는 이때를 기점(基点)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始作)한다.
왜적(倭賊)이 조선(朝鮮)을 침공(侵攻)했을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실정(實情)을 보면 : 여러 가지로 이해(理解)가 되지 않는 부분(部分)이 많다. 특히,
➊ 왜(倭)가 조선(朝鮮)을 침공(侵攻)【외적(外敵)】한 것인가?
➋ 왜(倭)가 중조【中朝:朝鮮朝廷】에 반역(叛逆)【내적(內賊)=내란(內亂)】한 것인가?
즉(卽),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 등에는 지방(地方)에 주둔(駐屯)하고 있었던 많은 병력(兵力)【중조(中朝)의 주둔군(駐屯軍)과 지방군(地方軍)】이 있었지만 : 무엇 때문인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침공(侵攻)한 왜적(倭賊)에게 제대로 대항(對抗)한 예(例)가 없다.」
여기에 덧붙이는 말은 : 「이때의 많은 향도(嚮導)들은 조선인(朝鮮人), 중국인(中國人). 화인(華人)들이었다」라는 것인데, “조선인(朝鮮人)은 누구고, 중국인(中國人)은 누구고, 화인(華人)은 누군가?” 이걸 고려(考慮)하지 않는 사가(史家)들은 사가(史家)라고 불릴 자격(資格)이 없다고 본다.
물론(勿論) 중기(中期) 이후(以後)부터는 적극적(積極的)인 대처(對處)가 보인다. 그러나 왜군(倭軍)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대동강(大同江)에 진격(進擊)할 때까지를 보면 :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게 무엇 때문이었을까?
➥➥➥ 사견(私見)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 「주둔군(駐屯軍)과 지방군(地方軍)에서 내린 판단(判斷)은 : 내란(內亂)이었으므로, 조정(朝廷 : 中朝)과 왜(倭)의 눈치만을 보면서 소극적(消極的)으로 대처(對處)한 것이 아닐까?」 하는 판단(判斷)이다.
또 “임진년(壬辰年) 왜란(倭亂)”은 「당시(當時)의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에 있었던 수만(數萬)∼수십만(數十萬)의 병사(兵士)들은 무엇 때문에 왜군(倭軍)과의 전투(戰鬪)를 요리조리 피하기만 하고, 미루기만 한 것일까?」 봉건왕조(封建王朝) 때라고 생각하면 100%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다.
도주(逃走)하고, 전투(戰鬪)를 피하고, 요리 저리로 눈치만 보면서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처(對處)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던 장면(場面)들이 : 여러 많은 기록(記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에 더(加)하는 것은 「조정(朝廷)의 정예군(精銳軍)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지방(地方)에서 일어난 ‘의병(義兵)=의군(軍)’들과의 전투(戰鬪)가 거의 다일 정도로 중조군(中朝軍)과 지방군(地方軍)의 활동(活動)은 없다」라는 이상야릇한 기록(記錄)으로 만들어져 후인(後人)들에게 가르치고, 그 후인(後人)들은 이것에 대한 의문(疑問) 하나 없이 주입식교육(注入式敎育)을 만족(滿足)해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건 길들여진 것이다” 국가(國家) 스스로 나서서 “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를 국민(國民)에게 ‘강아지’를 길들이듯 한 결과(結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교육(敎育)이 70여 년(餘年) 이어져 올 수 있는지, 누구도 모른다. 누구도 이에 저항(抵抗)하지 않으며, 누구도 이에 이의(異義)를 제기하지 않는 불문율(不文律)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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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임진년(壬辰年) 왜란(倭亂)’ 당시(當時)에 왜적(倭賊)의 침입(侵入)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의 “행로(行路)=파천로(播遷路)=순행로(巡幸路)”를 따라가 보자.
파천로(播遷路)를 따라가 보면 : 당시(當時) ‘조선(朝鮮) 영토(領土)의 지세(地勢)’를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왜(倭)”가 부산(釜山)에 상륙(上陸), 조선(朝鮮)군을 격파(擊破)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진(北進)하자, 충주(忠州)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주둔(駐屯) 중이던 왕사(王師)와 파견(派遣)된 중조(中朝)의 정예군(精銳軍)을 몰살(沒殺)시키고, 한양(漢陽) 도성(都城)을 점령한 뒤, 파천(播遷)한 선조대왕(宣祖大王)을 뒤쫓아 “서진(西進)”을 계속(繼續)하자, 선조대왕(宣祖大王)은, 해서지방(海西地方)으로 가기 위해 개성부(開城府)를 거쳐, 관서(關西)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발목을 잡는 것이 “서진(西進)”이라는 문구(文句)다.
한반도(韓半島)의 지세(地勢)는, 예나 지금이나 동서(東西)는 짧고, 남북(南北)은 3 천리(千里)에 이르므로, 남진(南進) 또는 남하(南下)한다거나, 북진(北進) 또는 북상(北上)한다는 말을 할 수 있으나, 서진(西進)한다거나 동진(東進)한다는 말은 특이(特異)한 경우(境遇)를 제외(除外)하고는 불가능(不可能)한 구조(構造)다.
특히 도성(都城)을 중심(中心)으로 말할 때일 경우(境遇) : “서진(西進)”이라는 말은, 그 존재자체(存在自體)가 불가능(不可能)한 지세(地勢)를 가지고 있는 곳이 반도(半島) 땅이다. 아래의 기록(記錄)을 보자.
➨ “관서(關西)의 서경(西京)”에 주필【駐蹕 : 왕(王)이 행차(行次)하여 묵는 일】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는 당시(當時)의 사건기록(事件記錄)이다. 곧,
《朝廷至西京駐蹕. 冊封光海君. 頒八道敎書云. 席基緖而忘危. 旣値干戈之逼. 簡元良而貳極. 聿係臣民之望. : 조정이 서경(西京)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八道)에 반포하였다. 조종(祖宗)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 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王世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位雖非安. 亂豈忘慶. 玆當播越之日. 誕布告諭之章. 眇予不明. 遭家多難. :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 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二十五年祇畏. 雖欲自盡乎吾心. 億萬生靈仳離. 奈此方來之民怨. 幸玆麟趾之播詠. 實賴燕翼之有貽. 撫民縱愧乎其方. 儲尙念其當早. :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冊禮宜謹. 漢臣之章奏徒勤. 日月久稽. 范鎭之鬚髮已換. :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 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 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但玆蠻獠之外侮. 適乘邦家之內訌. 侵鎬及方[➊]. 列城之保障齊潰. 剝床以膚. 七廟之衣冠將遷[➋]. 天步蒼黃. 人心危惧. :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서울(鎬)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予何執讓之徒固. 是宜定本之當遄. 第二子光海君琿. 天資英明. 學問精敏. 仁孝夙著. 久屬億兆之望. 謳歌思歸. 可繼先王之祚. :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玆進封爲世子. 因令撫軍監國. 事雖擧於倉卒. 計實定於前時. 臣工莫謂予偶然. 根本固不容遽爾. :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럽게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今來箕邑. 始頒中外之書. 昔在漢都[➌]. 已受臣工之賀. 關中沾小海之澤[➍]. 道路望前星之輝. : 이번에 기읍(箕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한도(漢都)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관중[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皇天尙佑乎祖宗. 社稷豈安於偏壤. 遊魂已褫. 漢水之風濤向淸. 官軍思奮. 赤縣之壁壘垂廓[➎]. :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筆者 注 : 적현(赤縣)의 벽루(壁壘)】확청(廓淸)되어 간다. 龍樓整問寢之禮. 鶴襟復舊都之儀. 嗟我臣民. 諒予告意. 願爲太子死. 無貽一人羞. 敷告用亶. 爾公咸遭. 於戱若涉大水. 茫未知其津涯. :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弘濟艱難. 用敬保於元子. 擇建賢嗣. 以從人望. 他日昇平. 實由今日之擧也. :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럽게 보호하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위의 글을 보면, 당시(當時)의 시급(時急)했던 상황(狀況)과 조정(朝廷)이 당쟁(黨爭)으로 인하여 백성(百姓)들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왜(倭)의 정세(情勢)에도 어두워, 그 군력(軍力)이 어느 정도(程度)인지조차 제대로 파악(把握)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 이런 일이 ‘수백(數百) 년(年) 뒤(後)’에, 또다시 「똑같이 일어났고, 또 당했으며, 아예 조선제국(朝鮮帝國)이 ‘멸절(滅絶)되었다’」라는 것은, 『이미 예견(豫見)되었을 이야기라고 한다면 과장(誇張)된 것일까?』
천심(天心)은 곧 민심(民心)이며,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랄 수 있다. 민심(民心)이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떠났다면, 남아있는 것은 “역성(易姓)”일 뿐인데, 그것이 “왜(倭)”였을 줄이야! 이래서 윤회(輪廻)라는 것일까!
• 당시(當時) 긴박(緊迫)하게 돌아가던 상황(狀況) 설명(說明) 중에서, 반도조선(半島朝鮮) 왕조(王朝)로써는 도무지 이해(理解)될 수도, 이해(理解)할 수도 없는 내용(內容)이 기록(記錄)되어 있기에 혼란(混亂)을 가중(加重)시킨다.
곧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허구(虛構)이다.』라는 것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의 당시(當時) 도읍지(都邑地) 곧 서울은 “한양(漢陽)”이며, 이곳에 “도성(都城)”이 있었으며, 도성(都城) 내의 황성(皇城) 안에, 황제(皇帝)와 그 가족(家族)과 이들을 위한 궁인(宮人)들이 수없이 많았으며, 정사(政事)를 보던 관청(官廳)들이 즐비하게 있었다고 한다.
• 과연(果然), 반도(半島) 한양(漢陽) 땅에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도성(都城)이 있었을까?
➊ 위의 글 “➊과 ➋” 를 보면 :
곧〈但玆蠻獠之外侮. 適乘邦家之內訌. 侵鎬及方[➊]. 列城之保障齊潰. 剝床以膚. 七廟之衣冠將遷[➋]. 天步蒼黃. 人心危惧〉라고 하여쓴데,
번역(飜譯)한 분께서는 : 『侵 鎬 及 方 : 수도(서울)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라고 하였다. 이는 곧 『‘호(鎬)’가 수도(首都) 또는 서울이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호(鎬)”란 무엇인가? “호(鎬)”를 먼저 알아야 한다.
➥ 「호(鎬)」 : “鎬” 자(字)는 : “호경(鎬京) 호(鎬)” 자(字)로, 곧 『은(殷)을 멸(滅)하고, 주【周 : 희씨(姬氏)이다.】를 세운 무왕(武王)이 도읍(都邑)했던 장안(長安) 서남(西南)에 있는 호경(鎬京)』을 말하는 것이다.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남(西南) 근교(近郊)에 있는데, 진(秦)의 함양(咸陽)과 한(漢)의 장안(長安)과 남북(南北) 수직(垂直) 선상(線上)에 있으며, 모두 가까운 근접(近接) 지역이다.」 이곳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살았던 황성(皇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안(長安)”에 조선(朝鮮)의 도성(都城)이 있었다면, “왜(倭)”가 이곳을 점령(占領)하자, “선조대왕(宣祖大王)”은 “해서(海西) 땅으로 피신(避身)하기 위해 관서(關西) 땅을 밟았다”라는 것을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
➨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 도성(都城)의 서(西)쪽으로 향했다.
• 서(西)쪽으로 파천(播遷)했다.
• 어가(御駕)가 서(西)쪽으로 향했다.
• 경성(京城)에서 서(西)쪽 길을 잡아, 해서(海西)로 향했다.
• 대가(大駕)가 서(西)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
• 주상(主上)께서 서(西)쪽으로 행차(幸次)하셨다.
➨ “서순(西巡)”이니, “서행(西幸)”이니, “서퇴(西退)”니, “서천(西遷)”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임금의 수레(御駕)가 서(西)쪽 땅으로 행차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인데,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 이야기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라고 한다면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에서만이 가능(可能)하다.
즉(卽), 한반도(韓半島)의 서(西)쪽은 서해(西海)【황해(黃海)】바다에 임(臨)하기 때문이다. 선조(宣祖)가 진실(眞實)로 서(西)쪽으로 행(行)했다면 오늘날의 인천(仁川)이나 강화(江華) 주변에서 배(船)를 타고 가까운 산동성(山東省)으로 향(向)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그러나 “선조(宣祖)가 서(西)쪽으로 갔다”라고 해 놓고는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선조(宣祖)는 서행(西行)이 아닌 북행(北行)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행(西行)했다”라는 많은 기록(記錄)은 뭐냐? 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역사왜곡(歷史歪曲), 역사조작(歷史造作)”이다.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을 : 한반도(韓半島) 땅으로 이동(移動), 옮겨 심으려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➋ 〈七 廟 之 衣 冠 將 遷 :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라고 하였는데,
➥ ➀ 「진(秦) 함양(咸陽)」 :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북(西北) 위성(渭城)의 옛 성(城)을 말하며, 위수(渭水)의 북(北)쪽에 있기에 ‘함양(咸陽)’이라 했다.
➁ 「한(漢) 장안(長安)」 :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북(西北) 13리에 한(漢)의 고성(故城)【옛 한성(漢城)이다】이 있다. 진(秦) 함양(咸陽)의 남(南)쪽이며, 위수(渭水)의 남(南)쪽에 있다.
➂ 「당(唐) 장안(長安)」 : 한도장안(漢都長安)의 동(東)쪽 근접(近接)거리에 있는데, 장안현(長安縣) 내 인접(隣接)하고 있다.
➃ 「주(周) 호경(鎬京)」 :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남(西南) 풍수(灃水) 동안(東岸)에 있다.
➨ 「칠묘(七廟)」가 무엇인가? [한국고전용어사전] / 칠묘[七廟] :
㊀ 〈天子七廟 諸侯五廟 : 천자(天子)는 칠묘(七廟)를,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高麗史3, 世家 3 成宗】〉
㊁ 〈敎中外大小臣僚閑良耆老軍民…一天子七廟 諸侯五廟 在廟右社 古之制也 :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와 한량, 기로, 군민들에게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 천자(天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太祖實錄1, 元年 7月 28日(丁未)】〉
㊂ 七廟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七廟,是指中國帝王於太廟中祀奉祖先的廟廷制度,源自《禮記·王制》:「天子七廟,三昭三穆,與大祖之廟而七。諸侯五廟,二昭二穆,與大祖之廟而五。大夫三廟,一昭一穆,與大祖之廟而三。士一廟」〉라고 하였다.
➨ 〈천자(天子)는 칠묘(七廟)를, 제후(諸侯)는 5묘(廟)를, 대부(大夫)는 삼묘(三廟)를, 사(士)【선비】는 일묘(一廟)를 모시는 것이,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에서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士)”라 함은, 주(周) 때의 사민(四民)의 윗 신분(身分)으로, 대부(大夫) 아래에 있던 신분(身分)을 “사(士)”를 말하는 것이다. 대부(大夫) 아래의 관리(官吏)들이 이에 속한다.】
위의 “칠묘(七廟)”의 예(例)로 보면 : “고려(高麗), 조선(朝鮮)은, 천자국(天子國)”이었음이 확실(確實)하다. 누구도 이를 부정(否定)할 수 없는 것이, 옛 제도(制度)이었기 때문이다. 「고려(高麗), 조선(朝鮮)이 천자국(天子國)이었음을 알면서 옛 기록(記錄)을 보면 : 바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중화(中華)요, 화하(華夏)요, 중국(中國)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이 바로 「“고려(高麗), 조선(朝鮮)”이 “중화(中華)요, 화하(華夏)요, 중국(中國)이었음을 숨기려 하고, 없애려 한 것”이 바로 “조선사(朝鮮史) 왜곡(歪曲), 조작(造作)이다”」 우리는 이걸 깨달아야 한다.
➌ 위의 글 〈昔在漢都[➌]. 已受臣工之賀. 關中沾小海之澤[➍]〉를 보자.
〈昔 在 漢 都 : 예전에 한도(漢都)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인데, 「“한도(漢都)”라 함은, 한(漢)이란 한수(漢水)를 말하는 것이고, 도(都)란 도읍지(都邑地) 곧 서울을 말하는 것이다.」
왜 한수(漢水)이고, 왜 한도(漢都)인가?
➥ 『한수(漢水)=한강(漢江)』 : 【출처(出處)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 한강(漢江, Hangang)】: 《광대토대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 백제 관련문헌에서는 '욱리하(郁里河)'로 수록되었다. 신라 관련 문헌에서는 상류를 '이하(泥河)'라 하고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고 하였다. 고려 때에는 '열수(冽水)'라고 하였다. '한수(漢水)' 혹은 한강(漢江)으로 된 것은 현재 서울 일대가 '한성(漢城)'으로 불렸던 삼국 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라는 것이 아니라 “추정(推定)”된다는 것이다. 추정(推定)이란 추측(推測)해서 말하는 것이다. 곧 ‘확실(確實)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된다.
이게 다인가? 도대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건가? 반도(半島) 땅을 수백만년(數百萬年) 또는 수십만(數十萬) 년 전(前)부터 흘렀을 것이고, 단군(檀君) 이전(以前)의 환웅(桓雄) 이전(以前)에도 유유(悠悠)히 물은 흘러갔을 것이고, 이 주변(周邊)에는, 강안(江岸)에서는… …백성(百姓)들이 살았을 것임은 너무도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바, “강(江) 이름도 없이, 강(江) 이름도 모르며 살아왔다”라는 말은 : 조선족(朝鮮族)은 미개인(未開人)이요, 미후(獼猴)와 같은 종족(種族)이란 뜻과 무엇이 다른가?
‘한반도(韓半島)=반도(半島)’ 땅 허리를 흐르는 대강(大江)의 이름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민족(民族)이 “조선족(朝鮮族),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말은, 곧 “이들의 역사는 없었다”라는 말과 똑같다.
누구 맘대로 아리수(阿利水)고, 대수(帶水)고, 욱리하(郁里河)는 또 뭐고, 이하(泥河)는? 왕봉하(王逢河)는? 열수(冽水)일까? 참 답답한 사가(史家)들이다.
「‘한수(漢水)니, 한강(漢江)’이니 하는 설명(說明) 자체(自體)가 없다」라는 말은, “한수(漢水)나 한강(漢江)은, 반도(半島) 땅을 흐르는 하천(河川)이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이것도 모른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➍ 〈關 中 沾 小 海 之 澤 : 관중(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恩澤)을 더하였다〉라고 했을 때, “관중(關中)”이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관중(關中)”이란 「“관(關)”과 “관(關)” 사이의 땅」을 말하는 것인데, 한반도(韓半島) 어디에도 이러한 “관(關)”과 “관(關)” 사이의 땅은 찾을 수 없다.
➎ 위의 글 〈赤 縣 之 壁 壘 垂 廓[➎]〉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赤 縣 之 壁 壘 垂 廓 : 적현(赤縣)의 벽루(壁壘)가 어지럽던 폐단이 없어져 깨끗해졌다〉라는 말인데,
여기서 문제(問題)는 “적현(赤縣)”이다.
➨ 적현(赤縣) : 「① 중국의 별칭 : 中 國 名 曰 赤 縣 神 州 : 중국의 이름을 적현(赤縣) 신주(神州)라 한다. 【史記 孟軻傳 : 齊, 추연(鄒衍)이 말한 것이다.】 ② 당(唐)의 서울 장안(長安)에 속한 봉선현(奉先縣). 서울에서 30리 이내 지역(地域)이어서 ‘赤’ 자를 붙였다」라고 하였다. [출처(出處) : 漢詩語辭典]
「제1편」에서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 「고구려(高駒驪) 평양성(平壤城)이 장안성(長安城)이다.」라 하였으니, 「당(唐)은, 장안성(長安城)에 도읍(都邑)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적현(赤縣)’ 설명(說明)에서 나오는 장안(長安)은, 「평양성(平壤城)을 말하는 것이지, 당(唐)의 서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기현(畿縣) : 고려(高麗市) 때, 왕경(王京)을 뜻하는 적현[赤縣, 京縣]과 함께 경기(京畿)를 구성했던 개경(開京) 인근의 군현(郡縣)을 말하는데 : 995년(성종 14)에 설치되었다. 즉, 919년(태조 2)에 설치되었던 개주(開州)를 개성부(開城府)로 개편하고 부윤(府尹)을 두어 그 관하(管下)에 6개의 적현(赤縣)과 7개의 기현(畿縣)을 두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의 예(例)에서 보듯이 “적현(赤縣)”이란 제후국(諸侯國)과는 전혀 관계없는 천자국(天子國)에서만이 사용(使用), 가능(可能)했던 명칭(名稱)이자, 천자국(天子國)을 말하는 것이자, 천자(天子)가 사는 궁성(宮城) 주변(周邊) 땅에 설치했던 행정조직(行政組織)을 말하는 것이다.
○ 위에서 예(例)로 든 것 외(外)의 “서행(西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
• 白沙集 : 《壬辰六月扈駕西幸 途中作》
• 忍齋先生文集. 附錄. 遺事錄 : 《壬辰年西幸時。上與河原君言曰》
• 浮査先生文集卷之三.記.晉陽全城記己未 : 《萬曆二十年壬辰.卽我宣祖大王之二十五年也.倭酋秀吉.遣其將平秀家等.領兵來寇.中略,聞大駕西幸.京城旣沒》
• 漢陰文稿附錄卷三.附錄.遺事李貴;《進陷忠州.而大駕西巡.公迺還時.訛言騰播.遠近洶洶.》
• 隱峯全書.混定編錄後集. 宣廟朝甲午: 《且壬辰之亂。大駕西幸》
• 隱峯全書. 混定編錄別集. 光海朝戊申庚戌 : 《先王西幸。車駕過成渾所居之地》
• 隱峯全書.混定編錄續集. 仁祖朝 乙亥丙子 : 《若大駕西行。當出謁路次。以竢進退之命.而旣 而去邠之計.決於一夕.卽到臨津》
• 己丑錄[上] (黃赫).[己丑錄[上]] : 《壬辰年倭亂時。大駕西幸》
• 亂中雜錄[四] 趙慶男撰. 戊申萬曆三十六年宣祖四十一年. : 《大駕西幸》
• 芝峯類說卷十四.文章部七.麗情. : 《至壬辰年三十一不起.臨絶作詩曰.六龍西幸隔風塵》
• 亂中雜錄一. 壬辰年,上,萬曆 20年, 宣祖 25년[1,592년] : 30일. 《車駕, 西幸》
• 記言38 原集 東序記言 西厓 遺事 : 《신립이 패하였는데 급보(急報)하는 자가 없자, 상이 드디어 서행(西行)하였다.》
• 記言別集 26 遺事 上洛君事 : 《昔壬辰之亂。上定西幸之計》
• 상촌집(象村集) 27권 神道碑銘. : 海平府院君月汀尹公神道碑銘 幷序 : 《壬辰。倭賊大擧入寇。傅國都。宣廟西幸》
• 西厓先生文集 16권 잡저(雜著) 記壬辰以後請兵事[1592, 宣祖 25] : 壬辰四月三十日。車駕西狩。五月三日。賊入京城。車駕次于平壤。六月。賊兵至大同江。車駕幸寧邊。進次博川。旣而平壤陷報至。車駕次于義州》
• 선조 29년 병신(1596, 만력 24) 1월 21일(무자) : 《戊子/司憲府啓曰: "壬辰大駕西幸以後, 至乙未六月, 春秋館日記, 太半未修。: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임진년 서행 이후부터 을미년 6월까지의 춘추관일기를 태반은 찬수(纂修)하지 못하였습니다.》
• 宣祖修 26卷, 25年(1592 壬辰 / 명 만력(萬曆) 20年) 4月 14日(癸卯) 이달 그믐에 상이 서행하다 : 《是月晦日, 上西幸。上旣決西幸之議, 闕內吏僕等,喧譁而退.俄而衛士盡散,更鼓斷絶.夜深,李鎰狀啓始至云: 賊今明日必至都城》
• 宣祖 27卷, 25年( 1592 壬辰 / 명 만력(萬曆) 20年) 6月 21日 己酉 : 《時, 東萊旣陷, 賊長驅直進, 所向無前 :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大駕旣入西路, 黃海以南, 至于東萊, 惟聞敗報, 絶無他信。: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黃海) 이남에서 동래(東萊)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
사대부(士大夫)들의 문집(文集)까지를 아우른다면 수백(數百) 수천(數千)의 기록(記錄)에서 「서천(西遷), 서행(西幸), 서수(西狩), 서진(西進), 서행(西幸)」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서(西)쪽으로 임금이 갔다”라는 것을 표현(表現)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행(西幸), 서로(西路)에 들어갔다’라고 하면서 ‘북(北)쪽에 있는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다’라고 한다면 이건 기막힌 이야기다. 즉(卽) “임진강(臨津江)”은 “도성(都城)의 서(西)쪽에 있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위주(爲主)로 살펴보자.
• 宣祖 28卷, 25年( 1592 壬辰 / 만력(萬曆) 20年) 7月 1日 戊午 : 《兵部尙書石星問我國使臣曰 : 爾國乃天下强兵處, 何以旬日之內, 王京遽陷乎? 疑怪益深 :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과 아국(我國) 사신(使臣) 간에 이르기를 : “너(爾)네 나라는 곧 천하(天下)의 강병(强兵)들이 있는 곳(나라)인데, 어찌하여 열흘(旬日) 이내(以內)에 왕경(王京)이 갑자기 함락되었는가?” 하고 의심스러워했다》라고 하였다.
➥➥➥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천하(天下)의 강(强)한 병사(兵士)들이 있는 나라(國)였다』라는 뜻인데, 『“곧 천하(天下)는 조선(朝鮮)이었다”라는 뜻으로, 천하(天下)를 지배(支配)하는 자(者)가 곧 천자(天子)다. 당시(當時) 선조대왕(宣祖大王)은 천자(天子)였고, 조선(朝鮮)은 천자국(天子國)이었다』라는 뜻이다.
이건 「명(明 병부상서(兵部尙書)였던 ‘석성(石星)’의 말」이자, 「조선(朝鮮)은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닌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러함에도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명(明)”나라의 일개(一介) “제후국(諸侯國)이었을 뿐이다”라는 역사통설【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천하(天下)의 강병(强兵)들이 있는 곳(나라)이 바로 조선(朝鮮)이었다」라는 말은 무엇이냐? 바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나라였다』라는 뜻이다.
➥➥➥ ➊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三) 兵政部 寇賊” 에서 이르기를 : 《且 倭 賊 以 我 國 人 爲 嚮 導 : 또 왜적(倭賊)의 길잡이 곧 향도(嚮導)는 아국(我國: 朝鮮) 인(人)이었다.》라고 하였고,
➋ 명사(明史) 열전(列傳)에서는 이르기를 :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한 왜군(倭軍)의 병사(兵士) 속에 많은 화인(華人) 즉(卽) 중국인(中國人)들이 길잡이(嚮導)로 있었다》라고 하였고,
➌ 宣祖 25年(1,592 壬辰, 萬曆 20年) 7月 11日 戊辰 : 《又況倭奴譎狡異常, 華人多爲嚮導, 萬一乘機挾詐闌入, 則其間貽害非細 : 또 형편을 보면, 왜노(倭奴)는 이상(異常)하게 교활(狡猾)하고, 많은 화인(華人)들이 향도(嚮導)가 되었으니, 만일 기회를 틈타 사술(詐術)을 부려 마구 들어 오면, 해를 끼침이 적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아국인(我國人)➨조선인(朝鮮人)➨화인(華人)➨중국인(中國人)」은 똑같은 나라 사람들을 지칭(指稱)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조선(朝鮮)이 바로 화(華)이자 중국(中國)이었다」〉라는 뜻이자,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도성(都城)은, 장안(長安)이었다」라는 뜻이다.
➍ 宣祖 29卷, 25年(1592 壬辰, 만력(萬曆) 20年) 8月 7日 甲午 : 《平壤之賊, 自本月八九日以後, 益肆西向之計, 與小邦兵馬厮殺不已。咸鏡、黃海兩道之賊, 亦將有合勢之意 : 평양(平壤)의 왜적(倭賊)은 이달 8∼9일 이후부터, 서(西)쪽으로 향(向)하려는 계책(計策)을 펴면서 소방(小邦)의 병마(兵馬)를 계속 마구 시살(厮殺)【전투(戰鬪)에서 마구 죽이다】하고 있다. 함경(咸鏡), 황해(黃海) 두 도(道)에 있는 적(賊)들도 장차 합세(合勢)하려는 의도(意圖)가 있다》라고 하였다.
➠ 위의 구절(句節)을 보면 : 한반도(韓半島)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보면 : 평양(平壤)의 서(西)쪽은 곧바로 서해(西海)에 닿기 때문에 “왜적(倭賊)=왜적(倭敵)”이 서진(西進)하려는 계책(計策)을 모의(謀議)하고 있다는 말은 「왜적(倭賊)들이 모두 서해(西海)바다 속으로 들어가 수장(水葬)되려 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한반도(韓半島)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先祖) 조상(祖上)들에 대한 큰 자부심(自負心)을 가져도 된다. 후인(後人)들의 기대(期待)에 어긋나는, 미치지 못한 조상(祖上)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일만(一萬) 년 조선사(朝鮮史)”에서 “수십(數十) 년, 오십(五十) 년 정도(程度)의 기간(期間)”은, 휴식시간(休息時間)에 불과(不過)할 뿐이다.
○ 〈조선족(朝鮮族)이 곧 한민족(韓民族)이며, 바로 오늘의 우리다〉 이것을 자꾸 깜빡하는 무리(衆)들이 있는데, 바로 친일사대주의자(親日事大主義者)들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 스스로 우리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를 깎아내라고, 비하(卑下)하고, 축소(縮小)시키며, ‘일제(日帝)=일본(日本)’의 우익(右翼) 패거리들에게 아부(阿附)하며 충성(忠誠)하며, 그들의 비위(脾胃)를 맞추려 자신(自身)을 내던지는 무모(無謀)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지를 이해(理解)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 우리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이 왜(倭)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왜(倭)는 수천(數千) 년(年) 동안 변방(邊方)에 있으면서 중조(中朝)를 ‘의지(依支)=의탁(依託)’해 살아왔던 일개(一介) 부족(部族)일 뿐이다.』 이걸 착각해 “왜(倭)가 우리를 품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놈들이 바로 친일사대주의(親日事大主義)들이요,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다.
이걸 잊으면 : “친일사대주의(親日事大主義)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득세(得勢)하는 사회(社會)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윤석열 정권”이 바로 그렇다. 우리는 이걸 경계(警戒)하고, 이걸 깨뜨려 경고(警告)해야 하며, 늘 감시(監視)하여, 후회(後悔)하는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제3편으로 계속]
2024년 01월 31일 [글쓴이: 문무(文武)]
첫댓글 고구려(高句麗)의 "도성(都城)"은 "국내성, 한성, 평양성(장안성)"등 여러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한반도 평양에 이러한 성의 유적지 또는 흔적이 있느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글 해설서 또는 사가들은 말하기를 : "오늘날의 평양 시가지가 만들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즉 유적지도 없고, 주춫돌 하나 없고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으니, 북한의 '평양 시가지 내'에 있었던 으로 뭉개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평양성과 똑같은 구조, 시읍, 성(城)과 그 규모등이 똑같았던 곳이 있을까요??
당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평양성"과 "장안성"이고, 서역 땅에 있다는 "구차국성"입니다.
*** 즉 "평양성, 장안성, 구차국성"은 "그 성의 축조모습, 성의 길이, 방향, 3중으로 성을 만든 구조까지 똑같고, 성 내의 시읍 또한 똑같았고, 아주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을 "한 유방"의 나라로 연결시키려 한다면 시대적으로 지리적으로 전혀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조선왕조의 역사속에서만이 그러한 연유와 이유가 해설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편"은 바로 이것을 다뤄보려 합니다,
성호사설 제30권 / 시문문(詩文門)
적성(赤城)
왕자안(王子安)의 시에,
적성에는 아침해가 비추는데 赤城暎朝日
푸른 물은 봄바람에 흔들리누나 綠水搖春風
하였는데, 적성(赤城)이란 장안성(長安城)으로서, 용수산(龍首山)의 흙으로 쌓았으므로 빛이 붉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며, 석전(石甎)으로 포개어 만든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성이란 바로 흙을 쪄서 만든 것이 많아서 그 견고함이 돌과 같다.
그러므로 저 통만(統萬)에서도 징험할 수 있다.
수 문제(隋文帝)가 장안성이 협소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새 도성을 용수산에다 창설하였으니, 옛성은 한(漢) 나라가 성을 경영함으로부터 백 년이 되었고, 물은 다 염분이 많아서 사람에게 너무도 적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생각건대, 용수산의 흙은 곧 지금의 붉고 차진 점액(黏液)인 것이다.
赤城者長安城也 用龍首山土築之色赤故云爾非石甎累成可見.
中國之城多是蒸土為之堅如石.
故於統萬可驗.
隋文帝嫌長安城狹小創新都于龍首山 ,舊城自漢營城 ♪八百歲♪ ,水皆醎鹵不甚宜人故也
意者龍首之土即今之赤埴黏液是也.
-> 번역은 한나라가 100년을 경영했다고 하는데 원문은 팔백년으로 되어있네요.ㅎㅎ
안녕하세요. "박장순"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장안성(長安城)이라는 말은, 주(周)의 풍과 호경, 진의 함양, 한(漢)의 장안, 수의 도성, 당의 도성등을 몽땅 두리뭉실 나타내는 말이라고 봅니다. 적성(赤城)이란 말과 만리장성을 자새(紫塞)라고 하죠. 황토고원에서 그 재료를 구해 그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삼국사기를 봐도 고구려가 장안성(長安城)을 쌓고,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하였지, 그 장안성을 쌓은 재료에 대해서는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돌로 쌓든, 흙을 재료로 했든 관계없는 일입니다.
➡ 陽原王 [或云陽崗上好王] 八 年【AD 552年】 : 《築 長 安 城 :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라고 하였고, 【東史綱目 : 高句麗 陽原王 8년 : 고구려가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 平原王 [或云平崗上好王] 二十八年【AD 586年】 : 《高 句 麗, 移 都 長 安 城. 都 平 壤 百 六 十 而 遷 : 》라고 하였다. 【東史綱目 : 平原王 28년 하(夏) 5월 : 高句麗가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평양(平壤)에 도읍을 옮긴 지 1백 60년 만에 옮겼다】
*** 옛 성을 한(漢)나라가 800년을 경영하였다?
이러한 원문의 내용을 보면 : 한(漢)나라가 장안성에 도읍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록이라고 보아집니다.
더더구나 한(前漢)은 장안성에서 200년을 보냈지 다른 곳으로 천도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원문의 800년은 심각하게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보아집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하세요.
항상 문무님께 감사드립니다.
문무님의 글을 인쇄해서 파일철에 넣어 수시로 보곤합니다.~^&^
무병장수하셔서 계속 좋은 활동하시길 기원합니다.
문무님 글을 보는 것이 저의 낙입니다.^^
알타이산이 백두산일 경우, 바이칼호수가 경박이며, 이르츠쿠츠가 발해의 상경용천부(흥경)이고, 지금 시베리아연방구(러시아)가 심양(성경)이고, 제가 유튜브에 알타이산은 백두산이라는 주제로 올리고 있는데, 시간나시면 타당성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