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관산성 전투와 탄현
가. 501년 탄현의 목책
498년 동성왕 20년 7월 동성왕이 사정성을 쌓고, 한솔 비타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게 한 후,(주 43) 참조) 8월 동성왕이 친히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고 하여 무진주(현 광주)까지 남벌을 떠났는데, 주56) 이 시기가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멈추고 대전 및 청주 이북으로 철수한 시기로 생각됩니다.
이는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왕도까지 쳐들어 와 개로왕을 죽였음에도 백제와 신라의 동맹으로 고구려에 대항을 하고, 고구려 혼자의 힘으로 공주의 공산성이나 보은 삼년산성을 점령하여 이 지역을 평정 어렵기 때문에 철수한 것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 이루었던 고구려 중심의 국제 관계가 깨졌음을 고구려도 인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언급되는 494년 고구려와 신라 장군 실죽등이 살수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백제왕 모대(개로왕)이 군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고 그들을 구원하였다. 주 57) 삼국사기 기록에서 살수에 대하여 양기석 교수는 2001년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신라 서원소경 연구’, 서경출판사 35쪽에서 살수는 삼국사지 지리1에 상주 삼년산군에 속한 살매현(薩買縣)으로 지금의 청원 미원일대로 비정하였고, 이병도교수는 1977년 ‘국역 삼국사기’ 박영사 400쪽에서 이를 신라때 살매현으로 보고 현재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비정하였고, 견아성에 대하여는 양기석 교수는 2001년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신라 서원소경 연구’, 서경출판사 35쪽에서 당시 신라와 고구려간의 전투가 보은 삼년산성을 모기지로 하여 보은-청원-진천선에서 벌어졌던 점에 비추어 볼 때 견아성은 보은 내북면 창리의 주성산성이나 보은읍 산성리의 함림산성에 비정된다고 하였고, 당시 고구려와 제라동맹군이 충북 청원 미원-보은선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보은일대로 추정된다. 주 58)와 같이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와 대응하여 왔는데, 고구려의 철수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것이고 따라서 고구려와 대응하기 위해 백제 땅에 주둔하였던 신라군이 철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양국관계가 애매해졌을 것입니다.
이는 501년인 동성왕 23년 7월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에 대비하였다. 주59) 에서 이 지역에서 백제와 신라 관계가 탄현을 중심으로 국경이 만들어지면서 정리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동성왕시대의 백제 해외경영이나 488년 삼국사기에서 위나라 침략을 물리친 경우등을 볼 때, 힘이 없었다기보다 고구려 중심의 국제 관계는 정리되었어도 백제 혼자 고구려와 대응하기는 부담스럽고, 신라와 연합을 할 시 승리가 가능해서 장기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버린다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동성왕 시 애민 정책이 없어서, 민심이 돌아섰습니다.
삼국사기에 491년 동성왕 13년 여름 6월, 웅천물이 불어서 서울에서 2백여 호가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고, 가을 7월,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가 6백여 호가 되었다. 주60) 경우가 있었고, 499년 동성왕 2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생겨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漢山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된 경우 주61) 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491년의 경우 600여호로 1세대에 5명을 잡으면 약 3,000명이 넘는 수의 사람이 신라로 도망한 것으로 추정이 되고, 도망의 원인은 공주의 홍수로 왕도(공주)의 200여호의 침수는 금강 상류에서 홍수로 추정이 되며, 특히, 옥천, 보은지역이 금강 상류이고, 신라와 가까운 옥천, 보은지역 사람들의 일부가 신라로 도망을 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반면, 그 시기 삼국사기에 신라 소지마립간의 애민정책이 기술되어 있는데
신라 소지마립간(왕)2년(480년) 여름 5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10월,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나누어 주었다. 주62)
소지마립간 5년(483년) 여름 4월, 큰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큰 홍수가 났다. 겨울 10월, 왕이 일선 지방에 행차하여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재해의 정도에 따라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주63)
소지마립간 10년(488년) 10년 2월, 왕이 일선군에 행차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하였다. 3월, 왕이 일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중의 주와 군의 죄수들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주64)
소지마립간 10년(489년) 11년 봄 정월,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농촌으로 돌려 보냈다. 주65)
소지마립간 14년(492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먹는 음식을 줄이도록 하였다. 주66)
특히, 483년 및 488년 소지마립간이 일선군으로 행차 및 규휼은 486년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하기 위해 징발된 사람이 일선군 장정임을 감안 시, 그 당시 보은이나 청산의 백제 사람들도 신라왕의 후덕함을 일선군 장정들의 말에 의해, 아니면 소문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백제 백성들은 이를 비교 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491년의 경우와 같이 홍수등으로 굶주리게 되니 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신라로 떠났을 것이고, 신라로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신라가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임을 감안하면 민심도 신라 쪽으로 흘렀을 것입니다.
499년 동성왕 21년의 경우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생겨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漢山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된다.’ ((주61)참조)는 동성왕은 규휼은 고사하고, 신하가 규휼을 건의하였어도 듣지 않았습니다.
500년 동성왕 22년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주67)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502년 무열천황 4년 이 해 백제 末多王이 無道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마침내 제거하고 도왕(嶋王)을 세우니 바로 武寧王이다<百濟新撰에 이르기를 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함께 제거했다. 武寧王이 즉위하였다....> 주68)
일본서기는 동성왕은 백가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무도하고, 백성에게 포학하여 나라사람이 같이 제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가 신라군이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 민심을 잃은 보은과 옥천지역에서 신라군을 몰아내고 전과같이 영토로써 영향력을 회복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차라리 탄현에 책을 세워 신라 선호 민심을 차단하는 것이 백제 입장에서는 더 유리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탄현의 위치는 보은이나 옥천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 구체적인 위치는 뒤에서 언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