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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1일 [연중 제3주일]
마르코 1,14-20
회개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이웃의 행복을 위해 멈추지 않고 도전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도대체 ‘복음’은 무엇이고 ‘회개’는 무엇일까요?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행복하여지려면 회개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회개는 이전의 행복에서 새로운 행복으로의 선회를 의미합니다.
그 예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첫 제자로 뽑으십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라고 하십니다.
‘자이언 클라크’는 하반신 없이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당뇨였고 감옥에서 아이를 배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보육원에 맡겼고 아이는 멸시와 학대, 절망과 우울증에서 커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보육원에서도 자이언을 원하지 않아 열 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의 삶을 바꿔준 한 권의 책을 만납니다.
‘카일 메이나드’의 『핑계는 없다』(No Excuses)입니다. 카일은 손발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매우 엄하게 키웠습니다.
무언가 할 수 없다고 여기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 하는 걸 다 시켰습니다. 카일은 모든 스포츠를 섭렵했고 심지어 격투기 대회에도
출전하였습니다.
레슬링으로 고등학교 4학년 졸업반 때 36승을 기록하고 전국 12등을 달성했습니다.
이에 멈추지 않고 킬리만자로와 아콩카과와 같은 높은 산을 오르며 손발이 없어도 끈기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은 자이언 클라크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초등부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둬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레슬링부를 찾아갔습니다. 훌륭한 코치를 만나 생애 첫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실력 차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등 뒤에 ‘No Excuses’(핑계는 없다)를 새기고
지금까지 하던 운동량의 두 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첫 2년 동안 치른 경기에서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러다 3학년부터 자이언은 다시 승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회개하면 뒤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패배자로 자기 연민에 빠져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
살던 삶이 지옥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처음에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와
교회에서 키울 때 한 달 정도 지나면 그 아이들이 다시 길거리로 나가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박 목사는 그들이 몇 년 동안 갈아입지 않고 입고 있었던 냄새 나는 옷을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들은 토악질하며 옷을 입고는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박보영 목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회개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뒤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돈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고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부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삶을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참 행복이 나를 행복하게 함이 아니라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함으로써 내가 행복해지는 삶임을
알았습니다.
이웃의 영혼을 구하고 성장시키는 것보다 더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는 바로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따라나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혼다 그룹 창립자 소이치로 혼다는 “꿈을 가져라. 끊임없이 도전하라.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마라.”라고 권합니다.
그 꿈이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회개한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1일 [연중 제3주일]
요나 3,1-5.10
1코린토 7,29-31
마르코 1,14-20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좀 더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시는 분들 참 많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동료, 연인, 친구 등 가장 가까운 사람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틀어진 관계로 인해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일찌감치 퇴직하셔서 매일 집에 계시는 영감님들 때문에 상습 편두통에 시달리는 할머님들 위해 제가 단골로 건네는 멘트가 있습니다.
“영감님께서 안 계신다고 생각하고 한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나마 영감님이 계셔서 마음 든든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디 영감님과 함께 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까칠한 사춘기 청소년 한명 양육한다고 생각하시기를..”
아마 바오로 사도께서도 관계가 힘든 부부들 대상으로 신앙 상담을 많이 해주셨던가 봅니다.
오늘 두번째 독서에서 그런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코린토 1서 7장 29~31절)
인간 관계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이 우리를 인간다운 삶과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재산이나 부동산, 귀중품이나 소장품들...
그런 세상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과욕은 깊은 상처나 좌절을 남깁니다.
때로 가장 우선적 가치를 두고 있는 그 대상들로 인해 우리네 삶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비참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어느 정도 살만하면 대폭 내려놓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욕심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걸고 쥐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실상은,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머지 않아 순식간에 형체가 사라지고 마는 것임을 잊지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올린 이미지를 놓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고수해온 정치적·사상적 성향 역시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만의 영역, 나만의 틀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참함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수십년 전에 받은 상처와 수모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말이 쉽지 놓아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좀 더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때,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할 때,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서로 다투며 소송을 걸게 되지요.
소유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매우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일 강론>
(2024. 1. 21.)(마르 1,14-20)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4-20).”
“때가 차서”는 “때가 되었다.”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이 세상 근처 어딘가에 가까이 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의 날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는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종말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심판을 잘 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실, ‘회개’와 ‘믿음’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회개할 것입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들어가게 될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
하루 종일, 또 영원히 기도만 하고, 성가만 부르는 곳인가?
그런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유치한 생각입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으니, 그 나라가 어떤 곳일지는 막연하게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지상에서의 신앙생활이 그대로 똑같이, 영원히 연장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온갖 억압과 압박에서, 또 온갖 두려움과 슬픔과 아픔에서, 또 온갖 미움과 갈등과 집착에서,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해방되는 곳, 그래서 순수하고 참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만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만 하는 것이 기쁨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그런 나라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곳이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를 그곳에서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성전이 없다는 것은, 전례가 없다는 것이고, 기도도 성사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제자’ 라는 말과 ‘신앙인’이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제자’ 라고 표현하든지 ‘신앙인’이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너희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 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 내가 너희에게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도의 인생’을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도로 삼겠다.” 라는 뜻이기도 한데, 정식으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일은 나중에 하셨기 때문에,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들을 사도로 뽑으시겠다는 것을 미리 예고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다.’ 라는 말은, 여기서는 “물속에 빠진 사람을, 즉 죽음 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건져낸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낚는다.’ 라는 말은 곧 ‘구원한다.’ 라는 뜻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느닷없이
부르심을 받고, 얼떨결에 응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버림’과 ‘따름’은 시작 단계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계속 배우고, 계속 훈련받았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낚아야 할(구원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바로 그들 자신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은 ‘내가’ 앞장서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뒤를 따라오라.’고 권고하는 활동입니다.
‘앞장서다.’는 ‘모범을 보이다. 먼저 하다.’입니다.
먼저 신앙인이 된 내가 잘못된 길을 가면, 나도 망하는 것이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망하게 만드는 일이니 그 죄가 큽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