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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25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
다.북한 인민군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
고, 3개월만에 대구, 부산 등 경상도 일부
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게 됐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 국제
연합군 참가를 결의하게 되고 이로써 전쟁
은 국제전화되었다.
미군을 주로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19
50.9.15), 서울을 탈환하고(9.28), 38
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10.13),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진격(10.26)
하였으나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
공이 개입(10.25)함에 따라 전세가 역전, 휴전 교섭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
들여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1953년7월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
다.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
의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후 5년 만에 일어
난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으나 민족
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미녀 삼총사’ 파라 포셋 사망
➡️2009년 마이클 잭슨 심장마비 사망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50)이 2009년 6월 25일(이하 현지시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다음 달 13일 영국 런던에서 컴백 콘서트 시리즈를 준비중이었다. 같은 해 8월 25일 마이클 잭슨의 사망원인은 치사량의 마취제 성분으로 밝혀졌으며, 잭슨의 불면증 치료를 약 6주간 해왔으며 매일 밤 강력한 마취제인 프로포폴(propofol) 50㎎을 정맥에 주사한 것으로 알려진 잭슨의 주치의인 콘래드 머리(Murray)가 과실치사 혐의를 받게 되었다.
https://youtu.be/BWf-eARnf6U?list=PLrKNoSXCWZDEm2F6Ypdxnq-6Yvm0PLHMV&t=1
➡️2005년 이란 대선에서 강경보수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당선
➡️2004년 국내 최장신 농구선수 하승진, 한국인으로서 첫 미국 NBA 진출
👉🏿 국내 최장신 농구선수 하승진(연세대·2m23·사진)이 한국선수로서는 처음으로 NBA(미 프로농구)에 진출했다.
하승진은 25일(한국시각) 미국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실시된 04~05시즌 신인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17번, 전체 46순위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의해 지명됐다. 하승진은 2년 계약기간 최저연봉 34만9458달러(약 4억247만원)를 보장받는다.
한국 선수로선 처음으로 NBA에 이름을 올린 하승진은 자신이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됐다는 소식을 드래프트가 실시된 뉴욕이 아닌 LA에서 들었다. NBA측이 1라운드 상위 지명이 예상되는 선수들만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일급 대우가 보장된 1라운드 지명에서 제외되고, 2라운드 17번째 만에 이름이 불려졌으나 그의 목소리에선 실망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에 와보니 뛰어난 선수들이 너무 많았어요. 몇 라운드, 몇 순위에 지명되는가보다는 일단 NBA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오히려 2라운드에 지명되고 보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앞서요.”
2m23의 큰 키로 국내 고교(삼일상고)·대학(연세대) 무대를 간단히 평정했던 하승진은 스스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2002년 한국, 월드컵 준결승전서 독일에 0대1 패
👉🏿 잘 싸웠다. 휴전선에서 마라도까지, 백령도에서 독도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 마음이 된 4800만 ‘붉은 악마’와 함께 잘 싸웠다. 우승후보로 꼽히던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을 잇달아 꺾으며 세계축구사를 새로 써온 한국의 월드컵 ‘이변 행진’이 준결승에서 멈췄다. 하지만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본선 1승은 물론 16강·8강을 거쳐 4강까지 진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25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독일의 미하엘 발라크에게 결승골을 내줘 0대1로 분패했다.
한국 선수들은 조별리그 3경기에 이어 이탈리아와의 16강전(18일) 117분, 스페인과의 8강전(22일) 120분을 뛰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나선 철인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과 선수들의 잠재력이 결합된 한국만의 ‘파워 축구’는 남미와 유럽의 어느 팀도 흉내낼 수 없었다.
독일도 그 힘을 의식했는지 이날 전반부터 조심스럽게 나왔고, 후반전 득점한 뒤에는 철저히 지키기 작전을 펼쳤다.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전에서 발목을 다친 김남일을 빼고, 이천수와 차두리를 선발로 내세웠지만 신체조건이 앞선 독일의 단단한 수비를 뚫기에는 선수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
독일의 결승골은 한국 선수의 피로 기색이 역력했던 후반 30분 터졌다. 노이빌레가 한국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든 뒤 낮게 크로스를 했다. 발라크는 문전으로 달려들며 오른발 슛을 했고, 이운재가 전진하며 쳐낸 공을 다시 왼발로 슛해 골 그물을 흔들었다. 이날 서울(250만명), 부산(43만), 대구(29만명), 인천(20만명) 등 전국 458곳에서 700만명이 거리응원에 나섰다.
➡️2000년 6.25전쟁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 `아! 6.25`전 전쟁기념관서 개막
👉🏿 6.25전쟁 50주년을 맞아 전쟁기념관과 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하는 특별기획전 `아! 6.25-그때는 자유를,이제는 통일을`이 2000년 6월 25일 오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개막됐다. 이날 오전 11시 개막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전시회 현황 브리핑을 들은
뒤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있어선 안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막행사에는 김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 피델 라모스 필리핀 전대통령 내외, 조성태 국방부장관,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아! 6.25`전은 `잊혀진 전쟁`이나 `동족상잔`만이 아니라 `자유세계를 지켜낸 전쟁`이자 `냉전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긴 계기를 만든 전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6.25전쟁의 의미와 실상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기획됐다. 2년간 미국-일본-중국 등지에서 수집한 사진, 문서, 영상 및 실물자료 5천여점이 12월 31일까지 전쟁기념관내 2천평의 특별전시실에서 전시됐다.
➡️1998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98` 영문판 판매
➡️1996년 불교계 대표적 스님 서경보 스님 입적
➡️1995년 미국 대법원장 워렌 버거 별세
👉🏿 대법원장을 지낸 워렌 버거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판사로 분류됐으나 그의 임기 내에 임신 중절과 사형,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철폐하는 데 공헌하고 학교의 인종 분리 등에 대하여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는 여러 결정을 내리는 등 그의 판결은 진보주의자들로부터도 많은 찬사를 들었다. 그는 또 1974년 자기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해 준 닉슨 대통령에게 워터게이트 스캔들 판결을 위해 백악관 녹음테이프를 제출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의 판결은 닉슨 사임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했다.
➡️1995년 대북 지원용 우리쌀을 실은 ‘씨 아펙스호’ 동해항 출발
➡️1991년 유고연방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
👉🏿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란 유고슬라비아가 8개 나라로 쪼개져 분열된 사건을 말한다.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뒤부터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되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유고슬라비아는 집단 지도 체제로 바뀌어 각 공화국에서 차례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1989년 공산주의 정권들의 도미노 붕괴를 계기로 본격적인 분리 독립 운동의 막이 오른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독립 무효를 선언, 6월 28일 슬로베니아에 연방군을 진격시킴으로써 유고내란이 발발하였다.
➡️1987년 세균무기(생물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약(BWC) 국내에서 발효
➡️1986년 브라질, 22년 만에 쿠바와 외교관계 재개
➡️1984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사망
➡️1982년 김상협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아세안5국 방문 등정
➡️1980년 엘살바도르, 국외탈출 꾀한 시민에 군의 무차별발포로 600여명 사망
➡️1979년 중국, 월남과 평화협상 재개
➡️1977년 국내 최초의 해양자원탐사선 `탐해호` 명명식
➡️1975년 모잠비크,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 모잠비크 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 남동부에 있는 나라이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연평균 8.3%의 경제 성장을 기록하였다. 모잠비크의 주요 수출품은 다이아몬드와 무연탄이며, 광업과 농업의 비중이 높다. 최근 다이아몬드의 사용량이 급감함에 따라 재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75년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포르투갈로부터 모잠비크를 독립시켰고 그의 부인 그라사 마셸은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교육부 장관이 되기도 했다. 한편, 모잠비크는 독립 이후부터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의 원조를 통해 계획경제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1973년 한미경제협의회 발족
➡️ 1966년. 김기수(金基洙) 세계챔피언에 올라
👉🏿15라운드가 끝나고 발표된 점수는 1대1. 마지막 주심의 채점을 발표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벤베누티 68점...". 순간 장충체육관을 가득메운 8000여명의 관중석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이겼다`는 표정이었다. “칠시입...”하는 발표가 다시 이어지자 장내는 함성의 도가니가 됐다. `74점`의 뒷 숫자 `4`는 환호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고 들을 필요도 없었다.
1966년 6월25일 밤 10시20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탄생했다. 함흥에서 월남한 가난한 소년 김기수(金基洙) 선수가 숙적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2대1 판정승으로 이기고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6년전 로마올림픽 준준결승전에서 김기수를 무릎꿇려 아마전적 88전 중 유일하게 1패를 안겨준 벤베누티에 대한 멋진 설욕이었다.
승리를 확인한 김기수는 귀빈석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달려갔고 대통령은 손수 챔피언 밸트를 채워주었다. 가난에 찌들었던 시절, 5만5000달러나 되는 개런티를 주면서까지 일궈낸 김기수의 승리는 국민들에게 꿈과 자신감을 심어준 `일대사건`이었다.
➡️1963년 거제도 장승포 압사
➡️1962년 한국-시에라리온 국교 수립
➡️1962년 한국-도미니카 공화국, 국교 수립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 부산정치파동으로 정국이 혼란에 처해있던 1952년 6월 25일. 상해임시정부의 행동대 의열단의 한 단원이었던 유시태가 6·25전쟁 기념식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했으나 탄환이 불발함에 따라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유시태는 현장에서 잡히고 배후인물인 김시현도 잇따라 붙잡혔다. 김시현은 6개월 전인 1951년 12월에도 인천형무소장 최양옥에게 이대통령 저격을 제의한 혐의로 당국의 수사를 받은 바 있다. 김시현과 유시태는 `국가를 살리는 길은 이대통령을 제거하는 길 밖에 없다`고 결론, 거사에 합의했다고 진술했다. 한때 수사당국은 배후인물 김시현이 민주국민당 소속이었음을 이유로 민국당 고위층인 백남훈, 조병옥 등에게도 수사의
손길을 뻗쳐 정가를 더욱 긴장시켰다.
두 사람은 1953년 12월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1954년 1월 무기형으로 특사 감형 되었고 1960년 4·19혁명으로 풀려났다.
➡️1951년 미 CBS방송, 최초의 상업 컬러TV 방송 개시
➡️1949년.북한서 남북의 민전(民戰)을 통합한 한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서울-평양에서 각 단체와 합동회의
➡️1944년 미술사학자 고유섭 사망
➡️1920년 한국 최초의 월간 종합지 `개벽` 창간
👉🏿 개벽(開闢)은 1920년대 천도교에서 천도교 청년회의 기관잡지로 발행된 잡지이다. 1920년 6월 발행된 창간호와 임시호가 압수당하면서 호외로 창간호가 간행되었고, 이후 수십 차례의 발행 금지 속에 정기적으로 간행되다가 1926년 8월 통권 72호로 폐간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문화정치에 의해 신문지법으로 잡지 발행이 가능해졌다. 당시의 잡지 중에서 《개벽》은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으나 꾸준히 신문화 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다했다.
➡️1910년 미국연방의회, 백인노예금수법 가결
➡️1907년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 3명, 헤이그 도착
👉🏿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이 상실되고 통감부가 설치돼 국권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906년 6월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았다.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한국침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을 밀사로 파견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 등 대한제국 대표단 일행 3명은 각 국 대표를 만나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고 호소문을 제출하는 등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5년 낙동강철교 준공
➡️1904년 허위 등, 배일통문(排日通文)울 전국에 발송
👉🏿 통문(通文)은 조선시대에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 또는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다. 1904년 6월 김기우(金箕祐) 등 32명이 발기하여 작성한 제1차 배일통문(排日通文)은 철도 부설에서 일어난 일본의 작폐를 비롯하여 국권의 침탈과 이권의 착취, 그리고 북진하는 일본군의 야욕 등을 지적하여 총궐기를 부르짖는 내용이다. 이 통문은 널리 배포되어 크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고, 일본은 그를 체포, 엄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윤병(尹秉)·허위(許蔿) 등이 잇따라 전국에 배일 통문을 발송하였다.
➡️ 1876년 미 제7기병대, 인디언에게 전멸 _ 리틀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
👉🏿<1> 1800년대 중반, 미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이미 정복자들에게 빼앗긴 인디언들에게 남은 땅이라곤 중북부의 대평원뿐이었다. 백인 정복자들은 두 번의 ‘라라미 조약’을 통해 그 길을 지나는 백인들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았고 인디언들에게는 영토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지역 내 블랙힐즈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복자들의 탐욕이 되살아났다. 미 정부는 인디언들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이곳을 떠나 보호구역으로 옮기라고 통보하고 제7기병대를 급파했다. 이에 인디언 연합 세력은 몬태나주(州) 리틀 빅 혼 강가에 모여 항전 채비를 했다.
<2> 리틀빅혼 전투는 1876년 6월 지금의 몬태나 주 리틀빅혼 카운티에서 벌어진 미국-아메리카 원주민 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이다. 수우족의 최대 부족인 라코타족과 샤이엔족은 시팅불과 크레이지 호스를 중심으로 뭉쳤고. 그러나 남북전쟁의 영웅 커스터 중령이 다른 부대와의 합류 약속을 깨고 선제공격에 나섰다가 200명 이상의 제7기병대 전원이 몰살당했다. 이는 부족단위로 분열되어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이 연합하여 미국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둔 기념비적인 전투이다. 이후 미국 측의 탄압이 강해져, 시팅 불 등은 캐나다로 근거지를 옮겨 대미 투쟁을 계속하였다.
➡️ 1852년 건축가 가우디 출생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1852 - 1926)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건축가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을 설계했다. 19세기말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을 주도했던 고전주의 건축을 벗어나, 건조한 기하학 만이 강조된 건축이 아닌 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의 사물들을 관찰했고, 그런 형태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들 외에도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