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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____한국신화의 수수께끼·4
수로신화 속 노래와 혼례
이태희
수로신화는 앞선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금관가야의 건국신화이다. 이 건국신화 속에서 우리는 <구지가>라는 고대가요를 들을 수 있고, 먼 이국땅에서 배를 타고 배우자를 만나러 왔다는 열여섯 살의 당당한 공주도 만나볼 수 있다. 가야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고대사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로 기술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금관가야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국은 오랫동안 예의 삼국과 나란히 존재하였으며, 가야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의 그야말로 ‘삼국’ 시대는 백 년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고대사를 ‘사국’ 시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의견인 것이다. 또한 가야국의 수로신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허황옥은 단군신화의 웅녀나 주몽신화의 유화, 혁거세신화의 알영과는 달리 역사적 실존 인물로 탐구되고 있다. 가락국기에 나타난 수로왕과 허황옥의 이야기를 통해 고대 가야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1. <구지가>는 어떤 노래인가?
수로신화를 전해주는 가락국기의 첫머리는 박혁거세신화의 비슷한 분위기로 시작된다. 신라의 건국신화인 혁거세신화가 진한 땅 6부 촌장의 이야기부터 시작되듯이, 금관가야의 건국신화인 가락국기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각각 집단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이 추장들이 백성들과 함께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며 살고 있었다. 아직 나라 이름과 군신의 칭호가 없던 시절이다. 어느 날 이들이 사는 북쪽 구지봉에서 사람을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삼백 명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사람의 소리 같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말소리만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9간 등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봉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온 것이다. 너희들은 봉우리 꼭대기 흙을 밟으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9간들은 그 말을 따라 함께 즐거워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에 하늘을 쳐다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줄 끝에 붉은 보자기로 싼 금빛 상자가 있었다. 그 상자 안에는 해와 같이 둥근 여섯 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 그 여섯 개의 알은 다음 날 모두 어린아이로 변했으며, 그 중 한 아이가 날마다 자라나 십여 일이 되자 키가 9척이나 되었으며,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라 이름을 수로라 하고,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부르니, 바로 6가야 중의 하나이며,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요약컨대,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자라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혁거세신화의 도입부와 매우 흡사하다. 다만, 혁거세신화에서는 ‘이상한 빛’이 비치고, ‘말’이 내려와 신성한 존재의 하강을 알리고 있다면, 수로신화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신성한 존재를 맞이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 다 건국영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셈인데, 수로신화에서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라고 한 점이 독특하다. 왕을 맞이하며 노래하고 춤춘다는 점에서 이를 ‘대왕맞이굿’으로 보는 민속학적 설명에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때 부른 노랫말이 심상치 않다. 흔히 <구지가> 혹은 <영신가>, 또는 <구하가> 등으로 명명된 이 노래의 노랫말은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하나다. 흔히 십장생의 하나인 <거북>은 신화 전설 속에서 매우 신령스런 존재로 등장하는데, 그런 영험한 존재를 <구워서 먹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가능할까? 설령 그러한 과격한 위협이 특별한 존재를 맞이하기 위해 필요하다 하더라도 거북은 노랫말에서만 등장할 뿐 실제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점도 언뜻 이해되지 않는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가락국기」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에는 <구지가>와 아주 유사한 노래 한 편이 실려있다. 신라 성덕왕 시절 순정공의 부인인 수로와 관련된 <해가>가 그것이다.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러 가는 길이었다.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는데, 절세미인인 수로 부인을 바다의 용이 낚아채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정공은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고 했으니,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순정공이 노인의 말대로 하자 용이 부인을 모시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왕에서 부인으로 달라졌을 뿐, 구지가와 해가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호명하고 요구하고 위협하는 노래의 틀이 일치한다. 사람들이 모여 땅을 밟거나 두드리는 장면도 똑같다. 수로왕과 수로부인의 이름도 한자만 다를 뿐 발음이 한가지다. <구지가>가 불리어지는 신화적 공간에서나 <해가>가 불리어지는 전설적 공간에서도 거북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구지가>와 <해가>는 신화와 전설의 전승과정에서 혹은 정착과정에서 어떤 원형적 노래가 삽입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딱딱한 갑옷 속에 머리를 감추고 내밀지 않는 거북을 위협했던 전래 민요가 감추어진 혹은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을 드러나게 하려는, 또는 분발시키려는 노래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이 원형적 노래가 수로왕의 탄생 이야기와 결합되면서 <구지가>로, 수로부인 이야기에 삽입되면서 <해가>로 변주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노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까치야 까치야 헌니 줄게 새이 다오>라고 부르는 동요가 그것이다. 현대 동요에서 위협 요소는 사라졌지만 호명과 요구의 구조는 옛노래 그대로다.
2. 탈해가 왕위를 빼앗으러 오다?
수로왕은 즉위한 후 2년이 지나 ‘신답평’이라는 곳에 도읍지를 정하고 이십여 일만에 성을 쌓았으며, 궁궐과 나머지 집들은 농한기를 피하여 그해 10월부터 짓기 시작해 이듬해 2월에 완성하였다. 이때 갑자기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자 탈해라 하였다. 탈해는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는데, 신장이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으며, 궁궐로 들어와 수로왕에게 말하기를 ‘왕위를 빼앗으려 왔다’고 했다. 이에 수로왕은 ‘하늘이 나에게 왕위에 올라 백성을 편안케 하도록 하였으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넘길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탈해와 수로왕은 서로 술법을 겨루기로 했다. 탈해가 먼저 매로 변하자 왕은 독수리가 되고, 다시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왕은 새매로 변하였다. 탈해가 항복하면서 말하길, ‘제가 술법을 겨루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인께서 어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절을 하고 물러갔다. 왕은 탈해가 다시 모반을 꾸밀까 염려하여 수군 500척을 내어 추격하였으나, 탈해가 계림 땅 경계로 도망쳤으므로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수로왕이 즉위하여 궁궐을 지을 때도 백성을 생각하여 농한기를 기다렸다가 짓는 등 나라를 잘 다스리는 중에 갑자기 탈해가 등장하여 나라를 빼앗겠다고 나서고 있다. 탈해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우선 그도 알로 태어났다는 점에서 수로왕의 비범한 탄생과 닮아있다. 그런데, 그의 신장은 3척이라 했다. 흔히 ‘3척 동자’란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매우 작은 체구라고 할 것이다. 반면 수로왕은 키가 9척이나 된다고 하였으니, 수로왕과 탈해의 대결은 마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 같아 보인다. 골리앗은 키가 8척 반(약 2.9미터)이나 되는 거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년이었던 다윗의 키는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성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소년의 돌팔매가 거인을 쓰러뜨리는 ‘기적’은 가락국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탈해의 완패다. 물론, 가락국기 서술자가 언급하듯 탈해에 관한 기록이 신라 쪽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수로에게 진 탈해가 신라로 가서 제4대왕이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관한 것은 탈해신화를 언급할 때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런데, 탈해의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과 치수가 달라 정확히 1척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신장이 3척인데 머리둘레가 1척이라는 것은 키에 비하여 매우 큰 두상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비록 탈해가 수로왕에게 패하였지만, 수로왕과 겨룰 만한 대단한 지략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수로왕 서사에서 탈해 이야기는 추후에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로왕의 탄생→즉위→도읍지 건설→혼인→관직 개편과 치국→태자 출생→ 왕비와 왕의 서거>로 이어지는 서사적 흐름에서 탈해와의 대결은 다소 엉뚱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탈해와 술법을 겨루는 이야기는 신화 영웅의 서사상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탈해와의 대결 에피소드를 통해 첫째 수로왕의 뛰어난 능력을 검증한다는 점이다. 주몽신화 읽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모수와 하백의 변신술 대결은 해모수의 능력을 검증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신성한 존재로 탄생하여 십여 일만에 9척으로 자라 왕으로 즉위한 수로왕의 능력을 보여줄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었는데, 탈해와의 술법 대결을 통해 이를 해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탈해와의 대결 에피소드는 수로왕의 능력만이 아니라, 수로왕의 훌륭한 ‘인품’도 강조하고 있다. 탈해가 술법 대결에서 매나 참새가 되었을 때, 독수리나 새매가 된 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죽음을 면한 것은 성인의 어진 성품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탈해 이야기를 통해 가락국의 탄탄한 군사력도 강조되고 있다. 탈해가 달아날 때, 수군 500척을 내어 추격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단군이나 혁거세왕의 경우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순탄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주몽의 경우 건국 후에 송양과 여러 차례 대결을 벌이는 어려움을 겪는다. 주몽과 송양의 대결이 결국 승리자 주몽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듯이 수로왕과 탈해의 술법 대결도 수로왕의 능력을 형상화하는 장치라 볼 수 있다.
3. 허황옥, 바지를 벗어 바치다?
수로왕이 탈해를 물리친 얼마 후, 건무 24년(서기 48년)에 7월 27일에 구간 등이 대왕에게 자신들의 딸 중에서 배필을 고르라고 간청했다. 왕은 자신이 내려온 것이 하늘의 명이었듯이 왕후를 맞는 것도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유천간에게 배와 말을 주어 망산도로 가도록 명하였다. 또 신귀간에게는 승점으로 가도록 하였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나부끼는 배 한 척이 북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섬 위에서 횃불을 드니 그 배는 육지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신귀간 등이 이를 대궐에 보고하자 수로왕이 기뻐하며 9간 등을 보내 대궐로 모셔오게 하였다.
왕후는 신하들에게 ‘내가 그대들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 가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왕은 그 말이 옳다하고 유사를 거느리고 행차하여 대궐 서남쪽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이에 왕후는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왕후를 모시고 온 일행은 신보와 조광 등 20여 명이었다. 황후가 가져온 패물은 비단, 금은, 구슬 등이 너무 많아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왕후가 수로왕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자 왕은 나가 맞이하여 장막 궁전으로 함께 들어왔다. 왕은 왕후와 함께 온 일행들을 편히 모시라고 신하들에게 명하였다. 왕이 왕후와 함께 잠자리에 들게 되었을 때 왕후는 왕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 올해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상제를 함께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 왕 수로는 하늘의 명으로 임금에 오른 신성한 사람으로 아직 배필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그대의 딸을 보내어 배필이 되도록 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상제의 명을 받았으니 너는 우리를 떠나 수로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배를 타고 와서 이렇게 대왕을 뵙게 된 것입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아들이라 청하는 것도 듣지 않았던 것이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이곳에 왔으니 참으로 나에게 다행한 일이오.”
드디어 왕과 왕후는 혼인하여 두 밤을 보내고 또 하루 낮을 보냈다. 서기 48년 한반도 남단에서 국제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열여섯의 처녀가 어찌 그 먼 길을 왔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왕후가 될 허황옥이 육지에 내려 맨 먼저 행한 일이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 바쳤다’는 장면이다. 어찌 혼례를 앞둔 처녀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바지를 벗는단 말인가? 이 장면을 두고 그간의 연구자들은 “여성성의 표출임과 동시에 결혼을 위한 전제로써 수행된 행위” 또는 “전통 속에서 납폐나 예단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행위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이 혼례를 앞둔 행위라는 점에서 맥락에 맞는 것이기는 하나, 하필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바쳤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장면은 일종의 제유법에 해당하는 묘사라고 보기도 한다. 자신의 몸이나 물건의 일부로써 전체를 대신한다는 수사법이 동원되었다는 설명이다. 혼례를 앞둔 허황옥이 자신의 바지를 바침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기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상징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흡족한 설명은 아니다.
오히려 허황옥이 바지를 벗어 바쳤다는 것은 상징적 묘사가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이런 관점에서 최근 한 고고학자의 연구가 주목된다.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라는 책의 저자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허황옥의 도래 이야기가 단지 신화적 전설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사실임을 추적하여 밝히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인도에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바지 위에 원피스를 입다가, 초경이 지나 성숙한 여인이 되면 ‘자타이’라는 저고리와 ‘파바다이’라는 긴 치마로 바꾸어 입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입고 있던 바지를 벗는 허황옥의 행위는 소녀의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하려는 여인의 인도식 통과의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친 것은 일종의 외래문화와 토착문화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수로왕과 허황후의 후일담
수로왕은 허황옥과의 혼인 후에 9간 등 벼슬아치의 이름이 촌스럽다고 이름을 고쳐주고, 관직도 새로 정비하였다. 수로왕이 허황옥과의 혼례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감각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수로왕은 집안을 정돈하고 백성들을 아들처럼 사랑하였으며, 정사가 엄하지 않아도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특히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이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와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왕과 왕후의 혼례는 바로 이 세상의 온전함과 같게 되었다는 칭송의 말이다. 또한 이러한 왕후의 공은 도산씨의 딸이 하나라 우임금에게 시집가서 도운 일, 요임금의 딸 아황과 여영이 순임금에게 시집가서 교씨의 시조가 된 일과 같다고도 하였다. 우임금은 아버지 곤의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이어간 중국의 신화적 인물인데, 우임금 자신이 물길을 트기 위하여 산을 뚫을 때 스스로 ‘곰’으로 변하여 산을 뚫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허황옥은 곰을 얻는 꿈을 꾼 후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고 한다. 또한 다른 기록에 의한 것이지만, 허황옥은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성씨를 물려준 인물이기도 하다. 김해 김씨, 김해 허씨는 각각 김수로왕과 허황옥을 시조로 하고 있다.
가락국기의 기록으로 다시 돌아오면, 허황옥은 먼저 157세로 세상을 떠났고, 10년 후에 왕도 왕후를 그리워하다가 1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왕후는 구지봉 동북쪽에 장사하였으며, 왕은 대궐 동북쪽에 장사하니 수로왕릉이라 하였다. 여기서 잠깐, 왕후가 왕과 10년을 사이에 두고 숨졌는데, 왕후는 157세 왕은 158세였다 하니 그럼 왕후가 9년이나 연상이었다는 말인가? 왕이 왕후보다 9살이 적다면, 16세의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한 해에 수로왕은 7살 소년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 나이 셈법은 부질없어 보인다. 수로왕의 세속적 나이는 알에서 부화한 해로부터 치는데, 그는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미 ‘이상한 소리’로 사람들에게 명령하였으며, 알에서 깨어나서도 10여일 만에 9척 신장의 성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범인들의 나이와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한편, 왕후와 왕이 죽고 장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다. 예를 들어 단군처럼 산신이 되었다거나 주몽처럼 승천하였다거나 혁거세의 사후 이적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리 신화 소개 책들은 수로신화를 왕후와 왕의 죽음까지 소개하는 데서 멈춘다. 그러나 가락국기의 내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로왕의 아들인 제2대 거등왕 이야기로부터 제10대 구형왕이 561년 신라에 항복하기까지 약 오백여 년의 일을 추가로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가락국기는 금관가야의 건국으로부터 신라에 복속되기까지의 가락국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워낙 짧은 분량에 담아내고 있어서 거의 간추린 연대기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수로왕의 사당 관리와 제사가 지속적으로 잘 유지되어 왔으며, 간혹 제사를 잘못 지낸 이가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 수로왕 사당에 도적이 들었을 때, ‘눈빛이 번개 같은 30척이나 되는 구렁이’가 나타나 도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오래도록 수로왕의 신성함에 대한 풍습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삼국유사가 기록되던 고려 중엽 당시에도 “수로왕을 사모하여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이면 향토의 백성과 관리들이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은 동서쪽을 바라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누어 망산도로부터 용맹한 말을 타고 육지로 다투어 달리고, 뱃머리를 둥실 띄워 서로 물에서 밀며 북쪽의 고포를 향해 내달리는 내기를 한다”고 적고 있다. 승점은 “옛날 유천간, 신귀간 등이 허황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급히 임금께 알렸던 유적”이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으며, 허황옥의 고향 아유타국으로 추정되는 인도 아요디아시에는 허황옥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아요디아의 왕손 부처가 김해시 수로왕제사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하니 가야의 수로왕 허황후 신화는 종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태희 / 196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래 익은 사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