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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주일설교 고린도후서13:1-13
본문: 고린도후서 13:1-13
제목: 우리가 자랑해야 할 능력은?
오늘은 고린도후서 13:1-13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자랑해야 할 능력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랑해야 할 능력은?”
축구에는 페널티 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선 안에서 반칙을 할 때 페널티 킥을 주고
비겼을 때 순위를 결정하기 위해
페널티 킥으로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 감독은 페널티 킥을 차는 선수를
정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어떤 선수가 골을 확실히 넣는 것을 안다면
정하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정답과 결과를 알고
길을 가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때 참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입장에서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은
이미 승리를 확정해 놓은 상태에서
우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확보해 놓고
우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될까 저렇게 될까라는 염려도 있고
불확실함 속에서 걱정도 있습니다.
가지 않는 미지의 걸으면 불안함도 있습니다.
바울은 삶은 참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죽음과 병마와 핍박과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에서 아프고 힘들고 고통을 당해도
그의 믿음이나 소망이나 선교사역이
흔들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십자가로 시작한 승리 때문이었습니다.
그 승리는 십자가의 승리로 우리의 먼 미래까지
확고한 점수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축구경기의 재방송을 보면
결과를 알고 봅니다.
그때 어떻습니까?
우리 편이 1점을 먹었다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편이 나중에 2점을 넣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승리를 확정해 놓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 가는 길에 멋짐과 당당함과 용기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적인 의지 발동이나
인간적인 어떤 노력이나 확신이 아니라
십자가가 기초가 되어 있기에 확고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은 하나님 나라까지의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선하고 확고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우리 신앙에서 능력은 무엇입니까?
고린도 전서에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주제가 하나의 단어입니다.
그것은 능력이었습니다.
아 저 사람 능력 있다고 합니다.
능력이라는 단어만큼 현대인에게
매력 있는 단어는 있을까요?
능력은 시대마다 누구에게는 우상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능력 있는 배우자를 찾아서 헤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미사여구를 써서
어느 어떤 사람이 좋다고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능력 있는 배우자를 찾고 구하고 있습니다.
인격도 있고 잘 생기고 돈도 있고
가정 배경까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고린도 사람들입니다.
고린도는 항구라 세계지역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어서
일찍이 황금의 맛을 알았고 돈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가 들어오면서
지식을 숭상하는 문화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칭 굉장히 문화인이었고
그리고 지식인이었고 여러 가지측면에서
발전된 도시 환경에서 생활하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 하면 강남 사람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전1장 2장을 보면 능력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은 그들이 알고 있는 능력이라는 개념을
부수어 트립니다. 어떻게 부수어 트립니까?
바울이 사용하는 것은 능력은 약함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십자가로 설명합니다.
십자가는 당대 사람들에게 매력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의 강함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습니다.
내려놓는 정도가 아니라
배설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들에게는 양극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이 가난한 사람은
과거를 챔피언으로 만듭니다.
내가 과거 얼마나 잘나간 사람인지 아느냐!
무엇도 했고 무엇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오늘을 폼 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과거를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아느냐
그런데 오늘 나는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오늘의 자기를 들어내며
인생을 설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자꾸 부풀립니다.
지금을 덮어 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르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이생의 자랑을
과감하게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도 자랑을 하는데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더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가장 야비하고 무기력하고
실패하고 초라하고 비참한 상징물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기꺼이 그 대열에 바울 자신도 세웁니다.
나를 포로와 같이 그 승리에 대열에
끼어 주셨다고 합니다.
자기는 그 승리를 위해
공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던 나를
그 승리의 대열에 끼어 주셨다고 합니다.
나는 공로 없으나 예수 공로 많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십자가의 가장 약한 능력을 통해서
그 능력을 무너뜨리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이것이 오늘 내용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자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허물 있는 백성임을
다시 발견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2.참된 능력은?
4절을 봅시다.
우리의 능력 무장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만들어진 능력으로
세상의 능력을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대항할 수 없고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비워내는가
그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나를 자꾸 비워내고 자기 의도
자기 열심 도 비워내야 합니다.
자기의 자랑도 자기의 교만도 비워내야 한다.
이 땅의 어떤 자랑은
어떤 것도 내 인생이 기반이 안 된다고 하는
고백을 하며 머리를 흔들며 가야 합니다.
얼마나 나는 교만 덩어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가만 놓아두면 교만이 올라갑니다.
이것은 솔직한 고백입니다.
여름날에 밖을 나가면 잡초가 자랍니다.
잡초가 무섭게 그냥 자란다.
자주 자주 잘라주어야 정돈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자라는 교만의 풀은
말씀의 검으로 철저하게 베어주어야 한다.
못 자라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철저히 약해지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내 안에 모든 것을 다 잘라내는 싸움입니다.
내 의라는 것이 아담의 본성입니다.
매일 매일 올라옵니다.
그 자란 것이 내 삶의 모든 것을 장악합니다.
그래서 저 잘난 재미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고개를 약간 숙여야 합니다.
마치 성전에 들어가서 가까이 갈 수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어서
멀리서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던 세리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까?
고개를 들고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고개를 숙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꺼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렇게 고백한 그렇게 작아지고 약해진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런 세리를 예수님은 친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낮아지고 약해질 수 있는가가
신앙의 정수이고 싸움입니다.
계속 힘 빼고 약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목적지는 분명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더 지독한 자존감 자체를 내려놓으시고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성령님께서 인도하는 길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택함을 받은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다른 사도들과 동역자 들이 그 길을 따랐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약해지는 것입니다.
약해진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취급안하고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 있었고
천군천사가 군병들을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3.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5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믿음을 보여 보라고 합니다.
너희 자신을 시험하여 보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버림받은 자라고 선언합니다.
*너희는 믿음이 있는가?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
어떻게 시험합니까? 그것은 열매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내안에 그리스도가 역사하고 살고 있다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있다면
당연하게 열매가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성령님이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삶 속에 열매가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뒤집어서 열매가 없다면 가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은 자가 됩니다.
열매가 목적일까요?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무늬만 그리스도인
단순히 교회만 다니는 아직 종교인의 지점에서
질퍽거리고 있는 성도들이 꽤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정직하게 고민하여야 합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일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부터 접근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습니까?
아멘!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그렇게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했다면 그리스도인입니다.
문제는 열매입니다.
왜 바뀌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까?
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극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열매가 없으면 가짜입니까?
변화가 없다고 가짜일까요?
가짜는 아닙니다.
좀 안심이 될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고 가짜는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이 우주의 질서 가운데 시공간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분명 2000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실효적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를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시간이라는 공간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개념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예수님을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을 때 우리의 죄를
다 속량하고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목적지까지 완성하셨습니다.
믿습니까?
이제 우리 눈에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길고 오래 더디게 걸어가고 있지만
목적지 곧 완성의 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풀어지고 있습니다.
이단에서는 열매를 가지고 평가를 합니다.
열매가 없으니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합니다.
열매는 그렇게 눈에 뜨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쩌면 심판 날에
주님 앞에 그때에야 완성되고
드러날 일인 미지수입니다.
단 우리는 매일 매일 조금씩 십자가라는
궁극적인 소망 속에 근거해서
그 목적지를 향해 터벅터벅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 승리가 하늘에서 약속하신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구체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연약해서 넘어지고 실수해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때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내주의 증거이다.
이미 하나님의 장중에 우리의 일생이 붙들려 있습니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하나님께서 구원한 백성은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이 우리이기 때문에
깎아 내야 할 부분, 얼룩진 부분,
흙 뭍은 것 검댕이 묻은 것 깎고 닦아서
작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은
이미 고달픈 상황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은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
반짝할 때가 3년 미만입니다.
그때는 기도 응답도 잘 되고
아 이런 천국이 있나 하며 형통하지만
3년만 지나면 다릅니다.
아이를 기를 때도 사탕을 주면서 선물을 주면서
어르고 달래서 키워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머리 큰 아이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지가 알아서 하거나 잘못된 길을 가면
호된 꾸지람이 가해져야 합니다.
이미 우리 선택적 운명은
그리스도의 피에 연결되어 있기에
그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생이 편할 수 없습니다.
왜 구속하셨습니까?
영원한 기업의 소망을 누리도록 구속하셨습니다.
소망의 기업을 확보하여야 하기에
상속자가 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삶을 갈수록 고달픈 것이 정상입니다
난 그렇지 않은데 라고 생각되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보건데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하에 계속해서 깎고 단련하기 때문에
나그네 길이 휘 바람만 나오는 길만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낼 때는
쉬운 것을 낼까 어려운 것을 낼까요?
숙제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갈 길이 멀기에 실력이 붙으라고 숙제를 줍니다.
중학생에게 구구단 숙제를 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는
어려운 문제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실력이 붙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버겁고
편할 날이 없게 숙제를 주십니다.
공짜가 없습니다. 외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어야 할 것은
다 겪고 가도록 하십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해도 안생기고 실력도 붙지 않습니다.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 날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어느새 여기까지 왔구나!
이런 모습으로 바뀌었구나! 를 알게 됩니다.
돌아보니 내가 잘나서 걸어온 걸음이 없고
한걸음 한 걸음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담겨있고 함께한 발자국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이 닥쳐서 어려울 지라도
그때에 하나님께서 개입에 들어오셔서 함께하는
은혜의 시간인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황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이 순례의 길을
당당하게 가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