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시인의 시 ‘봄비’입니다. 만물이 죽은 듯한 겨울을 보내고 새 생명의 봄을 맞는 어름에
봄비가 내립니다. 봄비는 봄을 재촉하는 전령입니다. 그 봄비를 보며 곧 펼쳐질 자연의
향연(饗宴)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봄비는 생명이자 희망입니다.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변영로 시인의 시 ‘봄비’의 마지막 연(聯)입니다. 봄비는 소리 없이 내리지만,
봄비에 마음은 흔들립니다.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들뜨지 않고 차분합니다. 봄비는 그리움이자 기다림입니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신중현씨가 작곡한 노래 ‘봄비’의 한 대목입니다. 박인수씨 등 수많은 가수가 다투어 불렀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의 고전이 된 명곡입니다. 가사도 여느 시에 못지않습니다. 사람마다 슬프고
외로운 사연이 있습니다. 봄비 속을 걸어가며 그 사연을 추억하며 마음을 달랩니다.
봄비는 슬프지만 간직하고픈 옛 추억입니다.
봄비는 보통 이슬비로 내립니다. 이슬비는 조용히 가늘게 내리는 비입니다.
때로는 이슬비보다 굵고 보통 비보다는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로도 내립니다.
어릴 적 집에 놀러 온 이웃집 아주머니가 돌아가려 하자 어머니는 더 머물다 가라며
“더 있으라고 이슬비 오네”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가라고 가랑비 오네요”라고
웃으며 대꾸하던 정겨운 장면이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봄비는 정다움입니다.
‘이슬비 총리’는 총리 때 저의 별명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느 일본인 교수가 저에게
“하루사메(春雨·はるさめ) 총리”라고 부르며 인사하였습니다. 직역하면 “봄비 총리”입니다.
인터넷에서 제 별명을 보았답니다. 이슬비와 봄비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슬비 총리’라는 별명은 취임 100일을 맞아 행한 연합뉴스 최이락 기자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붙여진 것입니다. 최 기자는 저에 대하여 과거 경력에 비추어 존재감이나 색깔이 없는 총리라는
지적이 있다고 하면서 어떤 총리로 남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조금은 서운했지만 옳은 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존재감이나 색깔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존재감이나
색깔이 없는 것이 나의 존재감이자 색깔입니다. 존재감이나 컬러를 만들려면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거칠게 싸움도 하고, 국민에게 근사한 말을 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습니다. 이슬비는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으로
스며들어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소나기는 시원스럽게 내리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쓸어버립니다. 조용히 내리는
이슬비가 열매를 맺게 하듯이 나의 작은 노력이 모여 국민의 이익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봄비는 조용히 내실(內實)을 다지고 싶은 저의 마음입니다.
얼마 전 내린 봄비로 남부 지방에 계속되는 가뭄 해소와 산불 예방·진화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선 살아가는 걱정이 앞서기에 예전같이 봄비나
이슬비를 두고 시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에 잠길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아
허허롭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봄비는 한없는 고마움입니다.
- 글/ 김황식(전 국무총리) -
蛇足
‘어름’은 두 사물의 끝이 맞닿는 자리, 구역과 구역의 경계점, 일정한 테두리나
범위의 안을 말한다. 또, 남사당놀이의 네 번째 놀이다.
‘어름하다’는 어떤 상황을 대강 짐작으로 헤아리는 데가 있다.
‘허허롭다(虛虛.. )’는 텅 비어 있는 듯하다,
(마음이) 매우 허전한 듯하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