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회랑>
-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시공사, 2020)
제5장 선정의 알레고리
- 이탈리나 시에나의 조개 모양 캄포광장에 푸블리코궁전. 시에나 정부가 쓰기 위해 지은 궁전인데 1297년에 건축. 이 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기구는 9명의 콘술(집정관)로 구성. 시에나를 포함해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서 급속히 형성되던 코무네에서 특이한 점은 훨씬 높은 수준의 자유. 그 자유는 번영의 길을 닦아주는 광범위한 유인과 기회가 있는, 특별한 경제체제를 뒷받침했다.
- 코무네 개념은 9세기 말과 10세기 이탈리아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남. 당시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시민들이 지배세력인 주교와 교회, 그리고 영주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기 시작. 그 지역에서 시민들은 공화주의적 자치정부의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정부형태의 결정적인 특징은 대중이 일정 기간 도시를 운영할 콘술을 선출한다는 점. 코무네 도시들은 형식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했지만 1183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가 서명한 콘스탄츠 강화 조약에 따라 사실상 자치권이 인정.
- 자치정부의 작동 원리의 기본적 형태는 성인 남성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 평의회는 남성시민 300명으로 구성. 시에나의 행정구역 3곳에서 각각 100명씩 1년 임기로 선출. 이 기구의 선거인들은 9인 위원회의 콘술들과 포데스타(행정장관), 재정관과 조달관, 국가 행정관료, 재판관들이었다.
- 포데스타는 가문과 당파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시에나의 바깥에서 온 사람이 채워야 했다. 포데스타는 시민들에게서 선물을 받을 수 없고, 심지어 그들과 식사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루 넘게 도시를 떠나 여행할 수 없었고, 각 포데스타는 번갈아 가며 다른 행정구역에 거주해야 했다. 임기가 끝나면 그이 재임 중 품행을 조사하는 2주일 동안 시에나에 남아 있어야 했다.
코무네는 선출된 콘술 혹은 권력 행사에 엄격한 제한을 받는 행정관들이 이끌어가는 공화정체였다. 민회나 다른 평의회 같은 대의기구는 국가 권력과 9인 위원회 같은 집행기구에 족쇄로 작용했다.
- 샹파뉴 연시(샹파뉴 지방 4개 도시에서 6주씩 6차례)는 이른바 중세의 상업혁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다. 이탈리아의 여러 코무네는 그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코무네의 정부체제는 5세기 말 서로마제국 붕괴에 따른 침체를 겪은 후 교역과 경제 활동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해주는 법과 경제 제도를 만들어냈다.
- 특히 금융 부분에서 이탈리나 코무네는 혁신을 선도. 코무네의 경제 활동이 유럽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모든 교역 장소에 기지가 설치. 중세 상업을 조직하는 주된 방식이 된 환어음을 발명. 국제적인 은행과 환어음이 출현하면서 국제 상거래는 대단히 원활해짐. 상업보험을 고안하고, 주식회사의 선구격에 해당하는 여러 조직 형태도 창안.
- 선진 회계 관행이 필요. 1202년 피사 출신의 피보나치가 아라비아 숫자체계를 채택함으로써 회계를 혁명적으로 발전시킴. 14세기 중반이 되자 이탈리아에서 처음 복식부기가 등장. 상업혁명은 눈부신 경제성장과 더불어 진행되었고 금융부분 바깥에서도 혁신을 자극. 도시화 수준이 향상되고, 교육과 노동력 기술 수준도 향상됨.
- “다른 지역 사람들이라면 마치 역병을 피하듯이 낮은 신분의 젊은이들과 저급한 기계를 다루는 일꾼들이 더 존경받고 명예로운 것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테지만, 제노바 사람들은 그들에게 기사의 허리띠와 같은 명예를 주며 높이 평가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라고 황제의 숙부인 오토 주교가 제노바 사람들에 대해 언급.
- 그는 위계질서와 그것을 지탱하는 규범이 침식되는 현상에 대해 불평한 것. 하지만 그런 규범들은 재능을 가진 ‘이름 없는 사람들’이 상위 계층에 오르는 것을 막기 때문에 그런 제약들을 완화하는 것은 경제 발전에 극히 중요하다. 혁신은 결정적으로 그와 같은 재능을 키워주고 이름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진로를 그리며 자신의 구상을 실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 번영과 경제 성장은 몇 가지 기본원리에서 시작. 그 원리에는 사람들이 투자하고, 실험하며, 혁신할 유인도 포함된다. 국가가 없으면 대개 그런 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분쟁을 심판할 법이 없고 다툼이 벌어졌을 때 재산권을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국가 상태에서 출현한 규범들이 경제적 유인으로 인해 사회가 동요하지 않도록 그 유인을 왜곡하면서 경제 활동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 번영과 경제성장이 확고한 재산권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번영과 성장을 위해서는 광범위한 경제적 기회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누구든 혁신이나 가치 있는 투자를 위한 좋은 구상이 있다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기회는 사회 안에서 널리, 공평하게 배분돼야 한다. 이는 자유의 중요한 면이지만 때때로 간과된다.(cf. 윌리엄 번스타인 <부의 탄생> : 재산권, 과학기술적 합리성, 자본조달 시장, 교통 통신의 발달)
제6장 유럽의 가위
- 고대의 모든 위대한 제국들과 비교하면 서부와 북부 유럽은 기껏해야 주변부였다. 로마인들은 지중해 주변에 발전된 문명을 건설했지만 그들이 야만인으로 본 게르만족과 맞서기 위해 오늘날 독일의 일부가 된 지역으로 원정갔을 때를 제외하면(물론 현대의 프랑스인 갈리아와 영국 일부를 정복하기는 했지만) 서부와 북부 유럽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유럽은 역사적으로 한참 지나서야 세계무대에 등장했다.
- 정부와 사회, 경제면에서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전례 없이 자유가 증진되고 기술과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어떻게 닦았을까? 유럽에 유리하게 작용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은 1500년 전 중앙에 집중된 권력과 보통 사람의 힘 사이에 뜻밖의 균형이 이뤄진 일련의 독특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 균형이 유럽을 회랑 안으로 밀어 넣어 국가와 사회가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하는 레드 퀸 효과를 작동시켰다.
- 균형은 두 가지 요인이 어우러져 발생했다. 첫째는, 5세기 말에 의회와 합의에 따라는 의사결정의 규범을 중심에 두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부족사회들이 유럽을 장악한 것이다. 둘째는, 로마제국과 기독교 교회로부터 흡수한 국가 기관들과 정치적 위계질서의 핵심 요소들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 2가지 요소를 가위의 양날로 생각할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도 혼자서는 유럽을 새로운 경로로 이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날을 쓸 수 있게 사북을 박으면 유럽의 가위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부상하면서 경제적 유인과 기회를 창출할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 게르만족은 참여적인 부족 의회 정치의 요소가 있었다. 덜 중요한 문제는 족장들만 논의한다, 중요한 현안은 공동체 전제가 토론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결정할 때도 족장들이 미리 그 주제를 검토한다. 게르만족이 전시에는 의회에서 지도자를 선출하지만, 평화기에는 제한된 권력을 가진 족장들을 빼고는 지도자를 뽑지 않았다.
- 프랑크족의 초기 역사는 게르만 부족들의 상향식 정치의 전통과 로마인들의 국가기관을 결합하려고 애쓰는 과정이었다.
- 871년 22살 앨프레드가 웨식스의 왕이 됨. 앵글로색슨족의 의회 위탄에서 합의됐을 것. 왕은 서약 후에 왕관을 받음. 왕관은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로마식 상징으로 게르만족에게서 영국으로 수입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색슨족이 위탄의 바탕을 이룬 게르만족의 의회를 도입한 것이다. 앵글로색슨족 지도자들은 유럽을 여행하며 그들이 접한 제도적 모형들을 자유롭게 차용했다.
- 국가의 역량 강화에 대한 사회의 반발은 헨리 2세의 중앙집권화 개혁들이 단행되고 1199년 그의 아들 존이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계속됐다. 존 왕이 끊임없이 세금을 요구하면서 법과 규범이 부과한 제약을 깨트리려고 시도하는 데 반감을 느낀 일단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런던을 장악했다. 존 왕은 6월 10일 런던의 템즈 강가의 러니미드에서 평화 교섭을 하러 그들을 만났다. 이 회합에서 귀족들은 귀족 조항으로 불리게 된 내용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열흘에 걸쳐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즉 대헌장(Great Charter) 제정을 협상했다. 핵심 조항들은 동의 없는 과세 문제와 법률과 제도로 왕을 제약하는 문제에 집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그나 카르타가 일부 반항적인 귀족들이 협상한 것이기는 해도 왕이 양보한 대상은 ‘왕국의 모든 자유민’이었으며, ‘이 나라 공동체 전부’가 그 실행에 참여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 마그나 카르타는 얼마나 독특한가? 답은 전혀 독특하지 않다는 것이다. 1356년에는, 나중에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분할되는 브라반트 공국에서는 의회가 새 공작에게서 환희의 입성이라는 헌장을 받아냈는데 공작은 그 현장에 따르고 실행하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공작은 전쟁 과세 화폐 주조와 평가절하에 관해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마그나 카르타가 제정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 전역에 걸쳐 '환희의 입성'과 비슷한 문서를 찾아볼 수 있다. 1205년 아라곤의 왕 페드로 1세가 카탈루냐에 준 헌장, 1222년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가 준 황금헌장, 1220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준 현장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헌장들은 모두 같은 문제들에 초점을 맞췄으며, 특히 통치자는 세금을 물리려면 시민들과 협의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보장했다.
- 대헌장들뿐만 아니라 의회도 유럽 전역에 걸쳐 생겨났다. 의회의 확산은 스페인에서 시작됐는데, 처음에 1188년 레온 의회가 생겼고 그 다음에 아라곤과 카탈루냐, 발렌시아가 합쳐 만든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퍼져나갔다. 팔러먼트와 같은 의회들은 이어서 이베리아의 나바라왕국과 포르투갈에서도 발전했다. 프랑스에서는 비록 전국적인 의회인 삼부회의 발전은 느렸지만, 각 지역의 신분제 의회들은 만개했다. 더 동쪽의 스위스에서는 지방의 각 칸톤이 자체 의회를 두고 있다가 1291년 스위스연방으로 합쳐졌다. 북쪽으로 가면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는 독일의 공국들이 일반적으로 란트타크로 불리는 의회를 뒀다. 서쪽에서는 나중에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된 플랑드르, 홀란드, 브라반트가 모두 활기찬 의회를 두었다. 북쪽으로 가면 1282년부터 덴마크에, 15세기 중반부터 스웨덴에 의회가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13세기부터 의회를 뒀고. 폴란드에는 그때 있던 의회 세임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물론 우리가 앞 장에서 봤던 코무네의 맥락에서 그곳 사정에 맞는 헌장과 의회가 있었다. 이것들 역시 민중의 집회에 뿌리를 두었다. 사실 이탈리아 북부는 로마제국의 국가기관들 그리고 처음에 또 다른 게르만족인 롬바르드족이 들여오고 그 후 카롤링거 왕조가 전파한 의회 정치의 전통이 섞일 수 있는 완벽한 무대였다. 이는 실제로 이탈리아 북부를, 민중 집회의 역사가 없고 헌장과 의회를 발전시키지도, 번창하는 자유를 같이 경험하지도 못한 남부와 구분 지었다.
- 산업혁명의 기원. 5세기와 6세기에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나타난 것은 비록 점진적으로, 때로는 잠정적으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 혁명이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그 경제적인 결과였다. 제5장에서 살펴본 이탈리아의 코무네의 경우와 꼭 같이 산업혁명도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가능케 한 자유와 기회, 유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