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廣陵(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있는 광주 이씨의 시조 묘) : 광릉은 600여 년 전 고려 말 광주 이씨 이집(李集)과 영천 최씨 최원도(崔元道) 두 사람의 신의와 우정이 담겨 있는 장소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고려 말 최원도는 신돈(辛旽)의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고향 영천으로 내려와 살았다.
당시 우의가 돈독했던 친구 이집 또한 정사에서 떠나 둔촌동 집에 머무르면서 모의를 꾀하다 발각되어 몰래 늙은 부친 이당(李唐)을 모시고 친구 최원도 집을 찾아 몇 달 만에 도착하였다. 마침 최원도는 향리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음유에 젖어 있을 때 이 집의 사랑채에서 부친과 쉬고 있었는데 소식을 들은 최원도는 무척 성을 내며 찾아와 부자를 쫓아내고 그 집을 불태워 버렸다.
이집은 최원도의 뜻을 알아채고 마을 밖으로 몸을 숨겨 밤까지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최원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부자를 데리고 와 다락방에 숨겼다. 오랫동안 집안사람들도 모르게 지내오다 어느 날 부엌일을 맡은 여종이 주인의 식사량이 증가한 데 이상히 여겨 문틈으로 엿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종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이집의 아버지가 다락방에서 돌아가셨는데 최원도는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서 정성껏 장사를 지내 주었다. 이것이 광주 이씨 시조 이당의 묘이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까지 광주 이씨와 영천 최씨 두 가문의 후손들은 선대의 각별한 우의를 항상 생각하면서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상대방의 조상 묘에 참배하는 풍습이 전해져 오고 있다.
왕의 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광릉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덤이 능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마을길인 광릉1길을 따라 들어서면 광릉의 추원재와 관리사무소가 있고, 그 북쪽 뒷산에 두 기의 묘가 있다. 광주 이씨 시조인 이당의 묘가 앞에 있고, 그 뒤쪽에 최원도의 어머니 묘가 있다.
광릉의 규모는 지름 14m, 높이 3m 정도이며 평면 형태는 원형에 가깝다.
광릉의 묘 앞은 이단으로 단이 져 있으며, 제일 아랫단에 석등과 향등이 있다. 그 윗단에 문인석이 양 쪽에 1기씩 세워져 있다.
문인석의 크기는 높이 1.2m 정도이며 풍화작용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묘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묘비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983년 10월에 세워진 것이다. 최원도의 어머니 묘 앞에는 무인석이 세워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광릉은 고려 말 어지러운 시기에 최원도와 그의 친구 이집에 대한 깊은 우의를 엿볼 수 있는 무덤이다.
그들의 신의와 우정은 오늘날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서로 추모하는 풍습이 남아 있어 각박한 현대인에게 모범이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무덤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최원도崔元道(고려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
최원도(崔元道)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백상(伯常), 호는 천곡(泉谷)이다. 최원도의 고조는 4세(世) 봉익대부(奉翊大夫) 전호위상호군(典護衛上護軍) 최승주(崔承澍)이며, 증조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좌우위 보승랑(左右衛保勝郞) 최윤기(崔允琪), 조부는 봉정대부(奉政大夫) 사온령 동정(司溫令同正) 최윤(崔倫)이다. 부친은 전의시 판사(典醫寺判事) 최유진(崔有珍)이며,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승의랑(承議郞) 지울주(知蔚州) 이중영(李仲榮)의 딸이다. 슬하에 아들 승의랑(承議郞) 최자화(崔自華)가 있다.
최원도(崔元道)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남대 사간(南臺司諫)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좌사간(左司諫)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영천 구룡산(九龍山) 천곡(泉谷)에 은거하여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지켰다. 서거정의 스승인 유방선(柳方善)이 그를 칭송하며 시를 주었는데 ‘무적도유전(無嫡道有傳)’이란 구절이 있다.
1368년(공민왕 17) 이집(李集)이 신돈(辛旽)에게 무고를 당해 아버지 이당(李唐)을 업고 피신하여 몸을 의탁하니, 최원도는 그들 부자를 여러 해 숨겨 주었다. 그리고 이당이 죽자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 묘소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가 바로 광주 이씨(廣州 李氏) 시조공 묘소이다.
최원도의 묘소는 일실(逸失:잃어 버리거나 놓침) 되었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北安面) 도유리(道有里) 나현(蘿峴)에 두 동생 최형도(崔亨道)·최정도(崔貞道)와 함께 단소(壇所:제단이 있는 곳)가 마련되어 있다.
단소 아래 나현재(蘿峴齋)가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둔촌에게 드리다.
사간 최원도
강개하게 시국을 한탄하여 눈물로 옷깃 적셨는데
유리(流離)중에도 지극한 효성은 유음(幽陰)까지 달했노라
한산(漢山)은 멀고멀어 운연(雲煙)만이 아득한데
나현(蘿峴)은 굽이굽이 돌아 초수(草樹)도 그윽 하구나
앞뒤의 두 마렵(馬鬣)은 하늘이 가려준 것인데
그 누가 그대와 나 두사람의 마음을 알 것인가
바라건대 대대로 길이 이와 같이하여
모름지기 교정(交情)이 이단금(利斷金)토록하자구나
최원도 충비 제비(崔元道忠婢燕娥) : 충비(忠婢)인 제비[연아(燕娥)]는 최원도(崔元道)의 노비이다. 최원도는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남대 사간(南臺司諫)에 이르렀다.
신돈(辛旽)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에 내려와 은거하고 있었다.
최원도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둔촌(遁村) 이집(李集)[1314-1387]이 개성에서 이웃에 살고 있는 신돈의 측근인 채판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가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이집은 연로하신 노부를 등에 업고 영천으로 와서 최원도의 집에 피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4년간에 걸친 다락방 피신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그때가 1368년(공민왕 17)이다.
최원도는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비밀로 하여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큰 그릇에 밥과 반찬을 담아 가서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긴 세월 동안 날마다 많은 밥을 먹는 주인의 식욕을 의아하게 여긴 여종 제비가 문구멍으로 몰래 들어다 보고 놀라서 안방마님에게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이 결국 공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공은 제비 등 식솔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에 비밀이 새는 날에는 양가가 멸망한다는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여종 제비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는데,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제비를 연아(燕娥)라고 적고 있다.
둔촌의 후손들이 산 아래에 천곡의 은혜를 추모하기 위해 보은당을 지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으며 충비(忠婢) 제비를 잊지 않기 위해 제비의 무덤 앞에 술과 밥을 지어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6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단[연아총(燕娥塚)]을 유지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