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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향한 사도 바울의 자기 변론
사도행전 21:37~22:29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하여 폭행을 당하는 중에서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간신히 건져져서 그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의 무고함을 변증하여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려고 행하는 변론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 가운데 드러난 사도 바울의 행동과 그의 변론에서 영적 교훈들을 살피고 그 교훈들을 배우는 복된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로마 군인들에게 떠받쳐서 들려 가던 중에 돌아서서 유대인들에게 말하고자 로마 천부장에게 부탁하는 대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7절로부터 4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동족 유대인 폭도들의 손에 주먹으로 맞고 발길질로 걷어 채이고 거의 죽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으면서도 로마의 천부장에게 부탁하여 자기로 하여금 자기를 쳐 죽이려 하던 유대인들에게 말을 할 기회를 얻고자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곧장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 동족에게 오해를 풀고 그들에게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증언함으로 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동족이 자기의 가르침과 전도를 오해하여서 자기를 향하여 분노를 터뜨리고 악의를 가지고 죽이려고 주먹질과 발길질과 돌로 쳐 죽이는 일을 감행했을지라도 사도 바울 자신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을 품고 돌이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은 그러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품고 행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정말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구원의 주님을 모신 자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에 빚진 자로서 우리에게 원수처럼 대한 자요 악을 행한 자일지라도 기꺼이 용서하고 사랑하며 품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에게 유창한 헬라어로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대뜸 천부장이 사도 바울에게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라고 말했던 배경을 잠깐 살펴봅시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참고해보면 이 때는 네로가 황제에 오른 뒤 4년째 지난 후입니다. 주후 57년 정도 시기인데, 그 당시에 유대 지역을 로마 총독 벨릭스가 다스릴 때입니다. 그 때에 유다 각지에서는 강도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군대와 치안 세력을 향하여 도전하면서 각처에 근거지를 두고 유대 사회를 혼란케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카리파’라고 불리는 무법자들이었는데, 단도를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암살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대제사장 요나단을 죽이기 시작하면서 날마다 백성들 사이에서 살인을 거듭하였습니다. 게다가 거짓 선지자들도 일어나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폭동을 선동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애굽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자가 수천 명의 추종 세력을 이끌고 가서 요단강을 건넌다고 말하기도 하고 감람산에 다시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로마군을 물리치고 자기가 황제가 되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은 친위대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이에 수천 명이 따랐는데, 요세푸스는 무려 3만 명이 추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 총독이 그들이 감람산에 모여들자 자기 휘항 있던 중무장한 로마 군대를 총동원하여 애굽 사람 사기꾼과 그의 추종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애굽 사람 사기꾼은 몇몇 사람만 데리고 도망쳤고 대부분이 죽고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강도떼들이 더 많이 늘어나서 부자들을 살해하고 그 집들을 약탈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암흑기가 유다 전역에 퍼지기 시작하는 혼란의 시기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도착하여서 지금 매우 예민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던 유다 사람들과 로마 군인들 한가운데 끼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천부장에게 자기가 그 애굽 출신 거짓 선지자가 아니요 다소 출신의 건전한 시민이라는 것을 확인시킨 후에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청하여서 허락을 받습니다.
사도는 혼란 속에서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는 조국 유다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예루살렘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드는 동족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간의 오해도 풀고 복음을 전하고자 이렇게 그들 앞에 담대히 나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층대 위에 서서 손짓하여 사람들을 조용히 하게 한 다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히브리 말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22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말씀을 듣는 청중인 유대인 동족들에게 존경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부형들아”라는 말은 “형제와 아버지들이여”라는 존대의 호칭입니다. 지금 자기를 죽이려 드는 자들에게 대하여 사도는 “형제들이여, 아버지들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항상 모든 이들을 향하여 존중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친절과 온유의 마음과 언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자기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히브리 말로 말문을 열어서 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동족임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유대인 집안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이방 지역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곧장 예루살렘 성에서 자랐다고 덧붙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에 대하여 자기도 철저하게 훈련받은 랍비생으로서 교육받았으니 곧 그 당시 바로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율법 학자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율법을 엄하게 공부했고 사도 바울의 말을 듣는 유대인 청중들처럼 자기도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을 가진 자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과 그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과 공통점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유도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사도 바울은 그가 애초에 기독교에 대하여 얼마나 가혹한 박해자였던가를 유대인들에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4절로부터 5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사도 바울은 자기가 유대인 청중과 동일한 혈통이요 자라난 것도 예루살렘 성이요 율법 학자로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철저하게 율법을 공부하고 존중하는 랍비 출신이라는 점을 밝힌 후에는 이제 자기가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기독교를 얼마나 열심히 박해한 사람인지에 대하여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이 도’ 곧 기독교를 박해하되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다고 말합니다. 또 그러한 박해자로서의 자신의 활동에 대한 증인으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장로들을 내세웁니다. 자기가 얼마나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활동했는지에 대하여 확실한 증인까지 밝힘으로써, 자기가 처음부터 기독교인이 아니라 철저하게 유대교를 신봉하는 자였음을 알립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가 20년 전에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시리아의 다메섹 도성에 가서 기독교인들을 수색하여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와서 감옥에 집어 넣어 처벌하려 했노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은 그의 변명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열고 동질감을 갖게 한 후에 자기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오셔서 만났던 극적인 사건을 언급합니다. 6절로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이 일은 사도 바울의 일생을 바꾼 가장 큰 사건입니다. 그의 인생은 이 사건에 의하여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고 그것도 백팔십 도 달라지게 되었으니, 사도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가장 거친 기독교 박해자에서 변신하여 기독교의 전파자로서 30년 넘은 세월을 헌신하다가 결국 순교로써 그의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던 돌발적인 사건이었으니, 그는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요 신성 모독자요 그는 십자가에 저주 받은 자로 죽었고 그가 살아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완전한 날조 사건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날도 사도 바울은 이 거짓된 도를 박멸하기 위하여 무서운 열심을 내었으니 다메섹 성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체포할 생각으로 성문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대낮에 햇볕보다 더 강렬한 빛이 그를 둘러 비취므로 그가 땅에 엎드러져버렸습니다. 아마 말을 타고 가는 도중이었을텐데 그는 말에서 떨어져 땅 바닥 먼지에 얼굴을 파묻고 만 것입니다. 그 때에 소리가 들리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고 하였습니다. 위엄 있는 목소리가 강렬한 빛 가운데서 그에게 들려왔을 때 그는 그 음성이 곧 신적인 음성이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리하여 물었습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그 때 그는 한번도 생각지 못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사도 바울은 청천벽력 같은 이 소리에 놀라 기겁을 했습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고 기가 질려버렸습니다. 그가 그토록 이단의 괴수로 알았던 예수가 바로 이 영광스러운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음성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커다란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이는 그가 핍박하여 죽이기도 하고 체포하여 감옥에 쳐 넣었던 기독교회를 박해하고 괴롭힌 것은 곧 그리스도를 때리고 괴롭히고 죽은 것과 다름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의 몸된 교회를 자기 자신과 일치하게 보시며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것을 자기를 해치는 행위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주님은 북한의 형제들을 박해하는 북한 당국의 악행을 결코 무심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과 이슬람 국가들과 아프리카와 동남아 불교국들의 기독교 탄압을 주님은 자기의 고난으로 알고 고통을 느끼며 그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위로해주며 주님을 핍박하는 대적들에게 때가 되면 반드시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건져주실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사건을 증언함으로써 당시에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알고 있고 그의 부활 사건을 가짜 뉴스라고 알고 있는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셨고 그가 바로 약속하신 그리스도시며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점을 분명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계속하여 주님과의 대화를 증거하였습니다. 10절과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노라”
사도 바울의 인격의 아름다운 점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주님 되심을 깨닫자마자 곧장 그의 주권을 인정하고서 그에게 굴복하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그 동안 기독교의 핍박자의 삶을 살았던 까닭은 자기가 깨닫지 못해서 그랬음을 인정하면서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자 그 순간 달라집니다. 주님이 이단의 괴수도 아니요 그의 부활이 진짜이며 그가 곧 그토록 구약 성경에 약속하였던 그리스도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자, 사도 바울은 그 즉시 주님의 주권 아래 무릎을 꿇고 그의 명령과 뜻이면 즉각적으로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금방 전까지만 해도 이단의 괴수로 알고 말할 수 없는 분노감으로 대하던 나사렛 예수라는 분을 이제 그가 살아계신 주님이라는 것을 알자, 곧장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이냐고 말씀해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정말 본받아야 할 귀한 자세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의 이성과 지식을 따라 분명히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 깨닫게 된 지식과 확신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그가 말씀하신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의 모든 생애는 그의 가르침, 그의 뜻을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점으로 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자기의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야 함이 정직하고 합당한 삶입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 바울의 질문이 항상 우리 각 사람의 질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을 우리 삶에서 실천하고자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질문을 받으시고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다메섹 성에 들어가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나라고 명하셨습니다. 12절로부터 16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 보았노라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 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가 유대인들이 섬기고 있는 조상의 신앙에서 벗어난 이상한 이단을 섬기는 것이 아니요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조상적부터 유대인들이 섬겨오던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애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눈을 뜨게 하고 자기에게 세례를 준 다메섹 성의 아나니아라는 유대인 형제가 바로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다메섹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말을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하는 기독교가 전혀 별종의 이상한 종교가 아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오리라고 하였던 의인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메섹 경험까지 잘 증언한 후에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그의 개인적인 체험담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17절로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다메섹 성에서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후에 있었던 일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갈라디아서 1장과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정도 기도하며 전도하다가 다메섹에 돌아옵니다. 그랬는데 당시 아라비아 지역을 다스리던 아레타스 왕의 고관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므로 그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다메섹 성벽을 타고 내려가 예루살렘으로 도망쳐나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다른 사도들과 교제를 하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사도들이 그의 진심어린 개종을 믿지 않고 있다가 바나바의 중재로 인하여 그의 진심을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신뢰 가운데서 거기서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열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성전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황홀한 영적 체험을 합니다. 환상 속에서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기를,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한 일들과 특별히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찬성하면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자들의 옷을 받아 보관한 일까지 말씀드리면서, 자기가 이렇듯 핍박했던 자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자기의 진심을 알아주고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한번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고 말씀하셨노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체험을 사도 바울이 처음 언급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에게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사도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을 한번도 무시한 적이 적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동족 유대인들을 결코 배신하고자 한 적이 없으며 그들 곁에 머물면서 부활의 진리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였지만, 주님께서 그를 이방인들에게 가라고 해서 그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변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조금도 반감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고자 한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끝까지 동족 유대인들에게 자기의 형제애를 증언했으며, 실제로 그의 마음은 여기서 말한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진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이 변명의 말을 유대인들 앞에서 말하기 불과 약 몇 달 전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가이오 성도의 집에서 로마서를 쓸 때에 동일한 그의 마음을 편지에 표명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9:1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서 9:1~2)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로마서 10:1)
이렇듯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각처에 다니면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는 것을 보면서도 그의 마음 한 편은 늘 미어지는 아픔이 있었으니, 곧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주님께 돌아오지 않고 그 마음이 완악하여 멸망길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동족을 위하여 애통함으로 기도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주님께서 어서 멀리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내몰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은 유대 지역 밖으로 절대로 나가지 아니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그는 유대인들에게 사역하다가 벌써 돌 맞아 예루살렘 안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의 이러한 동족 사랑의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을 숙연하게 가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22절로부터 23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죽이려 들고 빌라도의 재판정에 심문받을 때에도 “그를 없이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소리를 지르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처럼 지금도 이렇게 사도 바울을 향하여 살의를 드러내고 소란을 피우고 폭동이라고 일으킬 기세를 보이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십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고하셨던 바대로 이번에도 그들은 사도 바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사도의 사역지, 사역의 대상은 사도의 바람과 달리 유대인들이 아니요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진대, 우리의 사명의 자리는 우리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의 뜻과 계획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고 싶다고 함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있으라고 한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령관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서 싸워야 할 영적 전투 자리를 정해주실 때 그 말씀하신 자리에 가서 머물러야지,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싸울 전투 자리를 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그 자리, 주님이 파송한 자리, 그것이 교회건, 가정이건, 직장이건, 전도할 자리이건 내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먼저 묻고 순종하여 그 자리에 머무는 주의 종들이 됩시다.
결국 다시 유대인들에 의하여 사도 바울의 변명이자 복음 증거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사도를 향하여 유대인들의 분노가 솟아올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덤벼들 때에 하나님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을 통하여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24절로부터 2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천부장이 와ㅓ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두 번에 걸쳐서 사도 바울이 위험에서 보호함을 받은 일을 기록합니다. 한 가지는 로마 군대를 통하여 유대인 폭력으로부터 사도 바울을 건져준 일이요 또 한 가지는 로마의 법 체계를 통하여 사도 바울이 이유없이 채찍질을 당하는 일에서 건져진 일입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는 로마의 공직에 출마할 권리가 있었고 까닭없이 체포되거나 구금될 수 없는 법적 보호의 권리가 있었습니다. 만일 함부로 로마 시민권자를 결박하거나 구금하는 것은 심각한 범법자로 인정되어 기소되고 처벌받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이 대단한 특권이어서 때로 많은 돈을 주고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그렇게 로마 시민권자이면 그 자녀도 자연히 로마 시민권을 세습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그 천부장은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샀지만 사도 바울은 아버지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사도가 더 확실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천부장은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인 것을 확인하자 그를 채찍질하는 일을 금새 취소하고 심지어 그를 결박한 것조차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같이 까닭없는 채찍질을 당하여 육신이 상하지 않도록 그는 지혜롭게 자기의 특권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것도 각오하였지만 때가 이르기 전에 까닭없이 자기 몸을 해치는 일은 지혜롭게 피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이후의 남은 사역을 위하여 그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보호해서 위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유대인의 포악한 손에서, 또한 로마 군병의 채찍질에서 지켜주셔서 그로 하여금 장차의 사역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를 향하여 그토록 오해하고 죽이려 드는 동족 유대인들을 향하여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애썼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이러한 애정어린 간절한 해명의 말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살려둘 자가 아니라면서 죽이려 들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예언해주신 말씀대로 이번에도 유대인들에게 거절을 당하였고 그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저 이방 땅과 로마 제국의 심장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예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이번 증언 이후로 약 십 년 후부터 완전히 로마 군대에 의하여 포위되어서 굶주리고 병들고 서로 싸우고 결국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어서 전부 죽고 말았으니, 약 이백만, 삼백만 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모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일생이 결국 주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그 때까지 우리는 우리가 만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보냄받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핍박과 멸시가 있더라도 주님은 우리의 사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명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주님께서 홀로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부르심의 자리에서 끝까지 충성하며 고난 중에 참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기도에 항상 힘씁시다. 때가 되면 사령관 되신 주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될 것인데, 그 날에 주님은 전투 중에 당한 많은 우리 상처들을 보시고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영광의 훈장을 달아주시며 그 사랑의 품에 우리를 안아주시고 영광스럽고 행복한 쉼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