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쯤 해서 이불 킥을 했고 나이키 보따리를 싸 들고 집을 나왔는데 약속도 계획 없고 심지어 갈 곳도 없다는 것 아닙니까? 코끼리 숍 맞은 편 스테이크 집에 올라가 오리지널 큐브 스테이크-새우 2개 토핑 추가-카스를 하나 시켰어요. 필자가 코끼리 시절 종종 이곳 이 테이블에 앉아서 전국 구상을 했어요. 지금은 버려진 가게가 돼버렸지만 한 때는 폴리 플라자 건물 중 가장 핫한 가게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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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와 405호는 미동이 없는데 406호 주인 놈이 내 당구 다이마저 임의로 처분해버리고 혼자 살겠다며 새 인테리어를 해 놓은 상태입니다. 열받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선 돌파할 묘책도 여력도 없어서 그저 관망만 하고 있어요. 내 금덩어리-앨범-헌병 액자만 생각하면 당장 멱을 따고 싶지만 나이 60에 징역갈 수는 없잖아요. 이곳에 당구장을 차리기도 그렇고 스웨대시를 하자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 같아 애물단지입니다. 훗날 모든 걸 처분 할 때 어떤 식으로든 406호를 가만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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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예공, 퐁티를 아니? 아부지가 지난 번 구조주의 공부할 땐 놓쳤는데 오늘 보니 퐁티(1908-1961)가 미술 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더구나; 퐁티(Merleau Ponty)는 화가들이 그린 가시화시킨 공간은 오히려 실재하는 것이라 믿었어요. 그래서“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서로 얽혀 있다.”는 말을 퐁티가 했어요, 예술에 있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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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과 비구상인가? “리얼리티에 이르는 방법을 포기한 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 신체적 실존을 중심으로 철학을 새롭게 사유한 철학자로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퐁티는 화가 폴 세잔(1839-1906)의 작업을 이렇게 요약했어요. 세잔은 하나의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 100번을 작업했고, 하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모델을 150번이나 앉혀놓았다고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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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보다 철저히 보기 위함이었어요. 그러나 그러한 ‘철저한 봄’의 결과물인 그의 그림은 언뜻 리얼리티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고집스러우리만치 자연에 밀착하여 그려낸 실재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시각에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지요. 일견 역설적으로 보이는 세잔의 실재 추구 행위에 대해 동료 화가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는 “세잔의 자살행위”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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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재현의 방법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세잔의 작업은 화가들을 비롯한 그 시대의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던 겁니다. 이러한 세잔의 역설은 ‘사태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이념이 주는 역설과 맞닿아 있어요. 사태 자체는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를 가리키는데 왜 그것은 ‘주의’가 되고 ‘운동’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사태 자체가 일상의 의식적 차원에서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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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세잔이 눈앞에 드러나는 대상을 가시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대상 앞에 앉아있었던 까닭은 우리의 일상 속에 지각적 실재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었어요. 왜곡된 의식 속에서 그려진 회화는 습관적 태도에 편안하게 느껴지는 만큼이나 실재를 은폐했을 것입니다. 세잔은 그러한 거짓된 리얼리티를 벗겨내고 진정한 리얼리티로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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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통해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단순히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가시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가시적인 것의 이면, 그 내밀한 곳에 가닿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에요. 예술가는 감각적인 것들 속에서 언뜻언뜻 제 모습을 비추는 그것의 내부를 목도합니다. 세잔이 풍경 앞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바라보기를 반복했던 것은, 이에 대해 세잔 부인이 “확장된 눈”이라 말했던 것은, 보이는 것과 한 몸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을 탐색하는 화가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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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감각을 통해 작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감각은 우리의 시선을 때리는 일차적 가시성 너머의 은밀한 곳으로 촉수를 뻗어 나갑니다.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는 회화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후기 회화론에서 이러한 클레의 말을 좆아 회화가 구현하고자 하는 비가시적 세계가 무엇인지 섬세하게 파헤쳐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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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흔드는 퐁티의 '미학'은 무엇이라는 걸까? 퐁티는 감각 데이터 자체가 이미 맨 처음부터 내 정신과 얽힌 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순수한 객관적 데이타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 같아요. 퐁티가 회화에 특심이었는데 음악아나 문학에 비해 시각 예술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인간적 책임의식에서 자유롭다고 보았어요. 음악은 너무 극단적으로 느낌만 있고 형태가 없는데 시각 예술은 객관과 주관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 아닙니까? 동의 백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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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티가 말하길 "보는 자는 보이는 것을 차용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접근 하는 거다." 그래서 보는 나와 보여지는 세계는 서로 구별 되지 않는다고 합디다.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시영-한혜진-전지현을 합성한 여성을 보고 감탄을 하는 것은 단지 눈만 즐거운 것이 아닌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이란 뜻으로 이해했어요. 포르노가 대리만족을 넘어 판타지 섹스를 하는 것처럼.
2024.6.23.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