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시 (2012)
- 감독
- 박정우
- 출연
- 김명민, 문정희, 김동완, 이하늬, 엄지성
- 정보
- 드라마, 어드벤처 | 한국 | 109 분 | 2012-07-05
티브이에서 영화 ≪연가시≫를 보았다. 기생충 감염으로 인한 공포를 다룬 영화의 소재는 신선했으며 방법 또한 제법 괜찮았다. 누군가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지만 자극적인 소재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사실 다른 영화에 비해 그다지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든 것은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의 모습과 사회에서의 모습, 집단으로서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났고 그 모습에 내내 언짢았던 것이다.
재난 영화는 사람들을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므로, 평상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신념 혹은 가치관들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재난에 처해서는 사람들은 돌이킬 겨를도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을 찾게 된다. 따라서 재난 영화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에 따라 평상시 편견 혹은 선입견도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연가시≫는 특수한 상황을 겪은, 특정 지역의 물속에 들어갔던 사람만이 걸리는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로 기후 변화 혹은 화산 및 지진처럼 어느 지역의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겪는 재앙은 아니다. ≪해운대≫ 역시 재난 영화였지만 ≪해운대≫는 한 번에 대대적으로 밀려닥치는 재앙에 관한 이야기라면 ≪연가시≫는 시일을 두고 진행하는 이야기로 대응할 방안을 찾을 시간이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차분히 생각을 읽게 된다.
≪연가시≫의 주인공 재혁은 제약회사의 영업직 사원으로 두 아이를 둔 평범한 가장이다. 어느 날처럼 병원간부들과 영업용 골프를 치러 나가던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심상하게 보아 넘긴다. 평범한 일상, 그러나 티브이에는 이미 전국에 번진 연가시의 위험성이 경고된다.
시초는 한강에서 발견된 익사체다. 우연히 발견된 익사체는 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바싹 마른 몰골을 하고 있고 이어 한강변을 따라 수많은 익사체들이 발견된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익사체들, 학자들은 재빨리 원인을 밝혀내기 위한 검사에 착수하고 이어 변종 연가시가 그 원인임을 알게 된다.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죽는다고 알고 있던 질병본부는 단 한명의 (자칭) 생존자를 통해 특효약이 있음을 알게 된다. 특효약 윈다졸은 재혁이 근무하는 제약회사에서 만든 것, 그러나 그 약은 이미 재고가 없어 판매 중단된 상태이다.
여기서부터 재혁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예전에 그는 여름휴가조차도 자신을 제외한 채 가족끼리 가라고 내버려두던 무심한 가장이었다. 그러던 그가 가족이 연가시에 감염되었음을 알자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의 태도는 백팔십도 달라져 가족을 위해 약을 구하려 사방팔방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가족을 구하려는 노력, 어느 인종 혹은 어느 나라라고 다를 리 없으니 새로울 것은 없다. 흥미를 끄는 것은 그가 가족에게 보여주는 태도이다. 그의 태도는 현대 한국인 남성 혹은 가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의 태도는 롤란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2012≫에 나오는 가장과 좋은 비교가 된다.
≪2012≫의 가장 잭슨은 아내와 이혼해 혼자 사는 무명작가로, 지구의 멸망과 노아의 방주 계획을 알게 되고 이미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는 아내의 현남편을 포함한 가족을 데리고 온갖 방법으로 노아의 방주가 있는 중국으로 달려간다. 스토리와 환경은 다르지만 가장이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극과 극일 정도로 다른 부분이 있으니 이는 곧 가장이 자신의 가족을 대하는 태도이다. 잭슨은 전남편이지만 그는 아내와 아내의 현 남편 그리고 아이들에게 상황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 반신반의하던 전 아내도 현남편도 실제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그의 인도를 따른다. 자가용으로, 그리고 경비행기로, 그리고 비행기로 중국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지만 실제 일어나는 상황을 눈으로 보기 때문에 아이들 또한 납득한다. 잭슨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한편 자신의 진심을 알게 된다. 아이들 또한 진심을 드러내고 가족은 화해에 도달한다. 의사소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재혁과 그의 가족은 다르다. 재혁은 아이는 물론 어른인 아내에게도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밤중에(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늘 밤에 물을 찾는다. 밤은 숨겨져 있던 본능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시간, 아마 낮에는 인간의 이성이 활동하므로 기생충이 뿜어내는 힘이 덜하다는 뜻일게다.) 물을 찾아 밖으로 나가려는 아내와 아이들을 막무가내로 끌어안고 막을 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설명은 하지 않는다.
재혁의 아내 또한 지극히 소극적이다. 아내는 심지어는 물놀이 갔다 와서 미안하다고까지 말을 한다. 그 말에서는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태도, 남편을 걱정시켜서 미안하다는 뉘앙스가 물씬 풍겨 나온다. 남편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물놀이를 갔다 온 것은 칭찬받을 행동이지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물속에 연가시의 알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측을 하지 못하고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과를 하는 아내의 행동에는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가 엿보인다.
아내는 남편 중심으로 사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도 남편과 다름없이 생각을 할 수 있고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없는 듯 보인다. 나의 판단을 믿지 못하는 태도,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내 생명이 달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한국 아내의 모습은 잭슨의 무심함에 지쳐 이혼까지 한 ≪2012≫의 아내 케이트와는 사뭇 다르다.
독불장군 재혁의 태도는 가족들이 전염병 수용소에 격리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진다. 환자 격리 방침에 따라 수용소에서 쫓겨나온 재혁은 약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도 격리된 아내에게 자신이 어떻게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약을 구하려다 하마터면 불에 타 죽을 뻔하고 힘들게 구한 약을 가져오려다 눈치 챈 군중에게 거의 린치당하는 지경까지 가지만 전화를 걸어온 가족에게는 오직 한마디 내가 약을 구해가지고 갈게, 그 한 마디 뿐이다.
재혁에게서는 책임감은 있으나 의사소통은 없는 가장,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하기는 하지만 가족을 이해시키려 들지는 않은 한국인 가장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모든 일을 가족을 위해 하지만 그 일을 하는 이유를 가족에게 설명 하지는 않는, 자신이 전적으로 옳다는 독불장군의 모습을 보인다.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태도가 옳음을 믿으라는 강요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이해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설명해주어도 너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 다른 방안이 없다는, 곧 무능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알려주면 감당 안 되는 방법으로 골칫거리를 양산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도 하다. 결국 내 세계와 네 세계는 다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너는 나보다 못났으니 나를 따르기만 하라는 생각인 것이다.
재혁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이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감수하는 온갖 위험과 모멸감, 무력감 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평범한 그는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족을 입원 시킬 수조차 없다. 그동안 열심히 접대했던 병원간부는 도움 요청을 모른 체하고 그는 자신의 회사 제품이 특효약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동료와 친지를 통해, 혹은 인터넷을 통해 약을 구하기 위해 도움을 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재혁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그 모습이 내내 거슬린다.
결과적으로 가족을 구하기는 하지만 그가 가족과 진심어린 의사 소통을 할 기회는 없다. 그는 자신의 독불장군 스타일이 옳다는 확신을 하게 때문이다. 가족은 과연 가장의 일방적인 옳음을 확신시켜주는 존재인 것일까.
의사소통 없는 가장의 모습 외에도 내내 불편했던 것은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효약을 구하러 어디에서나 악을 쓰고 고함을 치며 막무가내로 졸라댄다. 가족 혹은 자신을 위해 약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병이 치명적일 경우에는 더욱 절박해진다. 따라서 온갖 방법으로 약을 구하기 마련이다. 인터넷에서 음성적으로 약을 구하는 것이야 개인적인 행동이니 거론할 바가 아니지만 재고가 없다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약국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제약회사 공장 문앞에 집단으로 모여 약을 내놓으라고 고함쳐댄다. 누군가의 설명을 들으려하지도 않고 그 설명에 설복당하는 법도 없다.
물론 그것이 그만큼 절박함을 뜻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태도에서는 우리의 생각, 우리 한국인이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의 현주소가 드러난다.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 통한다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그들의 분노를 통해 표명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정부나 다른 권위 있는 기관의 설명을 믿지 못하고 집단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들을 통해 드러난다.
집단적 박탈감은 경험에서 나온다. 옛날처럼 극히 소수만이 정보를 틀어쥐고 고급 교육을 받는 시대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정보는 도처에 널려 있고 조금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날카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상 돌아가는 품새를 알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권층, 기득층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행동들을 했고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이들이 겪는 감정이 집단적 박탈감인 것이다.
부정부패가 심한 나라일수록 그 박탈감은 더하다. 그것은 소통부재에서 비롯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사회는 곧 믿지 못하는 사회이다. 재혁의 태도는 곧 우리 지도층의 모습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지도층은 독불장군처럼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믿으라고 강요하지만 경험과 정보를 통해 그들의 생각을 파악하고 있는 현재 한국인들로서는 그들을 믿지 못한다. 그 모습이 곧 제약회사 앞에서 소리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다. 소리침은 나를 봐달라는 몸부림이다. 처음에는 소수로 시작하지만 그 외침이 힘을 얻으면, 곧 소통 부재가 축적되고 광범위해지면 소수는 다수로 늘어난다.
다수가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불신이 확산된다는 뜻으로, 공감대가 넓어지면 은연중에 방아쇠 사건을 기다리게 된다. 방아쇠사건은 일시에 수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서게 한다. 1965년 단순히 버스 좌석 문제로 보였던 로자 파크스 사건이 흑인 인권운동의 촉발점이 되었던 것처럼 작은 사건 하나가 폭발적으로 번져가는 것이다. 연가시 속의 군중들이 보이는 모습은 합리적 사고가 따르지 못하는 효력없는 무모함으로 비추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우리 인식의 저변에 소통부재에 관한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소통부재는 처음에는 시위를 불러오지만 소통부재의 축적은 결국에는 모두의 파멸을 불러온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 오로지 내 판단만 믿으라는 독불장군은 더 이상 옳지 않다. 특권층, 지도층이 알면서도 귀를 틀어막고 있는 사회, 여전히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오랜만에 대하는 문체 여전하군요..
우리집 주변에 영화관이 있어 한달에 두서너편의 영화를 시청하는편인데...위 영화는 보지못했네요.
최근에 본 영화가 얼마전 주연 배우가 내한해서 소개했던 분노의 질주...였는데...액션작이었지요.
약간 젊었을 적에 자동차 속도광이었던 적이 있어서 차에 대한 영화는 특히 빼놓지 않고 보는 편입니다..
대리 만족 이라고 해야 ,,,
연가시...에 대해 읽으면서 제 직장 생활에 대해 조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부하직원들이 유독 힘들어 하는 이유가 소통 부재인것 같더군요..
독불장군,제 행동 같았구요.차후로는 먼저 다가서는 상사가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아. 저런. 평안하시지요? 차에 관한 영화를 좋아하시는군요. 소통부재는 어느 사회나 있을테지만. 요즘 들어 한국사회에서 유독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 특유의 권위주의 탓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연가시에는, 소통 부재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안에서 현실을 읽지요. 먼저 다가서는 상사가 되시겠다니 글 쓴 보람이 있습니다. ^^
오늘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란 영화를 보았네요..
요즘 웹튠이 유행이더군요..다음 한주는 일주일간 집에 못들어 올정도로 바쁜데...
주말 가는 시간이 아쉽네요..
그리고 건강하시길,,
오, 요즘 화제인 그 영화를 보셨군요. 영화가 인기를 끈 인기가 뭘까요? 바쁜 한주가 지났군요. 뜻 있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저는 가족카페를 운영하면서 아들며느리들과 소통을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애쓴다는 말 자체가 좀 아전인수격이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