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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서예사
Ⅰ. 한자의 기원부터 각체의 성립까지
가. 은(殷), 주(周) 문자자료의 등장과 대전(大篆)의 성립
우리가 오늘날 확실히 알 수 있는 중국 최고의 문자는 은대(殷代)의 것이다. 그 이전의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 귀갑수골문 (龜甲獸骨文)
갑골문은 현재 잔존하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에 속한다. 1899년 북경 한약방에서 왕의영과 그의 식객 유악이 발견한 이후 수집과 연구, 발굴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현재는 상당한 수 의 자료가 모아 졌다. 연구 결과에서 출토지가 하남의 안양현 서북 소둔이라는 마을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골문은 은 인 (殷人)이 점복(点卜)에 사용하고, 전쟁, 수렵, 벼농사 등에 관한 복사(卜辭)를 칼로 각(刻)한 것인 데, 좌반(左半)과 우반(右 半 )을 대(對)로 하여 같은 문자를 각입(刻入)했다. 예리한 칼날로 귀갑(龜甲)이나 짐승 뼈에 새겨 넣었기 때문에 필획이 단순하 고 직선적이다. 획은 생략이 많고 안제(按提)가 없다. 그리고 갑골문의 서체나 서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곳에는 몇가지의 다 른 유형이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또 갑골주서(甲骨朱書)와 수골묵서(獸骨墨書) 등이 최근에 발견되었음에 비추어 당시 에 이미 붓이 존재하여 필사(筆寫)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갑골문이 처음 발견되고 학자의 관심을 집중하게 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왔 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짧기때문에 앞으로도 더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2) 금문(金文)
① 은왕조의 금문
문자자료는 앞서 지적했 듯이 은왕조 22대 반경왕 이후부터 등장했다. 이때는 청동기시대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안 양(安陽)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많은 동기(銅器)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의 동기는 위로는 조종(祖宗)을 기념하며 아래로 는 유급자손(留給子孫)하기 위해서 주조(鑄造)된 것으로 거의 일상 기물(器物)이다. 금문이란 이들 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 하는 것이다. 거의가 은말 이후의 각(刻)으로 갑골문보다는 뒤에 것으로, 갑골문에 비해서 문자로서의 조형이 한층 뛰어나고 또 한 필력(筆力)도 능히 엿볼 수 있다. 또 은기의 명문은 동시대의 갑골문보다는 획이 많고 자형(字形)이 복잡하다. 은왕조의 동 기에는 명문이 있는 것이 적다. 그리고 이때의 명문은 회화적인 성격이 뚜렷하고 상형(象形)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이 많고, 일 기 (一器)의 잣수가 적다.
② 서주(西周)의 금문
은망주흥(殷亡周興)에 미쳐 갑골의 사용은 급격히 쇠하고, 반대로 동기의 제작이 성행하여 명문이 갑골과 자리를 바꾸어 문 장 기록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주(周)로 와서는 동기제작의 사유도 확대되어 여러 씨족들이 무공,훈공을 세워서 왕실에서 은상 을 받음을 기념하는 내용등 세속적인 내용이 동기에 새겨졌다. 그리고 은대와는 달리 명문이 장문화(長文化)되었다. 이시대의 금문은 자체가 차차로 정제되고 자간(字間), 행간(行間)이 정해지고 상하좌우의 자연스러운 구성이 좌우의 균형을 가 져오게 하여 자형은 고정화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수록 점차로 생기를 잃어가고 형식화해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주왕 실 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나.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진(秦)--- 서체의 혼란과 문자통일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에서 이때까지 오래도록 계속되오던 고대 사회가 크게 변화를 일으킨 시대이다. 산업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 흥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시대의 상황에 걸맞게 서예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시대의 서예의 자취는 금문(金文), 석각(石刻), 죽간(竹簡), 백서(帛書)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때의 금문은 서주시대의 금문이 정제되고 고정화되어 가는데 비하여 그와는 역으로 지방적인 특색을 지닌 것으로 분화해 가는 경향으로 변화해 갔다. 전 국시대에 접어들면서는 청동기 문화가 급속히 쇠퇴하고 새로운 철시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동기의 수가 갑자기 적어져서 발견되 는 금문 또한 아주 적다.
1) 춘추전국시대의 석각
석고문 이전에 존재했으리라고 여겨지는 석각류들은 신빙성이 낮기 때문에, 석고문을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석각으로 인정 한다. 석고문은 수말당초(隋末唐初)에 섬서(陝西)의 진창현(陳倉縣)의 들에서 발견되었는 데, 큰 북의 모양을 한 돌이며 모두 열 개가 있다. 언제 만들어 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론이 구구하지만 춘추 말기나 전국 초기가 유력하다.
자체는 주문( )으로서 동 기의 명문과는 많은 치이를 보인다.
또 이 시대의 석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조초문( 楚文)이다. 전국시대 진(秦)에서 각입된 것인 데 내용은 초왕이 여러번 맹 약 을 어기어 진나라가 그를 저주한 것이다. 북송때 발견되었으나 곧바로 없어졌으며 원석(原石)이 없다. 자체의 크고 작은 변화 가 한결 같지 않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석고문과 유사한 점이 많으나 더 간략하게 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2) 춘추전국시대의 죽간과 백서
죽간은 춘추 무렵부터 일반적으로 서적이나 문서의 기록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은 존재하지 않았는 데, 근년에 여기 저 기서 개량으로 발견되었다. 1953년 호남(湖南)의 신양(信陽)에서 발견된 전국시대의 죽간과 모필(毛筆),칼,죽관(竹管)등 죽간 에 문자를 쓰는 데 사용된 공구가 바로 그것이다.
위의 죽간은 전국시대 초에서 만들어진 것인 데, 이들이 죽간을 쓴 것은 은인(殷人)이 갑골에 각한것에 비하여 편리하고 경 제 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체는 고문(주문)에 가깝고, 간편하고 독창성이 뛰어나다. 필의(筆意)가 이미 한예(漢隸)에 가까워졌고 주문에서 예서에로의 변천을 엿볼 수 있다. 초의 죽간에서 진 이전에 이미 예서 가 싹트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주목 할만하다. 또 1954년에 전국시대의 묘에서 좋은 토호(兎毫) 모필이 발견 되었는 데, 초인(楚人)의 필사 용구로 밝혀졌고 그 우수함은 놀랄만하다. 이는 죽간에 사용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춘추전국시대의 백서는 죽간과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부터 일반에서도 널리 사용된 것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유품도 적지 않다. 19 34년 출토된 초의 백서는 둘레에 세가지 색깔로 신물(神物)을 그리고, 가운데는 좌우로 나누어 장편의 문자가 쓰여있다. 이들 문자는 필획이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힘차다.
3) 진(秦)의 소전(小篆) = 문자의 통일
서체의 변천은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전은 국가 통제상의 필요에서 의식적으로 연구하여 고치고 변화시킨 서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짧은 왕조인 진이 서예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유도 이에 있다.
이제까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고문(古文)을 폐지하고 진나라의 전통 주문을 약간 간략화하여 새로운 자체인 소전을 만든 것이다. 소전의 구조는 정사각형에서 장방형으로 되었으며, 획도 처음과 끝의 굵기가 같고, 사이와 포백(布白)이 고 르고 형태는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으며 중심을 잡아서 평행을 이루도록 하였다. 당시의 서체를 전하는 자료로는 각석(刻石)과 와 당(瓦當)등의 명문이 있다. 또 최근에 발견된 다수의 죽간도 있다.
진의 각석은 여섯 군데에 7석(石)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태산(泰山)과 낭야대(琅 臺)의 두 각석 뿐이다. 그러나 이 들 도 훼손이 심하다.
1975년에 호북(湖北) 운몽(雲夢)의 고묘에서 천점이나 되는 많은 양의 진대 죽간이 발견되었는 데, 여기에서는 전서가 차차로 예서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과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4) 예서(隸書)의 출현
급속한 인지의 발달은 여러 가지 사무의 복잡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서사(書寫) 기록도 변모해 가야만 했다. 이전의 대 전이나 새로 만들어진 소전에는 아직 상형문자의 특징인 곡선적인 필획이 많기 때문에 서사에 불편하고 비능률적이었다. 이에 따 라 곡선을 직선으로 바꿔 필사를 쉽게 하고 그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예서라는 새로운 서체가 생겨났다.
예서는 소전을 간략화 한 것이나, 소전과 같이 국가가 제정한 자체가 아니라 민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그 예서 라는 명칭은, 소전이 국가가 제정한 바른 세체인데 대해서 예서는 일반 민간에서 사용되던 간략한 체였기 때문에 이것을 천하게 취급해서 '도예(徒隸)의 서(書)'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예서는 전서가 변화된 서체로서 전서에 내포되어 있던 모든 서법이 밖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로부터 해서와 초서가 발생한 근본이라 할 만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서의 필법은 중요하며 모든 서법의 기초가 된다. 오늘날 연세 서우회에서 예서를 먼저 배움은 이러한 연유에서 이다.
다. 전한(前漢 = 西漢) ☞ 서예술의 여명기(黎明期)
한 제국을 세워 올린 전한 때에는 광대한 국토와 비견되는 문화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서예에 있어서는 시대 에 걸맞는 진전이 없었다. 이 시대의 서예자료는 대단히 부족하다. 앞선 시대에서와 같은 훌륭한 금문은 전연 그 자취가 없어 졌 으나, 남아있는 몇개의 금문에는 진대(秦代) 전서의 풍취가 있고, 또 다른 것들은 모두 옆으로 길어서 전서와 예서의 중간 형태를 띠었다.
이 시대의 각석은 몇 개가 지금도 전하지만 아직 전서의 영향을 완전히 탈피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서로 쓴 것들은 예서 의 완성된 형태인 파책이 있는 글씨가 아니다. 이 외에도 당시의 서예자료는 거울의 명문이나, 동인(銅印)의 문자나 와당의 문자 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둥근 맛을 가진 전서를 도식화 한 것이며, 모두 전서의 풍취가 있다.
1) 전한의 한간(漢簡)
금세기 초두에 들어서 발견되기 시작하여 50 년대와 70 년대에 많은 양이 발굴된 목간(木簡)류와 백서(帛書)들은 한대의 서예 자료로서 서체의 변천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 하였다. 이 한간들에 의해서 예서 파책의 서법이 이미 전한 때 존재하였으며, 예서를 간략화하여 빠르게 쓰는 초예(草隸), 일종의 초 서 (草書=章草)가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것들의 내용은 주로 변방의 기록들이므로 초서체가 일반 민간에 널리 사용 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의 정식 서체로는 대부분 예서(파책이 있는)가 사용되었고, 일상의 서사체로는 예서의 속서(速 書 )로 장초(章草)와 초예(草隸)가 쓰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한대의 서체에 대한 연구는 돌에 새겨 영구히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에서 엄격하게 쓰여진 한비(漢碑)가 주종을 이루 어 왔지만, 한간의 발굴로 그 연구 영역은 한층 더 확대된 셈이다. 한간은 대부분 필세가 자연스럽고 억지로 붓을 돌리지 않았으 며 붓으로 쓴 먹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어서 한비와는 대조적인 차이를 찾아 볼 수가 있다. 또 전서에서 예서로, 예서에서 초 서 로 변화되는 전환기의 서체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데에서 그 중요성인 말할 것도 없다.
2) 새로운 움직임
아무리 전한시기가 서예에 있어서 발전이 미약한 시대이기는 하였지만, 그 말기가 되자 차차로 서예가 일종의 예술로서 인정 받 기 시작했으며, 이때까지의 원시적인 서예술 시대에서 자각적인 서예술로 옮겨가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의 원제(元帝 ), 성제(成帝) 때 일반 사회에서도 글을 중요시 하게 되었고, 글씨에 대한 관심이 높아 졌으며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는 과거에 제왕이나 권력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 서예술을 이끌어 가고, 그 문자를 쓴 당사자도 전문인인 것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민간의 관심 고조가 찬란한 후한의 시작을 재촉하고 있었다.
**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 약 15년간 유지 되었던 신(新)이란 왕조가 있었으나, 서예사적인 면에서 특이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제외시킨다.
라. 후한 (後漢 = 東漢)☞- 일대 전환기
후한 시대를 서예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원시 예술이 참다운 서예술로 옮겨가는 일대 전환기이다. 또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다 른 형태의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의 전반기 약 120 년은 아직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었다.중국의 서예술은 후한의 말기에 눈부신 진전이 있었고, 이에 따라 본격적인 서예술의 세계로 들어 갔다. 그 이유는 석비의 유 행 과 종이의 발명으로 대표되는 필기구의 급격한 진보에 의해서다.
1) 석비의 유행
석비에 대한 언급은 '남북조 시대'에서 다시 하겠다.
2) 종이의 발명
AD 105 년에 환관인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그 동안 실용적으로 문자 기록에 서용하던 목간이나 비단의 단점으로 인하여 종이는 이것들에 대체하여 서서히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종이를 사용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편리하기 때문에 일반 민간에 빠른 속도로 번져 갔을 것이다. 종이가 발명되면서 편지에 이 를 사용하는 일이 생겼으며, 대체로 여기에 초서로 서사를 한 것 같다. 이로써 초서가 종이의 보급과 함께 발달하였는데, 이는 예서가 한비의 유행으로 발달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3) 서가(書家)의 등장
진 이전에는 글씨의 공졸(工拙)을 비교하지 않았으므로 서학(書學)이나 서법의 설(說)이 없었으나, 한대에 이르러 비석이 성 행 하면서부터 그씨의 심미적 요구가 이어져 서법의 전승에 계통을 찾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전문적인 서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조희(曹喜)와 두도(杜度)이다. 두 사람은 장제(章帝)때 활동하던 인물이며, 조희는 전예( 篆隸)에 능하고 두도는 초서에 능했다고 한다. 이들 이후에 나타난 서가를 보면 두 사람중의 어느 한 편에 속해있다.그래서 전자 를 전예파, 후자를 초서파(= 행초파)라 했는 데, 전예파는 채옹(蔡邕)이, 초서파는 장지(張芝)가 대표하고 있다.
두 세력으로 구 분되어 있던 것이 점차로 시대가 지날수록 초서파가 세력을 증대해 갔다. 종이의 보급과 함께 초서가 새로운 혁신적인 글씨로서 일반 민간에서 환영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한대의 서가가 전예파와 초서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조시대 북파의 비(碑 - 예서,해서), 남파의 첩( 帖 - 행서,초서) 두파의 원류가 될 수 있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4) 각체의 성립
후한대에 들어서자 많은 서가들은 여러 가지 변형체를 발전 시켰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오늘날 통용되는 모든 서체가 성립된 것 같다. 앞서 이야기 ㄷ지만 초서는 진의 예서가 간략화되어 이룩된 것으로, 원래 한자의 발전으로 인한 자연적인 산물이다.
진대에는 소전을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통용되던 글씨는 오히려 초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돈황의 한간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따라서 당시의 초서를 정확히 부른다면 초예(草隸)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후의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할 수 있다. 후한의 장제때 이르러 초예에 능한 두도가 나왔으나 그의 유품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후 장지가 초서를 더운 발전시켜 금초를 이룰 하였다. 또 한대의 말기가 되어서는 우로 삐치는 파책의 필법이 대단히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증을 느끼게 되 었 다. 그래서 전서와 예서의 둥근 맛이 있는 형을 받아들여서 해서를 만들었다. 해서는 예서의 사각형과 정확성이라는 기본 성격 과 장초의 간결성과 속필(速筆)을 결합한 서체이다. 그리고 해서(楷書)의 출현과는 전후구분이 어려운 행서가 등장하였는데, 행서(行書)는 후한의 유덕승(劉德昇)이 간편하고 쉽 게 쓰고자하여 만들었고, 예서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진보된 형태이다. 예서의 모난 각(角)이 죽었고 운동감과 경쾌한 맛이 가 미 되었다.
행서의 획과 자형은 해서와 동일하나 속필로 썼다는 사실이 다르다. 아마도 해서와 행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유행했을 것이 고, 해서가 발전하고 분화됨에 따라서 그 변형체는 해서와 행서의 혼합체로 발전하였다.이로써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서체들은 한대에 이미 모두 만들어 졌다. 그만 한대, 특히 후한 시기는 중국 서예사상 매우 중요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겠다.
Ⅱ.본격적 예술 분야로서의 서(書)
가. 삼국(三國)과 서진(西晉) ☞ 교량적 시기
위 촉 오의 삼국에서부터 5호 16국에 이르는 동안은 서법사의 측면에서 결코 화려한 시기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대전환기를 맞은 후한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왕조가 성립이 되었지만, 상당히 단명하는 왕조들로서 단지 후한의 서 법이 동진과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적인 측면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적 측면에 있어서의 약간의 변화 양상을 들자면, 전예(篆隸)가 급격히 쇠퇴하는 반면 행초파(行草派)의 서가 발전 도 상 에 있었다는 것이다.
단적인 근거로서 행초파가 성숙하여 그 결실을 맺은 것이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서이며, 전예파의 서가 해서화 되고 변질된 형태가 북위의 석각을 낳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부분의 앞에서 5호 16국을 첨가 시킨 것은, 5호 16국이 시기 상으로는 동진의 시대와 같으나, 북방 민족의 문화 굴 복형 정복 왕조로서 후한의 서법이 동진으로 계승된 수준만큼 정복 왕조가 서법을 학습하기에는 5호 16국 이라는 100 년이 약간 넘는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 5호 16국과 동진(東晉)☞- 서체(書體)의 완성
5호 16국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동진의 서에 대해서만 논하겠다. 북방 민족에 의해 진(晉) 왕조는 그들의 영토를 잃고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주해온 진 왕조는 사실 독자적인 정 치적 역량이 부족하였으며 그래서 화북(華北)에서 난리를 피해 이주해온 문벌 귀족들에 의해 유지 되었다.
이들 문벌 귀족은 정치,경제,문화 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강남(江南)의 수려한 자연과 더불어 사치의 극을 달 리 고 있었다.이러한 사회적 상황속에서 서법은 삼국과 서진의 것이 그대로 계승되었고 그 완성의 단계를 가진 것이다. 이 위대한 사업을 완 수한 인물이 예나 지금이나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왕희지 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희지라는 인물도 당시 유력한 문벌 귀 족 출신 이었다는 것이다. 총괄하면, 삼국과 서진 시대부터 해 행 초의 삼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전예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눈부신 노력과 재능으로 해 행 초의 삼체는 완성의 단계에 도달했으며 독립된 서예술로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다.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북 서체의 독특한 발전
1) 석비(石碑)
후한 시대에 있어서 국가를 지배한 이념은 유교 사상 이었다. 하지만 후한의 유교 사상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왜곡 되었고 그 결과로 유교의 효 사상이 사치적인 장례 풍습으로 바뀌었다. 사치적인 장례 풍습의 대표적인 표현 형태가 묘비(墓碑)등을 세우는 것인 데, 서법의 측면이 다만 이것을 관찰한다면 이는 매 우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 질 수 있다. 사실 한대(漢代)의 석비가 예서 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한의 마지막 왕인 헌제 때(205년) 석비 세우는 것을 일체 금지시키는 법령이 내려졌다. 그 이유라면, 모든 것이 지나치면 해가 되듯이 석비는 당시 호족의 전유물로 대중과는 유리되었는데다가, 당시 실권자인 조 조 가 호족 세력의 견제를 위해 행한 정책의 하나로 보여진다.
석비 금지령 또한 서법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주 중요한 의미가 부여된다. 석비 금지령은 후한-위-서진-동진-남조에 이르기 까 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서법을 논하고 증명할 확실한 자료가 극히 적었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부정적인 요소가 가미된 다. 실제적으로 석비금지의 문제는 왕권이 매우 빈약한 시기에 행해졌던 것으로 수(隋)이후부터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
2) 남조의 서
남조는 동진의 전통을 계승한 문벌 귀족의 황금시대였다. 따라서 이 당시 서법의 특징을 논함에는 풍요로운 자연 환경속에 사치의 극을 달리는 문벌 귀족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여기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는 않겠다.)
남조는 이왕(二王 --- 왕희지,왕헌지)의 서가 계속 연결 되면서 아주 귀족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앞에 서도 언급했듯이 서(書)를 증명할 확실한 자료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3) 서론(書論)의 발달
중국에 있어서 서가 하나의 예술로서 독립성을 인정받게 된 것은 대체적으로 후한 말경으로 생각되지만, 이 경향은 차차로 심화되면서 남조에 와서는 서에 대한 비판 정신이 크게 대두 되었다.
서론(書論)이 같은 시기의 북조에는 대두되지 못했던 것은 앞에서도 대강 설명했듯이, 북조라는 북방 민족의 왕조는 한족의 선 진 문화를 흡수하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에 대한 비판 정신 이전에 서의 완성이 더욱 시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평론서로는 서품(書品), 고금서평(古今書評), 평서(評書)등이 있다.
4) 북조의 서
북조는 북방 민족이 남하하여 화북(華北)을 진(晋)으로 부터 빼앗아 세운 왕조로서, 특히 문화 굴복형 정복 왕조였다는 사실 을 반드시 염두해 놓고 서법을 논해야 할 것이다.이에 북조의 서를 특징 지울 수 있는 여건을 대략 세가지 정도로 제시 하겠다.
첫째, 아무리 북조가 문화 굴복형 정복 왕조라 할지러도 거기에는 자연히 북방 민족의 민족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북방 민족의 민족성이라 함은 정착적 농경의 한족과는 대조적으로 척박한 자연을 유랑하는 유목 민족으로서 굳세고 강인 한 정신과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 서진(西晋)의 문화를 대펴하는 문벌 귀족이 비록 남쪽으로 이주하였다고는 하지만, 북조는 옛 서진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 다는 점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상대적으로 동진보다는 그 양과 질적으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열약하겠지만, 어디 까지나 이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세째,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강력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위왕조의 말기가 되니 남조의 세련된 양식과 북조의 특유한 양식(서진의 잔존 양식 + 북방 민족 특유의 민족성)을 절 묘 히 조화해서 비교적 훌륭한 서를 쓰는 사람들이 배출되었는데, 장맹룡비(張猛龍碑) 고정비(高貞碑)는 그 대표적인 것이 된다. 또한 남조와 북조의 전쟁등으로 말미암아 남조의 문화가 북조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이에 보조를 맞춰 남조 이왕( 二王)의 서는 북조에도 큰 영향을 끼치면서 서법사의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것은 북조의 풍부한 석각자료 이다.
비, 마애, 조상기, 묘지(墓誌) 등이 풍부하게 있는 데, 조상기나 묘지 등은 서진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북위때 크게 번성했으리라 본다. 또한 북조는 남조와 같은 문벌 귀족 사회가 아니었으므로 굳이 석비의 금지가 강력하게 작용될 필요도 없었음을 주시해야 겠 다 .
라. 수(隋), 당초(唐初)☞ 정제된 해서(楷書)의 완성과 왕서(王書)의 전성
1) 남북조 문화의 융합
이 시대는 남북조를 통일한 수의 문제(文帝)부터 당의 두번째 왕인 태종(太宗) 까지의 약 100 여년의 기간을 말한다. 중국은 남북조로 분열되면서 각기 독특한 형태의 발전을 도모하다가 수에 의해 통일 되면서 서서히 융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 다 . 하지만 수는 너무나 비대해진 국력을 과시하다가 단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에 수를 이어서 당이 등장한다.
당은 수가 이루어 놓은 어느 정도의 융합 형태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이 융합의 완성을 이룬 장본인이 당의 태종으로 그 당 시 의 치세를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전성이었다.
2) 수의 서법
수대(隋代)의 유품(遺品)은 석비, 조상기, 묘지, 사경(寫經)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며 숫적으로도 방대하다. 수대의 서법을 연구함에 자료는 절대적으로 많지만, 거의 전부가 해서로 기록되어 있고 기타의 서체는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수와 당초의 시기는 해서의 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3) 당초의 서법
당초의 서법을 논함에 있어서는 먼저 두 명의 대가를 알아야 하는 데,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이 바로 그 인물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수와 당초의 기간에는 해서의 완성기라고 했다. 즉, 구양순과 우세남은 해서에 있어서 최고의 모범적인 형태를 완성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남조의 사람들로서 왕희지 서를 근본으로 하면서 전아하며 균제미를 훌륭하게 표현하는 극히 귀족적인 운치의 해서를 이룩했다.
이들 해서의 정제미와 균제미는 완전히 틀에 꼭 박힌 더 이상의 진보가 엿보일 수 없을 정도였다.
4) 당 태종과 왕희지
당 태종은 왕희지의 서를 무척 좋어 하였다. 그는 왕서에 거의 최대급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인 데, 단지 당 태종 개인적으로 왕서를 좋아한 점도 많은 비중은 있겠지만, 남북조 의 통일 후 양자간의 문화 융합 정책은 대부분 남조의 것을 주로 삼고 북조의 것을 약간씩 가미하는 경향이었으며 사실 왕서의 북 조 유행은 남북조의 말기부터 서서히(앞에서 언급) 싹튼 것이었다. 또한 참고적으로 수와 당은 모두 북조 계통의 왕조로 남조 문화의 융성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현상의 결과를 논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흥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여하튼 왕서에 있어서 이러한 위치(구 우의 서가 모두 왕서를 근본으로 하고, 왕서에 대한 왕과 귀족의 지나친 숭배)는 왕서 에 대한 반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왕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서 이전에 생성된 전예의 필법을 응용하여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우의 정제된 해서와는 다른 해서를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결과의 문제는 당 태종 당시의 문제가 아 니라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마. 당(중기 - 말기)과 5대 10국☞- 왕서에 대한 반발(혁신 서파의 등장)과 서법의 쇠퇴
1) 왕서에 반발한 혁신 서파의 등장
당대(唐代) 구양순과 우세남보다 약간 뒤늦은 시대에 저수량(596-658)이란 인물이 등장했다. 저수량의 서도 당초의 서풍을 따르고는 있으나 현저한 예법(隸法)이 섞여 있었다. 이는 왕서에 반발한 서풍의 등장을 예고하는 첫 신호였다.(앞에서도 언급)이와 같이 왕서를 반발하는 사람은 육조 때부터 있었으나, 전체적 시대의 서풍으로서 왕서를 반발하기 시작한 것은 당 중기에 서 부터 시작 되었다. 혁신(革新) 서파의 글을 일단 대성 시킨 사람은 안진경(709-784)이었다.
안진경의 서는 일점일획이 완전히 남성적인 중량감과 강기(剛氣)가 넘치고 있으며 그야 말로 무세(武勢)에 가득차 있으면서 운치에 매우 부족했다. 이는 곧 의식적으로 왕서의 전형(典刑)을 극력으로 깨뜨리려고 했던 결과였다. 안진경 서의원류 문제는 많은 이견이 있는데, 북위 해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설이 있다. 혁신 서파의 성격은 다분히 복고주의적 색채가 농후했다. 여기서 설명되는 복고주의의 방향은 왕희지 이전 시대에 있었던 전 서 나 예서였다. 따라서 혁신 서파에서 많은 전예서가(篆隸書家)가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연한 이치였다.
**<참고>** 여기서 등장하는 '복고주의'의 방향과 송대(宋代) 이후에 등장하는 복고주의의 방향을 잘 비교하기 바란다.
2) 서법의 쇠운(衰運)
혁신 서파인 안진경의 뒤를 이은 대가로 류공권(柳公權)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안 류의 서 이후로 혁신 서파의 맥을 이을 서예 대가가 출현하지 않았으며, 왕서의 전형을 지키던 서가들도 이렇다할 대 가의 출현이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5대 10국이라는 큰 혼란기를 맞이 하면서 서법의 쇠퇴는 극을 달리게 되었다. 실제로 5 대 10국의 약 50 여년 기간은 비록 짧지만 무인들의 무단정치가 마구 자행되던 때이므로 수 당 때 완성된 고대 사회의 형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 중기 이후 신(新) 구(舊)의 갈등을 잘 조화시켜 해결할 만한 대가의 출현이 없었다는 사 실은 곧 서법의 측면에서 이 시기를 정점으로 더 이상의 진전이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바. 송(宋)☞-- 새로운 의미로 전환된 서
1) 송대(宋代)의 일반적 경향
송을 세운 조광윤은 군인 출신으로 그 역시 지방분권적 형태의 정치 체제를 이용해서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광윤은 중앙 집권화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당 중기부터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던 귀족 세력 을 과거 제도의 엄격한 시행하에 철저한 문치주의의 지향으로 완전히 몰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학문적 소양을 겸비한 사대부란 계층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구귀족들과는 달 리 출세의 길이 보장되어 있지 못했으므로 학식을 쌓는 데 열중을 해서 과거 시험의 합격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전체적인 측면에서 학문이 대단히 향상되었다.
문방사우를 지필연묵(紙筆硯墨)으로 칭한 것도 송대 문인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대부가 귀족을 대신해서 문화의 중심 세 력이 되었는 데, 이들은 모두 서에도 능했다.
2) 전통주의적 서법
송초기 서법의 경향은 다분히 복고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서는 그 경향의 방향과 원인을 분석함이 가장 좋을 듯 하다.
첫째, 복고주의의 방향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이 시대에 풍미된 서풍의 복고주의적 방향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송대 초기의 부흥했던 서법의 복고주의는 당 중기 이후에 발생한 복고주의와는 달리 왕서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당 말기부터 중국은 커다란 전란에 휩싸였다. 특히 중원의 문화 중심부는 온통 싸움터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이에 전란을 피 해 많은 귀족들이 변방 지방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전란이 끝나고 송이라고 하는 통일 왕조가 건립되니 이들이 다시 중원 으 로 등장해서 문화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이들의 문화 성격은 다분히 육조 이래로 계속 내려오는 귀족적 경향이었으며, 따라서 왕서로의 복고 성향은 당연한 결과였다.
3) 혁신주의적 서법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미불(米 )의 삼인에 의해서 송의 서는 비로소 독특한 특색을 발휘했다. 이들은 왕희지 형(型)과 안진경 형의 서로 상반된 형을 연구하여 그 점을 지양하고 새로운 형을 만들고자 시도했는데, 이런 시 도에 의해 만들어진 서풍은 그래도 안진경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이들의 위대함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양식 창조의 형태를 더 나아가서 신양식의 완성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는 곳 이 시대에 걸맞는 서풍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4) 당 서법과 송 서법의 비교
송의 서는 당말 이후에 혼탁하였던 서풍을 청산하고 진당(晉唐)의 고법(古法)을 이어 받으며, 더우기 이를 초극해서 새로운 사 회에 적합한 신양식을 창조하여 이것을 확립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과 송의 서법 비교는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 당 중기 이전의 글씨는 어디까지나 서로서의 서라는 데 시종하는 일종의 순수 서도(書道)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조화와 균 제, 우려(優麗)와 전아(典雅)가 그에 작용하는 미학 이었다. 왕희지의 흐름을 더욱 진보시킨 당초(唐初)의 구양순이나 우세남 의 서는 오히려 그의 극한(極限)이며, 인간성을 초월한 비정(非情)한 것으로서, 비로소 능히 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일 것 이다. 따라서 서법을 배우는 이가 당중기 이전의 글씨를 먼저 배워야 함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 송대에 확립된 서법은 인간성을 안으로 간직하고 생생한 개성의 자유를 발휘하는 것이며, 서를 만드는 사람의 정신이 자연 적으로 그곳에 나타나있다. 즉 취미의 대상과 감상할 예술로서의 서가 성립된 것이다. 예컨대 송대에 와서 비로소 서는 지금까지 특수 기술의 성격 또는 완벽한 형식미의 추구를 중지하고 널리 일반 독서인이 참여해서 정신적으로 서로가 교류를 맺는 하나의 예술, 또는 자유롭게 즐기며 만들기도 하고 음미하는 예술로서 성립하기에 이른 것 이다. 이는 사대부의 역할이 컸으리라 본다, 따라서 서를 배우는 이는 송대 이후의 글씨를 표본으로 배워선, 잘못하여 그것의 정신을 잘못 표현할 수 있으니 당의 정제된 해 서 까지를 그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 남송(南宋) 금(金)☞- 송대(宋代) 서의 계승
남송의 시대는 백년이 넘는 긴 기간이었지만 서법사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이는 아마도 남송 시대가 전체적 인 사회 분위기로서 문약화 된 결과 침체의 분위기가 아니었었나 싶다. 남송은 북송의 서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금은 중원을 차지는 했지만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는 단계에 불과 했던 것이다.
사실 북위라는 정복왕조 만큼의 서에대한 결실을 맺기에는 너무나도 ㅉ은 기간이었고, 또 금이 멸망한 후에는 또다른 정복왕조 이면서 문화의 성격이 전혀 달랐던 원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5호 16국시대가 앞에서 100여년간 존재했던 북위 보다는 결실이 적은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 원(元)☞- 시대성을 대표하는 서의 완성 ( 조맹부 )
1) 왕서로의 복고적 서풍
복고주의란 표현을 참으로 많이 쓰는데, 여기서의 신복고주의라 함은 왕서로의 새로운 복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존재함은 당연한 것이겠다.
금과 남송을 멸망 시킨 것은 몽고족 이었다. 이들은 원이라고 하는 나라를 세웠는 데, 여기서 원이라고 하는 정복 왕조가 북 위 나 금 또는 청과 같은 정복 왕조와 다른 문화적 특성이 있었음을 우리는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그 다른 문화적 특성이란, 몽고족은 그 세력을 확장시키는 데 있어서 다른 북방 민족과는 달리 먼저 서역쪽으로 진출을 시작 했 다. 따라서 그들은 아라비아나 페르시아와 같은 지역의 문화를 먼저 흡수 했는 데( 그 근거로 원의 신분 계층에 있어서 색목인 이라고 하는 계층의 지위는 대단히 높았다.), 그러한 흡수 이후에 중국 본토로의 진출은 몽고족 제일 주의를 표방하고 전혀 문화적 성격이 다른 한족에 대한 억압에 충분한 근거를 제출 시켰다.
여하튼 한족은 문화적으로 성격도 다르고 그들이 오랑케라고 멸시해오던 북방 민족의 강력한 지배에 더이상의 진취적 성향이 존 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송대부터 문화를 주도해 오던 사대부 계층은 진당(晉唐) 시기의 왕서에 대한 복고적인 성향을 취하기 시작 했던 것이다.
사실 왕서에 대한 복고적 성향은 사회전체의 분위기가 침체 내지는 발전과정에 있었던 시기에 등장한 반면, 혁신 서파의 등장 은 사회 분위기가 진취적 성향이 강할 때였다.
원대(元代)에 있어서 이러한 풍조를 대표하는 이가 조맹부(趙孟 ; 호- 松雪)였다. 조맹부는 왕서로의 복고적 성향을 충분히 집 대성 시켜서 곧 완성의 단계에 도달 했는 데, 이 완성의 단계란 새로운 서체의 완성이란 측면으로 봐야 한다. 조맹부의 서체는 송설체라 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 등에도 익히 알려졌다.
2) 송대 서와 원대 서의 비교
송과 원의 문화를 주도한 세력이 사대부였다는 것은 두 왕조의 공통점이다. 또한 왕서로의 복고적 성향도 있었음은 그 성향의 원인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지라도 공통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할 문제는 이와는 다른 문제이다.
송말기에 혁신주의적 서법을 주장한 세력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소식,황정견,미불)이들은 왕서와 안서를 절충해서 신양식을 창조했고 이어서 이를 초극하여 신 양식을 완성 했다. 이에 비교한 원대의 서도, 조맹부란 인물에 의해 왕서로의 복고 성향이 집대성 되면서 그 완성이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총괄하자면 송대나 원대 모두 그 시대의 성격에 부합되는 독특한 서체의 완성이 있었다는것이다. 이것을 약간 시각을 달리해 서 본다면, 곧 당대까지의 서가 그 이후의 서에대한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명,청의 서를 살펴볼 때 이점을 반드시 염두해 놓기 바란다.
자. 명(明)☞- 시대성을 대표하는 서의 완성 ( 동기창 )
1) 명초기의 서풍
명초의 서풍은 전적으로 원대의 연장 선상에 있었다. 그 이유를 논한다면,원대의 문화 중심세력은 사대부 였다. 이들은 북방 민족의 강력한 몽고족 제일 주의에 억압되어서 생기를 잃은 문화를 창조하 고 있었는 데, 원이 망하고 한족이 세운 명이 등장 했으나, 사대부의 문화 경향은 쉽게 바뀌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때의 서풍은 활기가 없는 원대의 복고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은 정도에 불과했다.
2) 명 중기의 서
송·원대 이래로 양자강 하류 지역은 중국의 주요한 미곡 생산지로 큰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의 중심 도 시 가 소주(蘇州)였는 데, 이 도시에서 명중기의 서를 이끌어간 문징명(文徵明)과 축윤명(祝允明)이란 대가가가 배출되었다. 이들의 서는 모두 왕희지의 전형을 근본으로 삼았는 데, 명초기의 서풍과는 달리 기력(氣力)을 가지고 명대의 특성을 나타내 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면에 작용한 원인 이라면, 이들의 배출지인 소주의 사회적 배경을 들 수가 있다. 사실 소주의 경제적 윤택이 이들을 명초의 강력한 한인 복고주의적 경향을 간파하기에 충분한 활기를 준 것이었다.
3) 명말의 서
명의 초기부터 중기까지의 한인 복고주의에 대한 끊임 없는 노력 끝에 명 중기 이후부터는 서서히 명대의 특성을 담은 서체가 등장하기 시작 했다. 특히 북방 민족으로부터 오랫동안 암흑기를 맞이한 한족은 다시 왕성한 문화 창조에 전력을했고, 따라서 다시 진취적 성향의 혁신서파 세력이 확장하기 시작 했다. 이러한 서풍을 대표하는 대가가 출현하게 되었는데, 바로 동기창(董其昌)이란 인물이다.
그는 서에 있어서는 왕서를 근본으로 삼았으나 학습 방법에 있어서는 그 형태를 본받는 것을 문제로 삼지 않고 정신을 파악하 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차. 청(淸)☞-- 고증적 성향의 비학파 시대
1) 청 초기의 성향
명말부터 동기창의 혁신 서파가 시대를 뒤흔들고 있었음은 지적한 바와 같다. 하지만 청초에 들어오면서 동기창의 혁신 서파 를 왜고한 변질적인 서풍이 잠시 등장해서 시대를 휩쓸었다. 이들은 특정한 형태의 서를 모범으로 삼는 것보다는 생각나는 대로 붓을 날렸는 데, 정통적 서가들에게는 아주 기괴한 현상이었다. 히지만 이는 한 때에 잠시 흥행했던 특수한 사건에 불과할 따름 이었다. 여하튼 청초의 전체적인 문화 성향은 고증학적 분위기에 편승되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고증학이 왜 유행하게 되었는 가를 먼저 규명해야겠다.
청왕조는 북방 민족에 의한 정복 왕조였다. 따라서 거대한 한족을 다스리려고 생각하니, 북위와 같은 문화 굴복형은 도저히 용 납 될 수 없는 것이었고, 원과 같은 강경책을 쓰자니 원은 기실 정치, 군사적의 피상적인 지배에 머물렀음을 관찰했다. 따라서 청왕조는 강경과 회유를 병용하게 되었는 데, 강경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사상의 통제를 가했다. 그렇다고 진(秦)과 같 은 성격이 아닌, 대대적인 출판사업과 고증사업을 통해 은근히 사상의 통제를 가하면서 청왕조의 정당성을 그것으로부터 구했다 . 이에 부흥해서 일어난 것이 고증학 이었다. 이정도로 원인 규명을 끝낸다.
청초에는 첩학(帖學)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왕서로의 복귀를 주장한 서가들의 시대는 모두 첩학이 유행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남조는 한 말부터 계속해서 석비 세우는 것을 금지 했기 때문에 사실 비(碑)란 것에 대해서 그리 큰 중 요 성을 두지 못했다. 그러나 첩학파(帖學派)라 할지라도 집자성교서의 비나 안근례비, 구양순비 등을 다루지 않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안체나 구체 모두 왕서에 근간을 둔 글씨였기 때문이다. 집자성교서의 비는 왕서 그 자체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특히 안체는 왕서에 반발한 혁신 서파라 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왕서를 충분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발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송대 소식, 황정견, 미불과 명 말의 동기창등도 모두 첩학파의 일환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청초에는 고증학적인 분위기에 편승한 첩학이 조금 더 고증적 의미로 바뀌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2) 비학파(碑學派)의 시대
비학의 발흥은 청초부터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새로이 비가 발굴되고 하나 하나 소개되어 감에 따라 종래 법첩(法帖)에 의 존하던 시야는 조금씩 넓어져가고 있었다. 이라한 때에 비학파 서가의 거장이 출현하게 되었는 데, 등석여(鄧石如)와 이병수(伊秉綬)였다. 여하튼 등·이의 꾸준한 노력으로 이들 이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서가들이 배출되어 비학의 전성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비학 의 유행은 청말까지 지속되게 되었으며 이러한 성향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3) 비학과 관련된 현대의 서예
이제 우리는 전체적인 서예사의 흐름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중국의 시대를 서예사적으로 이분할때 지금과 같이 "은-한말" , "삼국-청"까지 나눌 수도 있고, 또 "은-당" . "당-청"까지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각 서체의 완성을 기점으로 분류한 것이고, 후자는 정제된 서의 완성을 그 기점으로 분류한 것이다. 예컨대 이 책에서는 전자에 대한 언급을 충분히 했으므로, 후자에 대해 현대와 연결시켜 약간의 설명을 붙이고자 한다.
당의 정제된 서라 함은 곧 구양순과 우세남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의 서는 앞에서도 평했듯이 더 이상의 발전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서예술의 극치라고 했는 데, 이 시기 이후에 대해서는 그 시대성을 대표하여 곧 그 시대를 완성하는 서예가의 글씨가 선 보였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당(송이라 해도 무관)부터는 글씨에 의(意)라고 하는 부분을 더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예를 배우는 이에게는 당 초기까지의 서를 배워야 함은 그 의(意)를 따지기 이전에 형태를 먼저 모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발상이 비학에 바탕을 둔 청대의 고증적 서(書)와 결합해서 지금의 우리가 직접 행하는 서예 학습법을 탄생시켰다 고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는 모두 인쇄술의 발달에 바탕을 둔 것으로 문예의 길에 있어서 현대는 과거에 비해 무척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많으리라 본다. 단지 사고방식이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기에 이점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