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선포는 있어도 피의 능력이 없다
십자가라고 해서 다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전해지면 교인의 심령에 애통함이 느껴져야 하고 죄에 대한 자각과 각성이 일어나야 하며 자기를 부인하려는 고백들이 물결치듯 일어나야 합니다. 주께서 몸이 찢겨가며 흘린 보혈의 피가 내 심장을 찢는데 부족하단 얘기입니까? 죄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게 하는 말씀선포가 없이 성경의 단면만을 훑어 내려가는 설교자는 사단에 미혹된 자입니다. 어떤 교회는 교인들 무서워서 지옥에 대한 설교만 빼놓는 곳도 있습니다. 주를 죽인 원수들의 채찍과 조롱만큼 죄가 혐오스럽지 않다면 나는 헛걸음질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합니다 (히 4;12). 이런 능력없이 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별의 영을 사랑하고 사모하십시요. 날마다 도우시는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요 14:26)
성령이 없다
성령이 없으면 능력도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 진정한 부흥이란 목사 자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각 사람에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귀신을 쫓고 천사의 말을 하는 것만이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참 부흥이란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믿음, 그런 믿음을 소유한 성도만이 진정한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신비주의 위주이다
주께로 온 은사와 사역이 참이라면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은사를 통하여 주님의 죽음과 고통과 아픔이 드러나고 주님의 영광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은사는 시작과 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반대로 빛으로 가장한 거짓 무리들은 겉으로는 주를 위한 사역이라고는 하지만 속내는 성도를 조종하고 삼키려는 못된 속셈을 품습니다. 못된 속셈이란 자기 말 듣지 않는다고 성도를 못살게 구는 모든 행위들을 포함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소속된 교회가 없이 나홀로 사역한다는데 있습니다. 나무로부터 잘려나간 가지에게 열매가 맺힐리가요!
성도는 영의 눈을 떠서 양의 옷을 입은 이런 이리의 무리들을 철저히 경계하고 배격해야합니다. 가장 복된 은사는 믿음 은사 하나입니다. 늘 간증거리를 찾는자는 교회 출석하는 교인이지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오셨고 말씀으로 성도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참 성도는 오로지 말씀만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합니다
사람이 우상된 가라지들이 만연한 교회
사람은 품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지 믿고 의지할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우상된 교회는 교인들간의 이권 다툼, 지분싸움등을 비롯하여 분쟁이 늘 끊이지 않습니다. 이 교회는 내가 일구어낸 교회 라고 합니다 직분 놓고 권사 장로가 "죽도록 봉사해봐. 직분 받는 거 도와줄께"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마디로 사람 눈치보기 바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자는 말 그대로 사람보고 교회 다닙니다. 사람 때문에 교회가고 사람 때문에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닙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직분자앞에서는 아첨하고 배후에선 늘상 거짓공박과 이간질을 일삼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 때문에 살고 사람 때문에 죽는게 특징입니다. 교회안에서는 모든것이 그럴 듯 하지만 정작 교회밖에서는 길가는 노숙인에게 빵하나 건네길 꺼려합니다
질보다는 숫자에 연연한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지역 전부를 저에게 주옵소서 하면서 전도의 열정에 불붙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교세확장을 노리는 것입니다. 참 목회자는 교인수를 채우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성도 한사람이라도 제자다운 제자를 길러내는 것에 헌신합니다.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어도 주님은 오직 열두제자만을 두셨습니다. 교인 천명보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성도 열명이 귀합니다
오로지 천국가기 위한 신앙인들로만 만연한 교회
천국만이 목적된 교인은 모로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 위주입니다. 예수는 없어도 천국만 가면 좋겠다고까지 합니다. 안 믿자니 지옥갈게 두렵고 믿자니 내 자존심과 자유를 짓밟는 신앙생활이 지옥같습니다. 마땅히 이런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리는 만무합니다. 말로는 십자가를 따라간다고 하지만 오로지 축복받기 위한 신앙일뿐이며 따라서 환난 앞에서 쉽게 믿음을 배반하고 돌아섭니다. 이만큼 십일조 했으니 배로 복 주옵소서. 이만큼 봉사했으니 공로 알아주셔야죠 하면서 오로지 땅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팔아먹고 신앙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것인지에 대한 감탄과 경이로움이 없거니와 자연히 그 삶에서 성령의 열매 또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한다
다른 복음이란 말 그대로 성경에도 없는 복음을 말합니다. 성경에 없는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복음, 즉 인간교리를 말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인간을 영화롭게 만드는 것은 교리지 복음이 아닙니다. 지식이라고 다 지식입니까? 무용지물인 지식은 세상에도 홍수처럼 넘쳐납니다. 지금은 너나나나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르는 스승을 두는 때입니다(딤후 4:3). 자기 사욕을 따르는 사람은 설령 그것이 말씀의 권위를 배척하는 것일지라도 자기 구미에 맞는 스승을 찾아 나섭니다. 거기서 평안과 위로와 안식을 찾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복음은 인간에게 평안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을 뛰어 넘기에 부담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교리가 만연한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증오하지 않습니다. 걸쭉하게 예수밖의 것과 행음하면서도 자기 자신조차 믿음 좋은 척 속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이란 인생의 무능함앞에 인간을 십자가앞에 무릎 꿇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만이 더 드러나고 십자가만이 더 빛을 발하도록 만듭니다. 주님 없이는 죽는다는 고백이 절로 터져 나오게 만듭니다. 복음의 능력은 세상에서의 삶이 풍족하든 그렇지 않든 성도를 세상과는 분리 시켜서 이땅에 소망없는 자로 살아가게 합니다. 땅에 소망없는 자가 예수외의 것을 거들떠 볼 리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란 고백은 성도의 습관적인 발언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삶. 그리고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삶이란 나는 없고 내 욕망도 없고, 내 유익도 없고, 하늘이 무너지면 솟아날 구멍을 찾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삶입니다. 내일 지구의 멸망이 와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신앙을 가진 자가 진짜 성도입니다. 마찬가지로 환경을 뛰어넘는 믿음을 소유한 자만이 참 복음의 능력을 입은 자입니다
나의 존재가치조차 오직 그리스도안에만 존재하므로.
이 외에도 세부적인 특징들이 더 있겠으나 일단 핵심되는 것만 적어 보았습니다
쥴리: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