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그래 현석아."
"나...그애가 아직도 좋다."
"응."
"...많이 좋아.태지만큼...그보다 더.나...벌받을까."
"자식...피곤하지..얼른자라.난 가볼게."
"...으응.저기..형!"
"응?"
"나...다시 돌아갔음 좋겠다.처음으로..다시."
"한숨자고 나면 뭔가 좀더 나아지겠지....자라 먼저 간다."
오랜만에 만난 주노형은 내게 별다른 위로도 질타도 없이 그저 으응.하는 대답만 늘어놓고 갔다.
하지만 그 별 것 아닌 대답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형은 아마도 모르겠지.
으응...하는 짧은 단어 속에서 나한테 하는 말이 다 들리는 걸.
힘내 현석아.다 잘될거야.
잘 안되더라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버틸 수는 있을 거야.
나란 사람은 어쩌다가 이런 인간이 되어버린걸까.태지와 몇 번의 접촉이 있었고 단 한차례도
지민의 이야기를,안부조차도 묻지 않는 태지가 다행스럽게 느껴지긴 했었다.나에게 그녀 소식을 묻는다면
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거울을 보며 연습까지 했을 정도니까.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분명하고
서로의 맘까지 확인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고 태지가 지민의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도 이상할건
하나도 없었는데.태지의 입 밖에 나지 않는 그 단어들을 내가 먼저 꺼내 놓기도 어색했다.
아니..오히려 온갖 죄스런 마음에 전처럼 태지를 대할 수 없다는게 솔직한 심정일지도 ...
하지만 태지는 늘 그래왔듯이 더할나위 없이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전보다 더한 열정으로
음악에 매달렸다.넘치는 악상과 쉴새없이 떠오르는 영감들로 잠잘때도 머리맡에 악보를 두고 잔다는
그의 말에 일에 치여 지민을 소홀히 하는 건가..하는 생각에 조금씩 부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어느순간 알아버렸다.그 둘은..나에게 또 다시 틈을 보이고 말았다는 것.
내 탓도 둘의 탓도 아닌 채로...내 안에서 작은 불씨가 꺼질 듯 꺼질 듯 희망을 타고 올라왔다.
"태지야..지민이..."
"약혼한다며 축하해.참..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벌써 했겠네.축하해."
"..어?어."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라 뭐라 말을 못하겠네.다들 잘 지내지?주노형은 얼마전에 전화했고
승환이는 여전해?송아씨도 다시 복귀 한다며 나중에 밥한번 먹어야 겠다."
"...지민이랑은 연락 안 한지 오래 됐나봐?"
"결혼은 언제쯤해?이러다 나한테 축가 부르라고 하는건 아니지?"
"어...곧.곧하게될꺼야."
"축하해 형...진심이야."
작은 심지 끝을 타고 조심스레 번지는 불씨.
모르는 채로 내버려둬도 되는 걸까.나...그래도 되는걸까.
이젠 지민에게 마저 떳떳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이런게..사랑인가.
끝도없이 추한 모습으로 달음박질쳐 버리는게...지민의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게
피보다 더 진한 형제애를 끊어버리는게...만인이 얘기하는 아름다운 사랑인건가.
기회는 준다.서태지...니가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데려가봐.
"너...지민이 좋아하잖냐.진심이 아니면 축하한다는 말은 안해도 돼."
나보다 더..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면 데려가.두번 기회는 없어.
"...지민이도...너 좋아하잖아.설마 모른다고는 안 하겠지."
아니면 그냥 포기해.지민인 내가 행복하게 해줄테니까.
"결국 지민이가 택하고,옆에 있는 건 형이잖아.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너..."
"한때 동경했던 가수에 불과한 거야 나는.게다가 항상 두번째고."
"..."
"단 한순간도 진심으로 날 사랑한적 없는 애야.내가 매달렸어.걔는 아니라는데 바보같이
내가 못알아듣고 매달렸어.그러니까 형...제발 나한테 자격지심 같은거 가지지마.
그럼 나 정말 불편해.나 다..잊었어.없던 일처럼 됐다니까."
"...태지야..."
새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태지의 머리가 많이 길었다.집에만 있어서 그런지 여느때보다
얼굴이 창백해 보이고..그래,어딘가 모르게 피곤한 얼굴이다.전엔 어떻게 했더라...
니가 피곤해하면 난 어떻게 했었지..?
"태지야..."
더욱 지친 니가 나를 보며 웃어줬었다.형이라고 철도 안든 나를 꼬박꼬박 대접해주고
넌 언제나 너보다는 나나 주노형이 먼저였어.난 언제나 아니라고 하면서도 니 몫을 탐내왔어.
언제나 니가 부러웠지.니가 가진 능력이며 어린 나이에도 냉철한 사고와 판단력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음악적 재능이며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은근한 질투도 느꼈어.
하지만 그건 내께 아니라고,타고나지 못한걸 어쩌겠어.마음 접으면 그만 인데....
지민인...한지민은 아니야.더더욱이 니가 사랑하고 널 사랑해서 놓아주기 힘들단 말야.
나만 없어지면 너희둘 행복할게 떠올라서...나...
"이틀 전에 코디 팀 보낼게."
"응?"
"메인은 이지민씨가 갈꺼야."
"어...요새도 같이 일한다며?몇년째야 벌써."
"중 메인은 한지민 보낸다."
"!"
"깨끗하게 정리하든 니 사람 만들든 끝장을 봐."
"무슨 뜻이야 형..."
"더이상 비겁해지기 싫다는 소리야."
막상 마주한 니 눈을 보고....
더 이상은 내가 용서 못할 거란걸 알았지.
네게...나쁜 기억으로 남는다는건...내게도 견디지 몰할 일이란걸....아니까.
******
아침일찍 일어나 우유 한잔을 마시고 케이블 채널을 틀었더니 '널 지우려해'가 나오고 있었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신기한 듯 티비를보는 내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올라가고 있었다.
우와..저게 언제적이야.의상을 보니 4집 활동을 하던때 같은데 퍽이나 멀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난 저 무대 뒤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겠군...
참 이상하다.나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는 모든 일들이..이젠 나도 모르게,마치 필연처럼 느껴진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걱정이 될 만큼.
다시 부딪히게 된 그들과 얽히고 얽혀서 여기까지 오게된 우리 사이며 지금의 나까지.
처음과는 다르다.다른건 둘째치고...난 많이 달라졌다.
내가 느끼기에도 남들이 느끼기에도...난 많이 강해졌다.
그가..날 이렇게 만들어 준거냐고?
아니,천만에.그가 없는 시간 동안 내가 날 만든거야.
내..스스로 강해졌어.
그를 지키기 위해선 내 스스로 강해지는 법을 배워야만 했거든...
그래서..행복해.이젠...우리 행복할 일만 남았어.
처음 만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오랜만이야?아니야 이건 너무 식상해.
하나도 안변했네.이것도 이상해
...그냥...다른말은 필요없을 것 같아.
보고싶었다고 말하면서 꼭 안아줘야지.
정말..많이 보고싶었다고.
그럼...그가 내게 웃어주겠지...?
오랜만에 고른 하늘색 원피스는 지금의 내 기분 같아서 괜히 마음이 들뜬다.
뭔가..무지무지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뭐..아니래두 상관없지.
"뭐,뭐?내가?"
느즈막히 사무실에서 현석오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분식나라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삼각 커피우유를 빨아가며 사무실 소파에서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사이 오빠가 돌아왔고
이내 나의 잠은 날아가 버렸다.아니..내가 잠이 들뻔 했다고?말도 안되지 그건...
"다..다시 말해봐."
"못 알아 들었어?너도 같이 가라고.앞으로 니가 일하는데 좋은 경험이 될꺼야."
"말도안돼...내..가?"
"얘가 속고만 살았나...가보라고.어차피 한번은 가야할거 아냐."
피곤하단 듯이 그 말만 던지고 들어가버린 현석의 표정이 지민의 눈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한 생애를 기다려 만난대도 이렇게 애틋할까...흩어진 혈육이래도 이렇게 애닲을까.
바로 어젯밤 내내 지민을 설레이게 하던 허황된 꿈이 진실로 다가왔다.
그에게 보고 싶었다 말하며 안길 수 있게 됐다.
"이게...꿈은 아니겠지....?실장님 나 한번 꼬집어 봐요."
미친척 실장에게 볼을 들이민 지민은 현석이 들어간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과하고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어리둥절한 실장이 우락부락한 손을 들어 지민의 볼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