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파로호>를 쓴 이유는..."
|
▲ 강원도 화천군과 양구군에 걸쳐 있는 호수 파로호. ⓒ
홍성식 |
6월29일 오후 강원도 화천군. 따가운 초여름 햇살이 호수 위에서 송화가루처럼 잘게 부셔지고 있었다. 나무그늘 아래로 살랑이며 귀를 간질이는 바람. 80여명의 사람들은 쫑긋 귀를 세웠다. <파로호>의 작가 오정희(55)가 나이를 잊은 듯 수줍은 소녀처럼 걸어나와 160여개의 눈동자 앞에 섰다.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먼 나라에 갔었어요. 말이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소통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갑갑함은 나로 하여금 소멸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했어요. '파로호'의
시퍼런 물 밑으로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왔죠."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한 <작가와 떠나는 문학기행>. 휴가를
낸 회사원, 자영업자, 학생, 화가, 문학담당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기행 참가자들은 오정희가 <파로호>를 쓴 이유를 저마다 귀기울여 들으며 메모에 열심이다. 소멸과 쓸쓸함이라...
|
|
▲ 소설가 오정희. ⓒ홍성식 |
'단애의 끝에 호수가 있다. 산을 깎아낸 길 아래, 가파른 벼랑 끝에 호수는 그릇에 담긴 물처럼 고요하다. 만산홍엽. 지는 잎들이
깊고 푸른 물위에 색종이처럼 후르르후르르 떨어져 내린다' 바로 그 단애의 끝에 위치한 호수 '파로호' 위를 외로운 새 한 마리가 날았다.
푸른 물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자니, 죽고사는 것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울고웃는 세상사가 그렇게 가소로워보일 수가 없다.
맞다. 오정희도 그랬다지. 그녀는 파로호에 이르러 '수만 년의
세월 뒤 흙을 털고 일어난 여인의 눈으로 물이 사라진 호수'를
봤고, '영원한 화두인 양 웅웅대며 떠도는 바람'을 보았다고 썼다.
작가와 함께 소설의 무대로
<작가와 떠나는 문학기행>은 소설의 무대가 된 곳을 작가와 독자가 함께 둘러보는 행사.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소설을 쓴 당사자가 풀어주는 흔치 않은 문학기행이다. 올해는 <파로호>의 무대인 파로호와 <유정의 사랑>이 공간적 배경인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이 답사지였다.
작가 오정희와 전상국(62)이 강사를 맡았고, 행선지가 강원도이니만치 이경자(소설가), 신동호(시인), 김선우(시인) 등 강원 출신 작가들이 함께 길을 나섰다. 여기에 작가회의 소설분과위원장 송기원(55)과 사무국장 전성태(34), 김지우(소설가), 김이정(소설가), 원시림(소설가), 김은경(시인) 등과 독자 60여명이 동행, 기행팀은 45인승 버스 2대를 꽉 채웠다.
이른 아침을 챙겨먹고 강원도로 발길을 재촉한 기행팀은 파로호 인근에서 산채와 막걸리로 요기를 하고, <땡볕>과 <만무방>의 작가인 김유정의 고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마을의 형상이
옴팍한 떡시루처럼 생긴 까닭에 지어진 이름 실레마을. 인근에
위치한 간이역인 신남역의 풍경이 겨울이 아님에도 을씨년스럽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라도 한 송이 피어있었더라면.
소설가 전상국이 기행팀을 반긴다. 이어지는 강연. 전상국은 김유정 문학의 핵심을 '빼어난 문장'과 '가난에 굴하지 않았던 작가정신'으로 요약하며, 그의 작품을 애정을 가지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기를 권했다. "이미 70여년 전에 쓴 것들이지만, 현역 작가의 어느 작품과 비교해도 떨어지는 않는 감각"이라는 칭찬이 이어진다.
문학은 소신공양(燒身供養)같은 것
김유정(1908~1937). <동백꽃> <봄봄>으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요절작가(夭折作家). 단 2년의 짧은 작품활동 기간에 30여편의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고, 그것들로 한국문학을 풍요롭게 한 불우한 천재. 90년대 중반 시인 이상의 삶을 다룬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는 그 역시 폐병으로 요절한 이상(1910~1937)과 김유정의 짤막한 대화가 등장한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을 게다.
"오호, 당신이 바로 그 폐병쟁이 독설가 이상인가?"
"그러는 당신은 폐병으로 피나 토하는 소설가 김유정이로군."
걸출한 사람들은 하늘도 부러워하는 것인가. 한국문학은 너무나 많은 젊은 문인을 잃었고, 잃고 있으며, 잃을 것이다. 어차피
문학이란 소신공양(燒身供養)에 다름 아닌 것. 자신을 버리지 않고 위대한 문학에 이르기는 요원한 일. 요절한 문인이 많은 것은
그들이 문학에 대해 품고 있는 열정이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든
뜨거움이기 때문이 아닐까.
|
|
▲ 소설가 송기원. ⓒ홍성식 |
전상국의 강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인근에 세워지고 있다는 '김유정 기념관'을 둘러보러 산모퉁이를 돌았다. 그 시간 김유정의
삶과 문학에서 쓸쓸함을 읽어낸 기행팀 몇몇은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로 막걸리잔을 돌렸다. 쏟아지는 뙤약볕 탓이었을까? 취기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진원지가 불분명한 슬픔까지 함께 밀려왔다.
전국 각처의 사찰과 인도, 그것도 모자라 히말라야까지 떠돌며
'궁극의 무엇'을 찾으려했던 소설가 송기원이 입을 열어 던진 한마디. 공안(公案)같기도 하고, 혼잣말같기도 하고, 주정같기도
한 그 말.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지."
미처 알아듣지 못한 누군가가 재차 물었다.
"네? 뭐라고요?"
"죽으면 썩어질 몸 아껴서 뭘 할려고."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일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송기원의 그 말에선 술냄새가 아닌 향냄새가 났다. 대관령과 설악산,
짙푸른 동해로 상징되는 강원도의 기나긴 여름해가 까무룩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이 시작된 곳에서
아득한 동경이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처럼 밀려왔다.
잠깐의 떠남이 오래도록 삶을 견디게 하리라
강원도의 빛나는 풍광과 작가의 삶이 던져준 몽롱한 감상에 젖어 내처 술잔만 들이킬 수는 없는 일.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오늘은 파로호와 실레마을에서 인간과 문학을 생각하며 숲길을
거닐었던 그들은 싫든좋든 내일이면 지하철과 답답한 사무실,
퇴근시간의 교통정체와 9시뉴스의 반복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기행팀이 잠시잠깐 일상을 벗고 만났던 눈이 시린 풍광과 아름다운 문학은 그들에게 오랫동안 지루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어주리라. 서울로 향하는 길. 어두워진 차창 밖으로
가로등이 휙휙 스쳐간다. 먼 하늘에 펼쳐진 막막한 어둠은 검은
차일(遮日)이 되어 시 한편을 투사하고 있었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氷花)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 김선우의 '대관령 옛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