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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2 - 몬주익에서 케이블카로 몬주익성에 올라 스페인 역사를 회상하다!
2018년 5월 17일 타라고나 Tarragona 역에서 12시 25 분 기차를 타고 지중해안을 달려 13시
40분에 바르셀로나 산츠역 Barcelona Sants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한후 지하철을
타고 파랄렐역 Paral-Lel 에 내려서 푸니쿨라 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편도 12.5 유로
하는 로프웨이 라고 부르는 케이블카 를 타고 몬주익성역 에 내려서 5분여 언덕길을 오릅니다.
몬주익성역 에 도착해서는 1인당 5유로씩을 내고 해자에 놓인 다리 를 건너서 정문으로
몬주익성 Castell de Montjuic 으로 들어가는데 해자도 엄청 넓을뿐 아니라
성벽도 매우 육중한데 지금은 해자에 꽃과 나무 를 가꾸었으니 공원 같은 느낌이 납니다.
여기 몬주익성 Castell de Montjuic 은 중세시대 부터 성채 가 지어졌었다는데.... 1640년
군사 요새로 개축했고 20세기 중반 프랑코시대 때는 수많은 공산주의자 들을 수용해
악명을 떨쳤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 군사박물관 Museu Militar 으로 개조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 ( 영어식으로는 스페인 ) 는 유럽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1세( 오스트리아에서는 카를 5세 ) 가 1556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 에게 그리고 스페인과 네델란드,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및 신대륙 은 아들 펠리페 2세 에게 물려주니 스페인은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왕 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인 카를 5세 는 조상들이 결혼을
통해 이룩한 가문이니.... 네델란드(벨기에) 공주가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국 에 시집을
갔는데 친정에 왕자가 없으니 사위가 네델란드를 차지 하는데... 그후 네델란드 공주가
합스부르크가 에 시집간후 또 친정에 왕자가 없으니 합스부르크 가문이 모두를 상속 합니다.
스페인에서는 카스티야의 공주 이사벨라 와 아라곤의 왕자 페르딘나도 가 결혼해 힘을
합쳐 700년간 스페인을 통치한 이슬람 사라센인과 무어인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룩하니 에스파냐의 탄생 인데.... 부부의 딸 후아나 는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1세 에게 시집갔는데 카를 5세 는 1500년 플랑드르(벨기에) 겐트 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 펠리페 1세 가 할아버지의 처가인 부르고뉴공작에 임명되면서 증조부의 처가인
네델란드(벨기에 포함) 로 가서 거주할 때 태어난 것인데 이후 아버지는
카스티야(스페인)왕이 되나 1506년에 아버지가 죽고 1516년에는 외할아버지도
죽자 카를 5세는 에스파냐 왕위 에 오르는데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 라고 칭합니다.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의 메메드 2세 는 1453년 비잔틴 제국
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해..... 2천년간 이어지던 로마제국을 멸망 시킵니다.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의 후계자 술탄들은 육지 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을
1529년과 1683년 2차례나 포위 공격했으며 바다에서는 요한십자군
로도스섬과 베네치아 크레타섬 등을 점령하고 지중해 중앙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서진 을 온몸으로 저지하던 베네치아 는 로마교황청과 유럽 각국에 호소하니
1538년 이슬람과 기독교 해군이 격돌한 프레베자해전 이 벌어지는데.... 카를 5세 는
유럽에서 해적 소굴로 악명을 떨치던 알제리와 튀니지 이슬람 도시들을 공격하는게
우선이라 생각해 해전을 회피해 투르크 해군이 승리하니 지중해는 이슬람의 바다 가 됩니다.
이후 기독교 국가들은 지중해 통행이 어려워지자 마침내 1571년 레판토해전 이 벌어지는데
베네치아의 호소에 교황청이 일어나 베네치아 110척 + 교황청23 척에 스페인 75척
(17+ 제노바 22 + 이태리 나폴리와 시칠리 36) 합계 208척의 대함대 가 결성되었으며
총사령관으로 스페인 왕의 이복 동생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오스트리아공 돈 후안 입니다.
8월 23일 전대미문의 208척 기독교 신성동맹 함대 가 메시나항에 집결해 동쪽으로 나아가
코르푸에서 재정비한후 그리스 서부 파트라스만을 봉쇄 하니 좌익은 베네치아의
바르바리고, 우익은 제노바(스페인)의 잔안드레아 도리아, 중앙은 오스트리아공
돈 후안으로....... 적 전사 8천에 포로 1만 을 잡아 승리하니 이른바 “레판토 해전“ 입니다!
잔 안드레아 도리아는 이번에도 북아프리카 이슬람 해적 근거지인 알제리 공격을 우선하는
스페인 왕의 비밀 지령 을 받았기에 33년전의 프레배자 해전 처럼 전투에 소극적이라!
원래 기독교도 이탈리아인으로 이슬람 해적에 납치되어 성장한후 전투에서 이슬람
좌익사령관을 맡았던 알리 는 무사히 탈출해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터키 해군을 재건합니다!
카를로스 1세의 아들 펠리페 2세 는 사촌 마리아와 결혼했으나 사망하자 영국의 메리여왕 과
결혼해 영국의 성공회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리려고 노력하던 중에... 메리가 죽고 동생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는데 1571년 레판토해전에서 승리한후 엘리자베스여왕 이
해적을 비호 하자 1588년 3만명 군인에 2,400문 포를 실은 132척 무적함대를 출격 시킵니다.
무적함대 가 잉글랜드 남쪽에 도착한건 1588년 7월 19일로 펠리페2세는 메디나에게 파르마
공작의 병력을 잉글랜드로 상륙하는 것을 도울 것을 명령하였지만 플랑드르의 스페인군
파르마 공작이 움직이지 않자....... 메디나는 영국 함대와 몇번 접전한후 플랑드르 로
찾아 가는데 네델란드 해군 67척이 영국 해군에 합류 하지 않을지 무척 마음에 걸립니다.
스페인 무적함대 는 7월 27일 모래 언덕에 배가 걸리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플랑드르 남쪽 칼레항구 로 들어가서는, 잉글랜드의 공격을 막기위해 밀집 진형 으로
정박하고 있었는데....... 잉글랜드가 8척의 화공선 을 내려보내자 닻줄을 끊고 출항
하는수 밖에 없었으니 피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닻이 없으니 배를 정박시킬수 없게 됩니다.
잉글랜드 함대는 무적함대를 공격하니 그레이 브라인 전투 에서 근거리에서 포격전 을
벌였고 잉글랜드 함대와 무적함대 양쪽에 사상자가 발생하는데, 무적함대는 거친
북해로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으니 영국 함대를 피해 스코틀랜드 북쪽으로 멀리 돌아서
1588년 9월 11일 코루나항에 돌아왔을때는 65척뿐 이었으니 67척이 침몰한 대참패입니다!
100여년이 흐른 1700년에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 가 후손을 남기지 못한채 죽었는데...
선왕인 펠리페 4세의 딸인 누나들 중에 마리아 테레사는 프링스 국왕
루이 14세 와 마르가리타는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1세 황제와 결혼했었으니
서로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지라 전쟁이 벌어지니 이른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입니다.
*** 두 딸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시집 보낸 펠리페 4세 스페인 국왕 ***
카를로스 2세 는 근친결혼으로 인해 태어날때 부터 병약했던데다가 정자의 힘이 약해 아들을
볼수 없으니 후계자를 미리 유언으로 정했는데,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 에게
스페인과 벨기에 및 아메리카대륙을 주고...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필리프 에게는
시칠리아와 나폴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카를대공 에게는 밀라노와 이탈리아를 주기로 합니다.
그런데 바이에른의 페르디난트가 일곱살에 요절하면서 카를로스 2세는 후계자로 루이 14세
의 손자 필리프 를 지명했으니 새로운 왕은 마드리드에서 따뜻한 영접을 받았으나....
불복한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 1세 는 아들 카를로스 대공을 왕 으로 내세움으로써
전쟁이 벌어지자 곧 18개국이 참전한 국제전 으로 번지니......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입니다.
포르투갈 은 인도양 식민지 반환을 조건으로 프랑스편에 참전을 약속했으나 영국, 네덜란드
가 오스트리아측에 가담하자 영국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포르투갈은 오스트리아편에 가담하니
1차대전에 이탈리아 가 독일측에 가담했다가 프랑스편으로 말을 바꾸어 탄 것과 유사합니다.
1702년에 시작된 왕위계승 전쟁은 12년간 계속되는데 북이탈리아에서 외젠의 오스트리아
군이 빌레루아의 프랑스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1704년에 이르면 5만 7천의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공격하려 하자 이탈리아에서 외젠의
오스트리아군이 북상하고 네델란드에서는 영국의 말버러 대공 은 4만을 이끌고 남하합니다.
말버러 대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오다 노부나가 사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 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 에서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 멀리 물러났다가 밤새
길을 달려 다음날 새벽에 불시에 전장에 나타남으로써 적군을 경악시키고 혼란에 빠지도록
해서 승리하는데.... 비결은 행군로 주민들에게 미리 돈을 주고 햇불과 물에 주먹밥 과
길 안내를 준비시킴으로써....... 사흘 거리를 불과 하룻밤에 주파하도록 준비한 데 있습니다.
처칠의 조부인 영국의 말버러 대공 도 네델란드군이 라인강 동쪽으로 진군하는걸 꺼리자
모젤강 쪽으로 이동한다고 말하여 네덜란드인들을 속이고는 코블렌츠에 도착한후
장비와 보급물자를 라인강 수로로 보내고 알자스로 진출하려는 듯한 행동 을 취해
적군을 속이니 프랑스군이 알자스 지역에 병력을 증강 시키자 라덴부르크에서 부대를
라인강 동쪽 네카르 강을 건너서 다뉴브 강을 향해 진출시켜서 3만 외젠 군과 합세합니다.
눈부신 행군은 이른 봄 부터 준비된 것이었으니 말버러는 미리 독일인 관리들로 부터 허락과
지원을 받아내고 군량과 보급품을 준비 시켰는데 징발한 물건들에 대해 값을 즉석에서
지불했기 때문에 말버러 군대는 현지 주민들과 마찰을 겪지 않았고 병사들에게 충분한
음식과 피복을 제공 했으며 그런 다음 엄격한 기강 을 요구했으니 영국 장군들은 그의
리더십을 귀감으로 삼아 이후 보급과 준비를 중시 하고 졸속작전을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8월 12일 탈라르의 프랑스군과 바이에른군은 다뉴브강 블렌하임 에서 6㎞에 걸쳐 진을 친채
네벨강을 사이에 두고 연합군과 대치했는데, 강 900m 뒤에 위치 함으로써 방어의 이점을
살리지 못했으니 13일 아침에 말버러는 네벨강을 건너 공격하자 기습을 당한 프랑스군은
패배했으니 연합군은 12,000명의 손실을 입은데 비해 프랑스군은 14,000명의 포로를 포함
46,000명의 병력과 대포 60문을 잃었으니 루이 14세는 유럽 지배를 위한 계획을 포기 합니다.
영국 해군은 툴롱에서 패했으나 비고에서 승리해 신대륙에서 운반해온 은 을 탈취하는데...
영국군은 포르투갈을 기지 로 삼았지만 프랑스군 공격으로 중북부 전역을 빼앗기는
위기에 처했으나 1706년에 포르투갈과 영국 동맹군은 마드리드에 입성 하여 독일의
카를로스 대공을 왕위에 추대했지만 곧이어 알만사(Almansa) 전투에서 패하여 후퇴하나
이후 프랑스는 참패를 거듭하다가 빌라르 원수 가 1712년 드냉 전투에서 실지를 회복합니다.
1713년에 유트리히트 조약 을 체결했으니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 했지만
영국은 프랑스령 아메리카 식민지 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지브롤터 를 얻었으며
포르투갈 은 아마존강의 소유권 을 얻었고 카탈루냐 는 신성로마제국에
가담 했으니 1714년 9월 11일 오랜 공성전 끝에 바르셀로나가 함락되자
자치권을 상실하고는 스페인에 병합 됩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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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맛을 모른다
이리하여 몸을 닦는 것은 마음을 바로
잡는데 있다고 이르는 것이다
-"大 學"-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역사만 파란만장한게 아니고.....
모든 나라들이 다 우역곡절
역사적으로 아픔이 있었음을 봅니다!
그림에서 보니 오스트리아 빈도, 거대한 스타시티였군요, 사라진 타아타리아의 스타시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