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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국성(龜茲國城)=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 [제3편]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옛 평양성(平壤城) ➠ 한도장안(漢都長安)?
2024년 02월 09일
○ 〈“장안성(長安城)과 평양성(平壤城)”에 대한 설명(說明)에서 “구자국성(龜茲國城)”을 빼놓고 말한다는 것은 ‘단팥 소’없는 ‘단팥 빵’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성(城)과 성(城)의 축조(築造) 방식(方式), 거리(距離), 시가(市街) 등 모두가 장안성(長安城)과 같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글은 “2020년 01월10일”에 게재(揭載)된 글이다. 이걸 일부(一部), 보완(補完)하고, 보충(補充)하여 재정(再訂)한 것이다.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구자국성(龜慈國城)의 미스터리(mystery)”【한(漢)의 장안성(長安城)은, 구자국성(龜茲國城)?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구자국성(龜慈國城)의 미스터리(mystery) 2020년 01월 10일】라는 부제(副題)를 달고 있는데, ‘장안성(長安城)’을 설명(說明)하면서 이곳의 ‘구자국성(龜茲國城)’을 빼놓을 수 없다.
이때의 글과 함께 보충(補充), 보완(補完)을 한 것이지만 당시(當時)의 내용(內容)이 중요한 것이므로, 중복(重複)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장안(長安)』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의해 도읍지(都邑地)가 되어 융성(隆盛)해졌다. 이후(以後)에도 장안(長安)은, 봉건왕조(封建王朝)들의 도읍지(都邑地)로 유명세(有名稅)를 탔는데, 특히 ‘수(隋)와 당(唐)“나라 때는 이곳 장안(長安)은, 동도(東都)라고 했던 낙양(洛陽)과 더불어 가장 번화(繁華)했던 도회지(都會地)였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소위(所謂) 정사(正史)라고 칭하는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장안(長安)을 유경(柳京)”이라는 애칭(愛稱)으로도 불렸고, 이곳이 낙랑군(樂浪郡)이었고, 평양(平壤)이다.〉라고 기록(記錄)해 놓아, 작금의 세대(世代)에서는 “이게 무슨 까닭인가?” 의아(疑訝)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한(漢)』【‘서한(西漢)=전한(前漢)’과 ‘동한(東漢)=후한(後漢)’】이란 옛 봉건왕조의 정체(正體)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사(朝鮮史)의 「한(韓)➠한(漢)」이었을까? 이 말은 〈구려(駒驪)가 한(漢)이었는가?〉하는 의심(疑心)이다.
이게 아니었다면, 분명(分明) 「한(漢)」이란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존재(存在)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오늘날 대륙(大陸)의 장안(長安)【서안(西安)】땅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곳 “장안(長安)은 고구려(高駒驪)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또 원전(原典) 기록(記錄)에서는 〈동방(東方) 땅에 구이(九夷)가 있었다.〉라고 했고, “동방(東方)이란 서방(西方)”과 대칭(對稱)되는 땅이며, 구이(九夷)의 후예(後裔)들이 곧 “한(韓)”으로 삼한(三韓)과도 같은 것이다.
『고구려(高駒驪)』 는, 《지중해(地中海) 동안(東岸)과 흑해(黑海)의 연안(沿岸)과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벨루하산(Belukha, 山)=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사이의 동구라파(東歐羅巴)와 중아(中亞) 땅에서 점점(漸漸) 동천(東遷)하였다.
계속(繼續) 동천(東遷), 동진(東進)하면서 “평양(平壤)”이라는 도성(都城)의 이름 역시 함께 천도(遷都)했음은 “평양(平壤)”이라는 말 자체가 “평안(平安)한 땅”이라고 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자국성(龜玆國城)” 역시(亦是) “고구려(高駒驪)의 평양성(平壤城)”이었으나, 고구려(高駒驪)가 동천(東遷), 동진(東進)하면서 그 후대(後代)의 ‘서한(西漢)=전한(前漢)’의 유방(劉邦)의 왕성(王城)이 된 것이다?》라는 의문(疑問)은,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하는 필자(筆者)로 보면 : 매우 당연(當然)한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이다.
항상(恒常) 주장(主張)하는 것이지만, 「➊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의 땅에서 어떻게 반도(半島) 땅이 동방(東方)의 땅이 될 수 있겠는가? ➋ “해동(海東)”이란 발해(渤海)의 동(東)쪽으로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 ‘북사(北史)’에서는 지중해(地中海)와 흑해(黑海)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해동(海東)의 땅이 어디냐?」
➥➥ “북사(北史)”의 기록(記錄)을 뒤엎을 만한 확증(確證)있는,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논거(論據)가 있는가? “한글 해설서(解說書)는 사절(謝絶)한다.”
“반도(半島) 땅은. 동방(東方)의 넓고 넓은 땅 가운데 오직 한 부분(部分)일 뿐이다.”」 이러한 것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이 지들 멋대로 “동방(東方)은 반도(半島)다”라고 해설(解說)해 버린 것이다. 그래야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반도(半島) 땅에 가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 카페[Cafe]의 회원(會員)님께서 기록(記錄)을 인용(引用)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 “적성(赤城)”을 두고 이를 ‘수(隋)의 장안성(長安城)’을 말한다고 하였는데, 사실(事實)을 보면 :
“용수산(龍首山)”은 “용수원(龍首原)”이라 불리는데 “산(山)”이라고 하기보다는 “들판”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곳의 일부 땅이 황토(黃土)였으므로, 수(隋)의 도성(都城)인 대흥궁(大興宮)이 있고, 당(唐)의 대명궁(大明宮)도 자리 잡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용수산(龍首山) 위(上)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헌데 오늘날의 중국(中國)에서는 “적성(赤城)은 곧 수(隋)의 도성(都城) 또는 대흥궁(大興宮)의 다른 이름(別稱)이라는 말 자체(自體)가 없다”라는 것이다.
당(唐)의 “대명궁(大明宮)”은, “동서(東西) 1.5리(里) 남북 2.5 리(里)”가 되는 조그만 궁(宮)으로, 수(隋)의 대흥궁(大興宮)은, 당(唐)의 태극궁(太極宮)으로 태극전(太極殿)인데, 대신(大臣)들과 황제(皇帝)가 서로 접견(接見)하는 곳【場所】이라고 전해진다. 현재(現在) 그 유적(遺蹟)을 보면 : “모두가 흙을 다져 만든 성루(城壘)가 보인다.”
어느 곳이든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따라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 조건(條件)들을 떠난 성(城) 축조(築造)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진(秦)이나 한(漢)의 장성(長城)을 자새(紫塞)라고 불리는데, 이는 황토고원(黃土高原)의 황토(黃土)를 이용(利用)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傳)해진다. 그러나,
➡ 그 유적(遺蹟)들은 대부분(大部分)이 “돈황(燉煌)과 그 서(西)쪽 지방에 있을 뿐”이라고 전(傳)해진다.
냉정(冷靜)하게 역사(歷史)를 바라보면 : 「수(隋)의 도성(都城)이나 당(唐)의 도성(都城)은 같은 곳이자, 조그만 궁궐(宮闕)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當時)의 수(隋)와 당(唐)의 위세(威勢)로 보면 : 이런 조그만 궁궐(宮闕)로 이루어졌다」라는 것을 이해(理解)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수당(隋唐)의 역사(歷史)”가 누군가에 의해 과대포장(誇大包裝)되어 확대재생산(擴大再生産)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또 황토(黃土)를 재료(材料)로 하여 성(城)을 쌓았다고 하여 “적성(赤城)”이라는 별칭(別稱)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그러나 당(唐)의 대명궁(大明宮), 태극궁(太極宮)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일반적(一般的)으로 전(傳)해지지 않는다.
◇ 이러한 조선사(朝鮮史)로 바라볼 때, 오늘날의 대륙(大陸) 땅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옛 장안(長安)】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평양(平壤), 낙랑군(樂浪郡)이었으며, 장안(長安)이었고, 유경(柳京)일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도장안(漢都長安)’이란 말은, 조작(造作)된 것일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즉(卽) 「➊ 한(漢)은, 한(韓)으로, 한(馯)이다. 한(馯)은 동방족(東方族)의 한 갈래다. 구려(駒驪)다. ➋ 한(漢)은,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일부와 서역(西域)【신강지방(新疆地方)】일부 땅에 있었던 제후(諸侯)로, 장안(長安)은 구자국성(龜玆國城)이다.」라고 추정(推定) 및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데, 오늘의 주제(主題)다.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이르기를 : “한도장안(漢都長安)”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이 딱 한군데 있는데, 「그 나라의 성(城)과 궁실(宮室)이 매우 크고, 시읍(市邑)이 장안성(長安城)과 같았다.」라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하면서, “그 유적(遺跡)도 상존(尙存)한다.”라고 한다.
따라서 〈한(漢)나라 이전(以前) 또는 이후(以後)의 수당(隋唐) 등의 여러 왕조(王朝) 이야기는, 오늘날의 ‘동방(東方)=대륙(大陸)’【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동(東)쪽】땅이 아닌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의 완충지대(緩衝地帶)였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新疆)의 일부(一部) 땅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 특히 조선왕조(朝鮮王朝) ‘삼국시대(三國時代)’라고 하는, ‘고구려(高駒驪)·신라(新羅)·백제(百濟)’가 흥성(興盛)할 때,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맺고 있었던 여러 왕조(王朝)의 역사서(歷史書)와 조선사(朝鮮史)의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과 학자(學者)들의 개인문집(個人文集) 속에 기록(記錄)된 것은,
◇ 평양(平壤)은,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인데, 당서(唐書) 또는 통전(通典) 등에서는, “평양(平壤)을 또한 장안(長安)이라 이른다.”했다.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서는,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이다.」라고 하였다.
특히 “유경(柳京)”이라고 한 것은, 〈장안(長安)을 흐르는 하천(河川) 양 둑에 십여(十餘) 리에 걸쳐 펼쳐져 있는 버드나무(柳) 숲을 지칭(指稱)하는 말로, 그야말로 장관(壯觀)이었다고 전하는데, 특히 남녀(男女) 간에, 부모(父母)와 자식(子息) 간에, 형제(兄弟)와 자매(姊妹)간에, 선후배(先後輩) 간에, 군주(君主)와 신하(臣下) 사이에, “이별(離別)의 애처로운 장소(場所)”로 기억(記憶)되었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애처로운 장소(場所)로 기억(記憶)될 수 있었던 십여(十餘) 리에 펼쳐져 있던 하천(河川)가의 버드나무(柳) 숲은 ‘장안(長安)=평양(平壤)’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하였다.”라는 것이 중요(重要)하다. 이러한 곳은 당시(當時), 한 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유경(柳京)”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애칭으로 불려졌는가? 하는 것인데, 이긍익【1,736년(英祖 12∼1,806년(純祖 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역대전고(歷代典故) / 기자조선(箕子朝鮮)”편을 보면, 그 연유(緣由)를 알 수 있는데, ‘유경(柳京)의 원조(元祖)’라 할 수 있다. 즉(卽),
《순오지(旬五志)를 인용(引用)하여 : 《「세상에 전하기를,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의 풍속(風俗)이 억세고 사나운 것을 보고, 버드나무의 본성(本性)이 부드럽다는 이유로 백성(百姓)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다. 이 때문에 평양(平壤)을 일명 ‘유경(柳京)’이라고 한다.” : 【世傳箕子見鮮俗强悍, 以柳樹性柔, 悉令民家種柳, 故平壤一名, 柳京云. [旬五志]】」라고 한다.》 이렇게 기록(記錄)으로 남겨놓고, 지금까지 전(傳)해지고 있으며, 또 전(傳)하기를,
《평양(平壤) 대동강(大同江) 동(東)쪽 기슭에 긴 느릅나무 숲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데, 가로(東西)로 10리(里)나 뻗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기자(箕子)가 백성(百姓)들에게 심게 하여 흉년(凶年)의 굶주림에 대비(對備)한 것이다. 【平壤大同江東岸, 有長楡林, 擁路左右, 橫亘十里, 世傳箕子使民種植, 以備救荒】》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또 고증(考證)하듯,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편을 보면, 『平壤(평양)은 長安(장안)이며, 鎬京(호경)이며, 柳京(유경)이며, 樂浪(낙랑)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유경(柳京)”이란 바로 “평양(平壤)”을 말하며, 이는 또 장안(長安)을 뜻하며, 곧 “고구려(高句驪)의 황도(皇都)”를 말하는 것으로 인식(認識)되고, 설명(說明)되어 있다.
또 하나 반박(反駁)할 수 없는, 빼도 박지도 못하는 결정적(決定的)인 것 하나는, 바로 “호경(鎬京)”때문이기도 하다. ‘장안성(長安城)과 호경(鎬京)’은 장안(長安)에 함께 있고, 서로 인접(隣接)해 있다. “호경(鎬京)”은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상(商)’을 멸하고, 옮긴 주(周)나라 서울(京)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주무왕(周武王) “발(發)”이 천도(遷都)한 “호경(鎬京)이 두 곳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수년(數年)에 걸쳐 장안성(長安城)을 쌓고, 완성(完城)되자 장안성(長安城)으로 서울(京)을 옮기고(遷都)… …이렇게 장안(長安)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서울(京)로써, 한때 흥성(興盛)했다고 전해진다.
똑같은 이름의 장안(長安)과 유경(柳京)과 장안성(長安城)은,
➊ 전한(前漢)과 수당(隋唐)의 서울(京)이었던 장안(長安)!
➋ 고구려(高駒驪) 서울(京)이었던 장안(長安)!
똑같은 장소(場所)에, 서로 이질적(異質的)인 전혀 다른 두 나라(國家)의 왕조(王朝)가 서로 사이좋게 도회지(都會地)를 나누어 서울(京)로 사용(使用)했을까?
○ 조선사(朝鮮史) 입장(立場)에서 바라보는 “장안(長安)”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서울(京)이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옛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는 동방(東方)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서방(西方) 땅에 장안성(長安城)이란 성(城)과 도회지(都會地)가 있었을까?
있다. 존재(存在)한다. 『장안성(長安城)과 도회지(都會地)가 같았다』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서방(西方)의 장안(長安)’이 아니었을까? 그 일부(一部) 유적(遺跡)들은 지금도 상존(尙存)한다」라고 하였다.
『동방(東方) 대륙(大陸)의 장안(長安)으로부터 ‘무려(無慮) 7-8 천리(千里)나 떨어져 있었다.’』라는 서역(西域) 땅의 ‘구자국(龜慈國)’편을 보면 : 〈구자성(龜茲城)은 장안성(長安城)과 장안(長安)의 시읍(市邑)과 똑같고, 궁실(宮室)도 대단히 성했다(컸다)【城如長安市邑, 宮室甚盛)】〉는 생뚱맞은, 이질적(異質的)인, 전혀 관계(關係)없는 기록(記錄)을 남겨 놓은 것일까?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은 이러한 것에서부터 출발(出發)하는 것이다.
➥➥➥ 쿠처(龜茲 : 龟兹 : Kucha)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쿠처【위구르어: كۇچار, 중국어 간체자: 库车, 정체자: 庫車, 屈支, 屈茨, 丘玆, 중국어 간체자: 龟兹, 정체자: 龜玆】는 고대(古代) 불교(佛敎) 왕국(王國) 구자국(龜玆國)의 현지명으로 비단길에 있으며,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장자리 무자트강 남쪽에 있다.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아커쑤 지구에 속하며 쿠처 현 중심이다. 인구는 1990년에 74,632명이었다. 쿠처(Kucha)는 쿠샤, 쿠처르 등으로도 읽히며 같은 곳을 가리킨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인용/끝 -
➥➥➥ 이러한 곳에 있었던 「구자국(龜慈國)의 「도성(都城)과 시읍(市邑)이 매우 크고 성했는데, 장안성(長安城)과 같았다. : 城 如 長 安 市 邑, 宮 室 甚 盛」라는 것이다. 명(明)나라 말(末), 청(淸) 초(初)를 살다 간 “고조우(顧祖禹)”가 편찬(編纂)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편에 이러한 이야기가 생생(生生)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고조우(顧祖禹1631 ~ 1692) :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의 역사, 지리학자. 사학자 유겸의 아들. 지리학에 정통하였다. 벼슬하지 않고, 20년에 걸쳐 “여도요람, 독사방여기요”를 완성했다. 서건학·진덕화 등과 함께 “대청일통지”편찬에도 참여했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조우 [顧祖禹] (두산백과)】
● 讀史方輿紀要. 西域 / 龜茲國城 :《龜茲國城在亦力把力東南.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역력파력(亦力把力) 동남(東南)쪽에 있다. 漢西域傳:龜茲治延城, 去長安七千四百八十里, 東至都護治烏壘城三百五十里. 或曰丘慈, 亦曰屈茲. 武帝時, 內附. 中略. : 한(漢)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 구자(龜玆)는 연성(延城)에서 다스렸다. 장안(長安)으로부터 7,480리 떨어져 있고, 동(東)쪽으로 도호(都護)가 다스리는 오루성(烏壘城) 350리에 다다른다. 혹은 구자(丘慈), 또 굴자(屈慈)라고도 한다. 무제(武帝) 때 내부하였다. 중략(中略). 太元七年, 苻秦將呂光伐西域, 焉耆諸國皆降, 惟龜茲不下. 九年, 龜茲窘急, 重賂獪胡求救. : 태원 7년, 부진(苻秦)의 장(將) 여광(呂光)이 서역을 쳐서, 언기(焉耆)등 여러 나라가 모두 항복(降伏)하였으나, 유일하게 구자(龜玆)가 항복치 않았다. 9년에, 구자(龜玆)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몹시 급하게 되어, 많은 뇌물을 주고 회호(獪胡)에게 도움을 구했다. 獪胡王引溫宿尉頭諸國兵赴救, 光大破之於城西. 王侯降者三十餘國, 光入龜茲城. : 회호왕(獪胡王)은 온숙(溫宿), 위두(尉頭)등의 여러 나라 병사들과 다다라 구원했으나, 여광(呂光)이 성(城)의 서(西)쪽을 크게 깨뜨렸다. 왕후(王侯) 30여 나라가 항복하고, 여광(呂光)이 구자성(龜玆城)에 들어왔다. 城如長安市邑,宮室甚盛. 光撫寧西域, 前世所不能服者, 悉來歸附, 改立故王帛純之弟震為龜茲王而還. 中略. : 구자성(龜茲城)은 장안(長安)의 시읍(市邑)과 똑같고, 궁실(宮室)도 대단히 성했다(컸다). 여광(呂光)은 서역(西域)을 안무(按撫)하니, 전에 항복하지 않았던 자들도, 모두 와 귀부(歸附)하니, 옛 왕(王) 백순(帛純)의 동생인 ‘진(震)’을 구자왕(龜茲王)으로 다시 세웠다. 중략(中略).》하였는데, 공교롭게도…
➥➥ “장안성(長安城)과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여러 가지로 공통점(共通點)이 많고, 시가(市街)와 성(城)도 장안성(長安城)과 똑같았다는 것이다
〈방(方) 6리(里)에 펼쳐져 있었다. 사찰(寺刹)이 많았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등의 몇 겹으로 성(城)의 규모가 컸고(三重), 궁실(宮室) 또한 크고 성했으며, 시읍(市邑) 또한 같았다.〉라고 하였다.
➊ 「구자국성(龜茲國城)은, 삼중(三重)으로 방(方) 5∼6리(里)에 걸쳐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➋ 「조선(朝鮮)의 장안성(長安城)인 평양성(平壤城) 즉(卽) 유경(柳京)의 도성(都城)이 삼중(三重)으 겹으로 만들어졌으며, 6리(里)였다.」라고 하였다.
➌ 진서(晉書)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은 낙양(洛陽)으로부터 서(西)쪽으로 8,280리 떨어져 있고, 성곽(城郭)이 있고, 그 성(城)은 삼중(三重)이며, 그 가운데에는 불탑과 사당이 천(千) 개소가 있다. 왕궁(王宮)은 장엄(莊嚴)하고 화려(華麗)하였다.【晉書四夷 / 龜茲國 : 龜茲國西去洛陽八千二百八十里, 俗有城郭, 其城三重, 中有佛塔廟千所. 中略. 王宮壯麗,煥若神居.】》라고 하였다.
➍ 북사(北史)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은, 위리(尉犁) 서북(西北)에 있는데, 백산(白山) 남쪽 170리(里)에 있다. 대(代)로부터 10,280리 떨어져 있다. 중략(中略). 그 나라 왕이 살고 있는 성(城)은 방(方) 5, 6리(里)이다. 【北史 西域 / 龜茲國,在尉犁西,白山之南一百七十里,都延城,漢時舊國也。去代一萬二百八十里. 中略. 所居城方五六里】》라고 하였다.
➎ 수서(隋書)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의 서울(京)은 백산(白山)의 남(南) 170리에 있다. 도성(都城)은 방(方) 6 리(里)이다. 【隋書. 西域. 龜茲 : 龜茲國, 都白山之南百七十裡, 漢時舊國也. 其王姓白, 字蘇尼咥. 都城方六里.】》라고 하였다.
➏ 주서(周書)에서 이르기를 : 《평양성(平壤城)은, 동서 6리(里)였다》고 하였다. 【龜 茲 國 在 白 山 之 南 一 百 七 十 里 , 東 去 長 安 六 千 七 百 里 。所 治 城 方 五 六 里 。】
➠➠➠ “한대(漢代)의 장안성(長安城)”은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長安[編輯] 편을 보면 : 《城市佈局[編輯] 漢長安城位於今西安市區西北郊外, 面積約36平方公里》라고 하였으니, “6리(里)였다”는 뜻이다.
또 相關遺址[編輯]편을 보면 : 《“目前唐長安城相關的遺址主要為:大雁塔, 大慈恩寺, 小雁塔, 大明宮, 太極宮, 乾陵, 昭陵等十八座唐朝帝陵, 碑林, 法門寺, 青龍寺, 大秦寺塔, 興教寺塔, 灞橋遺址, 華清宮遺址, 仙遊寺法王塔, 水陸庵, 東渭橋遺址, 鳩摩羅什舍利塔, 香積寺善導塔, 八雲塔, 長安聖壽寺塔, 長安華嚴寺塔, 昭慧塔, 藥王山石刻, 玉華宮遺址, 隋泰陵, 耀縣文廟, 隋仁壽宮唐九成宮遺址, 慈善寺石窟, 楊珣碑, 大佛寺石窟, 昭仁寺大殿, 精進寺塔, 百良壽聖寺塔等”이 있다.》라고 한 것처럼,
㊀ 「구자국성(龜慈國城)에도, 천(天) 개소에 이르는 사찰(寺刹)과 탑(塔)이 있었다(有佛塔廟千所), 동서(東西)로, 삼중(三重)으로 성을 쌓았는데, 6리(里)다. [5, 6리(里)] 」라고 하였고,
㊁ 『고구려(高駒驪) ‘장안성(長安城)=평양성(平壤城)’도 사찰(寺刹)로 뒤덮여 있었다. 동서(東西)로, 삼중(三重)으로 성을 쌓았는데, 6리(里)다』라고 하였으며,
㊂ 『한대(漢代) 장안성(長安城)에는 일천(一千)개의 사찰(寺刹)•사원(寺院)이 있었다. 동서(東西)로, 삼중(三重)으로 성을 쌓았는데. 6리(里)다』라고 하였다.
㊃ 〈구자국성(龜玆國城)과 장안성(長安城)은, 성(城)뿐만 아니라, 시읍(市邑)도 똑같았다〉라고 하였다.
➡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은 : 성벽(城壁)을 3중【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의 겹성으로 쌓았다.
➥➥➥ 讀史方輿紀要. 西域 / 龜茲國城【原文繼續】 / 上元以後, 河西軍鎮, 多為吐蕃所陷. 惟北庭安西為唐守, 以沙陀回鶻為應援. : 상원(上元) 이후에, 하서군진(河西軍鎭)은, 토번(吐蕃)에게 함락된 곳이 많았다. 유일하게 북정(北庭)과 안서(安西)만이 당(唐)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는 사타(沙陀) 회골(回鶻)이 응원(應援) 했기 때문이다. 吐蕃急攻二部, 二部益衰. 貞元三年. 安西陷於吐蕃. 自是不復入於中國. : 토번(吐蕃)이 2부를 갑자기 공격하여, 2부가 점점 쇠약해졌는데, 정원(貞元) 3년에, 안서(安西)가 토번(吐蕃)에 함락되었고, 그 뒤로 중국(中國)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였다. 唐志:龜茲東接焉耆, 西連疏勒, 南鄰吐蕃, 北拒突厥, 為四鎮之一. : 당지(唐志)에 따르면 : 구자(龜茲) 동쪽으로 언기(焉耆)와 접(接)하고, 서(西)쪽으로는 소륵(疏勒)과 연이어져 있으며, 남(南)쪽은 토번(吐蕃)과 인접(隣接)해 있고, 북(北)쪽은 돌궐(突厥)에 막혔다. 東北到北庭府二千里, 西南到于闐亦二千里. 李泌謂安西,北庭, 控制西域五十七國及十姓突厥. : 동북(東北)으로 북정부(北庭府)에 2 천리에 이르고, 서남(西南)으로는 우전(于闐) 또한 2 천리에 이른다. 이필(李泌)이 안서(安西)와 북정(北庭)에서 서역(西域)의 57개 나라와 십성(十姓) 돌궐(突厥)을 제압하였다. 五代史:安西都護衛西域羈縻三十六國. 是也. : 오대사(五代史)에서 이르기를 : 안서도호위(安西都護衛)는 서역(西域)의 36개 나라를 기미(羈縻)하였다【종속(從屬)시켰다】라고 하였다.》-讀史方輿紀要. 龜慈國. 引用 / 끝-
○ 위의 예(例)에서 보듯이
➊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의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서경(西京)=서도(西都)=유경(柳京)=낙랑군(樂浪郡)”으로부터 :
➋ 서(西)쪽 5-6 천리(千里)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장안성(長安城)=유경(柳京)=서경(西京)=서도(西都)”는 어떤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어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했으며,
➌ 이곳에서 또다시 서(西)쪽으로 7-8 천리(千里) 떨어져 있는 구자국(龜玆國)의 구자국성(龜玆國城)이 “장안성(長安城)의 시가(市街) 및 도회지(都會地)와 그 성(城)이 똑같은 도성(都城)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다”라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疑問)에 대한 해설(解說)은 오직 “고구려(高駒驪)”라는 나라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곧 고구려(高駒驪)는, 그 이전(以前) 구려(駒驪)라는 이름으로 BC 1,100년(年) 이전(以前)에도 존재(存在)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한(漢)’이란 겨우 BC 206년(年)에 나라를 세웠다고 했기 때문에 결코 설명(說明)될 수 없다.
즉(卽), 고구려(高駒驪)가 본래(本來)의 터전으로부터 해가 뜨는 양곡(暘谷)의 땅으로 점진적(漸進的)으로 동천(東遷), 동진(東進)하는 과정(過程)에서 남겨 놓은 유물유적(遺物遺迹) 곧 흔적(痕迹)인 것이다.
➡➡➡ “한반도(韓半島) 평양성(平壤城)”에서 5∼6 천리(千里) 떨어져 있는 장안성(長安城)과 또 이곳 장안(長安)으로부터 7∼8 천리(千里) 떨어져 있는 구자국성(龜玆國城), 이러한 세 곳의 도성(都城)이 : 삼중(三重)으로 겹성(城)을 이루고, 성(城) 한 면(面)의 길이가 6리(里)이며, 성(城)안에 일천(一千) 여소의 사찰(寺刹), 사원(寺院) 등이 있으며, 시읍(市邑) 또한 똑 같도록 만들어질 수 있는 확률(確率)은 얼마나 될까?
이러한 확률(確率)은 “제로(0)에 가깝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상(想像)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고구려(高駒驪)의 동천(東遷) 과정(過程)에서 평양성(平壤城)도 함께 하였기 때문이고, 다시 정착(定着)한 땅에서 도성(都城)을 평양성(平壤城)이라고 하고, 동천(東遷) 이전(以前)의 것과 똑같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더불어 중요(重要)한 것은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이란 뜻이다.
‘동방(東方)’이 극동(極東)의 조그마한 “반도(半島)” 땅일 수 있을까? 「반도(半島) 땅이 동방(東方)이라면 서해(西海) 건너 대륙(大陸) 중원(中原) 땅은, 서융(西戎) 또는 서이(西夷), 색목인(色目人)들이 살았던 서방(西方) 땅인가? 그럼 열도(列島) 땅은 북방(北方)에 있는 것인가? 남방(南方)에 있는 것인가?」
이러한 기본적(基本的)인 질문(質問)에 대해 : 답변(答辯)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 그게 무슨 사가(史家)라고 할 수 있겠는가?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에게는 이들은 : 반역(叛逆) 무리이자 매국노(賣國奴) 무리일 뿐이다.
○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를 보면 :
➡ 陽原王 [或云陽崗上好王] 八 年【AD 552年】 : 《築 長 安 城 :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라고 하였고, 【東史綱目 : 高句麗 陽原王 8년 : 고구려가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 平原王 [或云平崗上好王] 二十八年【AD 586年】 : 《高 句 麗, 移 都 長 安 城. 都 平 壤 百 六 十 而 遷 : 》라고 하였다. 【東史綱目 : 平原王 28년 하(夏) 5월 : 高句麗가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평양(平壤)에 도읍을 옮긴 지 1백 60년 만에 옮겼다】
위의 예(例)에서 보듯이 “고구려(高駒驪)”는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는데 그 기간(期間)이 34년(年)이며, 34년(年)이 지난 뒤에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遷都)했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정확(正確)하고 확실(確實)한 증거(證據)는 없다. 수(隋)【AD 581~618)】는, 「겨우 “37”년(年) 존재(存在)했던 나라였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다.
특히 『주서(周書), 수서(隋書), 당서(唐書), 통전(通典) 등은 바로 장안성(長安城)을 도성(都城)으로 했다는 왕조(王朝)의 기록(記錄)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이는 곧 「“주(周), 수(隋)와 당(唐)의 도성(都城)은 장안성(長安城)이 아니었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비(鮮卑) 출신(出身) 주왕조(周王朝)의 “주서(周書)”, 탁발씨(拓拔氏) 왕조(王朝)였던 ‘북위(北魏)=후위(後魏)’의 “북사(北史)”, ‘돌궐(突厥)+선비(鮮卑)’의 혼혈(混血) 수당(隋唐) 왕조(王朝)의 “수서(隋書)”, “통전(通典) 및 당서(唐書)”등을 보면 :
➊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으로 동서 6리(里)이며, 성내(城內)에는 유일하게 창고(倉庫)에 기계(器械)들을 쌓아 비축(備蓄)해 놓고, 대비(對備)해 놓고 있는데, 평상시(平常時)에는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나 전쟁(戰爭)이 터지면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가 고수(固守)하였다고 하였는데, 또 다른 기록(記錄)에서는 이것이 사찰(寺刹)이나 사원(寺院)과 같았다〉고 하였다. 【城 內 唯 積 倉 儲 器 備 ,寇 賊 至 日 ,方 入 固 守 。 城 內 唯 積 倉 儲 器 械 ,寇 賊 至 ,方 入 同 守 。】
➋ “주서(周書)와 북사(北史)”의 당사자(當事者)들인 선비(鮮卑)들은 고구려(高駒驪)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맺고 왕실(王室) 간에 혼맥(婚脈)으로 이어졌으며, 이들의 역사서(歷史書)에서는 : 「발해(渤海)」는, 「흑해(黑海)와 지중해(地中海)」를 꼭 찍어 기록(記錄), 설명(說明)하고 있다.
결국(結局) 해동(海東)이란 : 『지중해(地中海), 흑해(黑海)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이고, 동방(東方)이란 똑같은 곳을 다르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 ‘왕실(王室) 간의 혼맥(婚脈)’은 ‘연연(蠕蠕)=유연(柔然)’과도 이어졌고, 이러한 기록(記錄)은,
『駮 馬 ,其 地 近 北 海 ,去 京 萬 四 千 里 ➡ 鬼 國 在 駮 馬 國 西 ,六 十 日 行 。➡ 鹽 漠 念』으로 이어지는 나라들을 통전(通典)에 기록(記錄)해 놓은 것인데, 일단 “경(京)”이란 “당(唐) 서울”을 말하는 것인데, 이곳으로부터 14,000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어딜까? 아마도 구라파(歐羅巴) 북방지대(北方地帶)쯤 되지 않을까!
이러한 옛 나라들 기록(記錄) 속에 “고구려(高駒驪)와 다른 나라들의 왕실(王室) 간에 혼맥(婚脈)으로 이어져 주변(周邊)의 국가(國家), 부족(部族)들에게 큰 위협(威脅)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高駒驪)=고구려(高句麗)”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었다”라는 말은, 가소로운 이야기일 뿐으로, 열등의식(劣等意識)에 사로잡힌 “왜(倭)와 서구(西歐)”의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이 만들어낸 “조작(造作)된 산물(産物)”일 뿐이다.
여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한 “미군정(美軍政) 당국(當局)”과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政權)”과 “정권(政權)에 기생(寄生)한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이 모두 함께 만들어낸 결과(結果)다.
여기에 삶의 피곤(疲困)에 찌든 백성(百姓)들, 관(官)에 항거(抗拒)할 수 없었던 무지몽매(無知蒙昧)했던 백성(百姓)들, 양반(兩班)과 사대부가(士大夫家)에 착취(搾取)당하고, 그 밑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왔던 수많은 노예(奴隸), 노비(奴婢), 하인(下人), 천민(賤民) 등은 누구도 민족(民族)이니 국가(國家)니 하는 것에 보탤 힘이 있었겠는가?
하루 벌어 하루 먹기조차 힘든 시절(時節), 겨우 풀칠이나 하는 시절(時節)이었으니 누가 감히 나서서… …헛소리(?)를 지껄일 수가 있었겠는가? 50년대에도 이 정도였다면 그 이전(以前) 백성(百姓)들의 삶은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疲弊)해지고, 피곤(疲困)해지고, 희망(希望)조차 가질 수 없는 최악(最惡)의 시절(時節)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틈’속에서 소위 먹물깨나 먹었다는 자(者)들, 글공부나 좀 했다는 양반(兩班)이나 사대부(士大夫)들이, 이런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백성(百姓)들을 ‘지’들 맘 컷 이용(利用)해 먹은 것이다.
이건 지금도 그 양상(樣相)이 똑같다. 「뻔히 아닌 것이 보이고 있는데도, 될 수 있다고 표(票)를 구걸(求乞)하며, 헛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바로 이런 놈들이 국민(國民)들을 개돼지로 보며, ‘짐승’ 취급(取扱)하는 것이다.
➡➡➡ 이제는 국민(國民)들도 분노(忿怒)할 줄 알아야 하고, 그 분노(憤怒)를 표출(表出)할 줄도 알아야 한다. 국민(國民)의 권리(權利),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權利)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國民)을 “개나 소나 돼지”로 취급(取扱)하며 헛소리하며, 립서비스【입에 발린 말】만 하는 “권력자(權力者)”들에게 맞서서 당당(堂堂)하게 쟁취(爭取)해야 한다.』
지구(地球) 반대(反對)편의 “우크라이나”를 보면 : 국민(國民)들 스스로 앞장서서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위해 주어진 권리(權利)를 적극적(積極的)으로 주장(主張)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최악(最惡)의 사태(事態)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生) 초보(初步), 아마추어, 능력(能力)이 전혀 검증(檢證)되지 않은 지도자(指導者)를 선택(選擇)한 것이 바로 최악(最惡)의 사태(事態)를 만든 것이다. 오늘의 우리도 이와 똑같은 사태(事態)를 겪고 있다. 오직 실전(實戰)만 없을 뿐이다.
➡➡➡ 이제는 국민(國民)들도 분노(忿怒)할 줄 알아야 하고, 그 분노(憤怒)를 표출(表出)할 줄도 알아야 한다. 국민(國民)의 권리(權利),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權利)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國民)을 “개나 소나 돼지”로 취급(取扱)하며 헛소리하며, 립서비스【입에 발린 말】만 하는 “권력자(權力者)”들에게 맞서서 당당(堂堂)하게 쟁취(爭取)해야 한다.』
2024년 02월 09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다음 편에서는
[조선의 임금(君主)이 밤에 숙직(宿直)을 하고 있던 여러 관리들에게 "주제를 주고 시(詩)"를 짓도록 한 것인데, 특히 "AD 1792년 시대의 '한양=한성=한성부'의 지형지리, 물산, 풍경등을 노래한 성시전도(城市全圖)"속의 내용을 한 번 검토해 보기로 합니다.
* 전회에 한 번 살펴 본 것이지만 "한성과 평양과 장안"이 다루어 지기에 "보충하고, 보완하여 과연 평양성과 장안성과 한성과 한양은 전혀 다른 땅에 있었다는 것인지, 또는 같은 곳을 다르게 이름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고록 합니다"
* 물론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합리적인 의심과 의문에서 새로운 관점의, 다른 각도에서의, 발상전환이 시도될 수 있다고 봅니다.
* 설 연휴를 맞아 행복한 설날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