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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4~249) 중앙SUNDA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244>중졸 만화가 예첸위(葉淺予), 중국화 최고 교육기관 이끌다 |제245호| 2011년 11월 20
▲문혁이 끝난 후 한자리에 모인 중앙미술학원 중국화과 교수들. 왼쪽 다섯째(사진 중앙)가 예쳰위. 오른쪽 지팡이 끼고 안경 쓴 사람이 리커란(李可染). [김명호 제공]
1947년, 국립 베이핑예전(北平藝術專科學校) 교장 쉬페이훙(徐飛鴻)은 “인물·화조·삽화·스케치 등 모두가 독특한 풍격(風格)으로 일가를 이루었다”며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예쳰위(葉淺予)를 교수로 초빙했다. 2년이 지나도록 별 탈이 없었다. 1949년 2월 3일, 중국인민해방군의 베이핑 입성식이 열렸다. 베이핑예전은 학생·교수 할 것 없이 거리에 나가 해방군을 환영했다. 음악과 미술을 동원한 예전 교수와 학생들의 활동은 해방군 베이핑시 군관회 주임 예젠잉(葉劍英)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예젠잉은 ‘문화기구 접수소조’를 베이핑예전에 상주시켰다. 접수소조는 화베이(華北)대학교 미술대학과 베이핑예전을 합병, 국립미술학원 설립안을 작성했다. 같은 해 11월, 마오쩌둥은 쉬페이훙에게 ‘國立美術學院’이라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회신을 요구했다. 며칠 후 ‘中央美術學院’이 적합하다는 쉬페이훙의 답신을 받은 마오쩌둥은 쉬페이훙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듬해 5월 1일 왕푸징(王府井) 거리 초입 골목에 있는 중앙미술학원에서 개교 기념식이 열렸다. 중국 최고를 자랑하게 되는 미술교육기관의 탄생이었다. 4개월 전 초대 교장에 임명된 쉬페이훙이 행사를 주관했다.
설립 초기 중앙미술학원은 국화(國畵)와 유화(油畵)과를 통합시켜 회화(繪畵)과를 만드는 바람에 중국화(中國畵)과가 없었다. 정부의 지시였다. 쉬페이훙은 예쳰위와 함께 중국화과를 만들기 위해 중공 선전부와 국무원 산하에 있던 문화부 사람들을 3년간 설득했다. 1953년 9월, 쉬페이훙은 숙원이었던 중국화과 설립을 몇 개월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중국화과가 신설되자 이번에는 응시자가 별로 없었다. 교수들도 오려고 하지 않았다. 예쳰위가 학과를 맡는 수밖에 없었다. 예쳰위는 스케치(速寫)와 임모(臨摹)를 가장 중요시했다. ‘전통·생활·창조’가 삼위일체를 이루고 ‘임모·사생·창작’이 결합해야 새로운 중국화가 출현할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한동안 예쳰위는 원색적인 비난을 많이 들었다. “송대의 문인화가들이 스케치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치바이스(齊白石)를 봐라, 스케치가 뭔지 몰라도 그림만 잘 그리더라. 만화가 출신이라 어쩔 수 없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쳰위는 만화가 출신이었다. 예쳰위는 신해혁명 4년 전인 1907년, 저장(浙江)성 퉁루(桐廬)에서 태어났다. 퉁루는 작은 현(縣)이었지만 푸춘(富春)강과 베이(北)산 사이에 위치한, 원(元)나라 역사상 가장 걸출한 화가였던 창서우(常熟) 사람 황공망(黃公望)이 82세 때 그린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의 무대였다. 현대 중국화의 비조 중 한 사람인 예쳰위의 고향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예쳰위는 중학 시절 수업에 열중하는 교사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다 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생들은 그림만 빼앗고 야단은 치지 않았다. 꾸중은커녕 “내 모습이 정말로 이랬니” 하면서 볼이 빨개지는 여선생들도 있었다.
▲예쳰위(葉淺予)의 그림 모음
밖에만 나가면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로수에 머리 박고 훌쩍대는 친구 누나를 비롯해 깡패, 유랑극단, 부인에게 멱살 잡혀 끌려가는 오입쟁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노 젖는 뱃사공, 애들 몇 명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얘기꾼 등 온갖 군상들을 스케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계속) <245>대화가 예첸위(葉淺予)의 네 여인, 그중 셋은 예술계 전설이었다. |제246호| 2011년 11월 27일
▲예첸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만상을 찌푸린 적이 없고 말과 행동에 유머가 풍부했다. 권위적인 사람일수록 얼굴에 고난의 흔적이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사진은 그가 82세 때의 모습이다. [김명호 제공]
1987년 봄, 팔순을 맞이한 예첸위(葉淺予)는 화필(畵筆)을 놓고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다. 초고가 완성되자 손녀에게 보여줬다. 대화가인 할아버지의 지난날을 한 차례 훑어보고 난 손녀는 “잘한 일은 하나도 없고 잘못한 얘기들만 늘어놓은 반성문 같다”며 회고록을 내지 말자고 했다. 특히 할머니들에 관한 부분을 가리키며 “여자들과 차고 채이기만 한 게 뭐 자랑이라고, 할아버지 책 나오면 친구들 보기 창피해서 밖에도 못 나간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예첸위(葉淺予) 1963년 作
예첸위는 손녀를 달래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갖고 있는 궁금증을 스스로 파헤치는 것이 회고록이다. 자랑거리 늘어놓는 건 회고록이 아니다. 네 아버지의 친엄마인 뤄차이윈(羅彩雲)을 비롯해 량바이보(梁白波), 다이아이롄(戴愛蓮), 왕런메이(王人美) 모두가 나의 일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며 손녀를 설득했다.
친할머니 뤄차이윈을 제외한 나머지 세 여인 모두 중국인들에겐 전설적인 대예술가들이었다. 다이아이롄은 한국인 최승희와 함께 중국 현대무용의 초석을 놓은 중국 무용계의 신화였고, 왕런메이는 1930년대 상하이의 영화계를 주름 잡던 여배우였다. 영화 한 편 본적 없는 시골 아줌마들도 잉디(影帝)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한국 출신 영화 황제 김염(金焰)의 첫 번째 부인이기도 했다.
◀1982년 12월 동방가무단 20주년 기념 다과회에 참석한 다이아이롄(왼쪽).
예첸위는 한참 듣던 손녀가 “네 분 할머니들에 관한 얘기도 그냥 놔둬라. 회고록을 마치고 나면 할머니들 개개인에 관한 평전을 꼭 쓰라”고 하자 “알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뤄차이윈은 부모가 맺어준 예첸위의 첫 부인이었다. 애석하게도 문맹이었다. 문자와 인연이 없다 보니 정신세계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마작 판에 앉으면 자리를 뜰 줄 몰랐고 남자는 기를 쓰고 돈만 벌어오면 된다는 식이었다. 부부 간에 가장 많이 나눈 대화가 “돈 다 썼다. 돈 더 가져와라”와 “힘들게 번 돈이니 아껴 써라”였다.
예첸위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뤄차이윈을 고향으로 보내고 항일 선전대에 투신하며 뤼차이윈을 버렸다. 이혼은 하지 않았다. 뤼차이윈이 “나는 당당한 조강지처”라며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상하이 사람들은 여자가 평생 먹고살만한 돈을 지불해야 이혼이 가능했다. 그냥 모른 체할 경우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뤄차이윈은 문혁 시절 반동화가 예첸위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량바이보는 훌륭한 여류화가였다. 재주가 넘치고 예첸위와는 모든 게 잘 맞았지만 죽으면 죽었지 정부 소리 듣기는 싫다며 예첸위를 버렸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무용가 다이아이롄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고향 광둥(廣東)이 전화에 휩싸이자 영국 식민지 트리니다드토바고로 이민을 떠난 화교의 후예였다. 1930년 14세 때 런던으로 건너가 마리 비그만(Mary Wigman), 루돌프 라반(Rudolf Laban), 안톤 돌린(Anton Dolin) 등을 사사하며 정통파 발레리나의 길을 걷던 다이아이롄은 조국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중일전쟁 발발 소식을 접하자 무용도 무기가 될 수 있다며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 도중 홍콩에서 항일의연금 모금활동을 벌이던 쑹칭링(宋慶齡)을 만났다. 쑹칭링이 이끌던 보위중국동맹(中國保衛同盟)에는 항일 만화를 그리던 중국 화가들이 몰려 있었다. 예첸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계속) <246>예첸위(葉淺予), 이혼 통보 받자 “아름다움 극에 달하니 추해지네” |제247호| 2011년 12월 4일
▲예첸위는 무슨 일이건 혼자 하는 습관이 있었다. 평생 제자는 많아도 조수는 없었다. 1980년대 초 간위(甘雨) 골목의 사저에서. [김명호 제공]
1940년 봄 항일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 중이던 다이아이롄(戴愛蓮)은 중간기착지 홍콩에서 쑹칭링(宋慶齡)의 초청을 받았다. 쑹은 다이를 홍콩에 와있던 중국 예술인들에게 일일이 소개했다. 해외에서만 활동하던 다이는 화가 딩충(丁聰), 예첸위(葉淺予), 황먀오쯔(黃苗子) 등과 어울리며 중국 문화계의 주류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다이아이롄은 큰 물에서 놀던 예술가다웠다. 예첸위를 한눈에 알아봤다. 일주일 만에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예쳰위(葉淺予)의 스케치
2009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난 딩충의 구술에 의하면 항일 의연금 모금을 위해 주룽(九龍) 반도의 한 호텔에서 열린 다이아이롄의 첫 번째 공연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인쇄비를 아끼느라 포스터를 화가 한 사람이 50장씩 직접 그렸다. 관람객들은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국부 쑨원(孫文)의 미망인 쑹칭링과 중국혁명의 원훈(元勳) 랴오중카이(廖仲愷)의 무남독녀인 것을 알자 몸 둘 바를 모르며 안절부절못했다. 예첸위의 활약이 특히 돋보였다. 무대감독과 복장관리, 조명을 혼자서 다해냈다. 공연기간 내내 예첸위는 십장이었고 우리는 노동자였다.”
공연을 마친 다이아이롄은 예첸위에게 대담한 제의를 했다. “영국에 있을 때부터 전쟁으로 고통 받는 조국 동포와 호흡과 운명을 함께하는 게 소원이었다. 나랑 항일성지 옌안(延安)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자. 저우언라이에게 내 말을 전해라.”
하지만 예첸위의 생각은 달랐다. 연안으로 가기 전에 결혼부터 하자고 하자 다이는 씩 웃으며 눈을 한번 흘겼다. 며칠 후 쑹칭링은 저녁이나 하자며 친지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아이롄과 예첸위의 결혼을 선포하고 저우언라이가 보낸 편지를 다이에게 건넸다. “옌안에 오지 말고 후방에서 항일 선전활동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참석자들은 “예첸위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다이아이롄은 중국어를 못한다. 도대체 예첸위가 무슨 재주를 부려 세계적인 무용가를 홀렸는지 모르겠다”며 온갖 농담을 다했다. 다이아이롄의 통역으로 자처하던 에드거 스노(Edger Snow)가 “신부의 말에 의하면 예첸위의 영어 실력이 시골학교 중학생 수준은 된다”고 하자 다들 박장대소했다.
예첸위는 스케치북을 들고 충칭(重慶)·구이린(桂林)·홍콩·티베트·인도·미국을 오가며 다이아이롄의 공연 뒤치다꺼리를 했다. 가는 곳마다 중국인이 추는 외국 무용을 처음 접한다며 관객들의 찬사가 요란했지만 그 뒤에서 후일 “20세기 중국 미술의 정수”라고 해도 손색없을 수천 점의 무용하는 여인과 소수민족의 열기가 화폭에 담기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1949년 7월 중국인민해방군이 베이핑(北平)에 입성한 후 처음 열린 ‘전국문학예술계 대표대회’에서 예첸위는 미술가협회 부주석에 선출됐고, 다이아이롄은 신설된 베이징 무용학원 원장에 취임했다. 그해 겨울, 티베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예첸위에게 다이아이롄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그날 밤 예첸위는 “추한 것이 극에 달하면 아름다움이 되고,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추해진다”며 춤추는 여인 옆에서 미친 듯이 북을 두드리는 고수(鼓手)의 모습을 그려 다이에게 선물했다. 홍콩에서 처음 만나 2주 후에 결혼한 지 10년 만이었다. (계속) <247>이틀 걸러 이혼 들먹이며 30년 함께 산 예첸위(葉淺予)·왕런메이(王人美) |제248호| 2011년 12월 11일
▲1988년 봄, 50년 친구인 딩충(오른쪽), 황먀오즈(왼쪽)와 함께 고향인 저장(浙江)성 퉁루(桐廬)를 찾은 예첸위(가운데). [김명호 제공]
1950년 가을부터 6개월간 예첸위(葉淺予여)가 티베트에 가있는 사이 다이아이롄(戴愛蓮)은 신중국 최초의 무용극을 연출하며 주인공으로 발탁한 청년 무용가에게 넋이 빠졌다. 10여 년 후 다이의 패물과 돈을 들고 홍콩으로 도망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춤꾼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예첸위는 6년이 지나서야 다이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명예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왕년의 대스타 왕런메이(王人美)와 살림을 차렸다. 왕런메이는 영화 황제 김염(金焰)과 이혼한 후 10년간 혼자 살고 있었다. 예첸위 48세, 왕런메이 41세 때였다.
왕런메이의 부친은 제자였던 마오쩌둥이 “내가 본 최고의 수학선생 이었다”고 했을 정도로 유명한 수학교수였다.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겠다며 여자사범학교에 합격한 왕런메이는 부친이 벌에 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인생이 바뀌었다.
◀1956년 결혼 직후의 예첸위와 왕런메이.
왕런메이는 오빠들이 있는 상하이에 나왔다가 중화가무단(中華歌舞團)에 가입해 싱가포르·방콕·자카르타 등지로 공연을 다니며 안목을 넓혔다. 1949년 10월, 신중국 수립과 동시에 국가로 제정된 ‘의용군 행진곡’을 작곡한 니에얼(聂耳)과는 친남매나 다름없이 지냈고 의용군 행진곡을 제일 처음 부른 사람도 왕런메이였다.
왕런메이와 예첸위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가무단 시절 황먀오즈(黃苗子)를 따라 딩충(丁聰)의 집에 놀러 갔다가 처음 알았지만 남들 몰래 따로 만난 적이 없다 보니 서로의 성격을 살필 기회가 없었다.
30여 년에 걸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조용한 날이 거의 없었다. 예첸위의 딸에 의하면 “왕런메이는 애정은 한순간이지만 우정은 영원하다며 김염을 잊지 못했고,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다이아이롄의 모습이 오락가락했다”고 하지만 예첸위의 경제적 무관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예첸위와 왕런메이의 결혼소식이 알려지자 궈뭐뤄(郭沫若)·치바이스(齊白石)·저우언라이(周恩來) 등 당대의 명인들이 선물을 보내왔다. 예첸위도 친구 10여 명을 당시 최고의 요릿집 ‘사천반점(四川飯店)’으로 초대했다. 왕런메이는 이날의 일을 구술로 남겼다. “예첸위는 밥값으로 200원 가까이를 지불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오늘 날짜로 파산이라고 했다. 200원이 이 사람의 전 재산이었다. 그간 그림을 판 돈이 한 푼도 없느냐고 물었더니 남들을 주기는 했어도 판 적은 없다고 했다. 이날부터 내 돈으로 살림을 꾸려 나갔다. 집 안은 어찌나 더러운지 3일에 한 번씩은 이혼 얘기가 나왔다.”
문혁시절 예첸위는 10년간 감옥과 수용소를 오갔다. 사인방(四人幇)이 몰락한 후 그간 받지 못했던 봉급 3만원이 한꺼번에 나오자 중앙미술학원에 학생들 실습비로 기증해 버렸다. 집 수리로 돈이 필요할 때였다. 왕런메이는 친지에게 1000원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1986년 가을, 왕런메이가 “훌륭한 화가지만 형편없는 남편이다. 공원에 가서도 몇 시간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 스케치만 하며 내게는 말 한마디 거는 법이 없었다. 6시간 동안 그런 적도 있었다. 30년 동안 그랬다”며 따로 살 것을 요구했다.
그래도 예첸위는 매주 한 번씩 베이징영화(北影)초대소로 왕런메이를 찾아갔고 왕런메이도 가끔은 예첸위가 있는 중국예술연구원을 찾아왔다. (계속) <248>폭우 속 “제국주의 타도” 외치던 여학생 보고 충격 |제249호| 2011년 12월 18일
▲1994년 고향인 저장(浙江)성 퉁루(桐廬)의 푸춘화위안(富春畵苑)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87세의 예첸위. [김명호 제공]
1925년 5월 상하이, 일본 사람이 운영하던 방직공장에서 직장 폐쇄에 항의하던 중국 노동자 한 명이 일본인 작업반장에게 맞아 죽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시민들은 난징루(南京路)에 있는 공동조계(共同租界) 순포방(巡捕房)으로 몰려갔다. 조계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장악하고 있던 외국인들이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한 순포방에는 중국인 건달과 폭력배 출신이 많았다. 거의가 비밀결사 청방(靑幇)이나 홍방(紅幇) 소속이었다. 5월 30일,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후일 중국 현대사에서 “5·30참안(五三十慘案)”이라 불릴 대형 사건이었다. 전 도시가 파업에 들어갔다.
중국인을 상징하는 남색(藍色)의 예쁜 문양을 넣은 삼각표 타월과 털목도리, 손수건으로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을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한 삼우실업사(三友實業社) 직매장도 난징루에 있었다.
모든 상가가 철시하는 바람에 한가해진 18세의 매장 카운터 예첸위(葉淺予)는 비슷한 또래 직원 두세 명과 3층 창가에 앉아 적막에 싸인 거리를 내려다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텅 빈 도로 양쪽에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곤봉을 든 인도인과 코가 유난히 큰 프랑스 기마경찰들이 간간이 오갈 뿐 평소 사람과 자동차 행렬이 그치지 않던 난징루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던 예첸위는 처량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날따라 폭우가 쏟아졌다. 더욱 처량했다. 갑자기 거리 서쪽에서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이 나타났다. 온몸이 비에 젖은 여학생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주먹을 불끈 쥔 채 구호를 외쳐댔다. “제국주의(帝國主義) 타도하자! 북양군벌(北洋軍閥) 타도하자!” 벽안의 기마경찰들은 당당한 기세에 눌렸는지, 아니면 빗물을 뒤집어 쓴 동양인의 여체를 감상하느라 넋이 빠졌는지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 여학생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이 대담한 여학생은 경찰들의 도열을 받으며 동쪽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예첸위는 이날의 광경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날 밤 꿈속에서 그 여학생을 만났다. 아름다운 여체에 반해 열심히 스케치를 했지만 백지에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잠자코 서 있던 여학생은 빈 스케치북을 낚아채 보더니 흥, 소리와 함께 집어 던졌다. 다시 구호를 외치며 안개가 자욱한 곳을 향해 천천히 사라졌다. 그림을 마칠 때까지 붙잡아 두기 위해 비에 젖은 여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구호를 외쳤지만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를 써도 마찬가지였다. 여학생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무서워서 뻘떡 깨어보니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그 여학생은 먹을 것과 스케치북만 있으면 아무 생각도 없던 나에게 애국과 민족이 뭔지를 일깨워 준 스승이었다”고 훗날 회상했다.
▲예쳰위(葉淺予) 作 '延邊長鼓' 1960년
북방의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 국공합작이 성사되고 국민혁명군을 주축으로 북벌(北伐)전쟁이 시작되자 예첸위는 현실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27년 북벌군이 상하이에 진입했을 때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가있던 예첸위는 항저우(杭州)에서 회색 군복을 입은 북벌군과 처음 조우했다. “위풍이 당당했다. 국민혁명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가 손을 한번 휘저으면 군벌들은 혼비백산,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일기에 적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예첸위는 북벌군 휘하에 있던 상하이 경비 총사령부를 찾아갔다. 2년 전 꿈 속에서 본 여학생이 그 안에 있을 것 같았다. 예첸위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10년간, 지금도 중국인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만화 ‘왕선생(王先生)’ 시리즈와 잡지에 삽화를 그리며 입에 풀칠을 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만화 선전병으로 차출된 예첸위는 일본군의 공중폭격에 시달리는 전시수도 충칭(重慶)의 모습을 담은 ‘전시중경(戰時重慶)’ 100폭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아무도 만화가의 작품으로 보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 예첸위는 홍콩에 있었다. 갓 결혼한 무용가 다이아이롄(戴愛蓮)과 함께 일본군 치하의 홍콩 탈출 체험을 화폭에 재현한 ‘향항탈출(香港脫出)’ 20점은 장다첸(張大千)과 쉬페이훙(徐飛鴻) 같은 당대의 대가들을 감탄시키고도 남았다. 생활이 곧 예술이었던 예첸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계속) <249>출옥한 예첸위, 세로 1m 가로 33m 화폭에 푸춘강 담다 |제250호| 2011년 12월 25일
▲문혁이 끝난 후 감옥에서 나온 예첸위는 1년에 두 번씩 고향 퉁루(桐廬)의 푸춘강을 찾았다. 1993년 가을, 한때 부인이었던 무용가 따이아이롄(오른쪽)과 딸 밍밍을 푸춘강으로 초청한 예첸위.[김명호 제공]
몽골족이 북방에 원(元) 제국을 건국하기 2년 전인 1269년, 아직은 남송(南宋) 치하였던 장수(江蘇)성 창수(常熟)의 육(陸)씨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 부모는 양육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대로 내려오는 빈농이었다. 저장(浙江)성 용자(永嘉)에 황락(黃樂)이라는 노인이 양자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떠났다.
황공망자구의(黃公望子久矣), “황공이 아들을 바란 지 오래”라는 말이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던 황락은 “이 애는 생부보다 나를 더 닮았다”며 좋아했다. 부자의 연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황공망(黃公望), 자(字)를 자구(子久)라고 지어줬다. 책 읽고 붓글씨 쓰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었던 소년 황공망은 현시(懸試) 신동과(神童科)에 합격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북방을 지배하던 몽골족은 황공망이 10살 되던 해에 남송마저 멸망시키고 과거제도를 없애 버렸다. 문인 정권의 보호를 받으며 행세깨나 하던 양자강 이남의 문인들은 거지나 창녀와 비슷한 신세로 전락했다.
◀예첸위의 제자 저우스충(周思聰·오른쪽)은 중앙 미술학원이 배출한 신중국을 대표하는 여류화가였다. 1990년대 초 예첸위가 화랑의 농간에 말려들지 말라는 바람에 홍콩의 대형 전시회를 취소했다.
환로(宦路)가 막힌 청년 황공망은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의 관청에서 세금 징수와 전답 측량 일을 주로 했다. 말단이었지만 여기저기 다닐 기회는 많았다. 덕분에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바로 위 상관이 탐관(貪官)이었다. 원나라가 과거제도를 회복시킴과 동시에 응시자 부모에게 뇌물을 받아먹었다. 돈 심부름한 죄로 황공망도 4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나이 50이 다 돼서 출옥한 황공망은 낮에는 시장에 나가 무를 팔고 해가 지면 등잔 밑에서 그림을 그렸다.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그림은 어릴 때 배운 글씨와 별 차이가 없었다. 글씨가 그림이고 그림이 곧 글씨였다.
80세 때부터 고향 푸춘(富春) 강변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화선지에 옮기기 시작한 황공망은 7년 만에 중국 회화 사상 10대 명작의 하나인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완성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가로 636.9㎝, 세로 33㎝짜리 대작이었다.
황공망 사망 600년 후, 홍색 물결이 중국 천지를 뒤덮었다. 중앙미술학원 국화과 주임 예첸위(葉淺予)도 홍위병들에게 끌려갔다. 온갖 죄가 쏟아져 나왔다. “미국과 자산 계급을 숭상하는 투기꾼, 진보와는 일정한 거리를 뒀던 자유주의자, 수업시간마다 미국 문화를 찬양한 미 제국주의의 문화 침략 도구, 정규 미술학교 출신도 아니고 만화 덕분에 명성을 얻은 주제에 정치적인 입장을 한번도 밝힌 적이 없다. 중국 전통화의 기법을 교육했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 창작과는 거리가 멀다. 당의 정책을 옹호하면서도 정치운동과 사상 개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툭하면 사표를 던지며 가르치는 것은 공적인 일이고 창작은 사사로운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마치 가장이라도 된 것처럼 우리를 지도했다.”
예첸위는 7년간 농장과 감옥을 전전했다. 고향 산천이 그리울 때마다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는 황공망의 ‘부춘산거도’와 청대 시인 왕청참(王淸參)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이미 황공망이 세상에 없으니, 과연 누가 푸춘강을 그릴 수 있을까.” 1975년 출옥한 예첸위는 푸춘강을 찾았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4년에 걸쳐 황공망 이후 시인묵객들이 1000여 편의 시와 산문을 남긴 푸춘강변 33㎞의 자연과 생활상을 담은 세로 1m, 가로 33m에 달하는 거작 ‘부춘산거신도(富春山居新圖)’를 완성했다.
예첸위는 말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치바이스(齊白石), 쉬페이훙(徐悲鴻), 장다첸(張大千) 등 대가들의 작품 100여 점과 함께 ‘부춘산거신도’를 고향에 기증했다. 이유가 분명했다. “예술은 사회와 인민의 것이다. 나를 키워준 고향에 보답할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미술 작품을 놓고 불량한 상황이 발생할 날이 머지않았다. 경고가 필요하다.”
딸 예밍밍(葉明明)에 의하면 예첸위는 민간 공예예술이 없어질지 모른다며 학교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계산이 워낙 주먹구구식이라 거의 파산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원나라 화가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이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으로 절강성의 부춘강을 배경으로 그린 7미터가 넘는 장권의 대작이다. 전체적인 산세의 흐름과 여백이 마치 한곡의 완정한 교향악과도 같은 리듬감을 줄뿐더러 필법의 농담건습의 변화가 풍부하며 먹색이 담백하고 갈필준법이 고고(枯古)하여 황공망 평생의 수양을 읽어낼 수 있는 걸작이다. 황공망은 이 작품이 지정7년(1347)부터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지금 지정10년(1350)에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당시 이미 전진교의 수장이었던 황공망은 사제들과 함께 부춘산의 여러 도관(道馆)들을 오고가면서 이 작품을 시작했는데 발제를 쓰게 된 연유는 정저(郑樗)라고 하는 사제 때문이다. 정저 도호가 무용사(无用师)인데 수년간 황공망을 따라다니며 이 작품의 창작과정을 지켜보고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완성된 이후 꼭 자신한테 물려주도록 간청하여 당시 82세의 황공망이 미완성 된 상황에서 그림을 그린 시간, 장소, 계기와 무용사에게 그림을 준다는 발문을 썼는데, 그 이후로 아마 86세 사망 전까지 계속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잔류된 작품에 <무용사권(無用師卷)>이란 이름이 붙게 된 연유도 이 발제 때문이다. 원나라가 망하면서 작품이 민간에 유실되었다. 이후 명나라 화가 심주(沈周)가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발에서 황공망은 박식한 대학자이지만 뛰어난 그림실력에 가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면서 일찍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새로 표구 맡겼더니 표구사에서 사기 쳐서 팔아버렸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어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이 작품을 다시 재현했다고 한다. 사연인즉 황공망의 작품은 결국 당시의 절추관(節推官)인 번공(樊公)에게 팔렸는데 작품을 얻은 번공이 감격하여 심주에게 자랑했으니 심주는 놀랍고 가슴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황공망이 은연중에 사람을 선택하여 그림을 전한 것이라고 여겨 발문을 남겨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였으니 때는 1488년 쯤이다. 이후 작품은 담지이(談志伊)가 26년 정도 소장하고 있다가 명나라 만력 년 간에 동기창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동기창은 만년에 자식들의 범법행위로 지방 농민들의 공격을 받아 한때 파산을 하게 되면서 부득이 아끼는 이 작품을 당시의 부호 오달가(吳達可)한테 저당하고 후일 되찾으려고 했으나 끝내는 찾지 못하였다. 결국 이 작품은 오씨 집안에서 3대째 전해오게 되었는데 마지막 오홍유에 이르러 40년을 간직하게 된다. 오흥유가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은 광적이었다. 그는 식사할 때나 잘 때를 막론하고 늘 옆에 두고 있었으며 명나라가 망하고 전란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는 순간에도 이 작품만 품에 안고 산속으로 도망갔다. 청나라 순치7년(順治七年 1650) 그는 죽으면서까지 이 작품을 불태워 순장하도록 유언했는데 장례식에서 그림이 타는 순간 그의 조카 오정도(吳貞度)에 의해 구해냈지만 결국 두 동강이나 하나는 가로 51.4cm 높이31.8cm의 <잉산도(剩山圖)>와 다른 하나는 가로 636.9cm 높이 33cm의 <무용사권>로 나뉘어져 각각 민간에 유실된다. 이후 1746에 이르러 수장가 안의주(安儀周)가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어져 소장하고 있던<무용사권>을 팔았는데 결국 청나라 궁궐에서 소장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서화를 각별히 즐기는 건융 황제가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겨우 얻은 모사본 <부춘산거도>일명 <자명권(子明卷)>을 진짜로 오인하고 흥분한 나머지 십여 년 동안 그림의 여백 있는 곳곳에 55개의 제발을 쓰고 커다란 옥새를 찍어놓았다. 때문에 후일 <무용사권>을 얻었을 때는 진품이 아니라고 여겨 단지 대신 량시정(梁詩正)이 황제가 감식했다는 정도의 글만 남겨 다행스럽게 원작의 모습을 비교적 완전하게 간직할 수 있었다. 황공망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지방부호인 황락(黃樂)의 후계자로 입양되어 양호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2세에 국가급 신동과(神童科)에 합격될 정도로 영재였는데 이후 절강일대에서 세무에 관한 기층공무원으로 있다가 46세에 모함으로 투옥된다. 5~6년의 옥사를 겪고 나온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조맹부한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황공망은 투옥으로 인생 태도에 변화를 일으켰을 뿐더러 회화에 매진하여 산수화의 새로운 장을 펼쳤으며 송대의 동원, 거연 일파의 산수화풍을 화단의 주류 위치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황공망의 마지막 걸작 <부춘산거도>는 단순한 산수에 대한 표현을 넘어 그의 80평생의 철학과 문학소양을 담은 한편의 서사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011年 6月 2日, 그림이 나뉘어진 지 361년 만에 황공망의 만년 대작 <부춘산거도>의 후반<잉산도剩山圖>와 전반<무용사권無用師卷>이 대만국립고궁박물원에서 동시에 전시하게 되면서 또다시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글 이강@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07호 2013년 12월 27일 - 필자 이강은 1990년 연변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한 후 1993년까지 중국 심양노신미술대학 중국화과를 연수-수료하였다. 이후 2001년부터 2004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전공 미술학과를 졸업(석사)하고, 2007년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예술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예첸위(葉淺予)의 그림 몇 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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