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 정씨 족보를 엿보면서
우리나라는 옛적부터 상부상조는 미풍양속으로 전해 온다. 오래 전 마을의 지치 규약인 향약의 덕목에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이 빠지지 않는다. 해가 가고 오는 즈음이면 구세군 냄비를 비롯한 훈훈한 자선과 기부의 미담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한국인의 유전자엔 다른 민족 못지않은 나눔과 베풂의 따뜻한 DNA가 자자손손 대를 이어 내려온다.
나와 가까운 한 친구는 심야까지 식당업을 하는 억척스런 아내를 두었다. 친구의 아내는 식당일만으로도 힘겨울 텐데 매주 독거노인이나 복지시설을 찾아 빨래나 청소를 하는 봉사활동도 빠지지 않는다. 어느 날 안민고개를 올랐더니만 트럭 짐칸을 무대로 개조한 이색 연주회를 보았다. 색소폰을 잘 연주하는 어떤 사람이 일요일마다 오후에 산마루에 올라 산행객을 즐겁게 해주었다.
요즘 들어 ‘재능 기부’라는 말이 부쩍 흔하게 들린다. 재능 기부는 자신이 가진 장점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면서 사회를 더욱 밝고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힘이 된다. 전원적인 시골 생활은 이웃과 함께 하는 열린 사회였다. 도시화가 진행 되면서 아파트가 늘고 단독주택도 방범을 위한 구실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근 폐쇄 사회를 지향해 왔다. 이럴수록 이웃 간 정을 나누고 살아야 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행정실 책임자는 사무관이다. 이십대 후반이나 삼심대 초반 행정고시를 통해 입신출세하는 고위 공무원도 있다만 그리 쉽고 흔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 공직자들은 9급으로 출발해 나이 오십 줄에 이르러서야 능력을 인정받으면 사무관으로 승진한다. 앞서 소개한 행정실장도 후자의 경우다. 동료들보다 먼저 사무관이 되어 성심성의껏 교육활동을 지원해 오고 있다.
이분은 진양 정씨 후예로 고성 영오면 문암산 자락 아래 신흥마을에서 터 잡아 400여 년간 집성촌을 이루었단다. 이분 선대 입향조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복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할아버지를 두었다. 복병장은 요즘으로 치면 게릴라전을 펼친 장수다. 이분 선대 할아버지 전공은 세월이 얼마간 지난 영조 임금 때 ‘통훈대부군자감정’ 벼슬을 사후에 추증하는 교지를 받았다.
이분은 동료보다 먼저 사무관으로 승진 후 틈틈이 집안 내력을 밝혀줄 흩어진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국립 진주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과 문화원 등을 여러 차례 찾아 조상이 임진왜란 때 공훈을 남긴 자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한 세대 전 나온 진양 정씨 영계종중 파보를 발간하는 일에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이분은 자신의 집안을 위해 재능을 기부한 유형이다.
족보란 어느 씨족의 시조로부터 후손들에게 이르기까지 이어 온 가계의 기록이다. 사람이 대한 기록이며 한 가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필 수 있는 사료이다. 친족끼리 행고연장 관계를 비교할 수 있는 책자다. 집안에 따라 족보는 다양하게 편찬되고 있다만 대개 일률적인 틀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앞서 편찬 된 내용에다 한 세대 후에 태어난 자손 단자만 덧 붙여 엮어내기 일쑤다.
이분은 수년에 걸친 자료 수집과 한문으로 된 원전을 우리말로 풀어냈다. 혼자 힘으로 어려운 것은 원근에서 한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일일이 찾아가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고향 마을에 있는 재실 기문 국역은 물론 여러 곳에 흩어진 묘소의 사진을 찍어 자료로 남겼다. 종전까지 보아오던 족보와 전혀 다른 발상으로 편집 방향을 설정해 그 모든 일들을 혼자서 고군분투 노력했다.
한 세기 전 이분 선대가 고향 마을에 세운 ‘영계재(永溪齋)’가 정씨 집안 하드웨어라면 이번에 편찬한 족보는 소프트웨어에 해당하였다. 임금이 내린 교지를 비롯한 선산을 사진으로 남겨 어디에 소재하는지도 밝혀두었다. 종중 규약은 물론 재정 현황도 실어두었다. 시제를 지내는 홀기도 소개했다. 신세대 젊은이들도 족보만 펼치면 선대 조상을 찾아가는 내비게이션과 같은 책자였다. 13.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