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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쳔 조양각(朝陽閣) 영일정씨영천화수회카페 정정용. 옮겨옴 o조양각의 내력 *지정사항 :유형문화재 제144호 지정일 : 1981.4.25일 *장소 : 영천시 창구동 1-1
조양각(朝陽閣)의 원래 명칭은 명원루(明遠樓)였다, 고려 공민왕 17년 (1368)당시 부사 이용이 보현산에서 원류가 된 남천과 북천이 영천 중심지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을 이루는 남천의 절벽 위에 루각을 지은 건물이다,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 문장가 한퇴지(韓退之)의 시 가운데 원목증쌍면(遠目增雙冕) 훤히 트인 먼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 마저 밝아오는 듯 하다, 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가 서거정(徐居正)이 전하는 것 처럼 아늑한 영천 주남평야를 거슬러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채약산까지 이르는 원경은 속인의 감회라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밀양의 영남루,진주의 촉성루,와 함께 영남3루라 한다, 그리고 안동 영호루,울산 태화루,양산 쌍벽루,김천의 연자루,와 합처서 영남 칠 루라 칭한다, 1482년 군수 신윤종(申允宗)이 동서 별실을 고쳐서 동을 청량당,서를 쌍청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1592년 임란으로 영천복성 전투시에 모두 소실되고 이를 1637년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그 자리에 누갹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 이름했다,
다시 1742년 당대 명필가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중창하여 손수 서세루(瑞世樓)란 현판을 써 달았다,그러나 일재강정기 때 좌우 별실과 부속 건물은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정면5칸 측면3칸의 조양각 건물만은 포은선생,사가선생,점필재,율곡,노계,선생 등등 당대 명현들이 시액(詩額) 70여점을 간직한 채 날아갈듯 웅장하게 서 있다, 조양각은 공민왕17년.1368년 부사 이용.이 1482년 군수 신윤종,1637년 군수 한덕급,1742년 군수 윤봉오가 중창 했고, 그후에도 영조38.1763년,정조21.1797년,순조10.1810년,고종7.1870년,고종23.1886년,과 1921년에 각각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일재시대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놈들이 영천 심상소학교를 지을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모든 건축물을 철거하여 현재와 같이 위축되고 말았다,
조양각 누사를 없어진다면 그 썰렁함에 영천주민들은 안타까울 것이다,그리하여 생존 조치를 취하고 문화재로 지정하여 영원히 보존키로 하였다,
이 조양각 루 위에서 읆조린 명헌들의 詩를 살퍄보면 공민왕때 포은선생의 詩를 감상하고 그 시에 차운한 시.들이 다수적으로 실려있다,
조양각 루 판상각을 바라보면 이러한 詩들이 멋 떨어지게 걸려있다, 먼저 포은선생이 지어놓은 詩를 감상한다,
o포은 정몽주 淸溪石壁抱州回.청계석벽포주회, 맑은 시내 돌벼랑은 고을을 안고 도는데 更起新樓眼豁開.갱기신루안활개, 다시금 새 우각 이룩하니 눈이 활짝 트이네 南妙黃雲知歲熟.남묘황운지세숙. 남쪽이랑 누른 벼는 풍년이 왔음을 알리고 西山爽氣覺朝來.서산상기각조래, 서산의 시원한 바람은 아침이 되었음를 알리고 風流太守二千石.풍류태수이천석, 풍류를 즐기는 태수는 녹봉이 이천석인데 邂逅故人三百盃.해후고인삼백배, 옛 벗을 우연히 만났으니 술이 삼백잔이라 直欲夜深吹玉笛.직욕야심취옥적, 곧바로 밤이 깊어 옥피리 불면서 高攀明月共徘徊.고반명월공배회, 밝은달 높이 휘어잡아 함께 배회하고자 하네.
또 한수에.......... 오천인 정몽주
板上留名今的的.판상유명금적적, 현판위에 남긴이름 지금도 선명한데 樓前流水亦悠悠.루전류수역유유, 누각 앞 흐르는 물 또한 끊임없이 흘러가네 此生重面固難事.차생중면고난사. 내 생애에 다시 오기는 진실로 어려운 일 獨伴沙驅又再遊.독반사구우재유, 홀로 갈매기 벗을 삼아 또 다시 놀리라,
o부사 이용
新樓突兀鳥飛回.신루돌올조비회, 새 누각 우뚝 솟으니 새는 날아 돌아오고 懷抱登臨得好開.회포등림득호개, 포부를 품고 올라오니 가슴이 확 트이네 異顯故人難再會.이현고인난재회, 다른고을 옛 벗은 다시 만나기 어렵고 今年此日不重來.금년차일불중래, 금년의 이날은 거듭 오지 아니하네 溪虛水影撓歌扇.계허수영요가선, 시내가 맑으니 물 그림자에 노래하는 무희가 부채을 흔들리고 山近秋光落酒盃.산근추광락주배, 산이 가까우니 가을빛이 술잔에 떨어지네 五斗二年成底事.오두이년성저사, 고을살이 두해만에 무슨 일을 이루었나 更堪千里獨徘徊.갱감천리독배회, 다시 어찌 견디라,고향 떠나 천리 밖에서 홀로 배회하누나,
o이용(李容)생? ~ 사? 1368년~1370년까지 영주부사(현:영천)를 역임하며 명원루(조양각)을 창건했다,
포은선생이 언제 무슨사유로 영천고향에 왔다가 조양각에 올라가 주남뜰을 바라보며 당시의 감회를 詩로 표현하여 남기니 그 기념으로 영천태수가 시판을 만들어 판상위에 달아두니 조선시대 현인들이 선생의 시를 감상하고 그 시의 차운해 시를지어 보태었다,
포은선생이 생전에 어릴때 종증조부의 명에 따라 개성에 올라가서 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의 벼슬길 시작으로 수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선생이 그 동안에 고향 영천 임고 우항리에 다녀간것은 아버지의 상때와 어머님 상때 시묘살이을 영천집에 와서 했고, 그 다음은 문과 급제하여 월계관을 쓰고 내려오고, 울산 유배를 마치고 상경 할때 집에 다녀간 일이 있다,
포은선생이 월계관을 쓰고 명원루에 올라가서 시를 지었고,또 하나는 유배지에서 상경할때 시를짖고 올라가며 의성루에 비를 피해 올라가서 그기서도 한수 읅조리고 상경했지 않았겠나 싶다,,,,,,, 이것은 시의 내용으로 보아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추척일뿐 믿거나 말거나,,,,,,,,,,
최원우(崔元祐)(?~?)1347년 박광후와 더불어 서해도에 파견되어 민전을 조사하고 안렴존무사가 되었다,1365년 감찰.집의를 역임하고 1366년 정해 감무로 좌천되었다,
o최원우 登臨日日却忘回.등림일일각망회, 누각에 올라 노는 날마다 도리어 돌아가기를 있었노라 傍眼奇觀次第開.방안기관차제개, 눈 곁에 기이한 광경이 차례로 펼처지네 何處瑤岑雲外出.하처요잠운외출, 어느 곳에 옥 같은 산 봉오리 구름밖에 솟았느냐 有時飛雨野邊來.유시비우야변래, 때때로 흩날리는 비 들 가로 모여드네 晩凉倚柱風生帽.만량의주풍생모, 석양의 서늘함은 기둥에 기대니 바람은 모자에서 일고 夜靜吹簫月滿盃.야정취소월만배, 밤이 고요함에 퉁소를 부니 달은 술잔에 가득하네 流水亦知人愛着.유수역지인애착, 흐르는 물도 또한 사람의 애착하는 마음을 알아 樓前直到故徘徊.루전직도고배회, 누 앞에 직도하여 일부러 돌고 도네,
o함부림(咸傅霖1360~1410) 고려말 조선초 문신/호는 난계(蘭溪)1385년 문과 예문검열.1389년 우헌납.지춘주사.형조정랑을 역임,
上樓終日不知回.상루종일불지회, 누각에 올라 하루가 저물어도 돌아갈줄을 모르고 襟韻平生獨好開.금운평생독호개, 일평생 흉중에 생각했던 마음 홀로 좋게 틔이네 野草如烟隨地有.야초여연수지유. 들풀은 연기 같이 땅에 깔려 있는데 楊花似雪灣空來.양화사설만공래, 버들꽃은 눈 같아 하늘가득 날려오네 感今懷古愁聞笛.감금회고수문적. 지금 감동하고 옛날생각하며 근심스레 피리소리 듣고 對月臨風更引盃.대월림풍갱인배, 달을 보고 바람쐬며 다시 술잔을 잡네 南守功名差底疾.남수공명차저질, 남으로와 수령하는 공명에 파견령이 어찌나 빨라 行裝未便尙徘徊.행장미편상배회, 떠나려 해도 행장이 되지않아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네,
o유방선(柳方善1388~1443) 조선초기 학자 호는 태재 1405년 사마시.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 옥사에 연류되어 청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천으로 이배되어 아버지를 따라 영천으로 와서 영천 청통 애련리에서 후학. 이보흠.서거정.정종소,등등 많은 인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百尺高樓挾所聞.백척고루협소문, 백 척 높은 누각 듣던 대로 마음에 합당하여 登臨半日獨憑軒.등림반일독빙헌, 올라 놀던 반나절에 홀로 헌함에 기대었네 藪年漂泊長爲客.수년표박장위객, 수년동안 떠돌아 다녀 길이 나그네 되어 萬里歸來尙戀君.만리귀래상련군, 만리 길을 돌아와서 아직 임을 그리네 濃翠靄空芳草野.농취애공방초야, 짙푸른 아지랑이 낀 하늘에 방초 우거진 들이오 暗香浮地落花村.암향부지락화촌, 그윽한 향기 땅에 서리고 꽃이 지는 마을이여라 題詩欲記才華薄.제시욕기재화박, 시 지어 쓰고자 하나 빛나는 재주가 없으니 苦恨當時不學文.고한당시불학문, 젊을 당시 글 배우지 못한것을 몹시 한스럽네,
o정유길(鄭惟吉1515~1588) 조선중기 문신으로 호는 임덩,
明遠樓前屬晩晴.명원루전속만청, 명원루 앞에 날은 저물었는데 淸狼堂裏偃行停.청랑당리언행정, 청량당 안에서 행장을 풀고보니 天空塞雁寒無侶.천공새안한무려, 하늘은 비어 변방서 오는 기러기 추워서 짝이 없고 人靜風灘夜有聲.인정풍탄야유성, 인적은 고요한데 바람결에 여울은 밤들어 소리나네 老去浮萍從萬里.로거부평종만리, 늙어가는 인생 부평같이 만 리 길을 쫓으니 秋來明月轉三更.추래명월전삼경, 가을이라 밝은달은 삼경에 더욱 밝혀비추네 行藏欲向君平問.행장욕향군평문, 나아가고 물러남을 군평에 묻고자 하여 諏愴危按獨倚情.추창위란독의정, 비통하다 높은 난간에 홀로 기대고 있는 내 심정이여,
o율곡 이이 白雲黃鶴幾千秋.백운황학기천추, 백운과 황학이 깃든 지 몇 천년이 되었던고 爲愛靑山不下樓.위애청산불하루, 청산을 사랑하여 누각에서 내리지 못하네 吏退庭空無一事.이퇴정공무일사, 아전을 물리고서 뜰이비어 할 일이 없는데 夕陽鷗鷺下汀洲.석양구로하정주, 석양에 갈매기와 백로는 정주에 내려가네,
o사가.서거정(1420~1488) 白雲黃鶴幾時回.백운황학기시회, 백운과 황학이 몇 번 이나 돌아왔던고 二水三山次第開.이수삼산차제개. 이수와 삼산이 차례로 열렸네 崔灝風流人不見.최호풍류인불견. 최호같은 풍류객은 볼 수 없지먼 謫仙才調客重來.적선재조객중래, 적선 같은 재주있는 시객은 다시 왔다네 登臨千古復千古.등림천고부천고. 올라서 노는 사람 천고에 천고를 거듭하고 離別一盃又一盃.이별일배우일배. 이별하는 술잔이 한잔에 또 한잔이로다, 爲被主人苦晩袖.위피주인고만수. 주인이 굳이 내 소매 당기고 만류하기에 朱欄徙倚醉排徊.주란사의취배회. 붉은 난간에 서성이며 술 취해 배회하네,
o점필재 김종직(1341~1492) 元戎新向辰韓回.원융신향진한회. 원수(元帥)가 새로이 진한을 향하여 돌아오니 幕客愁懷到處開.막객수회도처개. 적졸(敵卒)의 울적한 회포 가는곳 마다 풀리네 臨皐飽聞山川好.임고포문산천호. 임고는 산천 경치가 좋다고 익히 들었더니 春色遙隨旌稗來.춘색요수정패래. 봄빛은 멀리 깃발따라 펄쳐지네 閒霑小雨薇舞渚.한점소우미무저. 조금 내리는 비 궁궁이 싹이 돋는 물가 한가로이 적시네 獨把高樓鸚鵡盃.독파고우앵무배, 높은 루에 앵무조개로 만든 술잔을 홀로 잡았네 更待使君吟畵戟.갱대사군음화극, 다시 사또님의 행차를 기다려서서 欄干終日共排徊.난간종일공배회, 난간에서 온종일 함께 배회하네,
o신영희(辛永禧 1454~1511) 호는 안정.으로 점필재의 문인.1483면 사마시에 올랐으나 화가 있을것을 충고한 김굉필의 예견을 받아들어 벼슬을 단념하고 직산에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염한 학자로 사화를 피했다,
益陽鳴洛下.익양명락하. 영천의 물이 울리며 흐르는 아래에 鬱鬱竹坊林.울울죽방림, 훌창한 것은 죽방의 숲이더라 猿鶴歸山僻.원학귀산벽, 잔나비와 학은 산 궁벽한 곳으로 돌아오고 魚鰕喜水深.어하희수심, 물고기와 새우는 물 깊은 곳을 좋아하고 新亭成主興.신정성주흥, 새 정자는 성주가 흥을 내는데 遺觸圃翁吟.유촉포옹음, 포은선생의 읊은 자취가 남아있네 西望歌遊鳳.서망가유봉, 서쪽을 바라보며 유봉산을 노애하니 顧翔若下臨.고상약하림, 봉황새 날아와 내려 앉는것 같네.
o이행(李荇 1478~1534) 호는 어택으로 1495년에 문과급제. 시화에 능한 사람이다. 蕭蕭白發照淸秋.소소백발조청추, 쓸쓸한 백발에 맑은 가을빛이 비취는데 徙倚元龍百尺樓.사의원룡백척루, 호기로운 원룡이 백 척 루가에 서성이네 最是永州堪賞處.최시영주감상처, 여기는 영천에서 가장 구경할만한 곳이라 野邊煙霧鎖滄州.야변연무쇄창주, 들녘의 연기와 안개가 창주에 가득 메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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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릴 때 늘 올라가서 놀던 조양각을 오랫만에 사진으로 보니 정말 반갑네요.
제가 조양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조양각위에서 반별로 쪼그리고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비를 피해 한쪽으로 모여서 수업을 듣고는 했는데...
3년전쯤 가서 보니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서 아쉬웠는데, 그래도 평인병원
표시가 건물에 그대로 있어 반가웠습니다.
덕분에 조양각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있어 감사합니다.
조양각 추억도 세월의 흐름이 잊혀져 가네요,
자양국민학교 졸업후 중학교 졸업때까지 행복한 기역보다 할머니, 아버지,할아버지 연이여 돌아가시니
슲은 추억만 기역됩니다,
추석날 아침 차사지내고 사라호 태풍에 조양각에 올라가보니 태풍때문에 붉은사과,초가지붕 돼지등
떠내려가다기 주남다리에걸쳐 순식간에 완산동 대부뚝이 터져 완산동,금노동,주남들 잠겨 지금도 생각해보니
만일 한밤중에 물난리 났으면 많은 인명 피해가 있섰을겁니다,
다행이 우리집은 흙담이 많이 무너진 사고들 생각하고 싶지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