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문체반정
1792l년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화정책이 시행되었다.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인데, 이때 주요 표적이 된 것은 청에서 유입되어 유행하고 있던 ((패관소품(稗官小品))이었다. 패관소품은 요즘의 단편소설이나 수필에 해당하는 것이다. 정조는 흥밋거리로 지어지고 읽히는 이런 작품들이 사회를 어지럽힌다고 보아 문체반정을 시도한 것이다. 당시 가장 인기 작가였던 박지원(朴趾源)원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문체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정조는 순정한 작품을 지어 바쳐 속죄하도록 명했고, 지목된 이들은 일종의 반성 작품을 제출했다.
이옥(李鈺)역시 패관소품을 지어 문체를 타락시켰다고 지목된 인물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순정문))을 지어 죄를 용서받았던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문체를 고치지 못해 난관을 겪었으며, 그 때문에 인생 자체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운명과 문학을 맞바꾸었던 이옥, 그에게도 도대체 문학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 49세의 이옥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깊은 수심에 빠졌다. 한 때는 준수한 외모로 기생이 던진 꽃들이 다발을 이루었던 전성시절도 있었건만, 오 십 줄에 접어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이옥은 겨울에 넋두리를 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듯 그도 세월은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옥(영조36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로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호는 경금자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자는 기상(其相)이다. 이옥 가문은 5대조 경록(慶祿)이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반으로 전신한 집안이다. 경유가 본처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지 못해 서자 기축(起築)이 대를 이었는데 기축 역시 무과에 급제했고, 기축의 아들로 이옥의 증조부가 되는 만림(萬林)도 무과에 합격했다.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는 하지만 무반으로 전신한데다가 결정적으로 기축이 서자라는 사실 때문에 조선사회에서 이옥의 가문은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그의 집안은 당색으로 북인의 일파인 소북계열이었다. 북인은 광해군대에 잠시 집권했다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면서 함께 몰락했다. 광해군을 적극 지지했던 대북은 완전히 몰락했지만 소북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엇다. 느른 일색인 조선후기에 소북이라는 출신 성분은 운신하는 데 적지 않은 장애 요인이었다
이옥의 부친이상호(李常五)는 1754년 집안 인물가운데 처음으로 진사시에 급제했다. 무반 가문에서 탈피해보려는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진사시에 합격한 것을 보면 그는 문인 기질이 강했던 인물인 듯하다. 것 번째 부인 남양 홍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고, 남양 홍씨와 사별한 후 재혼하여 다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옥은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났다.
집안에는 수백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옥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 책들을 접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스스로 배내니를 갖지 않았을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으니 대략 5-6세 전후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우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집안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과거에 합격해야만 했다. 과거 공부가 달가웠던 것은 아신(文神)에게 고하는 다음 글에는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잘 나타나 있다.
과거를 위한 문장을 대방가(大方家,문장이나 학식이 뛰어난 사람)는 비록 달갑게 여기지 않지만 과거를 준비하는 수재(秀才)학구(學究)는 반드시 이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또 이는 선비가 자신을 출세시키는 수단이니 반평생 마음을 쓰는 토제어전(兎蹄魚筌, 토끼 올가미와 물고기 통발, 즉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뜻을 둔지 16년에 거의 1천 편에 가까운 시가 있고, 거기에 2백편의 반려문이 섞여 있으며, 책문은 50편을 엮었고, 부. 논. 명. 경의가 틈을 타서 나왔다. 망령되어 스스로 한번쯤 과거에 합격해도 부끄럽지 않다고 한 글을 그의 나이 25세 되던 마지막 날에 쓴 글이다. 과거에 뜻을 둔지 16년이 되었다고 하니 9세 때부터 과거 를 목표로 삼고 공부를 한 셈이다. 한 번쯤 과거에 합격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 이라고 자신했지만 어떤 이들은 이옥의 문장에 대해 “시는 화려해야 하는데 소박하고, 반려문은 섬세해야 하는 데 창고(蒼古)하고, 책문은 적절해야하는데 지나치게 풍부하고, 부(賦)이 하는 시원찮은 나무와 같아 비평할 것도 없다고 품평했다. 과거 합격용 문장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옥은 좀처럼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잠깐 성균관에 머물면서 거의 장원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지만 결국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일곱 차례나 과거시험장에 들어갔지만 한 번도 합격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대책문(對策文)을 제출해 합격을 노리기도 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과장에서 이름을 날리는 자들의 글을 구해 읽어보았지만, 그가 보기에는 허수아비를 장식하여 저자에서 춤을 추게 하는 식의 엉터리를 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별 볼일 없는 글재주에도 불구하고 연줄로 과거에 합격해서 살아서는 영광을 누리고 죽어서도 글이 남았다. 그런 자들과 비교하면 자신은 불운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