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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여름입니다. 열대야의 수자가 기록을 깨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한 달을 꽉 채우려나 봅니다.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다음 주에는 ‘처서’를 맞습니다. 마무리할 때도 다가오고 있다 여깁니다. 아침에 일어나 실내 온도를 보면 30도입니다. 참을래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에어컨을 켭니다. 다가올 전기료 폭탄고지가 두렵기도 하지만 일단 먼저 살고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어컨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싶지만 없는 사람들도 꽤 될 텐데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내가 급하니 그런 생각도 접어둡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더위와 지냅니다. 며칠 전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버스 안이야 천국이지만 바깥은 지옥불이네요. ㅋㅋ
가능하면 외출 삼가, 그런데 그럴 수만은 없습니다. 이런 저런 볼일들이 생깁니다. 승용차로 나가지만 때로 여의치 못한 때도 있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은 양반이지요. 거리를 걸어보면 알아봅니다. 그럼에도 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참 대단하다 싶습니다. 하기야 일단 먹고살아야 하니 도리없다 하겠지요. 나름 이겨내는 길도 찾아가리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보면서 위로 삼고 걷습니다. 2024년 펄펄 끓는 팔월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 덕에 오는 추석 과일 값은 좀 나아지려나 기대합니다. 뭔가 바랄 것이 있어야 그래도 살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네요. 행여 이 더위까지 연장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 - 세상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가을을 기다립니다. 다시 맞는 주말, 시원한 냉면이라도 한 그릇 하면서 즐거운 주말을 빕니다. 행복하세요. ^)^
2024년 8월 17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찌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함이니라” (잠언 24 : 1 - 2)
<리볼버>
세상 살아가는데 문제와 흥미를 일으키는 주 소재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바로 이것이 드라마 소설 영화의 주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여태 경험하였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사랑, 영화에는 돈, 소설에는 보다 다양하게 들어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요즘 특히 드라마나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 이야기를 해보면 돈과 사랑으로 축약됩니다. 사실 우리 인생 속에 이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삶을 거의 지배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주제라도 등장하는 인물들과 상황들이 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계속 시청하고 관람하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평범한 연애 이야기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직장생활 이야기도 아니기에 관심이 가게 됩니다. 그렇게 흔히 경험하는 일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상의 보통 이야기라면 흥미를 일으키기 어렵지요. 대부분 뭔가 다른 경험을 원합니다. 나와 다른 환경과 다른 성격의 사람들 그리고 독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그 사람만의 특징 같은 것들을 보고 싶어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이면 어떻게 할까 상상도 해봅니다. 쉽게 말해서 돈 안들이고 색다른 경험해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돈과 사랑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관심과 흥미를 을으킵니다. 인생에서 매우 필요한 사항이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속담에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기는 쉬워도 받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흔히 돈을 빌려주고 나면 되돌려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여유가 생긴다면 어렵지 않겠지요. 그러나 갚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자신의 형편이 여의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기어코 시간 안에 받아내려고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채무자는 일단 자신이 죄인의 입장이기에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그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일부러 되돌려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기야 남의 돈 받기는 쉬워도 자기 돈 내주기는 어렵지요. 빚진 돈이라 하더라도 주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받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생활을 감내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출소합니다. 자신의 나가는 날짜를 계산해야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만한 빚을 졌으면 그만한 관심을 가지고 응대해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금 후 엉뚱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싶지요. 아마도 특별한 조처를 해야겠다 각오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전에 약속했던 돈을 요구하려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반갑기는커녕 홀대를 당합니다. 그냥 쉽게 이루어질 일은 아니겠구나 생각하겠지요. 한바탕 싸울 대비를 합니다. 숨겨둔 총도 찾아둡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 사용할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돈을 주기로 한 자들이 약속을 어겼어요.’
‘약속한 돈을 받는데 무슨 각오가 필요해?’
이 말들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고 봅니다. 감옥생활이라는 것이 어떠할지는 구태어 설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그래도 예전과 좀 다르리라 짐작하지만 그러나 군대생활보다 엄격하고 좀 억셀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개인의 자유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곳입니다. 단체생활 속에서 선후배 관계가 매우 엄격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폭력도 모른 척해주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아무튼 일반사회와는 다른 곳입니다. 그만큼 어렵겠지요. 하루도 힘들 텐데 2년을 견디고 나왔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에.
범죄 뒤에는 흔히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대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없으면 살기도 힘들다 싶으면 이판사판 대들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고 또 그만큼 자기자신 단련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감히 대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직 경찰, 그만한 훈련이 되어 있겠지요. 그래서 총기도 마련해두었을지 모릅니다. 만약을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찾아나섭니다. 하나하나 풀어냅니다. 복수를 꾀하는데 상대방이라고 가만 당하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사전 제거반을 동원합니다. 결국 싸움이 일어납니다. 한쪽은 받으려고, 한쪽은 안 주려고. 돈이 문제입니다.
어찌보면 이야기는 그렇고 그렇습니다. 이런 류의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 등장 배우들이 꽤나 쟁쟁합니다. 이런 장르의 영화를 크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등장 배우들에 이끌려서 관람한 것이기도 합니다. 배우 ‘전도연’의 영화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작은 체구지만 차가운 인상에 꿀리지 않는 소위 카리스마라고 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다양한 영화에서 보지만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가장 그 배우에게 어울리는 듯합니다.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렇게 좀 다소 무겁고 차갑습니다. 이야기를 따라 일부러 그렇게 만든 듯합니다. 우울할 때 볼 영화는 아니겠지요. ㅎㅎ 영화 ‘리볼버’(Revolver)를 보았습니다. 권총 이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한 가지 질문해봅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이름을 아십니까? 사실 교회를 10년 이상 다녀도 예수님의 12 제자를 다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목사님들도 다 외울까요? 그저 안다고 해야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 정도? 좀 더 나으면 마태나 배반한 가룟 유다와 의심 많은 도마 정도 말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머리를 갸우뚱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무튼 반은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구누구 남았습니까? 안드레, 바돌로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빌립,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먼저 스스로 목매어 자살합니다. 그래서 행 1장에 보면 그를 대신하여 맛디아라 하는 제자가 12 사도 가운데 가입하게 되지요.(26) 요한계시록에 보면 장차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 12 사도의 이름이 어디에 있는가 볼 수 있습니다. 계 21 :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그 성곽에 열두 문이 있습니다. 그 열두 문들 위에 이스라엘 자손 12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답니다. 그리고 그 성곽에 열두 기초석이 있습니다. 14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그 기초석에 누구 이름이 있다고요? 예수님의 12 사도의 이름이 있답니다. 그러므로 그 날 우리가 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과 예수님의 12 사도의 이름을 다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은 압니까? 이건 열두 사도 이름보다 더 어렵지요? 아무튼 그들이 누구의 자손입니까? 이스라엘 12 지파는 이삭의 아들이고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서 시작되지요. 야곱의 이름이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12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보겠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내가 넷이 있었습니다. 그 각각에게서 아들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합하여 열둘이 됩니다. 그 이야기가 창 29장에서부터 시작하여 35장에까지 이어집니다. 한꺼번에 정리된 부분을 읽겠습니다. 창 35 : 23 - 26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그런데 계 7장에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단’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가 나옵니다. 즉 요셉에게서 두 지파의 몫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요셉의 아들은 둘이 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다가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 때 결혼해서 낳은 아들들이지요. 나중에 아비 야곱이 애굽에 와서 같이 살며 죽기 전 요셉을 불러 축복합니다. 요셉이 두 아들을 축복해주기를 바라며 아비인 이스라엘 앞으로 데려 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지요. 그러므로 요셉의 이름은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이 이어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요셉의 아들들이지만 야곱이 자기 아들들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창 48 :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두 지파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면 ‘단’ 지파는 왜 사라졌을까요? 야곱 즉 이스라엘이 죽기 전에 그 아들들을 불러 예언합니다. 창 49 :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그리고는 아들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장래의 일을 말해줍니다. 예언이지요. 그런데 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창 49 : 16 - 18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우선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가 도대체 무엇인데 그 백성을 심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뒤의 말이 더 이상합니다. 단을 가리켜 뱀이랍니다. 잘 아는 대로 뱀은 마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해서 범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하늘에 전쟁이 있을 때에 쫓겨나는 자입니다. 계 12 : 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과연 단 지파가 나중에 마귀 짓거리를 합니다.
구약 성경 중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사는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나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사기 끝 부분에 가면 단 지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삿 18 :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그렇게 자기 기업을 얻으려고 유리하던 중 미가라는 사람의 가정에서 우상을 세우고 섬기는 것을 탈취합니다. 그 가정의 제사장까지 잡아와서 자기네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30절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알고 있듯이 제사장은 모세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의 자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우상을 따라갔고 하나님을 등진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를 통하여 이삭이 태어나고 이삭을 통하여 야곱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야곱을 통하여 열두 아들이 태어나고 야곱은 하나님에게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20년을 살다가 돌아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러 옵니다. 야곱이 두려워하여 가족들은 다 강을 건너보내고 자기 혼자 얍복 강가에서 기도합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창 32 : 27 - 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아멘! 이스라엘은 바로 이긴 자로서 받은 이름입니다. 이긴 자의 자손, 열두 아들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이야기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 땅에서 당신의 제사장으로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을 맡기려 하셨습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이 세계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 분포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독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왜 하필 이스라엘이냐? 하고 따질 이유도 권한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에게 왜?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미술 시간에 진흙으로 무엇을 빚던 그것은 전적으로 만드는 자의 생각이고 의지입니다. 만들다 다시 뭉개버려도 진흙은 할 말이 없습니다. 사 45 : 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세상만국 중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출 19 : 5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처음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에게도 같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바로 제사장의 복입니다.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의 수명도 점점 짧아졌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하는 것이었지요. 아담이 하나님의 소원을 깨뜨렸고 이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스라엘 백성도 깨뜨립니다.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종결짓습니다. 바로 혈통중심 육적 이스라엘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때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창 3 :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마지막 때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때 즉 예수님 초림 때에도 이루어졌지만 아직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고 또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마귀는 그 세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온전히 이루어집니까? 신약의 마지막 때 즉 계시록 때입니다. 계 12 :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바로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가 이긴 자가 되어 장차 만국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 앞에 4절을 보면 그 아이를 마귀가 해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그렇지요? 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하여 만국을 다스릴 철장 권세를 가지고 와서 마귀의 세력을 물리칠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을 끝내신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을 창조하셨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12 지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의 12 제자를 통하여 영적 이스라엘 12지파를 세우려 하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만국을 구원하고 다스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 마지막 당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마 28 : 19 - 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도 중요한 부분은 바로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육적 이스라엘 12 지파가 하나님께로 받은 말씀도 그것이었습니다. 순종하면 너희가 세계만국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고 다스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똑같이 영적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약속하신 것입니다. 벧전 2 :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처음 아담을 불러 세우셨을 때나 육적 이스라엘을 창조하여 약속하신 것이나 영적 이스라엘을 세워 약속하신 것이 모두 동일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하나님의 원하신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또한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겠지요.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밝혀져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위 마지막 때가 예언되어 있는 것이지요. 살후 2 : 1 - 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주 강림에 대하여 즉 재림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미혹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에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 말라는 당부이지요. 그리고 분별할 수 있는 근거가 주어집니다. 3절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즉 재림 전에 발생할 일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배도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먼저 일어나기 전에는 주님의 재림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무작정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오시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살후 2장의 말씀을 보건대 배도하는 자 즉 배도자가 나타나야 하고 다음 멸망시키는 자 즉 멸망자가 나타나야 그 후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때가 우리가 말하는 소위 종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이제 영적 이스라엘의 종말입니다. 즉 우리 시대의 끝이지요. 그리고 영적 새 이스라엘의 시작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원하셨던 바로 그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배도자가 누구이며 멸망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리되어야 온전한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시는 배반이나 멸망 같은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이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계 21 : 4절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뭐라 하십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야곱으로 시작된 혈통 중심의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등지고 끝났습니다. 다시 예수님으로 시작된 우리 영적 이스라엘도 끝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신다고 하신 것이지요. 다시 오셔서 영적인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고 사망도 아픈 것도 애통함도 없는, 말 그대로 영생의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며 살고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의 순서가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기 위해 어떤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지 정리해봅니다. 그 때는 마지막 때요, 세상 끝이고 주님의 재림 때입니다. 무슨 일들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1) 배도와 멸망의 일이 있다고 합니다.(살후 2 : 4)
2) 추수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마 13 : 29 - 30, 39)
3) 심판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마 19 : 28)
4)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합니다.(마 24 : 11, 24)
5) 주님이 드디어 구름을 타고 천사들과 함께 오십니다.(마 24 : 30 - 31)
일단은 배도와 멸망의 일이 있다 하는데, 배도 즉 도를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도(道)는 하나님 말씀입니다.(시 119 :15, 시 25 : 4) 하나님 말씀을 배신하였다는 말이고 언약을 배반하였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등진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고 신약의 하나님 백성도 그러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작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 즉 주 재림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없겠다는 탄식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을 등지게 된다는 말이지요.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추수군 천사들을 보내어 택하신 자들을 추수하여 새롭게 당신 백성을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십니다. 과연 세상은 새롭게 됩니다. 그 완성을 바로 계시록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 마지막 때를 바르게 알려면 그 때 나타나는 배도자가 누구인지 또 멸망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배도자는 이방인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었다가 등지는 자입니다. 그러니 소위 신자들 곧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멸망자를 통하여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배도하면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나라들을 들어서 심판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마지막 때 일어나리라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주시해야 합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곧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그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준비해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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