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절 사무량심
1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가섭아, 법을 알고, 뜻을 알고, 때를 알고, 족한 것을 알고, 나와 대중과의 높고 낮음을 알고, 또 자ㆍ비ㆍ희ㆍ사의 사무량심을 닦아라.
가섭아, 여래는 헤아릴 수 없는 방편을 가지고 미처 날뛰는 중생을 다룬다. 중생이 만일 재물을 탐하면,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어진 임금으로 화해서 길이 그 요구를 따라 갖가지 물건을 주어 마음을 기뻐게 하여 주고, 그 뒤에는 저에게 무상정진의 도를 가르쳐서 편안하게 하여 준다. 또 중생이 만일 오욕을 탐하면, 나는 묘한 오욕으로3써 그의 소원을 채워주고 그 뒤에는 무상정진의 도에 들도록 권하여 편안하게 하여 준다. 또 중생이 만일 부귀영화를 누려 스스로 잘나고 높은 체하면,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종이 되어, 잘 섬겨서 먼저 그의 마음에 들게 한 뒤에, 그로 하여금 무상정진의 도에 들게 한다. 또 중생이 만일 강경하게 제 고집을 세워 제가 하는 일만 옳다고 하면 나는 꾸짖고 달래어 그의 마음을 항복 받고, 그 뒤에 그를 무상정진의 도에 들어 편안하게 하여 준다.
가섭아, 이러한 따위의 방편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다. 여래는 연꽃과 같아서, 많은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가섭아, 자慈를 닦으면 탐욕의 마음을 끊고, 비悲를 닦으면 성내는 마음을 끊고, 희喜를 닦으면 고통을 끊고, 사捨를 닦으면 탐욕과 성내는 마음과 차별을 보는 마음이 없어진다.
2 가섭아,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에 대하여 삼품의 구별을 가지고 있다. 친한 사람과 원한을 가진 사람과 그 중간의 사람들이다. 친한 사람 가운데도 삼품 이 있고, 원한을 가진 사람에게도 또 삼품이 있다. 보살은 먼저 가장 친한 자에게는 좋은 즐거움을주고, 중 ㆍ하로 친한 자에게도 또한 좋은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가장 원한을 가진 자에게는 작은 즐거움을 주고, 중간쯤의 원한을 가진 자에게는 중간쯤의 즐거움을 주고, 최하의 원한을 가진 자에게는 증상增上의 즐거움을 준다.
보살은 부모와 원수를 대할 때에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여 조금도 차별이 없다. 이것이 곧 자의 성취다. 그러나 대자는 아니다. 대자는 실로 성취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예를 들면, 완두콩이 마를 때에는 송곳도 안 들어가는 거와 같아서, 번뇌의 굳은 것은 비상한 것이다. 한 번 일어난 번뇌는 며칠을 지내도 마음을 얽어 놓아서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조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성내는 마음도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마치 집을 지키는 개와 같은 것이다. 자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수풀로 달리는 사슴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난 마음을 풀기 어려운 것은 들에 글자를 새긴 것과 같고, 인자한 마음은 쉽게 풀리기가 흘러가는 물 위에 글씨를 쓰는 거와 같다. 성나는 마음은 불덩어리와 같고, 인자한 마음은 번갯불과 같은 것이다.
가섭아, 보살이 초지에 머무를 때에는 대자라고 이름 할 수가 있다. 그것은 보살은 이때에는 극히 악한 사람을 대할지라도 마음에 차별이 없어서, 그 허물을 보지 않고 또 성내지도 않는 까닭이다.
가섭아,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롭고 즐거움이 되지 않는 일은 없애버리고 만다. 이것이 대자이다. 또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로움과 즐거움을 준다. 이것이 대비다. 모든 중생을 대하여 마음의 환희를 내는 것은 대희다. 그리고 일체의 법을 볼 때 평등하여 간격을 두지 않고, 나의 즐거움을 버리어 다른 사람에게 준다. 이것이 대사이다. 이 네 가지의 무량심은 모든 선행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3 가섭아, 보살이 보시를 행하는 것은 두려움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했다고 하여 교만심을 낸다거나 또는 갚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이 보시를 행할 때는 자기도 돌아보지 말고 이것을 받는 자도 가려서는 안 된다.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심평등으로 하여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다.
병든 중생을 보거든 부모가 병든 자식을 보는 듯이 불쌍히 여기고 그 즐거워함을 불 때에는 부모가 병든 자식의 병이 나은 것을 보는 듯이 기뻐하고, 이미 보시한 뒤에는 마치 부모가 자식이 장성한 뒤에 잘 살아가는 것을 보는 듯이 마음 든든하게 볼 따름이다.
가섭아, 보살이 자비와 희를 닦으면 극애일자지에 머무르게 된다. 가섭아, 무슨 까닭으로 극애라고 이르고, 일자라고 이르는가? 부모는 그 아들이 편안한 것을 보면 기뻐하고 그 아들이 근심하는 것을 보면 크게 근심한다. 보살도 이 일자지위에 들면 모든 중생 보기를 외아들과 같이 하여, 그의 선행을 닦는 것을 보면 매우 기뻐하고 그의 번뇌의 병에 얽혀 있는 것을 보면, 매우 괴로워하여, 온 몸의 털구멍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다. 또 가섭아, 부모가 외아들을 가졌을 때에는 그 자식의 잠자고 일어나고 먹고 입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만일 허물이 있으면 이것을 잘 달래서 죄악이 커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보살도 모든 중생이 혹은 삼도에 빠지거나 혹은 인천에 날지라도, 항상 이것을 생각하여 잊어버리지 않는다. 설사 어떠한 악행을 할지라도 마침내 성내고 꾸짖어 중생들에게 더 큰 악행을 범하지 않도록 한다."
가섭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이 일자지에 머물러 능히 이와 같이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옛적에 국왕이 되어 보살행을 닦으실 때에 한 바라문의 목숨을 끊으셨습니까? 또 무슨 까닭으로 제바달다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너는 다른 사람의 가래침이나 받아먹을 놈이다'라고 말씀하시어, 그를 노엽게 하셨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설사 모기가 주둥이로 바다물을 길러서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여래는 결코 중생의 번뇌를 일으킬 인연을 만들지 않는다. 가섭아, 남에게 밥을 주는 것은 목숨을 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죽이는 것을 삼가고 말을 삼가는 것도 목숨을 주는 것이 된다. 옳은 일은 남에게로 돌리고, 나쁜 일은 자기에게로 돌려, 송사가 없게 하는 것도 목숨을 주는 것이 된다. 정진과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도 중생에게 목숨을 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결코 남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생각이 없지만,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끊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악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저 바라문은 죄를 원체 많이 지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위하여 내가 자비의 마음으로써 그의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그는 달게 받고 죽은 뒤에 지옥에 들어가 그 인연을 관찰하고, 마침내 도를 믿고 부처님의 처소에 나서 이미 십 겁을 지내고 있다. 그렇거늘 어떻게 이것을 악의로 죽였다고 말하겠느냐?
가섭아, 모든 여래가 말씀한 것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중생에 혜택을 끼칠 일이면, 중생이 듣고 기뻐하지 아니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이것을 설한다. 이것은 실로 모든 여래는 방편을 아시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제바달다를 꾸짖은 것이 아니다. 제바달다도 또한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주 선행을 끊은 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또 성문, 연각도 아니다. 가섭아, 그는 실로 이승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은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알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