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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김칼 정육업자의 어둑한 작업실에서 새김칼이 빛난다.
작고 날카로운 것이 희게 빛난다. 다음 순간, 한 뼘 남짓한 칼은 죽은 소의 붉은 몸을 파고든다. 살점을 자를 때의 두툼한 감촉은 없다. 칼등은 뼈에 바짝 밀착되어 있다. 그대로 칼을 내리자 주검의 일부가 축 늘어지며 ‘고기’로 떨어져 나온다. 동물의 골격과 근육 사이에는 얇고 반투명한 막이 있다. 그래서 정육업자들은 뼈에 붙은 살을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막을 경계로 칼을 넣어 살에서 뼈를 ‘긁어내는’ 식으로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을 발골 혹은 새김질이라 하며, 그때 사용하는 칼을 새김칼이라고 한다. 새김칼이 크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머리와 내장 등을 제거한 소의 무게는 300kg 정도다. 도축장에서는 대부분 소의 주검을 네 조각으로 잘라 납품하는데, 그렇게 나눠도 한 덩이당 장정 한 사람의 체중과 맞먹는 셈이다. 그 중량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새김질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사람이 위치를 바꿔가며 작업을 해야 하고, 그러기에는 둔한 칼보다 작고 예리한 칼을 사용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살치살이나 낙엽살처럼 정교한 부위를 작업할 때는 교묘한 칼질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다. 그에 비해 뼈가 아닌 살점 사이에 파묻힌 안심은 비교적 분리하기 편하다. 안심을 새김질할 때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그 부위 하나로 이윤이 결정될 정도의 높은 가격 때문이다. 물론 숙련된 ‘새김꾼’이 실수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새김칼을 잘못 놀렸을 때의 대가는 크다. 좋은 새김칼의 조건들 중 하나는 자신의 손에 익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이 너무 안 들어도 문제고, 너무 잘 들어도 사람이 다친다. 작업을 하다 보면 칼날이 연골에 박히기도 하는데, 그것을 빼려고 힘을 주다 잘못하면 칼이 그대로 허벅지에 박힌다. 끔찍한 얘기지만, 세기의 살인마들이 이 작고 날카로운 정형도를 다른 용도로 선호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 역시 뼈와 살, 혈관과 힘줄로 이뤄진 존재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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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나이프 고기 누린내가 진동하는 주방, 셰프는 정형도를 이용해 근막을 벗겨낸다.
정육점의 새김칼을 레스토랑 주방에서는 본 나이프(bone knife)라 부른다. 레스토랑의 부처 키친(butcher kitchen), 즉 정육 주방에서는 채끝살과 분리된 안심을 굽기 직전까지 다듬고 자르는 역할을 맡는다. 작업대 위에 놓인 안심은 묵직한 부피감에 자르르 윤기가 흐른다. 이 살덩어리에는 소거해야 할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 부처 셰프가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근막’을 분리하는 것이다. 근막은 근육과 장기 등 몸 안의 공간을 싸는 막을 이른다. 이 부분을 없애지 않으면 스테이크의 식감이 구두 밑창 씹는 듯 질기다. 부처 셰프가 본 나이프를 들고 안심의 표면에 작은 흠집을 낸다. 근막과 살점을 살짝 벌린 다음 칼날을 대고 손가락으로 잡아당긴다. 종잇장보다 얇은 껍질 한 줄이 순식간에 벗겨진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껍질은 금세 둥글게 오그라든다. 이것들은 오븐에 고소하게 구운 후 오랫동안 끓여 육수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근막 제거 작업을 몇 차례 반복한 후에는 고기에 붙은 지방을 쳐내는 절차가 남는다. 스테이크에 여분의 지방이 남아 있으면 구울 때 가장 먼저 탈 뿐 아니라 맛도 텁텁해진다. 안심을 뒤집자 몽글몽글 모여 있는 하얀 지방이 눈에 띈다. 셰프는 살코기의 결을 따라 지방을 섬세하게 긁어낸다. 그의 손길을 따라 안심 덩어리는 점차 순수한 선홍빛 ‘고깃덩어리’로 변모해간다. 정육 주방에서 본 나이프는 다양한 효과음을 낸다. 근막을 벗길 때는 칼날을 따라 ‘찌익’ 하는 소리가 뒤따르고, 지방을 제거할 때는 셰프의 손짓에 맞춰 ‘샥샥’ 소리가 이어진다. 소리의 속도는 아주 빠르다. 신속한 작업 속도는 예리한 칼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부처 셰프는 아침마다 숫돌에 본 나이프를 간다. 그 후에는 칼이 쓸 만한지 확인하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칼날에 살짝 대본다. 매끈한 표면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면, 살점이 그대로 베이는 듯한 환시에 섬뜩해지기도 한다. 잘 갈린 본 나이프에는 그런 섬광이 있다. 하루에 한 번씩, 그 시린 감각에 셰프의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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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팅 나이프 은빛 칼날이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인다. 붉고 매끈한 살점이 슬근슬근 잘린다.
왼손으로 살점을 잡고 오른손으로 칼을 지그시 누른다. 매끄러운 근육 사이로 날렵한 은빛 금속이 쑥 들어간다. 아무 저항감 없이 날이 오가고, 셰프는 안심을 스테이크 사이즈로 잘라낸다. 이 단계에서 도구의 크기는 약간 커졌다. 길이 20센티미터 정도, ‘부엌칼’이라는 말에서 가장 통상적으로 떠올릴 법한 그 형상을 레스토랑의 주방에서는 ‘커팅 나이프’라 한다. 스테이크는 부위별로 두께를 조절해 써는데, 안심은 상당히 도톰하다. 살코기의 결이 짧아야 고기가 부드러워지기 때문에, 근섬유에 직각으로 칼날을 넣는다. 단면에 굴곡이 생겨 모양이 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기를 썰 때는 단칼에 자른다. 차가운 금속이 살덩어리 위를 몇 차례 오가자, 가슴과 옆구리 근육 사이에 숨어 있던 길쭉한 살점이 어느새 동그란 조각들로 나뉘어 있다. 셰프는 무심하게 칼질을 반복하지만, 그의 몸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손에 익은 그대로만 작업해도 무게의 오차 범위는 10g 내외에 불과하다. 칼날이 일정한 간격을 반복하다가 안심의 정중앙에서 약간 넓어진다. 그 부분을 샤토 브리앙이라고 한다. 19세기 브르타뉴 지방의 귀족이었던 프랑수아 르네드 샤토브리앙의 요리사가 처음 고안해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안심 부위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식감으로 유명하다. 보통 안심 스테이크는 220g 전후로 썰지만, 샤토 브리앙의 무게는 500g 정도에 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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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크 나이프 스테이크가 완성됐다. 짐승의 이빨처럼 생긴 이 칼은 구운 고기의 살결을 깨끗하게 끊어낸다.
스테이크 모양으로 잘린 살코기는 타임과 마늘 등 향신료를 넣은 오일에 잠시 절인 후 굽는다. 표면은 검고 바삭하게 익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선연한 붉은빛이 숨어 있다. 완성된 안심 스테이크는 가니시와 함께 접시에 예쁘게 담는다. 소의 안심이 다시 칼날과 만나는 것은 그 후다. 맛있는 스테이크를 위한 식탁에서의 관건은 잘 자르는 것이다. 조금만 힘을 줘도 쉽게 흩어지는 생선과 달리 고기는 결 때문에 썰기가 쉽지 않다. 칼이 잘 들지 않으면 뜯어지듯 잘리는 바람에 식감이 거칠어진다. 스테이크 전용 나이프는 5년 전쯤부터 스테이크 전문점을 중심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작고 삐죽한 톱날들이 이어진 칼날은 상어의 이빨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살코기의 결을 쉽게 끊어줘 육질의 손상도가 크게 줄어든다. 스테이크 나이프는 결 방향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결 반대 방향으로는 잘 썰리지 않아 여러 번 칼질을 하게 되고, 그 횟수만큼 육즙이 빠져나가 고기의 풍미가 사라진다. 작게 잘린 조각을 입 안에 넣는다. 살결 사이로 어금니가 부드럽게 틈입하고, 농밀한 육즙이 그 사이에서 새어나온다. 혀마저 녹여버릴 듯한 식감. 그 황홀경을 가능하게 만든 한 자루의 칼이 접시 옆에서 문득 번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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