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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1일 수요일 [(백)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스타니슬라오 성인은 1030년 무렵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한 뒤 주교가 된 그는 뛰어난 설교와 영적 지도로 많은 이를 하느님께 인도하였다.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크라쿠프의 교구장으로 활동하던 중 폴란드 국왕의 불의와 폭정을 꾸짖으며 그를 파문하였다. 이에 국왕은 스타니슬라오 주교에게 반역죄를 덮어씌워 1079년 4월 11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던 그를 성당에서 끌어내어 살해하였다. 1253년에 시성된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감옥에 갇혔다가 주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난 사도들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자,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몹시 당황하며 사도들을 데려 온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복음).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빛과 어두움의 대조는 요한 복음 저자가 복음서 처음부터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반대로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때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면서 온통 빛으로 가득한 삶이란 없고, 그렇다고 언제나 어두운 인생만 있으란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다 보면 회색 지대도 필요하고,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순간도 필요하다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구원의 빛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죽음을 물리쳐 이겼음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들과는 달리 복음서 시작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고백하고, 그분이 바로 인류의 빛으로 오시어 어두움과 죽음을 이겨 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들이 두려워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대사제와 사두가이파들의 어두움과 반대로, 감옥에 갇혔어도 천사들의 도움으로 다시 세상에 나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빛의 모습이 사도행전에서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말씀처럼, 지금 내가 회색 지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내 안의 어두움을 이겨 낼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한 며칠 화사한 꽃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달콤한 봄비가 내립니다. 온천지가 완연한 봄기운으로 기지개를 활짝 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이젠 예전같이 매서운 칼바람이 아니라 훈훈하고 따뜻한 봄바람입니다.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비가 되어 내리는구나! 세상 방방곡곡 그 어떤 지역,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골고루 풍성하게 내리는구나!”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영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니코데모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니코데모의 내면에는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어렴풋이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강한 주님 체험이 부족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한 하느님 자비 체험, 골수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온 몸으로 느꼈던 절절한 은총 체험이 니코데모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저 머리와 이성으로만 자꾸 이해하려하니 이런 저런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말씀에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복음 3장 8절)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장 9절) 참으로 묘한 것이 바람입니다. 물론 기압골이나 대기상태, 지형이나 태풍의 영향에 따라 이리 불고 저리 부는 것이 바람입니다. 느낌은 있으나 절대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바람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백번 깨어나도 성령의 그 감미로운 바람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묘하고 신비스런 성령의 바람이 스쳐지나갑니다. 때로 뜨겁게,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느님의 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임하십니다. 그 결과 육으로만 살아가던 한 인간 안에 참된 내적인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고스란히 한 인간 안에 실현됩니다. “나는 그들 안에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어,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그대로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키엘 예언서 11장 19~20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간 측의 신앙 고백은 어찌 보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육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물질과 육체의 쾌락만을 최고로 여기고 추구하는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 대가 없는 예수님 사랑, 거저 주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의 중요성을 설파해야 되는 신앙인의 삶이 꽤나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사라져버린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확신 갖고 믿음 갖고 온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우리들 삶의 원리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 부활은 당신과 함께 다시 시작하자는 우리 각자를 향한 강렬한 초대입니다. 새 인생을 출발하자는 초대, 영적인 삶, 위로부터의 삶을 다시 살아보자는 예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재능보다 태도>
커밍 워크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각지의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통된 특징을 조사했고 또 장래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되는 좋은 재목들을 미리 찾아다니며 과연 정말로 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지도 조사했습니다.
연구는 몇 십 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워크는 마침내 4가지 성공 요인을 찾아내었습니다.
첫째는 지능이었습니다.
타고난 지능이 높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성공했습니다.
둘째는 지식이었습니다.
타고난 지능이 있더라도 지식의 습득을 게을리 하는 삶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기술이었습니다.
지식을 올바로 응용할 수 있어야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넷째는 올바른 태도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아무리 앞의 3가지 요인이 타고났더라도 태도가 엉망인 사람들은 성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 성공했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요인이 평균 이하더라도 태도만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매우 많았습니다.
워크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성공은 90% 이상 태도가 영향을 끼친다고 발표했습니다.
[출처: 김장환 큐티 365, 나침반 출판사]
신앙도 마찬가지고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능이 뛰어나 감동적인 설교로 잠시 신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있어도 그 복음선포자의 삶의 태도가 밑받침이 되어주지 않으면 그런 강의는 결국 허무함만을 남깁니다.
제가 복음화국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방법들만을 찾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을 쓰고 있지 않은 형편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스템과 교육을 개발하고 적용하면 복음화가 잘 진행될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태도에 대해 반성하고 쇄신해가야 하는 요구가 더 절실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들을 천사가 구해줍니다.
그리고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성전은 그들을 가두었던 이들이 손만 뻗으면 다시 붙잡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천사를 보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지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잡히면 다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전혀 머리를 쓰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박해가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시간동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복음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복음선포 내용이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선포 하는 이들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박해받고 미움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고통을 피하게 해 주시는 이유는 복음을 조금이라도 더 선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베드로처럼 다시 돌아가 순교할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완전한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선포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박해받고 순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때가 차자 모두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악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부활시켜 주신다는 믿음을 세상에 전해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죽음을 회피하려고 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사도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피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 피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을 원하면 그리스도처럼 당당히 그 죽음을 향해 가야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을 팔아넘기려는 가리옷 유다에게 당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시간과 능력과 기적까지 갖추었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바치려는 자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이 두려워 피하셨다면 세상에 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천사를 보내신 이유는 필요한 때면 당신께서 구해주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위협에 당당히 맞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먼지로도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복음 선포자를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 분 뜻에 끝까지 순종할 수 있는 선포자는 우리가 아니면 안 됩니다.
복음의 선포 기술이나 능력, 방법들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갖추었는지 먼저 살펴야겠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스타니슬라오(Stanisla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크라쿠프(Krakow)
활동연도 : 1030-1079년
같은이름 : 스타니슬라우스, 쓰따니쓸라오, 쓰따니쓸라우스
폴란드 크라쿠프 교외 슈체파노프(Szczepanow)에서 출생한 성 스타니슬라우스(또는 스타니슬라오)는 그니에즈노(Gniezno)에서 수학한 뒤에 서품되었다.
그는 설교가로서 곧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애썼고, 교회 개혁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여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1072년 그는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었는데, 국왕 볼레수아프 2세(Boleslaw II)의 잔학성과 불의를 고발함으로써 왕과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국왕을 파문하고 대성당의 출입을 저지하자, 볼레수아프 왕은 크라쿠프 시외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그를 직접 끌어내어 살해하였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다. 그는 1253년 9월 8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아시시(Assisi) 대성당에서 시성되었고,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