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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묵상글 들 ( 대림 제2주일 금요일. - 어느 장단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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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대림 제2주일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느 장단에
오늘 주님께서는 짧은 비유를 드시는데
당신 세대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같다고 하십니다.
당신 세대가 아이들처럼 미성숙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미성숙하냐 하면
자기가 반주해주는 대로 춤추지 않고
장송곡을 연주해도 같이 애도하지 않는다고 서로를 탓합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는 완전히 자기중심의 미성숙이지요.
그런데 이런 미성숙도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고
아무 장단에 춤추는 미성숙입니다.
이런 미성숙도 또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아예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이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어느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며
완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미성숙이 있습니다.
미성숙 1: 내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의 미성숙.
미성숙 2: 아무 장단에나 놀아나는 줏대 없는 미성숙.
미성숙 3: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경직되고 자폐적인 미성숙.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란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지도,
남의 장단에 내가 놀아나지도 않으며,
아무 장단에나 춤추지 않지만,
어느 장단에는 춤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성숙한 사람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요?
사랑의 장단에는 춤을 추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 장단에는 춤을 춥니다.
자기 사랑,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에 어긋나는 장단에는 놀아나지 않고,
사랑의 장단에는 어울려서 춤추고 신명 나게 춤을 춥니다.
쓸데없는 말이나 남을 해치거나 흉보는 말은 듣지 않고,
하소연과 도움이나 동감을 얻으려는 말은 귀담아들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데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주님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요한은 굶는다고 비난하고
주님은 먹는다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어떤 말도 거부하기 마련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들을 것이고,
그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이 대림 시기에 귀담아들어야겠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장)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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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대림 제2주일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부서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제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 져 있습니다.
아니,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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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대림 제2주일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즈음 소위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 마음에 드실까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는 이들이 참으로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요즘 나라의 혼돈상태를 보십시오. 서로 남 탓만 하고 있잖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여전합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 줄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참 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18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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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대림 제2주일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에 입대하면 똑같은 훈련을 받지만 능력이나 재능에 따라서 ‘주특기’가 주어집니다. 운전면허가 있거나, 재능이 있으면 수송주특기를 받습니다. 체격 조건이 좋고, 강인하면 헌병 주특기를 받습니다. 사무능력이 있거나 컴퓨터를 잘 다루면 행정 주특기를 받습니다. 신학교에 다니거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군종 주특기를 받습니다. 그밖에도 의무, 정보, 시설 등의 주특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필요한 인력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2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배치를 받기도 하고, 부대의 필요에 의해서 배치를 받기도 합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녔기에 군종병이 되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행정병으로 옮겼습니다. 3년 동안 주로 예비군 담당 행정병으로 지냈습니다. 전방 부대에서 철책 근무를 하는 것도, 후방 부대에서 행정 업무를 하는 것도 제대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에서 주어지는 주특기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지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같은 날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교구의 필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사목의 분야가 다양하게 정해집니다. 인재양성 위원회의 선발에 의해서 유학을 가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사회사목, 경찰사목, 병원사목, 청소년 사목, 복지기관, 선교사목, 교포사목, 빈민사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님들은 본당사목을 하게 됩니다. 사제는 순명서약을 하기에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당연하게 새로운 임지로 가게 됩니다. 저는 보좌신부로 8년, 본당신부로 8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 11년 있었습니다. 3년은 캐나다에서 연수를 하였습니다. 1년은 안식년으로 지냈습니다. 어디에서 근무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사막에 샘이 흘러넘치게 하는 사목도 있고, 사목에 꽃이 피어 향기가 나게 하는 사목도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제에게는 어디에서 있느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부족한 제게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어디에 있어도 늘 ‘가시방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된 밥에 재를 뿌리듯이 공동체를 갈등과 분란으로 몰고 가곤 합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꽃이 피듯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을 탓하지 말고 내 마음의 바가지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새는 곳이 있다면 새지 않도록 고쳐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리고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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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대림 제2주일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 망친다.”
자기 욕망을 줄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을 하면서 살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완전히 없앤다고 잘 사는 결과를 가져올까요?
어렸을 때, 저는 전자오락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용돈이 생기면 전자오락실로 향했고, 돈이 없을 때는 오락실에서 남이 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오락실 간 것이 들통났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오락실을 다니는 거야?”
지금 커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오락이나 게임을 전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렸을 때 전자오락실 간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에 빠지게 되면 스스로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순간의 만족이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생산성 있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모두 버리고 하기 싫은 것만 하면, 재미없는 인생으로 더 망치게 되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욕망 안에서도 미래의 나를 만들어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분명 기쁨과 함께 더 나은 나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욕망은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원하고, 가장 적절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이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한패는 피리를 불며 잔치 놀이를 하는데 춤추지 않으면 장단을 맞추지 않습니다. 다른 한패는 곡을 하며 장례 놀이를 하는데, 아무도 가슴을 치며 울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놀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례 놀이는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외침이고, 잔치 놀이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즉,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해야 하는데, 자기 일에만 집중해서 해야 할 모습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 전체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생활한다면, 욕망으로 보이는 나의 즐거움 안에서도 큰 의미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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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이 적을수록 즐기는 일들을 할 시간이 생긴다(비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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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대림 제2주일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주님
-신뢰와 경청-
어제는 근래 보기 드문 참 평화롭고 포근한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원장수사 부친의 문상차 대구를 방문했던 날이었습니다. 함께 간 도반도 시종일관 시중을 들며 함께 해줬습니다. 방문했던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밝고 평화롭기가 흡사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어둡고 무거운 슬픈 분위기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 참 잘 사셨구나! 선종의 복된 죽음을 맞이하셨구나!”
저절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영정 사진도 흡사 오늘 날씨처럼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습니다. 떠나면서 함께 연도를 바쳤고 원장수사에게도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파스카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축제 분위기 같았습니다. 영정 사진에서 본 생전 야고보 아버지의 분위기였습니다. 새삼 선종의 복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길 빕니다!”
30년 동안 함께 했던 수도도반과도 나눈 메시지입니다. 백요셉 수사는 1992년 입회했으니 올해로 함께하기 만30년입니다.
“극진한 배려와 친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 지내다 오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프란치스코 수사님! 감사드립니다. 조심해서 잘 올라가시고 남은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쁘고 생동감이 넘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마침 잠시 대구에 거주하는 예수성심자매회 회장 자매의 메시지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15년 이상 한결같이 예수성심자매회를 섬겨온 참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슬기로운 자매입니다.
“신부님, 제가 장례식장에 가니 신부님께서 막왔다가셨다 하던데 어제 말씀해 주시면 점심이라도 같이 하실 걸 그랬어요. 대구까지 오셨는데 뵙지도 못했네요. 고생하셨어요. 조심해서 올라 가셔요!”
상경도중 열차안에서 책을 보려다 포기했습니다. 참 오랜만에 차창 풍경이 ‘살아 있는 책’처럼 눈에 와닿았기에 차창밖 풍경의 자연성경책을 내내 관상했습니다. 날씨처럼 평화롭고 고요한 창밖 풍경이었습니다. 서울역에서도 참 좋은 분의 환대로 잠시 저녁식사를 나눴습니다. 참 오랜만의 깨끗하고 정갈한 담백한 식사였습니다. 하여 두루두루 행복했던 하루였습니다.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께서 시종일관 어제 하루 함께 해 주셨음을 한밤중 강론을 쓰면서 늦게야 깨닫습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어제 만난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어제 하루 삶의 중심에 참 좋은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살아 계신 주님이 늘 함께 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서야 저절로 나오는 시편 고백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참으로 늘 신뢰와 경청을 다해야 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이심을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 새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두 말씀에서 주님의 깊은 아쉬움과 좌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수준이 너무나 미달되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다 우리의 참된 회개를 촉구합니다.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구원자이신 주님께 대한 신뢰와 경청이 턱없이 부족하고 순수와 사랑도 없습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새삼 주의를 기울여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경청할 때 그 놀라운 결과가 참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주님의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우리들에 대한 주님의 깊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도 대동소이합니다. 역시 무감각하고 공감할줄, 반응할 줄 모르는 완고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나 이제나 늘 상존하는, 참으로 무딜대로 무뎌진 공감 능력을 상실한 세대임을 깨닫습니다. 이들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대한 곡해가 그 증거입니다. 두 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색안경을 쓰고 심히 왜곡해서 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부정적 모습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모두가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주의를 기울여 듣지 못한 때문입니다. 새삼 주님을 신뢰하고 겸손히 귀기울여 듣는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분도규칙도 “들어라!”로 시작되며,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외친 말씀도 “들어라!” 였습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딱딱하게 굳은 대지를 부드럽게 하듯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마음은 열리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경청함은 은총의 하늘비와 같습니다. 초 겨울에 어울리지 않지만 문득 “봄비”란 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시쓴지 17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합니다. 정말 봄비같은 딸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화두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을 뜻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이 환히 드러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을 삶의 중심에 스승이자 인도자로, 구원자로 모신 우리 제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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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대림 제2주일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리는 함께>
마태오 11,16-19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살리는 함께>
살리는 함께
아파하는 이들을
돌보는 함께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함께
기뻐하는 이들을
흥겹게 하는 함께
힘없는 이들을
북돋우는 함께
쓰러진 이들을
일으키는 함께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는 함께
그릇된 이들을
깨우치는 함께
뉘우치는 이들을
보듬는 함께
살리는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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