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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와 미래 목회
1. 예배 회복과 새로운 부흥
– 뉴노멀, 언택트, 비대면 -
코로나와 종말 현상
성경이 말하는 종말 현상들이 곳곳에 나타나면서 다가올 미래가 아닌 ‘다가온 미래’ 시대를 이미 살아가고 있음을 본다. 구약성경에 전염병은 패역한 세대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들 가운데 한 현상이었다. 신약 성경은 기근과 지진 그리고 전염병이 있을 것인데, 이로 인해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진다고 말한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전염병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어느 한 곳에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여러 장소에서 다종(多種)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가 드러내는 현상들은 많은 부분 이러한 조건에 일치되어 보인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목회적으로 특별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든다. 무슨 문제이든지 성도는 어려움을 만나면, 교회를 찾아와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해야 하는데, 이 염병은 교회로 하여금 스스로 모임 자체를 금지토록 하고, 게다가 여기에 공권력까지 동원되는 것을 보면 과연 말세지말의 현상임을 직감하게 한다.
성경은 분명히 종말이 가까이 옴으로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히 10:25)고 말씀하지만, 세상은 이 말씀의 명령들과 역주행하고 있다. 오히려 목회자 가운데 스스로 ‘모이지 말자’라고 강조하며 마치 사회적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도 있다. 또 청교도 신앙의 나라 미국에서는 주지사가 찬송을 부르지 못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린 후에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교회 안에까지 구청직원이 들어와서 설교자에게 마스크를 쓰도록 강제하며 예배를 감시한다고 한다. 기가 막힐 일이 종말 현상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다.
뉴노멀, 언택트, 비대면, 빅 데이터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시대를 표현하는 용어가 생겼다. 뉴노멀(New-Normal)의 시대라고 한다. 일상의 삶과 반대가 되어 정상적이라고 하기에는 합당치 않아 새로운 노멀, 뉴노멀 시대의 등장이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는 언택트(Un-tact) 시대이다. 영어에 없는 단어인데 contact(컨택트)에 임의 부정어를 붙인 조어이다. 세 번째는 상호 간 실제 얼굴을 보고 대할 수 없는 비대면 공동체로의 전환을 말한다.
실제 이와 같은 신조어가 생길만한 상황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식당은 이제 테이크 아웃 전문점으로 변한 지 오래다. 집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데, 단 2인분의 경우에도 주문배달에 응하는 것을 본다. 이유인즉, 지금 2인분이 후에 20인분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미리 단골확보를 위한 과용의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학교도 지난 3월부터 아이들이 온라인으로 전환해서 시험과 모든 과제를 수행한다. 5월의 졸업식에도 학생이나 교수 모두 모이지 않는다. 학교도 입학에서부터 졸업까지 전혀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지는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면 팝콘에 콜라를 마시면서 함께 놀라고 함께 울고 웃는 낭만도 있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극장에 갈 필요도 없게 되었다. 가정에서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가 배포되고 클릭 클릭만 하면 편안한 자세로 집안에서 영화를 즐기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빅 데이터가 좋아할 영상을 계속 추천해 보내온다. 이제는 더이상 어딘 가를 가지 않고도 계속해서 방콕, 집콕이 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기에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빅 데이터이다. 유튜브를 시청할 때도, 자동 재생 기능에 의해서 내가 가진 기호를 파악한 빅 테이터가 계속 유관 된 영상물을 제공해 준다. 최근에 셔츠를 하나 구매했는데 크기가 맞지 않아서 교환하러 가게를 방문했다. 영수증이나 기타 정보를 위한 전자우편(이메일)을 남기기 원해서 알려 주었더니, 계속 광고 메시지를 보내온다. 그런데 이제는 메시지뿐 아니라 인터넷을 켜면 광고판에 관련 광고까지 떠오른다. 엄청난 유혹이다. 결국에 넥타이에 유혹이 되어서 이를 선택한 후 쇼핑 바구니에만 넣어두고 잠시 다른 일을 하던 중에 또 메시지가 날라왔다. 결제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는지, 도와주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대신 돈을 대줄 것도 아니면서 왜 묻느냐고 한마디 하면서도, 동시에 많이 놀랐다. 이게 도대체 뭔가 싶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빅 데이터란 존재가 내 생각과 기호를 읽고 보고 있다는 생각에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는 서점도 갈 필요가 없다. 책을 사지 않고 가정에서 그냥 아이패드를 들고 e-book을 읽거나 대신 읽어주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차량도 운전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기업들도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기계나 시스템들이 홀로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기술로 발전해서, 예전처럼 회사 취직하면 할아버지가 양복 사주며 축하하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빌딩 크기를 자랑하는 그런 일이 필요 없는 재택근무, 출퇴근이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제는 방안에서 태어나 지내다가, 방안에서 죽게 되는, 그런 세상을 보게 될는지 모르게 되었다.
다가온 미래와 준비
위에 약술한 내용은 항상 다가올 미래 시대의 이야기 소재였었다. 그런데 금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변화의 가속도가 붙은 나머지 이제는 이미 다가온 미래가 되어버렸다. 이런 때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준비하는 기업들만 살아남는다고 미래 시대를 대비하자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 준비해야 한다. 매장 크기와 숫자만을 자랑하던 월마트처럼 해서는 곤란하다. 아마존의 급성장을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하고, 비둘기의 순결함으로 뱀의 지혜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꾸준한 질문들 속에서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 속에 제대로 반응할 것인가? 요동치는 세상 가운데서 상황은 복잡해도, 답은 간단명료하다.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그렇게 하면 된다.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의 삶에 ‘홀로 족(族)’이 등장하고, 편한 것이 좋은 것인 줄 오해하면서 계속 비대면 비접촉 사회를 형성한다고 하여도, 교회는 그저 성경이 말하는 모습을 지키면 된다.
기독교 영성, 개인주의와 양립 불가
세상은 점점 인간이 혼자 있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럴수록 더 모이는 대면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혼자 있기에 좋은 존재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문화는 창조의 원리와 맞지 않는다. 아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만들고 가정을 이루게 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즉 함께 있는 것이 인간 본질이다.
혼자 있던 하와가 사단이 꾀어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마귀가 딱 좋아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이 혼자 계셨을 때, 예수님마저 공격하는 간 큰 사단을 보면서 우리도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사단이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혼자 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의 영성은 개인주의와 양립될 수 없다.
생각해보라. 말씀이 충만하고 예배에 큰 은혜를 받아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잠시는 몰라도 참 신앙의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성경을 보라. 오순절의 성령의 충만했던 사람들 그들은 함께 교회를 세웠고, 그들은 입을 열어 세상 열방의 영혼들을 향해 복음의 나팔을 불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면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영혼들을 향해 나아가고, 주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함께 예배하게 된다.
새로운 교회의 부흥기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목적에 맞게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DNA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향한 갈증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모양 저 모양 친목 모임으로 시작해서 향우회나 전우회 등의 그룹을 만들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생의 본질과 전혀 다르게,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비대면화가 너무 가속화된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 대안의 중심에 바로 교회가 있고, 예배가 있다.
혹자는 코로나 이후에, 혼자 있는 습관들이 익숙해진 탓에 기독교가 위축될 것이며 교회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일견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본질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코로나 이후에 제2의 예배 회복과 새로운 교회의 부흥기가 올 것이라고 여겨진다. 포스트 코로나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찾는 곳이 교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수 있다.
왜 그런가? 코로나가 삶의 지형을 바꾸어 버렸다. 잠시 격리하듯 홀로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본성이 그 체질을 따라 사람이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 한다. 실제 외롭다. 그러나 이러한 시절에는 오라는 데가 없다. 학교, 직장, 식당 등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그리운데 오라는 곳이 없고, 가급적 오지 않기를 원한다. 함께 밥을 먹어줄 사람도 잘 없다. 그런데 그런 때에, 나를 반겨주고, 사랑으로 섬겨주고, 함께 찬송하며,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힘들면 위로하고,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섬기는 이 지역 교회라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에 합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그 교회 위에, 우리 하나님은 코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부흥의 은혜를 허락해 주실 것이다.
준비된 교회, 노아의 방주
혼자가 편하다. 그러나 인생은 편한 것으로만 살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주의 교회가 주님 앞에 합당하게 준비만 된다면, 교회는 사막 광야 같은 외로운 인생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코이노니아를 회복함으로 반드시 제2의 부흥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오고 싶은 곳, 찾고 싶은 곳, 매력적인 곳이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진리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바꾸는 변화의 과정과 노력만 있으면, 포스트 코로나를 지나면서 결코 기독교와 교회는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와 교회가 쇠퇴하지 않을 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세상이 모두 흩어져 홀로 살아가기를 좋아하고, 교회도 점차 쇠하여 문을 닫아 버린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택한 백성들은 과연 교회 없이 어디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노아의 방주를 찾겠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교회를 이 땅에 남겨두실 수밖에 없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이고 싶어 하는 교회를 미리 준비하고 만드는 노아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지혜 중의 지혜이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 시기에, 사회적 의를 위해, 이웃을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교회와 예배를 폐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지 정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염병이 아무리 창궐하여도, 코로나 염병만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위해 주무시지도 않고, 더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예배상실이 강제되는 시대
– 가상과 실상, 영적 면역력 -
예배상실
은퇴를 3년 정도 남겨두신 선배 목사님께서 최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몇 주 동안의 회한이 가득 담긴 편지를 한국에서 보내주셨다. 이곳 미국에서도 교회에서 모이는 예배에 대한 부담감이 안팎으로 커지는 때여서인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읽어보게 되었다.
[예배를 전폐하니 몸은 편한데 영혼의 갈급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네. 바벨론 강가에서 수금을 걸어 놓고 예루살렘 시온산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한없이 울었던,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간절히 생각하며 가슴에 품어본다네.
주일이면 교회 와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음껏 찬송하며 감사로 예배하던 그 날들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던가! 성도들과 마주 보고 즐겁게 웃으며 정을 나누던 그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그럼에도 주일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에 좀 더 정성껏 헌신하지 못한 아쉬움이 더욱 마음을 짓누른다네.
모두가 대구를 혐오하지만, 그래서 대구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이 종은 오히려 대구의 시민이라는 자긍심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네. 저 악하고 더러운 전염병이 사라지고 우리 그리운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전보다 더욱 대구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또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감사하며 살고 싶은 마음 끝이 없다네. 3.20 춘분, 봄이 오는 길목에서]
교회와 예배, 궤변
편지글처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예배를 마음껏 드리지 못하는 마음이다. 어떤 분은 ‘인터넷 영상예배’가 있지 않냐? 라고 대안을 제시한다. 또 분당의 어느 목사는 건물이 교회가 아니므로, 꼭 교회로 모이지 않아도 우리가 있는 그곳이 교회라고 말한다.
또 서울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교회를 신앙생활의 기준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아주 못된 궤변에 불과하다. 현실 상황이 온라인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 이러한 정황을 합리화하기 위해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들을 결코 훼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 염병의 문제가 터지면 어떻게 하라고 하였는가? 주의 성전에서 회개하며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다. 염병의 문제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돌아보고 기도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말씀하시며, 그럴 때 땅을 고쳐주시며 회복시켜 주시겠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지금의 사태는 염병의 문제와 더불어, 이를 치유할 기도의 자리까지 막혀버린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인 것이다. 오히려 기도하고 예배하러 모이면, 이웃에게 돌을 맞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한마디로, 지금은 하늘 아버지 집에 모여 예배할 수도 없게 된 이 막막한 현실 앞에 통곡하며 울부짖어야 마땅한 형편이지, 오히려 굳이 교회로 모이지 않아도 충분히 예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엉터리 논설을 말할 때는 아니다. 교회로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야 마땅하지, 어떻게 교회 오지 않아도 될 합당한 근거로 교회를 건축물 빌딩 정도에 비유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예배 방해의 괴질과 영적 치료소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느 곳에서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대공항을 예고한다. 한국에서는 IMF(국제통화기금) 지원 때보다 더 심각할 것으로 추단한다. 왜 그런가? IMF 위기를 한국이 극복하면서 신용평가 등급이 되고, 오히려 경제나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면에는 IMF의 고통 가운데서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와 예배와 간증이 풍성했던 것을 이유로 판단한다.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어렵고,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밤을 지나면서 힘써 주님의 전에 모여서 기도함으로 곳곳에서 은혜의 힘으로 난세를 이겼다.
그러나 작금의 코로나19는 아주 악독한 것이다. 주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며 찬송하는 모든 통로를 막아버리니 악한 형편들이 회복될 길이 더 요원해진 것이다. 기도와 예배가 펼쳐지는 교회부터 막아버리니 형편이 더욱 악해질 것은 불을 보듯 더 선명하다. 염려와 근심과 불안을 돌이킬 만한 기도의 귀한 부르짖음의 기회를 상실해 가는 것이다. 어떻게 집 안방 침대에서의 기도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교회에서 드리는 기도가 같을 수 있겠는가?
최근, 어떤 성도님이 삶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결심을 말한다. ‘목사님, 어렵고 힘들지만 그러려니 하고 꾹 참고 지나가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조금 답을 바꾸어 드렸다. ‘집사님, 꾹 참고 지나가지 마시고, 입을 열어서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사람 접촉이 힘들어 교회를 오지 못하는데, 사업장에는 마스크를 쓰고라도 출근하지 않습니까? 아이가 배고파하면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마켓에 가셔서 장을 보지 않습니까? 사람이 없는 시간에 교회에 와서, 빈방에 가서나 교회 기둥을 붙잡고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무엇이든 이곳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이곳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고 하였는데, 교회로 와서 더 많이 더 세게 부르짖고 기도하세요.’
물론, 듣고 아니 듣고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분명한 것은 금번의 일로 신앙이 좋아지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영적으로 해로운 바이러스로 인해 그 형편이 더욱 악하여지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마디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영적 면역력부터 먼저 공격하면서, 영적 치료보호소인 교회부터 차단하는 것을 보면 공격의 강도가 엄청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늘 문을 열고 부어주시는, 주의 은혜의 빛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인터넷 예배
코로나바이러스는 영적 치료소인 교회를 폐쇄하게 할 뿐 아니라, 이 염병이 지나간 후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영상예배에 익숙해진 나머지 굳이 교회당에 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금번 질병으로 인해, 교회마다 예배당을 폐쇄하고 유튜브 등의 방송시설을 바꾸며 인터넷 예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영상의 연구와 개발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동시에 결코 영상예배가 일상의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음을 의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영상예배에 익숙해지면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복된 예배자의 삶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염려가 크다.
마치 한국에서 예전에 인신매매가 횡행할 때 저녁 예배를 오후 예배로 돌리고, 문제가 지나간 후에도 편한 방법을 찾아 저녁이 아닌 오후에 모였고, 후에는 더 편하도록 오후 예배를 오전부터 몇 부 예배로 나뉘어 골라서 형편 따라 한 번만 예배드리면 주일성수를 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아주 취약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판단된다.
마찬가지로 영상예배에 익숙하면, 엔터테인먼트 기술에 의해 영적 감각이 둔화할 수 있다. 드라마를 찍을 때, 한 장면에서 보통 여덟 컷을 찍는다고 한다. 이에 비해 영화는 장면당 스물네 개의 컷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에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는 재미를 영화가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대작을 찍을 때는 1분짜리를 찍는데 거의 한 달 이상이 소요된다. 프로 야구 경기를 보러 가면, TV 영상으로 볼 때보다 훨씬 못한 것을 경험한다. 그냥 분위기에 취할 따름이지, 선수가 공을 잡았는지 떨어뜨렸는지 그저 주변의 반응과 더불어 볼 따름이다. 이에 비해 TV 중계는 훨씬 더 재미있다. 천천히 돌리기도 하고, 다시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TV 프로 야구가, 현실게임보다 더 재미있는 이유이다. 거기에 광고 선전까지 등장하면, 그야말로 유혹과 세뇌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쇼’와 강단, 실상과 가상
더 나아가 미래 시대에 교회 강단에 실제 목사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때를 생각해보라. 그냥 동영상이 아니라, 5G 데이터에 의한 동영상이 강단을 장식한다고 생각해보라. 5G는 교회 영상예배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다. 실제보다 훨씬 더 극적인 화면의 보여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향력 있는 교회들은 지교회를 세우고, 영상을 송출하여 때로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한 시킨 무대에서, 예수님처럼 벽을 통과해서 목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한마디로 ‘쇼’하는 강단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지역마다 지교회로 교회를 두는 유명한 미국 대형교회에서는 매 예배시간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만들어진다. 멋진 배우의 등장처럼 목사를 등장시키고, 세트장을 꾸미듯 강단을 꾸며 매주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가 마치면 절로 아이패드를 꺼내어 그날 ‘쇼’의 값을 매기듯 헌금을 결정하여 온라인으로 송금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과연 영향력 있는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그것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앞서서, 좋은 기술 PD를 영입한 교회가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지 않겠는가? 어느 교회가 더 좋은 장비와 시설을 가지고 더 사람들을 이끌만한 시스템을 구축하는가 하는 것이 부흥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결국에 이것은 실상이 아니고, 가상일 따름인데, 가상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정말 참람한 일이다.
이와 같은 타락이 일반화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시대는 이를 수용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때에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문제는 작은 입맛을 느끼게 하는 기회가 되기에 충분하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연세가 드신 어르신부터 모두가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일상생활과 정보를 얻고, 이제는 예배까지 이를 통해서 드린다고 하면 이 흐름의 대세를 누가 막을 것인가?
영적 면역력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전혀 질병과 상관없이 사는 삶을 말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암세포가 생성되지만 이를 이길 만한 면역세포가 싸워 물리쳐주기에 인간은 건강함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다. 쉼 없이 반복되는 영적 공격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염려하게 만든다. 저들은 영적 세포들을 파괴한 후에 우리의 생명과 삶을 공격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염병이며 괴질이다. 몸속에 바이러스 감염질환을 유발하기에 앞서, 성도를 교회에 모이지 못하게 하고, 예배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악한 사단의 도구이다. 성도들에게 교회로 가지 못하고,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악하고 독한 것이다. 이를 이기는 길은 질병 치유의 유무에 앞서, 영적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염려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인터넷 정보와 뉴스로 무장해제 되지 말아야 한다. 영혼의 생명을 위해 대신 싸워줄 면역세포를 백기 투항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언제나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이다.
3. 한결같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
- 13%, 30%, 악한 궤계 -
13% 대책, 실패
한 예배텍사스주 달라스에서 미래 목회자 연구모임이 있었다. 20년간 이민교회 사역을 마친 후, 한국 강남중앙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병락 목사의 코로나 이후 목회적 현상에 대한 발제와 차후 대책을 위한 심도 있는 토론과 발표의 시간이었다. 이민교회와 한국교회를 비교하면서 적절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는데, 눈에 띄는 연구자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교회를 출석하던 이들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예배를 전혀 드리지 않은 비율이 예전에 비교해 13%가 되었다는 통계자료(코로나19의 한국교회 영향도 조사,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눈에 띄었다. 한국의 자료였지만, 함께 모인 이민 목회자들의 공통된 의견도 지역을 떠나 코로나로 인해 어느 교회든 이런 누수 공간이 있더라는 것이다.
13% 외에도 영상 예배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니다. 교회가 처음 현장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는 사람들이 긴장감 가운데 온라인 예배 앞으로 모였다고 한다. 교회에 가는 것처럼 외출 옷을 준비하고, 헌금예물을 정성 되게 준비해 드렸었는데, 갈수록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복장 자율화가 이루어지고, 조금 더 지나니 목회자의 설교가 길어지면 자세도 편안하게 해서 예배를 드리더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들은 이런 지루한(?) 상황을 고려해서 전체 예배시간을 1시간 이내로 축소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영상이 준비되어 있으니, 꼭 정한 시간에 예배드릴 필요 없이 언제라도 드리면 된다는 생각에 예배의 모습들이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자유로운 영혼들은 주일에 양수리나 청평으로 놀러 다니면서 ‘아 행복해요, 자유의 세상’이라는 글귀로 SNS에 올리며 자유를 누리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코로나 초기 ‘온라인 예배’를 선도했던 교회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면 온라인 예배로 전환한 교회가 온라인 예배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당신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두세 사람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하시며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던 교회들이, 이제는 최선의 방역을 하고 ‘교회로 와서 거리를 띄우고 마스크를 쓰고 예배하자’라고 하면, ‘왜요? 여기도 예배드릴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예배의 신비와 회복의 방향
이민교회나 한국교회나 상황이 다르지 않음을 생각할 때, 어느 곳 어느 교회이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지도자가 코로나로 어수선하고 어두워져 가는 세태 속에서 성경적인 방향을 잘 선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방향을 잘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먼저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인 주님의 요구하심을 분별하며 그 표적(Goal)을 본 사람만이 흔들리는 풍랑 중에도 목소리 높여 그 배를 지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지도자는 무엇보다 ‘교회와 예배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바르고 분명하게 해야 한다. 교회는 칼빈이 말하는 어머니의 품과 같이 안전한 곳이며, 환란 중에 우리 영혼의 피할 곳이 되며, 이곳에서 예배를 목숨같이 사랑하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지고 좋은 복을 얻는 승리자가 된다는 사실을 확신 중에 가르쳐야 한다.
예배는 정수기와 같다. 온갖 삶의 복잡하고 분주한 문제들, 어떤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도,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삶을 새롭게 질서 지워 주시며, 소망을 보게 하신다.
이런 이야기를 기억한다. 어떤 여성분이 칠순 잔치를 하는데, 자녀들 넷을 앞에 두고 한마디 인사말을 한다. 자신은 30대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이 넷을 잘 키웠는데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인사말처럼 회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암으로 투병하던 남편이 생명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남편이 1시간 동안 자기 손을 꼭 잡아주더라는 것이다. 그때 그 한 시간이 자녀 넷을 키우며 40년을 버티고 견디게 해준 힘이었다는 고백이었다. 물리적으로 1시간과 40년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것이 영적인 세계이며, 영적 존재인 인간이 경험하는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손에 우리 영혼이 만짐을 받는 시간이다. 주일 한 번의 예배가 한 주간의 삶을 바꾸며, 새벽 미명에 드리는 하루의 첫 시간의 예배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예배를 세상의 다른 오락과 바꿔치기하는 성도가 있다면, 정말 그는 엉터리 같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평생에 몇 번 주일을 지킨다고 그렇게 하는가?
포스트 코로나와 교회에 대한 제언
코로나는 결국 지나갈 것이다. 이미 백신도 주셨고, 인간의 지혜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결국에는 극복할 것이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때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이다. ‘너는 그 어려운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느냐?’ 그렇게 물어보신다는 것이다.
코로나와 종말 시대 현상들이 겹치면서 교회지도자들이 직면하고 감당해야 할 목회적 환경들은 굉장히 심각하다. 포스트 코로나를 생각하면서, 과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미나 때에 발표한 것 중에서 교회와 관련하여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해서 옮긴다.
1. ‘교회 중심 신앙’의 나팔을 세게 불어라
영적인 의미에서 성도들은 양 떼이며, 목사는 목자장이신 주님께 부름을 받은 목자들이다. 목자는 양들의 귀에 선명하고도 분명하게 진리의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한다. 양 떼는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복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이런 것이다.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름을 부어 세운 주의 종들이 코로나 환경에도 낙심치 않고, 교회 중심의 신앙에 대한 나팔을 세게 불어야 한다. ‘교회로 나아오라, 교회에서 만나자, 교회에서 함께 주의 영광을 보자. 교회는 주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곳이다’ 그렇게 힘 있고 담대하게 외칠 때, 양들은 두려움 속에서 울다가도 따라올 것이다.
물론,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나팔을 불어도 안 따라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괜찮다. 나팔을 불어도 따라올지, 아니면 제 갈 길을 그냥 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목자가 나팔을 불지 않으면 양들이 따라올 가능성조차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께 결과를 맡기고, 힘차게 교회로 오라고, “교회에서 최고의 방역 속에 최선의 예배”를 함께 드리자고 나팔을 불어보자. 그렇지 않으면 주님 앞에서 직무유기 한 목자로 판단 받게 될 것이다.
혹자는 또 질문할 것이다. 현재 여러 가지 방역수칙에 의한 제한으로 교회에 나아올 수 없지 않냐? 법을 지키지 않고, 사회에서 이웃의 필요를 무시하며 독불장군처럼 행할 수 있느냐? 하는 이의제기이다. 맞는 말이다. 성도는 마땅히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법을 준수해야 하는 존재이다. 규정된 사항을 잘 따라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이 모든 상황이 공권력을 포함하여 엄청난 제한을 주고 있기에, 우리 참된 신앙의 교회들은 그럴수록 더 목소리를 높여 교회를 강조하고, 더 강력하게 복음 앞으로, 교회 앞으로 나아오도록 선명하게 강조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의 파도와 30%
왜 그럴까? 아주 선명한 교회 중심의 말씀만이, 교회를 해체하려는 듯 달려드는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찬양을 부르며 막연히 기다리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교묘하고 악하게 교회를 핍박하기 때문이다.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본향 예루살렘을 사모하듯이, 이 극한 염병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자신과 가정과 자녀들은 더욱 잘 영적으로 무장되어 주의 몸 된 교회로 돌아갈 것을 잊지 않도록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한다.
많은 기독교 신문들이 미래 교회를 예측하며, 포스트 코로나의 파도에 휩쓸려 기존 교인의 30%만 돌아올지 모른다는 척박한 예단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 예배의 활성화로 인한 주일 성수 개념의 파괴와 여러 가지 방종의 현상들을 보노라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불안함 마음을 가지게 된다. 분명히 코로나로 인해 모이지 못하는 신앙생활의 행태가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신(新) 사사 시대의 등장을 앞당긴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간절하게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외쳐야 할 것이다.
2. 교회를 기대하도록, 사역의 다양화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할 뿐 아니라, 교회가 성도들의 귀환(?)을 준비하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코로나로 인해 방콕, 집콕 하는 성도들이 많다. 그들이 교회를 궁금해하고 보고 싶은 곳으로 여겨지도록 조금의 변화라도 추구할 것을 권한다. 한마디로, 교회 보수공사라도 하면 좋겠다. 예를 들어 카페공사, 교육관 개보수 작업, 야외쉼터, 게시판을 바꾸거나 페인트 작업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를 궁금해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계획해본다면 좋을 것 같다. 도무지 할 일이 없다면 교회 배너 색깔이라도 바꾸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참된 성도의 마음은 항상 주의 전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 기대할 수 있게 하되, 최선을 다해 물리적으로라도 모이도록 해야 한다. 어찌하든 성도는 교회로 모여야 한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여야 한다. 거기서 부흥은 시작된다. 모이니까 뭔가를 하게 되고 열매가 나타난다.때아닌 부흥을 맛보는 부서가 있다. 청년부이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의 입학식이 취소되고, 기숙사 생활이 되지 못하면서, 멀리 갔던 자녀들이 교회에 모이게 되었다. 청년부의 때아닌 모임 열기가 생겼다. 너무 가까이 모이는 것이 위험한 면이 있지만, 잘 양육하면 한명 한명의 청년들을 귀한 교회의 일꾼으로 양육할 복된 기회가 될 것이다.
한 걸음이라도 교회로 가까이
주일이면 보통은 현장예배와 가정예배로 나뉘어 드리게 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였다. 주일이면 당연히 교회를 향해 가듯이, 주일에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드림보다 아이들 복장을 챙겨서 차를 몰고 교회로 와서 교회 주차장에서 영상으로 주차장 예배를 드리도록 한 것이다.
집이나, 주차장이나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뭘 모르는 말이다. 주일은 내 날이 아니다. 주님의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에 집에서 방콕예배를 드림보다, 비록 주차장이라 하여도 주님의 집 뜰에서 예배드림이 신앙교육이나 예배의 은혜 면에 있어서 그 내용이 달라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주된 인생의 목표라고 할 때, 주님은 과연 무엇을 더 기뻐하시겠는가? 할 수만 있으면, 한걸음이라도 더 주의 교회로 가까이 가는 이들을 주님께서 더 기뻐하시고 복 주시지 않겠는가? 이것이 율법적 생각인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하기 싫고 귀찮으면 율법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다양한 사역의 방법을 통해 사역이 멈추지 않게 해야 한다. 사역의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로나 시기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 교회와 사역자에게도 동일하게 일하라고 말씀하신다. 실제 일하는 교회는, 이런 시기에 교회건축까지 준비하며 일하는 것을 본다.
코로나는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결코 쉼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를 더 주의 군사로 시험하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회는 계속해서 멈추어 있지 않고 일해야 한다. 그리하여 코로나를 넘어서는 역동적인 그 힘으로, 코로나 이후에 후회와 탄식과 핑계와 침체가 아닌, 힘 있는 간증을 기록하는 복 있는 교회로 주님 앞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3. 교회를 허무는 악한 궤계를 더욱 주의
최근 한국에서 개혁주의 사상을 표명하는 신학자가 중세 시대의 교회로부터의 신앙의 자유와 오늘날 코로나 환경 속에서 교회를 출입할 수 없는 환경을 연결해서, 교회라는 건물에 성도들의 신앙이 갇히지 말도록 권고하는 책을 내었다. 예측하건대, 많은 가나안 성도들이 열광하며, 자신들의 교회 밖 신앙생활의 근거로 삼을 것 같다.
더불어 교회를 성전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이단 취급하겠다는 정신없는 기독교 학자들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책을 팔기 위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언설들이다. 한 영혼을 세우기 위해 밤낮으로 땀 흘리는 목회자의 고통은 뒷전인 채, 책상머리에 앉아 영혼을 복되게 하지 못할 일만 궁구한다면, 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가 배운 지식은 그저 주님 앞에 받을 책망의 조건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교회에 대포를 쏘시겠는가?
최근 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 존경받는 은퇴 목사가 멋진 영상의 배경과 음악을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 언설들을 나열하는 일들이 있었다. 코로나라는 대포로 교회를 박살 내었다는 정신없는 이야기를 방송국 프로그램을 통해 뱉어낸 것이다. ‘성과 같은 교회에 하나님께서 코로나 대포를 쏘아줌으로 성도들을 흩어 버리고 영상 예배와 같은 특별한 은혜의 도구를 허락하셔서 오히려 회복을 맛본다’는 엉터리 이야기였다. 말에 재능있는 이분에게 동조하는 많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SNS(쇼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급속히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런 세태 가운데 과연 ‘교회는? 예배는? 교회와 예배 중심의 신앙의 감격들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우리 2세들은 어찌하나?’ 하는 생각에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다. 본인이 받은 수혜를 잊어버린 듯하다. 교회와 예배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복된 토양에서 살아왔고, 책도 많이 팔아주었건만(?) 인생 후반기 그의 거침없는 발언들, 특별히 기존 교회를 향한 불편부당한 말들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교회사랑 예배 중심
소견을 따라 교회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말과 행동을 보면 매우 화가 난다. 그들은 교언영색(巧言令色, 아첨하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편집자 주) 하듯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지 몰라도, 짧고 유한한 인생의 한 부분임을 간과하는 행동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현장예배가 어려운 나머지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시기에 드려지는 영상 예배에 무언가 대단한 하나님의 특단의 계획과 섭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며, 기존 교회의 전통적인 현장예배를 대포로 폭파하듯 했다는 그의 언행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불법한 일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시대와 환경을 떠나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주의 전으로 모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복 주시기 위함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몸 된 교회를 향해 코로나 대포를 쏘시겠는가?
4. 편리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세속화를 경계하라
편리함이 발전인가?세상은 편리해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한다. 크고 무거운 컴퓨터를 부팅과 기다림 속에 겨우 사용이 가능했던 그런 시대를 지나, 이제는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클릭하는 만능 휴대전화의 최첨단 시대를 살고 있다. 가끔은 이토록 편리한 전화기가 조지 바나가 말하는 ‘주전자 속 개구리(the Frog in a Kettle)’처럼 나를 삼켜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심방, 광고, 공문, 심지어 노회의 회의까지도 카톡을 통해 처리하게 되니, 편리함도 좋지만 때로는 두려운 생각을 하게 된다. 가끔, 지나친 기능 탓에 시간과 생각을 빼앗겨 버리고는 다시 베이직 폰으로 돌아갈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만, 실제로는 이 편리한 문명의 도구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특히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사회가 확장되면서, 더욱더 다양한 앱의 기능으로 무장한 채 생활현장 곳곳에서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매번 그 기능들 앞에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러면서 또 질문해 본다. 과연 편리해지는 것만이 진보와 발전인가? 인간으로서 삶의 편리함을 거부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것이 영적인 부분까지 침투해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악성 편리주의라면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삶의 지나친 편리주의는 반드시 죄로 가득한 세속화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오지 않는 예배
편리주의가 영적인 부분에도 많이 침투되어 있음을 본다. 예전에는 주일성수를 신앙의 가장 기본으로 생각해서 목숨을 걸고 주일을 지켰다.그러나 오늘날 자신의 편리를 먼저 따지며 ‘1주일에 한 번만 교회 가면 되지 않느냐, 꼭 교회 가야만 예배가 되느냐,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 않는가?’라는 사상들이 확산해가는 것을 본다. 마치, 예전에 교회마다 아주 이른 시간의 주일예배가 드려지게 된 계기가 교사 등 봉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예배를 빨리 드리고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예가 많음을 본다.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드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결코 때우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주일에 일찍 드리는 예배를 ‘해치우기’ 하고서는 말한다. ‘깔끔하고 좋았고, 무엇보다 주일 시간을 여유롭게 사용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이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본을 빼내어 버린 예배, 형식적인 껍데기로만 드린 실패한 예배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몸이 교회로 오지 않는 편리한 예배를 드리겠다고 말한다. 몸을 산 제물로 주님 앞에 가져오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말세에 모이기를 힘쓰라 하셨는데, 몸을 움직여 모이지 않고 귀신도 아닌 데 몸이 없는 예배, 몸이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교회의 예배를 생각하는 것이다. ‘꼭 내가 몸을 움직여 교회에 갈 필요가 있겠느냐? 그냥 집에서 편하게 인터넷으로 말씀을 듣고, 필요하면 헌금은 온라인으로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기 소견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가인 같은 마음 없는 예배자에 불과한 것이다. 훗날, 교회에서 섬기는 봉사의 일들도, 로봇이나 돈으로 고용된 일꾼에 의해 감당하게 할지 모를 일이다.
세속화-마귀의 지혜
아마 조금 더 나아가 미래세대에는 내가 예배하는 처소도 필요 없다는 예배당 무용론에 도달할지 모른다.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르지만, 너무나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예배당에서 유행가 가수의 쇼가 펼쳐진다. 술과 재떨이를 두고 예배하는 교회도 생기지 않겠는가? 아니면, 아예 술집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그렇게 되기 전에 주님이 오셔야 할 것 같은데,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는 이미 초신자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교회당 한쪽에 재떨이를 두었다고 한다. 구별됨의 장소로서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들의 음성, ‘교회 가지 마라, 예배드리러 가지 마라, 편하게 편리하게 신앙생활 해라’는 결코 성령의 음성이 아니다.
마귀의 지혜-멀리 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다시 저들을 회복시키고자, 모세를 보내어 바로 왕을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 원하니, 예배드리러 광야로 보내 달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바로의 첫 번째 대답은, ‘거기까지 갈 필요가 뭐가 있느냐? 너무 멀리 가지 마라(출 8:28). 광야에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예배를 드려라.’ 그렇게 대답했다.바로 왕의 대답은 마귀의 지혜이다. 광야, 구별된 장소로 가지 말고 그냥 여기 있는 자리에서 머뭇거리면서, 여기 침대 위에서 속옷 차림으로 인터넷을 켜두고 내 마음의 사정에 따라 은혜가 되는 목사님을 선택해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바로 여기서 설교 듣고 예배드리라는 것이다. 전화기에서 온갖 말씀이 다 나오는데, 불편하게 연료비 들여서 구태여 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예배자를 낙심하게 하는 마귀의 소리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세에게 바로는 다시 타협안을 제시한다.
광야에서 예배를 드리기는 드려라, 그런데 가족 모두 가지는 말고 남정네들만(출 10:11) 가라는 것이다. 남자만 가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집안의 대표자만 가면 되지 않느냐, 신앙은 개인적인데, 너만 잘 믿으면 되지, 왜 믿음을 가족들에게까지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꼭 가족이 같은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때가 되면 다 믿겠지, 너무 어렵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단의 교묘한 타협의 소리이다.
내가 가진 그리스도의 신앙이 영원한 생명의 유일한 길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강요 이상의 강요를 넘어, 강권함으로 저들과 함께 주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제물 없이 예배드리라
거듭된 재앙의 고통 가운데, 마지막으로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찌니라’고 말한다. 예배에 드릴 제물은 두고 빈손으로 가라는 것이다. 교회에 은혜가 떨어지면 재정문제가 시험 거리가 되듯이, 남자가 신앙이 떨어지면 돈부터 말해서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가게 만든다. 예배를 온전히 못 드리게 하는 것이다.은혜는 받았는데, 드릴 게 없으면 마음이 냉랭하게 차가워진다. 하나님 앞에 공수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물이 없으면 제사가 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 나아가 사단은 십일조의 말씀을 교회에서 돈 이야기하지 말라고, 왜 부담을 주느냐? 라고 반박하는 지혜를 가지고 신자를 유혹하게 된다. 바로 왕의 소리는 사단 마귀의 소리다.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유월절 재앙을 통해서도 반드시 그 백성들을 자신이 원하시는 구별된 자리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많이 불편해도, 부담되어도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말씀 그대로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신앙해야 할 것이다.신앙은 편한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 예배는 편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시작부터 마치기까지,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십자가를 붙잡고 회개하며 마음이 축축해서 드려지는 시간이다. 예배는 편하게 하는 게 아니다.죄성을 거스르며 성령과 말씀이 내 영혼을 조명하고 철저히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에스겔 36장 26절의 말씀처럼, 영혼의 불순물이 씻겨 나고,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영혼이 수술받는 구별된 시간이다. 불편할지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배의 구별이 온전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히 구별된 복장도 필요하다. 또 댄스홀에 왔는지, 예배당에 왔는지 구별되지 않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인지 어떤지 모를 자세로는 도저히 구별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의 소비자 중심주의 거부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의 가장 첫 번째가 예배다. 신앙의 선배들은 예배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했다. 예배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예배를 잘못 드리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다. 좋은 교회는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이고 좋은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잘 드리는 성도다.
소비자 중심주의 태도를 없애야 한다. 마치 물건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사듯이, 자기만족과 기쁨과 편안함이 목적인 소비자 중심의 소비주의가 되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에게 영광을 올려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하늘 문을 열고 주시는 은혜가 우리가 누릴 만족과 기쁨이다.앞으로 미래는 예배의 장소뿐 아니라, 시간도 마음대로 정하는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이 중심이 아닌, 예배드리는 소비자 형태의 성도 중심으로 편리하게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도 이에 발맞추어 모든 상황이 주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로 변경시켜 갈 것이다.
그뿐인가? 예전에는 교회에 가는 일,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 때문에 그렇게 부부싸움을 하고 자식과 싸움이 되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아픔의 시간도 필요했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이러한 고통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기다리며 기도할 틈도 없이 너무나 잘 알아서 해결하고 타협하더라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적당히 타협하고 이해하니, 하나님이 개입하실 틈도 없고 더불어 신앙의 아름다운 간증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악한세대의 참믿음
오늘날 인터넷을 보면, 십일조나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목사님을 향해 율법적이라고 공격하는 일들이 많음을 본다. 예배하는 날로 정하신 주일도 마음대로 바꾸고, 교회예배당 무용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선각자처럼 대우받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저것 편리하게 다 바꾸게 되면, 나중에는 편안하게 팬티 바람으로 집에 앉아서 다할 것이다. 망하는 세대, 타락하는 세대 모습이다.
이 악한세대는 참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려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다. ‘편하게 믿어라. 뭘 그렇게 별나게 신앙생활을 하느냐고 말한다. 적당히 섞여 살아라’라고 말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말씀대로 지키자고 하면 율법적이라고 말한다. 그 내면 깊숙한 곳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과 멀어지게 하는 바로의 소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은 편리주의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여 악한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나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편리하고 편한 것만이 발전과 성숙은 아니다.
5. 다원주의와 죄의 전염성
– 문명의 발전과 진리의 희석 -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시대
종말 시대를 지나면서, 세상은 점점 더 믿는 자들에게 핍박과 함께 분명한 신앙의 고백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통해 자유롭게 다양한 지식습득이 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각자의 소견이 옳음을 증명할 많은 도구를 가지게 되었다. 모든 진리가 점차 상대화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경향은 양면성이 있다. 매우 고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가지는 진리에 대해 자신이 받는 인정만큼 쉽게 관용도 하겠다는 것이다. 아주 복잡 다변한 세상이 찾아온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반드시 생명을 건 분명한 신앙고백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희미한 회색 진리,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그런 혼돈된 진리를 말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고백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시대를 생각하며, 믿음의 공동체가 예배 중 사도신경을 공동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른다. 주일 아침마다, 나의 믿는 바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함께 고백하며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지를 한목소리로 제창하는 것은 이 악한 세대 가운데 너무나 복된 일이다.
죄의 전염성
몇 해 전 미국 장로교 제222차 총회를 기억한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열렸었는데,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오전 11시 성찬식을 겸한 개회 예배 후,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전체 회의에서 당시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과 무슬림에 의해 저질러진 많은 테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총회는 이런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포틀랜드 지역의 무슬림 종교지도자를 초대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단상에 올라가 인사하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그 무슬림 지도자가 그 단상에서 알라의 이름으로 수많은 목사가 모인 자리에서 기도하고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미국 장로교에 소속된 한인 목회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사과와 유감을 표명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과의 해명에 대해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갑자기 예정에 없던 기도가 진행됨에 대해 자신들이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말을 새롭게 되새겨 본다. 과연 이럴 줄 몰랐을까? 동의할 수 없다. 이 일은 성경을 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럴 줄 몰랐다.’라는 말은 그저 핑계와 무지를 증명할 따름이다. 죄의 전염성에 대해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자리에 왜 무슬림 지도자가 단상에 올라가야 하는가? 하나를 주고 둘을 주면 셋을 내어주어야 함을 왜 알지 못하는가? 그렇게 하면 정말 저 무슬림과 기독교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예견했단 말인가?
이 일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뉴욕의 어느 미국교회가 교회 강대상에 스님과 불교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이용하면서 설법하던 아찔한 장면을 보며 탄식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이 두 장면이 서로 낯설지 않게 연결되고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나라를 더욱 크고 강한 큰 나라를 만들고자, 정략결혼으로 이웃 나라와 화친을 맺고 여인들을 궁전에 불러들였다. 화친을 맺는 당시에는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씩 둘씩 내어 준 결과가 무엇인가? 후에는 하나님이 세운 왕의 궁전에서 우상숭배가 범접하듯이 이루어지는 비극을 성경은 명백하게 증거한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이 이렇게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을 왜 미리 보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죄의 전염성은 요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그 열매의 결과로만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말한다. ‘이것이 뭔 호들갑이냐? 다 같이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가자는 것인데.’ 또한 ‘이 미국 교단은 우리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한 교단인데,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변설(辨說)하기도 한다. 지도자의 이 같은 언급에 얼굴이 붉어진다.
신사참배와 한국 기독교
1938년 제27차 조선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의식의 하나로 공식 결정한다. 이유라는 것이 해방 후 저들의 변명을 추억해보면, 교회를 위함이라는 것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나 찬성한 이들이나, 감옥 밖에서 교회를 지키며 고생한 이들이나 감옥 안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고생한 그들이 똑같다는 것이다. 모두가 교회를 위한 일을 한 것이니 서로 관용하자는 것이다. 덮고 지나가자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말함에 무슨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훗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해명하면 될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당시 저들은 조선 땅의 영적인 지도자요, 민족의 영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그때부터 7년 후 일본의 패망과 해방, 궁극적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영적인 감각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다.
결국,
7년 후에 해방을 맞이했을 때, 저들은 한 번 더 자신들의 변설을 내려놓고 자신들이 영적인 둔감함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돌이켰어야 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순교한 이들처럼, 자신들은 보이는 교회를 위해 감옥 밖에서 순교적 고생을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는 자신들 스스로 민족의 영적 지도자의 자격이 없음을 증명하는 말들이다.
더불어 지도자의 문제는 지도자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저들을 따르는 수많은 민초들에게 격심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지도자의 분별없음이 얼마나 그 백성들에게 해악인지를 열왕기의 역사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그러한 역사적 안목을 상실한 지도자들의 무 회개는 5년 뒤 한국전쟁의 잔혹하고 피폐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다. 왜 이것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보는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는 바가 없는데, 그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그 평양 도성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김일성 가문의 우상들이 초대형 크기로 세워져 있고,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던 그 도시가 이제는 가장 질흙 같은 암흑의 도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평양에서는 주일이면 가게 상점들이 문을 닫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하러 가던 바로 그곳이 지금은 어떤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는가? 그러함에도 전쟁의 상처 위에 반도의 한쪽을 남겨두시고 세계의 가장 복음의 역동성이 넘치는 한국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남은 자를 붙드시고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긍휼과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8년과 지금 이 시대
지금 이 시대를, 1938년 그때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이렇게 연관 지어 말하고 있는가? 참으로 귀한 복음을 우리 조선에 전해준 미국 장로교회의 행태가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저들은 과연 무슬림 지도자를 단위에 세움으로 평화와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진실로 기대했단 말인가? 더 나아가 가장 뜨거운 이슈인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계속해서 안방을 내어주고 성경적 신앙고백과 멀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관용과 이해를 말할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적지 않은 목회자들의 반응이 놀랍다. 일반 성도들의 경우는 더 할 것이라 여겨진다.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같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자는 것인데, 일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라는 관용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공동 총회장으로 선출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의 여성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구원의 도리에도 달리 견해를 가진다는 소식을 언론 매체를 통해 듣게 된다. 갈수록 점입가경인 이 문제가 필자에게만 유독 심각한 것인가? 다양한 소견에 따라 행하는 신 사사 시대를 본격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 진리의 거룩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대 가운데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 선명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아무런 구별됨이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어갈 수는 없다.
조금 지나치게 말해서, 사람 밥에 개밥을 섞으면 그것은 개밥이지, 사람하고 나란히 먹을 수가 있는 사람 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진리와 비진리를 혼용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의 진리가 상실되는 것이지, 결코 진리를 보전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한번 섞어보자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므로, 더 우월한 진리를 찾아서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복리를 누려보자는 것이지만 사실은 진리를 거스르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진리의 구별된 거룩성을 위배하면서까지 이룰 평화와 화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다원주의를 급격히 수용하는 시대를 앞으로 우리는 더 격하게 살아갈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나타난 뉴노멀, 언택트, 비대면 사회의 연습은 장차 더 빠른 속도로 다원주의 사회를 경험하게 할 것이다. 1세들의 시대는 옳음과 그름을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왔다면, 우리 2세 아이들은 엄청난 다양성을 인정하는 구조 속에서, 참된 진리를 분별하고 지키고 살아야 하는 그런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별히 아이들의 교과서에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 관계,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더 나아가 사람과 짐승의 성적 관계의 여러 경로까지 기술하는 교과서를 받아보는 시대가 되었다면, 정말 교회를 이루며 진리를 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대한 분명한 분별력이 필요하다.
다양한 문명의 체험과 진리의 희석
앞서 언급한 것처럼, 코로나 시기에 문명의 이기를 예배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습득된 다양한 문명의 체험들은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성을 많이 희석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세상이 더 발달할수록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의 이해보다는, 보편적인 상식과 이성에 근거해 진리를 이해하는 방법에 훨씬 더 빨리 익숙해질 것이다. 다원주의적인 접근을 용이하게 학습시켜가는 것이다.
깨어 경성 해야 한다. 세속의 물결 앞에 삼키지 않고, 진리의 몸부림을 치지 않고서는 결코 신앙의 고백대로 우리 삶을 경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방법은 없는가? 제한적이지만,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처럼 다른 어떤 것보다 진리의 말씀을 분명히 함으로 이 악한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진리의 성령을 찾고 구하며, 자신의 몸을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는 순종과 복종을 통해, 삶으로 하나님이 흠향하실만한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다.
코로나 종말 시대를 지나가면서, 다가오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생각하며 더욱 다원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참 진리를 구현하는 특별한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6. 종교를 원하는 시대, 진리 앞에 미련하라
- 교회의 회복, 세상의 회복 -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면서, 비대면 사회로의 요구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개인주의를 심화시켰다. 문명사회로 갈수록 집단적인 생활행태보다는 개인의 욕구충족을 우선해서 보장하는 측면이 있지만, 코로나로 인한 사람과의 거리 두기와 같은 비접촉 비대면 캠페인들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공동체에서 분리하는 개인 문화를 더욱 활성화한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이나 한국, 세계 어디를 가도 혼자서 한다는 의미의 ‘혼밥’과 ‘혼술’을 즐기며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별로 원치 않는 이른바 ‘홀로 족(族)’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들이 아니다. 창조로부터 함께 살아가도록 남과 여, 부부를 허락하셨고, 더 나아가 가족과 사회공동체를 허락하셨는데, 이게 역기능으로 간다는 것은 반드시 죄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와 죄악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개인주의화가 더욱 심화하고 있다. 하물며 가족인 부모와 자녀 간에도 각자의 삶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 무관심으로 바뀌어버린 것을 보게 된다. 이민사회의 경우 아이들이 부모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고 방이 여유가 있음에도, 미국의 독립된 자녀 세대처럼 자신의 원하는 자유를 찾아 혼자 사는 미혼 자녀 세대가 늘어가고 있다. 결국은 죄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스스로 통과하는 현상들을 나타낼 뿐이다.
종말 현상들이 코로나로 말미암아 훨씬 더 빨리 나타나고 있다. 지금 이 시대가 노아의 때와 같이 크고 작은 죄악들이 우리의 영적 감각을 둔화시킨 채로 점차 만연해가는 것을 본다. 믿음을 말하는 신자들도 죄에 대한 기준과 감각들이 다르다. 이러한 세상의 타락에는 무엇보다 교회의 잘못이 크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강도의 소굴은 어떤 곳인가? 세상에서 강도짓을 하고도 자기 소굴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저들은 죄의 불안함을 씻어내고 편안함과 안식을 느끼는 곳이다. 교회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범하는 죄와 잘못들에 대해, 마땅히 예배를 통해 교정하고 책망하여야 한다.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모습들은, 세상에서 범한 죄에 대해 그 죄를 씻음으로 누리는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와 무관한 편안함과 만족만을 주고자 열심인 것 같다. 과연 주님이 지금의 교회들을 보시며 뭐라고 하실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적 감각의 둔화
죄를 죄로 감각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에 치명적이다. 말씀과 성령에 무감각하게 만드는 편안함과 익숙함은 마치 따뜻한 물속에서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영혼을 서서히 감각 없이 병들어 죽게 한다. 온전한 신앙생활은 익숙함이라는 관성의 영향에 주의해야 한다. 익숙함이란,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 편안함을 말한다. 익숙한 것은 언뜻 좋아 보인다. 그러나 세상의 일과 기술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늘 깨어 있어 한밤중에라도 주님 만날 것을 예비하며 살아야 할 신앙인에게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오늘날은 인공지능의 발달을 포함하여, 편리함의 첨단을 살다 보니, 도무지 삶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고난의 불편함을 인내와 기쁨으로 지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불편하다고 싶으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돌아선다. 그래서 교회마다 그러한 성도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많은 것을 배려하고 있다. 당연한 섬김의 과정이겠지만, 실제 그 열매들을 보면,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함에도 영적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도록 과보호되는 게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공적 신앙생활의 포기와 자유
설교, 성경공부, 구역모임, 봉사 활동 등 모든 것에서 되도록 불편해 보이는 부분을 제하고, 소비자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을 본다. 마치 자기 돈을 들고 쇼핑몰에 가서 물건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사는 것처럼 교회 생활과 예배 생활을 한다. 힘들고 어려운 것은 조금 더 헌금해서, 유급 사역자들을 통해서 일하게 하고 자신들은 그들의 봉사를 통해 누리기만 원한다. 어떤 교회는 3년마다 목회자가 바뀌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3년 들었으면 웬만큼 다 들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설교의 흐름이나 논리를 알게 되었으니까 더 들을 게 없다는 것이다.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하고, 계시의 말씀을 목회자의 의견처럼 듣는 저들로 인해 결국 교회는 늘 싸움이 그칠 날이 없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유치원에서 벌어질 만한 일들이다. 이해와 관용을 배우기보다는 삐치고 토라지고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며 사나워진다. 자기 영혼을 다스리며 성숙시키지 못한 그 거친 형상들이 무기가 되어 서로를 찌르는 것이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교회를 망치는 것이다. 결국에 자신의 호불호를 따라서 적응하지 못한 영혼들은 또 다른 자신을 편안하게 해줄 곳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주일에 교회 근처의 커피숍에 성경책을 펼친 이들이 점차 늘어간다고 한다. 교회의 그 딱딱한 장의자, 지루해 보이는 순서들, 많은 사람과의 부딪힘, 봉사와 헌신의 부담스러움 등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편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아무런 간섭도 없고, 봉사의 부담도 없는 미국교회를 통해 신앙의 명맥을 유지한다. 더 심한 사람들은 아예 공적인 교회 생활을 포기하기도 한다.
익숙한 성도, 불편한 교회교회 생활에 익숙한 것을 마치 신앙이 좋아지고 성숙한 것으로 오해한다. 교회 생활 몇 년이라는 것이 그의 삶에 중요한 훈장이 된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한 채, 터줏대감처럼 교회 생활의 편안함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유해할 따름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보장하고자 애를 쓴다. 교회가 세상의 현실을 따라가고 성도를 소비자처럼 저들의 요구에 타협하는 것으로 쉽게 무장을 해제한다.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와서 주일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키며, 하나님의 교회 앞에 마땅히 감당할 헌신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릴 줄 알며, 자신뿐 아니라 성도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나의 기도 제목으로 삼을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배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이를 듣지 못하면 어디서 들을 것인가? 교회에서 성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른길을 가도록 외치지 않으면,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을 것인가? 괜찮다고 말한다. 때가 되어 은혜가 되면 깨달을 날이 온다고 항변한다. 몸은 썩어 가는데 약간의 피부약을 발라주는 격이다. 영적인 억압과 세상의 억압과 죄의 억압이 커져 점점 타락되어감에도, 대수롭지 않게 느끼며 나아가고 있다. 진짜 위기는 이러한 세상의 편리함에 동조하며 세상과 구별 없는 교회를 통해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의 각성과 교회의 회복세상에 각성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이여 깨어나라고 외칠 수 있을까?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권하며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교회의 온전함, 예배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 잠에서 깨어날 때, 세상의 각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와 예배의 회복이 세상을 깨우며 주님이 오실 날을 예비하는 축복의 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던 유다 왕 요시아로부터 시드기야 왕 때까지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들의 죄를 지적하며 외쳐댔지만, 그들은 예배의 대상을 바꾼 채 자기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변론을 내놓을 따름이다. 결국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너희들은 자고새처럼 살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자고새의 의미가 무엇인가? 속임과 도적질의 상징이다. 불의로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한창때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가면 형식적인 신앙이요, 종교적인 삶이 되어 결국은 하나님을 속이고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며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치유하려고 외치기 전에, 교회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편리함과 소비자 중심주의에 물든 사상들을 제하여야 한다. 사람의 편리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교회는 회복될 수 없다. 세상을 깨울 수 없다. 예배가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말씀하시는 대로 하여야 교회와 예배가 회복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세상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려고 한다. 또 축복을 받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결국에 자신의 신앙도 회복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를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무기력한 성도가 되며, 그의 섬기는 교회는 승리하지 못하는 책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종교를 원하는 시대오늘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종교이다.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친목 모임으로 전락했다. 사람에게 굴복하고 세상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자신을 땅에 부딪치지 아니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자만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사데 교회의 모습과 같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 있다’ 실제로 생명이 없는 교회가 사데 교회였다.
세상을 향한 회복과 각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 됨을 회복해야 한다. 소비자 중심주의, 편리주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벗어나 참된 진리를 선포하며 진리 안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세상도 깨어날 것이다. 코로나 시기에도 교회는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 더욱 미련해져야 한다. 우직할 정도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그를 예배하는 일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전남수 목사(미국 알칸사 제자들교회 담임)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97